33화
“선생님, 누구부터 손대실 생각인지 여쭈어 봐도..?”
조심스레 묻는 제세현.
기민이 생각에 빠졌다.
오성 밀실을 다시 떠올려 보는 그.
‘역시 최악은 백상기지.’
기민도 알고 있다.
1순위는 백상기란 것을.
마음 같아서는 백상기부터 치고 싶으나.
아직은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지옥화염넝쿨.. 생각은 해 봤는데. 아마 통하지 않을 거야.’
제아무리 능력을 먹어치우는 놈이라지만.
백상기의 회귀는 1초 단위다.
1초 내로 회귀능력을 먹어치울 수 있을까?
기민이 고개를 저었다.
‘일단 백상기는 조금 미룬다. 그 다음은...’
죽음의 포탈에 던진 놈이 1순위라면. 죽음의 포탈을 연 놈이 2순위가 되는 것이 맞다.
‘최세헌.’
“최세헌..부터 잡을 것 같군요.”
“최세헌이라.”
고개를 끄덕이는 이세라.
그녀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기민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혹시 유감이라도..”
“아뇨. 그게 아니라요.”
그녀가 황급히 고개를 젓는다.
“복수와 상관없는 희생이 많을 것 같아서.. 그게 조금 마음에 걸리네요.”
“복수와 상관없는 희생이 많다니요?”
기민이 눈썹을 찌푸렸다.
연관되지 않은 타인이 자신의 복수에 휘말려 죽게 하는 것은 기민의 취향이 아니다.
“다크 옥션은 최세헌이 능력으로 만들어낸 거대한 아공간 안에 있습니다. 선생님이라면 이미 그 점을 눈치채셨겠지요.”
제세현의 대답이 이어졌다.
‘다크 옥션이 아공간 내에 있었다?’
예상하던 바다.
기민이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다가, 이세라의 말뜻을 깨달았다.
“최세헌이 죽으면 아공간이 소멸하는군요.”
“그럴 가능성이 높죠. 그래서 걱정이에요.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어찌 될지...”
모두가 입을 다물었고.
침묵이 흘렀다.
“생각 좀 해 봐야겠군요.”
팔짱을 낀 기민이 눈을 감았다.
다크 옥션이 제대로 된 건물 하나 없이 컨테이너와 트레일러만 가득하다고 하지만.
명색이 최세헌이 세운 왕국이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더 이상 미약하다고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용객만 최소 수천 명은 넘을 것 같던데.. 상주인구도 존재하는 것 같고.’
복수도 포기할 수 없고, 복수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목숨도 포기하기 싫다.
딜레마 속에서 고뇌하던 기민의 머리를.
순간 아이디어 하나가 통렬하게 강타한다.
“그러면 되잖아?”
“네?”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린 기민이, 자신을 바라보는 이세라를 마주보았다.
“최세헌을 죽이지만 않으면 되잖습니까. 그럼 아공간은 유지될 테니까요.”
“그건 그렇긴 하지만...”
“하지만 죽이지 않으면 선생님 마음이 좀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세라와 제세현이 기민을 우려했다.
“죽는 것보다 더한 삶이 있죠.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세요. 최고의 삶을 선사해 줄 예정이니까.”
기민이 씩 웃고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저도 제 복수에 다른 사람이 휘말리는 거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런 것 같아요.”
기민을 따라 미소짓는 이세라.
“그건 그렇고. 혹시 특수한 인피면구를 하나 만들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말씀해 보시죠, 선생님.”
“이중 인피면구입니다. 하나의 인피면구로 두 개의 얼굴을 나타낼 수 있도록요.”
“그건 난이도가 상당하겠는데요. 입이 무겁고 실력 있는 장인들을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입이 무거운 걸 최우선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럼요. 그래야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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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오늘도 왔다고?
조 팀장 앞에서, 박진범이 표정을 구겼다.
“예. 사냥팀이 찾아내어 제압해 둔 상태입니다.”
- 아니 외국 새끼들은 왜 쫓으라는 백상기는 안 쫓고 우리 회사에 기어들어오는 거야. 이유는 알아봤어?
박진범은 요즘 죽을 맛이었다.
외국에 정보를 뿌린 것까진 좋았는데,
누군가 그 정보에 장난이라도 친 것일까?
요즘 외국의 사냥꾼들이 숨어 들어와 오성의 기밀구역에 접근하려는 시도가 급증하고 있었다.
