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괴한의 정체를 안다고?’
충격적인 발언에 이목이 진범에게 집중되었다.
모두가 진범의 입만 바라보았지만.
정작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른 것이었다.
“좋아. 일단 오늘은 여기서 파하지. 대책회의는 나중에 하는 걸로 하고, 먼저들 가, 난 잠시 앉아 있다 나갈 테니까.”
‘그래서 누구라는 건데?!’
사람들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을 애써 감추며, 미적미적 일어나 회의실을 떠났다.
-대체 누구인 걸까요?
-혹시 모르시는 건 아닐까요.
나가는 자들이 수군거린다.
곧 텅텅 빈 회의실.
이제 그 곳에는 박진범과 권 실장만이 남아 있었다.
“고생하십시오... 헉!”
뒷정리를 마친 실장이 박진범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혀 보이고는 나가려는 찰나.
누군가가 권 실장을 입구에서 가로막는다.
“당신은..”
“납니다. 사냥팀장 조호건이요.”
“아.. 아직 안 돌아가셨군요. 좀 지나가겠습니다.”
사냥팀장.
‘사냥개’들의 두목이다.
비록 사냥팀과 전략실이 업무협조관계에 있다지만, 실장은 아직 사냥팀장이 조금 불편했다.
최동수 전 실장의 그림자가 그들 사이에 놓인 기분이랄까.
“아니오, 다시 들어가시오.”
“이게 무슨..?”
사냥팀장에게 밀려서 다시 회의실로 들어오는 권 실장.
그들의 뒤로, 한 여성이 따라 들어온다.
힐러 최하영이다.
그들을 본 박진범이 입을 떼었다.
“이걸로 필요한 사람은 다 모인 것 같군. 앉아. 대책회의 할 거니까.”
쓸데없는 자들을 배제한, ‘놈’을 위한 진짜 회의의 시작이었다.
*
“그래서 그 자가 누굽니까?”
“있어. 예전에 동수가 한 달 정도 데리고 있었던 친구.”
“아!!!”
사냥팀장의 거두절미한 질문에 박진범이 대답하고.
최하영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하영이, 기억나나? 그 상태이상 흡수하던 놈. 네가 힐러로 들어갔었잖아.”
“네, 기억나요. 회장님 말씀대로면.. 그러네요. 말이 되네요.”
“그래. 그 놈이 방출까지 얻은 채로 살아 돌아온 거야.”
“그러면 최 실장, 전 회장님 사건의 모든 게 설명되죠. 그리고 그 놈은 전 회장님께 원한이 있을 수밖에 없고요.”
“잠깐만. 제가 좀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저도 좀 알고 가면 안 되겠습니까?”
이야기의 갈피를 못 잡던 사냥팀장과 권 실장에게 최하영이 간략하게 설명을 마치고.
“아, 이해했습니다. 동수 형님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이...”
“그래. 동수 그 놈은 술을 먹은 게 아니었어. 내 오해였다.”
씁쓸한 침묵이 흐른다.
“회유할 수는 없겠습니까?”
“최동수에게서 한 달을 버틴 놈이야. 그리고 회유가 가능했다면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셨겠지.”
“일단 대역을 쓰셔야 하겠는데요. 놈이 언제 회장님을 노릴지 모릅니다. 회장님께서 직접 활동하시는 건 위험하실 것 같습니다.”
“네 말이 맞다.”
“허락만 해 주신다면 오늘 바로 인피면구 제작을 맡기겠습니다.”
“그렇게 해.”
사냥팀장의 말에 박진범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최하영을 쳐다본다.
“혹시 놈에 관해 기억나는 것 있나?”
“얼굴이 화상으로 뭉그러져 있었다는 것밖에.. 죄송합니다.”
“그건 의미가 없겠는데. 문신도 방출하던 놈이야. 흉터는 없어졌을 거야.”
진범이 사냥팀장에게 질문을 던진다.
“조 팀장, 어때. 놈을 찾으면 죽일 수 있겠어?”
