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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서재입니다.

삼국지 유융전 - 한의 재건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퓨전

완결

흐후루
그림/삽화
문피아 제공
작품등록일 :
2014.06.05 20:50
최근연재일 :
2016.04.2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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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9.0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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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글자
35쪽

사예 - 낙양(단(斷)-2)

재밌게 읽으셨으면 해요. 대체역사 소설이므로 역사적 사실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DUMMY

양주 - 오군 부춘성.


부춘성을 확보하기 무섭게 적을 맞이한 손권은 자신이 군중에 당당히 세운 것과 같은 양주자사의 기치를 휘날리는 익주의 정병을 마주하고 쓴 웃음을 지었다.

유의가 양주 예장에서 뽑아 올린 병력을 날름 희생하고 익주의 오반이 이끄는 병력과 합세한 모양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손권의 곁에서 오반의 군세를 확인하던 손환 또한 이를 깨닫고 분노로 볼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유의란 어린아이는 참으로 맹랑합니다. 양주의 백성들을 무엇으로 보았기에 그리 간단히 희생하여 아군의 기세를 깎아내는데 쓰고 지금에야 기다렸다는 듯 익주병을 투입하다니. 양주의 백성들을 무엇으로 보았기에!”


손환의 말을 귀에 담은 것은 손권뿐이 아니어서 대다수가 양주출신인 장수들이 공분하기 시작했다. 또한 장수들에 의해 군중에 퍼진 이 이야기는 역시 양주 오군과 회계군 출신인 병사들을 두려움과 분노에 떨게 만들기도 충분했다.

병사들과 장수들이 한마음으로 유의를 원망하기 시작하자 이를 확인한 부장 손린(孫鄰)이 손권에게 강력히 권했다.


“유의는 쫓겨난 그대로 익주병에 합류했습니다. 적들은 제 주장이 패한 것을 잘 알아 조심스럽고 아군은 이제 분기탱천하였으니 나서면 적을 능히 물릴 수 있으리다. 만일 용감히 나서 승리한다면 오군에서 노선을 정하지 않고 눈치만 살피고 있을 성주와 장수들을 다시 휘하에 둘 수 있으니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손권도 분노하고 좋은 기회임을 알았으나 침착함을 잃지 않고 의견을 구하듯 손환을 바라보았다.

부춘성의 상태를 빠르게 살펴 적절히 대처해 성을 수중에 두는 공을 세운 후 한 층 깊어진 신뢰를 받게 된 손환은 그 공을 잃을까 걱정이 깊어졌지만 대담한 척 손린의 의견을 지지했다.


한편,

유의는 오반 등과 만나 흩어진 양주 출신 병력을 수습하기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미리 오반과 합류해 유의를 기다렸던 이풍은 유의에게 경고했다.


“이긴 적병이 그냥 보고만 있을 턱이 없습니다. 반드시 행군으로 지쳤을 아군을 노릴 것이니 수습에 애쓰기보다 경계를 강화하심이 옳습니다.”


유의는 옳게 여기고 극읍을 시켜 패배한 양주의 병력 8백을 이끌게 했으며 그들을 후방에 배치했다.

과연 손권이 군을 크게 몰아옴에 오반과 유의가 군을 나누어 이를 맞이했다.

손권의 공격이 매서웠으나 유의는 선두에 서서,


“상대는 손권이 직접 지휘하는 병력이니 여기서 물러서면 오군은 물론 단양군까지 민심이 흔들릴 수 있다.”


하며 굳게 지켜내고서,


“우리는 위태로우나 후방이 넓고 손권의 후방은 산월로 득실거릴 뿐, 겨우 확보한 부춘이 전부이다. 이제 그들은 곧 식량마저 사라져 그마저 잃을 것이 분명하니 조금 무리해서라도 진군해 적을 부춘까지 물린다.”


군을 몰아 무리수를 두며 손권군을 짓쳤다.