“예. 사냥팀 중 다행히 외국어가 되는 놈이 있어서 생포해 둔 놈들에게 이유를 물었는데.. 백상기가 ‘엘릭서’를 오성에 감추어 두었다는 정보가 돌았답니다.”
- 엘릭서? 그게 뭐야?
“뜻 자체는 ‘영약’이라는 뜻인데.. 알아보니 상태이상흡수 능력자에게 붙은 별명입니다.”
- 하... 피곤하네. 정보가 오염돼 봤자 백상기 선에서 끝날 줄 알았는데.
‘백상기가 상태이상흡수 능력자를 데리고 있다’는 추가 정보가 퍼져나갈 때만 해도 축배를 들었던 진범.
그는 지금 통제할 수 없는 거짓 정보에 고심하고 있었고.
조 팀장은 고뇌하는 주인 앞에서 정적을 지켰다.
- 추가 정보가 돌았다... 내용은 확인했나?
“그게.. 오성과 백상기가 특히 긴밀한 관계에 있는데, 백상기가 회장님께 ‘엘릭서’ 관리를 맡겼다고..”
듣자마자 진범이 버럭 역정을 낸다.
- 아니 그걸 믿는 새끼가 있단 말이야? 그 추가 정보는 어디서 나온 거야?
“죄송합니다, 회장님. 추적해 봤는데 꼬리잡기에 실패했습니다.”
상태이상흡수 능력자가 오성에 있다는 정보.
그 정보 역시 세라와 기민이 퍼뜨린 정보였지만.
진범이 그 사실을 알 길은 없으리라.
- 하... 아냐. 웬지 놈일 것 같군. 그런 느낌이 들긴 하는데...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으니..
진범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이에,
전화가 오기라도 한 건지 폰을 슬쩍 내려다보는 조 팀장.
“급한 전화인 것 같습니다. 잠시 통화해도 괜찮을까요?”
- 그래.
전화를 받은 조 팀장의 입술이 그대로 굳는다.
“회장님.. 기사를 확인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 왜? 네가 말하면 입이라도 아파서 그런가?
“그게 아니라...”
자신의 짜증에도 불구하고 조 팀장이 머뭇머뭇거리자.
보통 사안이 아님을 짐작한 진범이 뉴스를 띄웠다.
[ 백상기·최세헌 참사의 진실. 외신 기자가 밝혀내다. ]
- 이... 이 새끼....
낯익은 얼굴이다.
인피면구 속에서 나왔던..
‘오성병원의 그 자식! 빌어먹을 외국인!’
카메라의 수수께끼가, 최악의 방향으로 풀렸다.
진범이 정신없이 기사를 읽어 나갔다.
기사는 신문의 것이라기보다는 잡지 기사와 더 유사했는데, 일종의 일기를 읽는 느낌마저 주었다.
[ 본 기자가 보유한 유력한 소식통에서 다양한 정보를 접한 뒤에야, 본 기자는 모든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취재 관계상 유력한 소식통을 공개할 수 없음을 양해해 주길 바란다) ]
[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백상기·최세헌 참사는 한 능력자를 독차지하기 위한 추악한 다툼에서 비롯된 것이고. 오성 역시 위 참사의 한 축으로 개입되어 있었다는 것. ]
[ 모든 것의 시작은 ‘엘릭서’에서 비롯되었다. 엘릭서. 모든 병을 치유하는 영약이라는 뜻이다. 비극의 치료사 ‘핫산’을 기억하는가? 그 핫산조차 ‘엘릭서’라는 칭호를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별명을 얻은 능력자가 있다. 바로 ‘상태이상흡수’ 능력자다. 그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없으나.. (중략).. ]
[ 유력한 소식통에 따르면 그 ‘엘릭서’를 손에 먼저 넣은 것은 한국의 지배자, 백상기였다. 백상기는 시간을 다루는 한국의 지배자로서... (중략)... ]
[ 본 기자는 예전부터 오성과 백상기의 관계를 취재 중이었는데, 취재뿐 아니라 소식통을 통해서도 백상기가 오성의 박진범 회장과 특히 친밀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
[ 또한 본 기자는 취재 과정에서 백상기와 박진범 회장에게 심각한 생명의 위협을 받은 바 있음을 이 지면을 빌어 이야기하는 바이다. ]
[ (자료사진) ]
자료사진을 본 진범이 입술을 깨물었다.
조 팀장과 권 실장의 배웅을 받으며 백상기가 오성을 나서는 사진,
VIP회의실에서 나온 후 조 팀장 앞에서 기지개를 켜는 사진.