“가능합니다.”
사냥팀장의 호언장담.
“오, 그래?”
“어떤 능력이든 빈틈이 있습니다. 놈의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로만 들으면 무적인 것 같지만 분명 약점이 있고, 그것을 공략하면 됩니다.”
“원칙론이구만. 조 팀장 말대로 놈을 죽이려면 놈을 찾아야지. 권 실장.”
“..예.”
“찾을 수 있겠어?”
“지배자들이 개입했었다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공권력의 도움도 괜찮..”
진범의 표정이 굳는다.
“실장.”
“예.”
“무슨 말 하고 싶은 건지는 알겠는데. 오성의 전 회장, 그리고 전 능력전략실장이 당했어. 이건 오성의 문제야. 최대한 우리 손으로 끝내야 돼.”
“알겠습니다.”
실장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말을 이었다.
“놈이 나름 신중해 보이는데, 그런 놈이라면 인피면구를 착용하지 않겠습니까? 인피면구 상인을 캐 보는 것은 어떨지.”
“캐 봤자야. 다크 옥션에서는 죄다 가면을 쓰고 다닌다고. 파는 사람 입장에서 누가 뭘 샀는지 어떻게 알겠어?”
“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침묵만이 감도는 대책회의.
박진범이 한숨을 쉬었다.
“보아하니 이번 회의는 여기까지인 것 같군. 놈이 누군지 알면서도 찾을 수가 없다니..”
“더 파악해 보겠습니다.”
“저희도 노력하겠습니다.”
고개 숙인 부하들.
진범은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손을 내저었다.
“일단 해산하지. 조 팀장은... 아니다. 권 실장이 따라와. 인피면구랑 대역 문제 얘기해야 되니까.”
“예, 회장님.”
“그리고 하영이 너도 몸 사려. 내가 보기엔 너도 타겟이니까.”
“...네..”
“조 팀장.”
“예.”
“하영이에게 한 팀 정도 경호 붙여 놔.”
“알겠습니다.”
*
*
*
*
*
기민은 세현의 가게로 향하는 중이었다.
‘이제 오성에서 어느 정도 나에 대해 눈치챘을 것 같기도 한데.’
기민 역시 자신이 어느 정도 추적당할 것은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놈들을 그냥 죽일 수는 없으니까.
‘그냥 죽여도 되긴 하지. 쉽기야 그게 더 쉽고, 걸릴 일도 전혀 없지.’
‘하지만 그게 무슨 복수야?’
그의 복수에 관한 철학은 확고하다.
그래서 기민은 항상 각오를 다지고 있다.
그 관철에 따른 불이익을 달게 받겠다는 각오를 말이다.
‘아직 나에 대해 완전한 정보는 얻지 못했을 거야. 끽해야 고문받던 예전의 나에 대한 정보 정도겠지.’
‘예전 김기민과 지금의 나를 연결짓기는 쉽지 않을 거다.’
‘그래도 생각이 있다면 대역 정도는 쓸 것 같고.’
‘문제는 지배자들인데.. 오성이 지배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잇다 보니 어느새 가게 문 앞.
끼이익-
“안녕하세요, 사장님.”
“오, 선생님이시군요. 어서 오십시오.”
“차 한 잔 얻어 마시러 왔습니다.”
“허허허.. 손님도 없고 아주 적적했는데, 아주 잘 오셨습니다.”
그 때 핸드폰 벨소리가 울린다.
기민의 것은 아니다. 기민의 폰은 항상 진동 모드이기 때문이다.
“응, 무슨 일이냐. ...뭐? 응, 응, 알겠다.”
전화를 끊은 세현.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진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죄송합니다. 제가 가게를 좀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같이 나가시죠.”
기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게를 비워 주어야 하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세현이 뭔가를 망설인다.
말할 듯 말 듯 우물쭈물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기민이 물었다.
“사장님, 뭐 부탁하실 거라도 있으세요? 가게 봐 드릴까요?”
“아니오, 그....”