그간 침착하게 계산해 손해가 적은 방향에서만 과감한 척 하던 유의였기에 이 같이 큰 손해를 감수한 행동은 분위기를 크게 바꿔 놓았고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장수들도 유의와 마음을 같이 해 병사들을 다그쳐 전심전력으로 손권군을 내몰아댔다.


서로 끝에 몰린 기분은 같았기에 손권 또한 유의만큼 필사적으로 수비를 행했고 그 결과 고작 하루 만에 손권과 유의는 서로 두 번씩 공방을 주고받았으니 해가 지평선에 닿아 점멸했을 때 양 군영에 부상자의 신음이 가득했고 부러지고 피에 물든 병장기가 산처럼 쌓였다.

손권은 걱정했다.


“적과 병력이 비등한 이곳에서 이렇게나 막힌다면 유찬과 풍칙이 적의 절반뿐이 되지 않는 병력으로 지키는 길목은 얼마나 상황이 답답할른지.”


부장 주재(朱才)가 손권을 위로했다.


“소문을 듣기로 유비의 아들인 유선은 그 능력이 아비에 비해 모자라고 매우 조심스러워 큰 전쟁에 적합하지 않다 하였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반드시 부춘성을 통해 유찬 장군의 승전 소식이 닿을 것이니 심력을 소모하지 않는 것이 전황에 보다 이롭습니다.”


부춘성이 든든히 뒤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손권은 주재의 의견에 미소 지음으로 화답했다.


유의도 걱정했다.


“내가 오래 살펴보니 유선은 사람됨이 잘고 잘다. 그나마 군의 일익을 맡긴 것은 같은 종친이란 이유와 전선이 유리해 아군의 깃발만 보고 도망할 양주의 장수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이었다. 유찬은 산월을 토벌한 경험이 많은 회계의 용장이며 그의 병력은 사기가 높은데 그런 이를 상대로 유선이 얼마나 버틸까?”


곁에서 수행하던 군리 종리인(鍾離駰)이 답했다.


“장수가 용맹하여도 주장(主將)인 손권이 깊이 믿지 못하면 옳게 쓰이지 않을 것이고 장수가 노련하지 못하여도 자사께오서 깊이 믿고 맡기시면 산같이 지켜낼 수 있으리다.”


손권은 주재의 조언을 들었으나 내심 불안하여 유찬에게 부춘성에 가깝게 붙어있을 것을 지시했고 유의는 종리인의 조언을 듣고도 역시 불안해 하였으나 조언에 따라 유선에게 과격한 움직임을 종용하니 유선은 자신의 가병이나 마찬가지인 병력을 이끌고 있었기에 내심 불만이 생겼으나 유의의 과한 명령의 절반이나마 수행해 책을 잡히지 않고자 했다.

그 결과,

유선의 병력과 마주한 풍칙의 진영과 긴밀히 교류하지 못한 유찬은 기습을 당한 풍칙을 구원하지 못했고, 슬쩍 건드려 느낌이 오고서야 크게 몰아붙이기 시작한 유선은 더 큰 욕심을 내지 않고 풍칙의 병력만 잡은 채로 폭풍처럼 몇 번이고 달려오는 유찬의 병력을 상대로 방어하고 방어하며 또 방어해 물러나지 않았다.


손권과 유의가 마주한 전선이 아닌, 정체될 것이라 여겼던 유선과 유찬의 전선에서 승패가 갈리니 오군에서 줄을 갈아탈 시기를 기다리던 철새 성주와 장수들은 양주자사의 깃발 뒤에 유의의 이름을 조심스레 걸었다.

손권의 진격과 함께 오군에 일었던 손권 맞이 봉기(蜂起)의 물결은 부춘 함락 당시 최고조에 이르렀다가 손권이 파죽지세로 오(吳)현 인근에 이르지 못하고 비기고 패하자 단 사흘 만에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거기에 더해서,


“-하여 저희 부춘성은 횡포에 견디지 못해 태수 하달을 잡아 보냅니다. 부디 손가의 수장께서 하해와 같은 아량을 베푸시어 성에서 약탈하듯 강제 징수한 양곡을 되돌려 주시기 바랍니다.”