그리고 방 안, 손잡이에 밧줄이 걸쳐져 있는 의자의 사진.
사진 옆에는 (오성병원, 본 기자가 묶여 있던 의자)라는 설명이 붙어 있고.
사진.. 사진...
일부 사진은 특수한 몰래카메라로 찍은 것인지 화질이 그리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백상기라는 것을 충분히 알아볼 정도는 되었다.
‘백상기, 이 등신 같은 새끼.. 사진은 또 언제 찍힌 거야...’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오성을 매도하는 기사에, 마음 속에 분노가 가득 차올랐지만.
그는 일단 읽어야 했다.
읽어서 내용을 알아야 대처할 수 있으니까.
[ 백상기는 한국의 다른 대기업을 수탈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본 기자가 주목한 것은 이 부분이었다 - 백상기는 왜 자신이 수탈하는 대기업 중, 오성에만 이렇게 들락거리는 것일까? 단순히 친밀해서? 그것은 아닐 것이다. ]
[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던 도중. 본 기자는 ‘엘릭서’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백상기가 ‘엘릭서’를 손에 넣은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모든 의문이 풀린 것이다. ]
[ 답은 간단하다. ]
[ 상태이상흡수 능력자, 백상기의 ‘엘릭서’는 오성에 있었다(지금도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으므로, 과거시제를 쓰기로 한다). ]
[ 그리고 한국의 또 다른 지배자, 최세헌은 그 ‘엘릭서’를 훔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공간을 다루는 그의 능력 특성상 납치 시도는 아주 용이했을 것이다). 백상기는 분노해서 최세헌을 응징하면서 ‘백상기·최세헌 참사’를 일으켰는데, 최세헌도 자신이 잘못한 것을 알았기에 별다른 반항도 하지 않고 당해 준 것으로 보인다. ]
[ 결국 ‘백상기·최세헌 참사’의 비극은 지배자들의 추악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백상기의 욕망을 도왔던, 그리고 지금도 돕고 있을 오성은 비극의 방조범이다. ]
[ 그리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현재 진행중인 비극이 있다. 오성에 갇혀 있을 ‘엘릭서’의 삶이 그것이다. 유린당하고 있는 그의 인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 ....
기사를 다 읽은 진범은 의외로 분노도, 황당함도 드러내지 않았다.
- 이게 무슨 기사야. 기자가 쓴 것 맞아?
“완전한 기자는 아니긴 한데.. 기자는 맞습니다.”
- 이런 놈을 기자로 쓰는 언론이라니 글러먹었군. 이거 그냥 찌라시잖아. 증거가 있어, 뭐가 있어? 음모론에 불과한 것 아닌가? 찌라시도 이 정도면 업무방해죄야.
“예.”
- 그냥 묻어 버리면 될 걸 왜 내가 읽게 만들어? 이것도 내가 지시해야 할 일이야?
“그런데.. 그.. 미국의 능력자협회 쪽에서 이 기사를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그 기자가 능력자협회의 정보원도 겸하고 있어서..”
- 그런데 뭐 어쩌라고. 여기가 미국이야?
“아닙니다.”
- 조 팀장, 여기 한국이야. 냄비근성 처음 겪어?
“아닙니다.”
- 기사도 병신같이 쓴 게 뭐가 기자라는 거야. 저것도 기사라고.. 그리고 정보원이면 정보를 혼자 먹어야지. 왜 기사로 쓰는 거야?
진범이 혀를 찼다.
- 메이저 언론에 같은 내용의 기사 올라온 거라도 있어?
“메이저에는 아직 없습니다.”
- 그럼 하던 대로 해. 무시하고. 혹시 포탈에 기사 뜬 거 있으면 다 내리고. 알잖아. 왜 갑자기 초보처럼 그러는 거야?
“죄송합니다. 그리 하겠습니다.”
그러나, 진범의 판단은 틀렸다.
찌라시처럼 보였던 기사의 영향력은 상상 이상이었고.
‘미국의 능력자협회가 신분을 보장하는 정보원에 의한 추리’라는 부제목이 붙자, 메이저 언론을 제외한 언론들이 슬슬 군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거대한 외침을 마주해야 했다.
“오성 회장 박진범은 직접 해명하라!!!”
오성 본사 앞에서 시위의 물결이 거칠게 일렁이고 있었다.
- 작가의말
* redhide8 님, 후원 감사합니다.
**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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