“사장님, 편히 말씀해 보세요. 제가 도와 드릴 수 있는 거라면 도와 드릴게요.”
후우-
기민의 따뜻한 말에, 한숨을 내쉰 제세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선생님, 그... 저는.. 혹여나 선생님의 오해를 살까 하여 이런 부탁을 최대한 피하려 했던 사람이라는 걸 먼저 말씀드립니다.”
“아...”
‘오해’, ‘이런 부탁’.
이 키워드를 현재 제세현이 알고 있는 기민의 능력과 결부시켜 보니, 기민은 답을 알 것 가았다.
“저주술이군요.”
“예. 선생님, 혹시 해주(解呪)도 가능하신지요?”
만약 세현이 누군가를 저주해 달라고 하는 것이면 기민은 그에 대한 평가를 달리할 생각이었지만,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저주를 푸는 능력, 해주술.
일반적으로 저주술사가 저주술의 잠재특성으로 얻는 능력이다.
사실 기민은 저주술사는 아니다. 그러나,
“약간이나마 가능합니다.”
해주만 가능할까.
그 이상도 가능하다.
“그럼 부탁을 좀 드려도 될지... 사례는 반드시 하겠습니다.”
어쩔 줄 몰라하는 노인의 모습을 보며, 기민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사장님이 나를 이용하려 접근한 것 같지는 않아.’
‘그리고 이미 신세진 것도 많은 데다가..’
무엇보다 기민의 마음을 흔든 것은 제세현과 쌓아 온 친분이었다.
세현은, 어찌 보면 지금 기민과 가장 친한 사람이었기에.
“네, 도와 드리지요. 대신 몇 가지 약속해 주셔야 합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먼저..”
*
세현의 차는 집보다는 장원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만한 단독주택의 주차장에서 멈추었다.
“굉장한 곳이군요. 대체 왜 가게를 하시는 겁니까? 그냥 쉬셔도 될 것 같은데요.”
“늙은이가 집에만 있어봐야 밥이나 축내지요. 사람은 뭐라도 해야 합니다.”
“하하하..”
부리가 툭 튀어나온 역병의사 가면을 쓴 자와 노인이 정원을 걷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어르신.”
“그래. 고생하게나.”
집안의 구성원으로 보이는 여러 사람을 지나쳐 저택에 다다른 그들.
저택 내 엘리베이터를 타고는 저택의 지하로 향한다.
‘B4? 단독주택인데 뭔 지하가 이리 깊어?’
“다 왔습니다. 이 장갑을 착용해 주십시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저 앞에 푸른 철문이 보이고, 철문 앞에 두 명이 기다리고 있다.
임학동과 이세라였다.
“...”
기민은 아무 말도 않고 철문을 향해 걸었다.
저번에 조우했을 때는 워낙 경황이 없어 도망치듯 뛰어나오느라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래서 저들의 얼굴을 제대로 보는 것은 이번이 사실상 처음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저들에게 가까워 갈수록..
어째 여자의 얼굴이 익숙하다.
‘저 얼굴, 그리고 이세라라는 이름..’
“....!”
‘망령지배자 이세라.’
순간 기민이 멈추어 선다.
“지배자 가문이셨군요. 사장님.”
덩달아 멈춘 세현이 고개를 숙였다.
“숨기려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미리 말씀드렸어야 하는 건데 죄송합니다, 선생님.”
“죄송할 것까진 아닙니다만..”
기민의 심경이 복잡해졌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이세라 역시 복수의 대상에 포함된다.
하지만 그녀는 제세현의 외조카이고, 그가 가장 아끼는 사람 중 하나다.
이세라를 죽이면 제세현 사장은 비탄에 빠지리라.
친구냐, 복수냐.
어지러운 마음과 다르게 발은 잘도 움직여서, 어느새 푸른 철문 앞이다.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말이 없으셔서..”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기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할지 모르겠다면.. 물어 보고 정해야지.’