“뭐라? 약탈?”

“예, 장군. 태수 하달은 제 공을 믿고 부춘이 유의에게 귀의했던 때를 입에 담아 협박하듯 횡포하며 군량미로 쓴다는 이유 하에 민가의 곡식을 약탈하여 이곳에 보낸 지 오래입니다. 그저 저희는 그 절반이라도 되돌려 받아 겨울과 봄을 굶지 않고 나고자 합니다.”


손권은 그렇지 않아도 부족해지는 군량 사정으로 쪼달리는 상황에서 단비와 같은 소식을 듣지 못했기에 황당했고 참담한 몰골로 잡혀온 하달의 모습에 분노했다.

또 한편으로는 하달의 아비 하제가 사치스러웠기에 하달이 민중을 수탈해 개인적으로 사치하지 않았을까 의심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얼굴이 터질듯 붉어진 손권을 대신해 손린이 부춘의 토호를 다그쳤다.


“그것이 진정 사실인가? 보급을 받아보지 못한지 오래이다.”

“어찌 자사와 장군께 거짓을 고해 올리리까?”


손권이 손을 들어 제지하고 하달에게 물었다.


“장본인이 입을 열라.”

“주군, 어찌 이 같은 때를 골라 민심을 수탈하리까? 부춘에서 반란이 일어 수백 양주 용병들이 목을 잃었고 성루에 유의의 이름이 걸렸습니다. 다만 부춘성 반란의 병력도 미미해 아직 불안하니 빠르게 2천 병력을 보낸다면 능히 다시 점할 수 있으리다.”


토호가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어찌 그런? 자사님! 만일 유 뭐시기의 편에 서 있었다면 저 하달이란 장수의 목이 여직 제 자리에 붙어 있겠습니까? 부디 살피소서!”


마침내 손권이 불같이 성내며,


“주재는 하달과 저 토호를 군중에 감금하고 손린은 5백 병력을 내어 부춘성의 동태를 급히 살피라!”


명을 내리니 하달을 잡아온 토호는 격분하며 침을 뱉고 땅에 머리를 세게 박아 혼절했다.


상황이 그러할 적, 부춘성은 성문을 열고 일단의 군세를 받아들였다.

왕우가 선두에 서고 맹획이 그 뒤에 서 환영하며,


“패전을 수습하고 빠르게 응답하니 양축(楊竺)장군의 공이 결코 작지 않으리다.”


하였다.

맹획이 온전할 뿐 아니라 패전한 이후 유의의 양주 병력을 수습해 오히려 늘어난 양축의 군세에 인상을 구겼으나 왕우가 발을 밟음에 고개를 돌려 모른 채했다.

양축은 손가를 배반하고 유의에게 붙었다 손권이 부춘을 공격하기 위해 북상하자 다시 손가에 붙고 오반이 달려온다는 소식과 왕우가 전한 손권군 군량미 운송 소식에 이를 약탈해 숨긴 후 다시 유의에게 붙은 오군의 토호요, 군벌이었다.

오늘에 이르러 부춘성에 불길이 솟고 성을 지키는 병력이 모자란 듯 보이자 도망하여 2백에 이르는 병력을 숨긴 것과 부춘에서 이동하는 군량미를 약탈한 것이 공인 양 나타난 것이었다.

양축이 1천에 가깝게 늘어난 병력을 거느리고 뽐내며 다가와 은근히 말했다.


“부춘성은 패배하여 그을음이 여기저기에 있구려. 이제 아군이 들면 성곽이 높아지고 병장기에 날이 선 것과 같을 것이요. 그렇지 않소?”

“과연 그렇습니다. 마침 태수좌가 비었고 양 장군은 용병에 출중한 실력이 있으니 능히 성의 대소사를 총괄할 수단이 있으리다.”


왕우가 입에 침도 바르지 않자 뒤에 서 있던 맹획이 못마땅한듯 대신 침을 발랐다.

이에 더욱 콧대가 선 양축이 경계하며 명령하듯 말했다.


“저 밖에 남아 내게 협력하지 않은 패잔 병력들은 다 유의님을 배신한 이들이라 믿을 수 없으니 이 양축이 성문을 점하고 그들을 경계해야 옳소.”

“여부가 있겠습니까, 장군.”


곧 양축이 성문과 관청을 점거하여 유의의 패전 병력을 가려 받아들였는데 병장기를 몰수하고 수장들을 잡아 패장이라 모욕을 줌이 볼만했다.

그 꼴을 구경하던 맹획이 왕우에게 물었다.


“성의 병력이 저 치의 절반뿐이 되지 않지만 능히 잡아 죽일 만큼은 된다. 어찌 저런 돼지가죽 같은 인간에게 일을 맡겼는가?”

“쓸모가 없어서 되려 쓸모가 있는 사람이 있는 법입니다.”


과연 날이 지나자 손권이 보낸 손린이 당도해 부춘성의 닫힌 성문 위로 고함했다.


“부춘의 백성들은 성문을 열고 손권님의 명을 받으라!”


양축은 거느린 병력이 손린의 배가 넘어 천 수백에 이르렀으나 기세가 형편없는데 비해 젊은 손린이 용맹해 보여 망설였다.

때를 함께해 아첨하고 패물을 헌상하며 양축의 측근 자리를 확보한 왕우가 조언했다.


“양 장군, 지금 아군은 패전으로 꼴이 형편없습니다. 반면 저들은 정병이라. 싸우면 반드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것이고 소식이 손가에 닿아 손권이 거느린 2만 병력의 절반만 와도 우리의 목이 붙어있질 못할 것입니다.”

“허, 어찌할까? 어찌해?”


양축은 손린은 조금 두려웠으나 손권은 크게 두려웠다.

왕우가 그런 양축을 툭툭 건드리며 배신을 제안했다.


“제가 성문을 열고 패잔병을 모은 이유는 손권의 장남이 5천 병력을 이끌고 달려오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허나 병력을 추스르는 것보다 손권이 달려오는 일이 더 빠르겠으니 일신의 명예보다 이 부춘을 챙김이 우선 아니겠습니까?”

“그대는 변절을 입에 담는가?!”


양축은 내심과 달리 불처럼 화를 내며 왕우를 살짝 밀쳐냈다.

왕우는 당황한 사람처럼 크게 뒤로 밀리고 땀을 쏟아내며,


“부춘성 일만 백성의 영웅이 되는 길을 그리 곡해하시면 이 왕우는 설 곳이 없으니 성 밖에 몸을 던져 목숨으로 다른 뜻이 없음을 증명하리다.”


양축은 그제야 왕우를 살며시 말리고 성문을 열어 손린을 맞이했다.

손린은 성에 들어 양축을 보고 분노가 일었으나 자신의 병력이 작고 지쳤기에 이를 티내지 않고 우선 토호들만을 불러 물었다.


“배반이 있다 들었다. 손권님께선 억울한 사람이 없을 것을 원하신다.”


왕우의 왼편에 선 토호가 조심히 고했다.


“이는 태수좌를 노린 양축이란 오군 출신 장수의 소행으로 간에 붙고 다시 쓸개로 옮기길 기막히게 하는 이의 간계입니다. 장군은 흔들리지 마소서.”

“간계?”

“하달이란 자가 역심과 비견할 만한 욕심을 품고 저 배반자 양축과 통하여 손가의 장남을 죽여 그 정병을 거느릴 것을 맹세한 일이 있습니다. 성의 백성들과 관리들이 이를 알고 빠르게 저항했으니 다행히도 하달이나마 잡아 그간 횡포한 것을 자사께 고할 수 있었음입니다.”


하달의 부정이나 조사하러 온 손린은 뜻밖의 반란소식에 혼란스러워 더 자세히 묻질 못하고 눈을 굴렸다.

이에 왕우가 조심스레 나서 낮은 목소리로 조사 방식을 권했다.