*
쿠구궁-
열린 철문 안으로 기민이 들어서자, 다시 묵중한 굉음과 함께 문이 닫혔다
문 안에는 기민뿐이다.
그 혼자서 들어가겠다는 것.
그것이 가면을 비롯하여, 기민이 세현으로부터 받아낸 약속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LED 형광등이 건조하게 켜진 가운데 싸늘한 냉기가 그의 몸을 휘감는다.
‘저것이군.’
기민은 냉기의 원천을 쳐다보았다.
방 한가운데에 놓인 거대한 얼음기둥.
‘평범한 얼음 같지는 않은데.. 아티팩트일까?’
그리고 기둥 한 가운데에 호박 속의 모기처럼 굳어 있는 여성.
중년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여자의 얼굴은 이세라와 판박이였다.
보랏빛 반점이 그녀의 얼굴을 반쯤 덮고 있었는데, 반점이 목 아래쪽부터 번져 올라온 것을 보면..
‘아마 목 아래쪽으로는 전부 보라색이려나..’
기민이 여자 쪽으로 손을 뻗는다.
[ 상태이상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
[ 흡수 가능한 상태이상 : 지옥화염넝쿨, 영겁의 빙정... ]
기민의 시선이 지옥화염넝쿨에서 멈추었다.
저주란 단어가 없다.
‘어라? 이거 저주가 아닌데..’
저주였다면 ‘저주:지옥화염넝쿨’로 표기되었을 테다.
고개를 갸우뚱한 기민이 이내 시선을 옮긴다.
‘영겁의 빙정은 지금 저 얼음기둥 상태를 의미하는 것 같고. 저건 흡수하지 말아야겠다.’
‘빙정은 증상의 진행을 늦추기 위해 사용한 것 같은데...’
파악을 마친 기민이, 이번에는 뒤로 돌아 다시 문 쪽을 보았다.
이세라를 부를 차례다.
*
“처음 뵙겠습니다.”
“아, 오랜만에 뵈어요. 다크 옥션에서는 죄송했어요. 역시 삼촌과 아는 사이셨군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네요. 제가 세라님을 모신 이유는 저주풀이에 세라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기민은 다크 옥션의 일을 딱 잡아떼고는, 세라를 부른 이유를 말했다.
물론 당연히 거짓말이다.
저주풀이도 아니거니와 해결에 딱히 세라가 필요하지도 않다.
다만, 기민의 개인적 번뇌의 해결을 위해서 그녀를 불렀을 뿐.
“저주를 푸는 데 제가 필요하다고요? 그럼 당연히 해야죠.”
“여기 앉아 주시면 됩니다.”
밖과는 철문으로 격리된 공간.
얼음기둥 앞에서 이세라는 역병의사 가면과 마주 앉았다.
“세라님과 닮으셨더군요.”
“제 어머니에요.”
“그러시군요. 마음이 힘드시겠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중이니, 세라님도 부디 도와 주시길 바랍니다.”
“네, 감사해요.”
“어머님이 걸리신 저주를 알고 계십니까?”
“아니오.”
“다른 저주술사들은 부르신 적이 없나요?”
“여러 명 불렀어요. 하지만 다들 모르겠다고..”
고개를 젓는 이세라.
‘그럴 수밖에. 이건 저주가 아니니까.’
저주풀이의 접근방식으로는 풀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저주술사들이 허탕을 치고 돌아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기민은 잠시 이세라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시험은 이제부터가 진짜다.
제세현의 웃는 표정이 뇌리를 잠시 스쳤으나.
이를 마음 한 구석으로 매정하게 밀어 놓은 기민이 이윽고 입을 떼었다.
“세라 님. 실례지만 요청할 게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제 저주풀이에 꼭 필요한 것이 있어서요.”
“뭐죠? 말씀만 하세요.”
눈을 번쩍이는 세라에게, 기민이 묘한 말투로 대꾸한다.
“어머님의 저주를 옮겨 받을 사람이 하나 필요합니다. 구해 주실 수 있지요?”
- 작가의말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시고, 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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