“장군께선 하달만 조사하시는 척, 양축에게 태수의 직인과 양축이 지닌 병력의 일부를 바치라 명하소서. 허면 욕심만큼 의심이 많은 양축은 단번에 속내를 보이리다.”


손린이 이에 따르자 과연 양축은 크게 화를 내며 병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만, 이에 응하여 양축과 마주한 맹획이 서로 다짐하는 자리에서 단숨에 그 목을 자르니 양축은 입이 있어도 열어 스스로 처지를 변호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큰 반란이 제 눈앞에서 일어날 뻔한 것에 손린이 크게 놀라며 왕우 등 토호들의 행동을 칭찬하고 손권에게 그다지 좋지 않았을 소식을 좋게 서술해 전하였다.

단 며칠 사이지만 그간 상당한 우호를 쌓은 손린이 손권의 부름을 받아 성을 나서려 하자 왕우가 나서서,


“만일 장군께서 전장으로 돌아가신다면 이 성은 누가 맡아 보호하리까?”

“대공자께서 오시니 염려마시게.”

“이 근처에는 유의의 패잔병이 많습니다. 또한 성내에 대공자를 아는 이가 없으니 다시 의심을 살까 두렵습니다.”

“내 친히 서한을 써 미리 연락해 두겠네.”

“감읍합니다, 장군.”


손린이 돌아간 연후, 왕우는 밤을 틈타 맹획을 부려 손린이 남겨둔 병사들을 일시에 잡아 죽이고 맹획으로 하여금 1백 병력을 이끌고 성을 나서 손등의 선봉 5백을 영접하게 했다.


손린의 보고를 받은 손권은 크게 화내며 하달을 잡아 목을 자르고 토호를 위로해 돌려보냈다.

이 소란은 자연스럽게 유의의 진영까지 전해지니 유의는,


“비로소 손권을 완전히 잡을 수 있겠다.”


하고 기뻐했다.

또 유의는 유선에게 부춘성의 은밀한 사정을 전한 후 당장에 군을 이끌고 손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유선 또한 속사정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이미 승리한 전장에서 대공을 세우지 못하면 어찌 출세할 수 있을까.”


하고 유찬을 향해 크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유찬은 유선의 능동적인 공세를 크게 환영하였으나 유선은 조심에 조심을 더하던 때와 달리 관색과 정예를 선두에 내보내어 유찬을 상대해 잡아두게 하고 요화에게 일군을 맡겨 유찬의 뒤를 치게 하니 어찌 몸이 하나뿐인 유찬이 앞뒤에서 날라오는 칼날을 홀로 버틸까.

유찬이 크게 패하고 물러나자 유선은 잽싸게 부춘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물론 패한 이후에도 끈덕지게 달라붙어 오는 유찬 덕에 가벼운 피해를 입었으나 유선은 알랑거리는 파리 한 마리 때문에 때를 놓칠 만큼 어두운 인물이 아니었다.

유의가 놓친 금괴를 유선이 줍는다.

유선은 무거운 갑주를 뒤덮은 채 말을 거칠게 달리는 와중, 찰 지게 느껴지는 고간의 미약한 통증에도 자비로운 미소를 지었다.


유찬이 패하고 유선이 부춘으로 내달린다는 소식이 손권군 본영에 닿았다.

손권은 손린에게서 부실한 부춘의 사정을 듣고 잘 알고 있었다.

그간 의외로 하달을 잡아 바치며 손권에게 지극한 충심을 보여주었으나 이제 상황이 달라져 부춘이 변심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았다.

손권은 병력을 나눠 손환으로 하여금 유의를 견제하게 하고 자신은 친히 부춘성을 선점하기 위해 달려갔다.


부춘성 성루에 올라 도착한 병력을 훑던 왕우는 인상을 구기고 손권에게 이르길,


“성에는 고작 8백의 병력뿐이 없고 유선의 병력은 자그마치 5천이 넘습니다. 다만 자사께서 5천의 병력을 이끌고 이리 당도하셨으니 이 왕모는 그저 성문을 닫아걸고 손등님의 5천 병력이 더해지길 기다리길 권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손권은 손등이 도착하길 기다리자는 의견이 옳다는 것을 알았으나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염려대로 손환은 손권이 떠나기 무섭게 유의의 매서운 공세에 눈코를 감수할 겨를이 없었고 손린이 부춘에 남기고 떠난 부하들의 머리 수 십 개가 주인 없는 말이 끄는 수레에 매여 진영에 당도하자 혼란을 수습할 수 없었다.

손환은 손권에게 이 사실을 급히 전했으니 손권은 손린을 불러 확인하며,


“저 왕우란 놈이 시간을 끈 것은 손등을 기다림이 아니라 유선을, 더해 유의를 기다린 것이 아닌가! 어찌 듣도 보도 못한 잡것에게 이리도 휘둘려 대사를 그르치는가!”


하였다.

손린은 분하고 창피하여 수하 5백을 이끌고 왕우가 내려 보는 성문 앞에서 크게 시위했다.

그러나 손등의 선봉을 부춘이 아닌 다른 길로 안내하여 따돌리고 돌아와 그 꼴을 보던 맹획이 창을 잡아들고 손린을 향해 고함을 내지르니 맹획의 손에서 춤추던 창이 손린의 머리를 꿰어 땅에 박았다.

맹획이 엉뚱한 길로 손등을 안내한 사정을 모르는 손권은 기어이 손등보다 유선이 앞서 도착하자 게으른 자식을 욕하고 피를 토하듯 유선을 향해 거침없는 공격을 내부었으나 돌연 부춘의 성문이 열리고 수백의 병력이 쏟아짐에 피해만 입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왕우는 승리한 이후에야 본색을 드러내 손권에게 다시 사람을 보내어,


“이제 익양후께서 길도 모르는 손등따위 보다 먼저 달려오지 않을까. 촌부의 걱정이 지나치지 않은지 모르겠구려.”


하고 약 올리니 손권은 분했으나 부장 주재와 유찬의 청을 들어 군을 양분하여 손등이 도착하리라 믿고 있는 길목에 진영을 세웠다.

유선이 조심스레 이를 건드렸으나 꼼짝하지 않았고 왕우 또한 사람을 더 보내어 손권의 심기를 흐렸으나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 사이 유의는 손환의 군을 격파하고 손환을 사로잡아 말 뒤에 매달아 손권에게 보내니 손권은 일이 틀어졌음에 통탄하며 손등에게 사람을 보내어 회계 깊이 물러날 것을 엄명했다.


부춘 인근에 당도한 유의는 오반과 군을 나누고 유선, 부춘성과 긴밀히 협력하여 손권을 가둔 모양을 만들어 이틀 밤낮을 공격하니 사람이 긁히고 꿰어져 피를 흘리는 것이 아니라 창검이 사람에게 긁히고 찢겨 피가 흐를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이제 되었다.”


생사를 제 손으로 정한 손권의 말인지, 야망의 끝에 서 새로운 시작을 맛본 유의의 말인지, 심지어 원하던 공을 세운 채 청운의 꿈을 꾸는 유선의 말인지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장안 10년(230년) 봄.

유의는 비로소 오군을 완벽히 평정하고 오의 중심인 오현에 임시로 자사부를 두어 머물며 백성을 위로했다.

양주 오군의 토호들이 유의를 쉽게 인정하려 하지 않았으나 앞장서 유의를 떠받드는 이들이 없지 않았으니 유의는 과감히 청렴하고 충직한 인사들을 버리고 얌체 같은 이들을 받아들여 오군 곳곳을 시찰하게 명했다.


그간 단양과 예장, 노릉, 여강, 구강군의 대소사를 의양태수인 유엽이 대리하여 자사처럼 다스렸으나 유의가 한번 명하자 유엽은 그 많은 권한을 내려놓고 유의의 단하에 서서 그의 명을 받았다.

이 모습에 크게 감동한 젊은 재사들이 유엽을 찾아 관에 투신했고 유엽은 그들을 이끌고 말릉으로 향해 의양에 터를 닦아 권력을 잡았던 어제의 동맹, 토호들의 힘을 깎아내려 견재하기 시작했다.


장안 11년(231년) 가을.

무능한 이들이 자리에 앉아 오군 전역에서 크고 작게 실정했으나 강력한 군권을 놓지 않은 유의가 친히 감찰을 풀어 실패를 지적하고 실수를 고치게 만들었으며 공정히 벌했다.

유의가 손을 쓰자 손가가 다스리던 시절보다 살기 좋았다.

유의는 시절이 그리 흐름에도 쓸모없는 충정과 의리 따위를 내세워 제 고향을 돕지 않는 명문 토호들의 행위를 비웃으며 자신의 말을 군의 각 현청의 현판으로 삼게 했으니,


“양주 오군에는 사람이 없다.”


는 현판이 걸리자 글을 쓰고 익힐 줄 아는 오군 사람들의 얼굴을 붉게 만들고 유의의 능력을 인정하게 만들었다.

오와 단양이 유의 한 사람의 엄정한 치세에 의지해 위태롭듯 평화로울 때 회계에 자리 잡은 손등, 손화, 손려 등 손권의 아들들이 오정후를 자칭하며 반란했다.

허나 회계 깊은 곳은 곧 산월의 터전이기도 해서 규모가 클 수 없었고 움직임도 자유롭지 않았다.

되려 유의는 무(武)가 아닌 문(文)으로 명성 있던 손등과 손화 등의 어설픈 반란과 그들을 돕지 않고 칩거만 고집 하는 옛 손권의 신하들을 가르켜,


“역적의 아들들이 각박한 산월의 땅에 홀로 서서 그들에게 한의 예를 가르치려나 보다. 잘된 것인지 모르겠으나 여전히 오에는 사람이 없구나.”


하고 비꼬았다.


그 해 겨울.

유의는 회계 장안(章安)현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던 -허나 그곳을 다스리며 산월을 상대하기도 벅차보이는- 손등을 토벌한다는 핑계로 남벌을 시작했다.

유의가 비워둔 오군에서 작은 반란이 일었으나 유선이 앞장서 이를 진압했다.

유의는 그런 유선의 공을 가감 없이 황제가 거처하는 허도에 정식으로 고해 올렸다.

오히려 권력의 중심지인 낙양에는 개인적인 서찰로 소담하게 고해 올리니 유융이 황제를 대신한다는 소문과 반대되는 행위라, 예에 맞았기에 충직한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결국 패배한 손등은 남해안을 따라 영녕(永寧)현을 거쳐 동부(東部)현까지 도망쳐 흘러갔고 유의는 이미 영녕에서 손려를 잡았고 동부로 가는 길에 손화의 투항을 받았으므로 산월의 끝없는 방해와 손권의 장렬했던 전사(戰死)를 기린다는 이유를 들어 병사를 거두었다.

손등이 물러난 장안현과 영녕현의 인근 산월을 정리하고 관리를 파견해 양주와 교주가 소통하는 길을 열었다.


장안 12년(232년) 봄.

유의는 마침내 육손과 육적, 제갈각, 손화와 손려 등의 도움으로 시의와 사경 등 옛 손권의 훈신들을 설득해 품고 숨어 지내던 노숙을 찾아 삼고지례로 초빙했다.

이를 시작으로 오군과 회계군에 숨어있던 재사들이 다시 출사하기 시작했으니 유의는 유엽과 육손, 이풍의 간청에 따라 치소를 말릉으로 옮기고 평화로이 제국의 기둥을 세우겠다는 뜻을 품은 건강(建康)이라 명명하였다.

강력히 통치하는 유의의 모습에 산월의 반란이 주춤하기 시작했다.


그해 가을.

촉왕 유휴가 사람을 보내어 익주의 병력을 익주로 귀환시켜줄 것을 건의했다.

당시 유의는 건강으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치적으로 취약한 곳이 있었고 여직 익양후였기에 이를 거절하기 어려웠으나 형주자사 서서가 유휴를 설득해 이를 미뤄주었다.

유의는 해를 넘겨 병력을 돌려줄 것을 약조했고 형주자사와 예주자사가 이를 보장했다.


서주 남부에서 크게 일어났던 조휴의 반란은 양주가 안정됨과 동시에 시작된 제갈량의 대대적인 반격에 크게 휘청이기 시작했고 서주자사 제갈량은 말릉으로 주도를 옮긴 것으로 토호와 군벌들의 절반 이상을 단숨에 제압한 유의를 축하하는 동시에 구강군 수춘현을 마저 정리할 것을 권했다.

마침 해를 넘기지 못하고 수춘 태수를 자칭하던 이전이 병사했다.


******


사예 - 하남윤 낙양성


단 아래 엎드린 유휴는 아버지의 따가운 눈총 아래 고개를 들기 어려웠다.

불편하게 앞으로 내민 그의 사내다운 두 손에는 작지만 열기가 가득한 옥새가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옥새를 항시 보관하던 옥함(玉函)은 유휴의 곁에 안절부절 선 내관이 들고 있었는데 옥새에 뒤지지 않는 화려함을 발해 어색하고 어려운 상황을 비꼬고 있었다.

유융이 반시진(약 1시간) 가량 굳게 닫아두었던 입을 열었다.


“네 지난날 황상 앞에서 교만한 적이 있더냐.”

“소자 그런 일이 단연코 없었나이다.”

“네 지난날 황상 앞에서 위엄을 부린 일이 있더냐.”

“소자는 군략을 배우려 대장군께 고개 숙였던 애송이일 뿐, 결단코 위엄을 부릴 자리를 찾아간 적이 없습니다.”

“네 지난날 황상 앞에서 실언을 내뱉은 때가 있더냐.”

“오늘날과 같이 어지러운 하늘 아래 모든 조당의 작은 자리는 매사 전전긍긍하는 자린 줄 압니다. 어찌 입을 조심치 않아 하나뿐인 몸과 가문을 망치려 들었겠습니까.”


부자지간이 아닌 듯 살벌한 공기가 조당을 메우자 그 누구도 나서길 꺼려했다.

너도 나도 유융의 눈치만 살필 적, 유휴의 눈치를 살피는 이가 있었으나 유융은 모르는 척 눈을 잠시 멀리 두고 손을 내저으며 음울히 말했다.


“정사를 보는 것은 결코 굶으며 할 수 없다. 오늘의 불경함은 내일이 가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요, 배를 채운 후에 다시 논함이 옳다.”


유휴가 물러나고도 눈치만 살피던 관료들이 조심스레 물러나자 손에 흥건한 땀을 닦던 사마의가 유융에게 다가왔다.


“태백과 계력의 예로써 세번 사양함이 천하를 감동시킬 것이거늘 안타깝기 그지없나이다. 사군.”

“중달. 그대의 낭심은 항상 아랫도리의 음습한 곳을 벗어나 입 밖에 있구나.”

“송구합니다만 태백부터 계력까지 혼자 도맡으려 하시는 사군만 하겠습니까.”

"아들이 왕이 될 덕이 있나니 고(孤)가 곧 태백이요, 계력이다. 아닌가?"

"물론입니다. 사군."


한편 돌연 죄인이 된 유휴가 혼자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한 채 넋을 놓고 있을 때, 살며시 접근하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앞서 유융이 조당을 내려 살피며 눈에 담은 인물로 유휴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위북군(衛北君).”

“아, 진태 공.”


진태의 아비 진군은 지난날 허도에서 일시에 잡혀 제갈량에 의해 낙양으로 불려온 무리에 섞여있었다.

당시 형주군 총 사령관으로 공을 세운 유종은 황실의 인척임을 자신의 공훈과 함께 내세워 조조의 무리 중 많은 인사들-주로 명문의 자제들-을 구명하는 일에 힘썼는데 진군과 그의 일가, 가문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

진태는 이후 유종의 식객으로 있으며 그의 은혜를 입음을 잊지 않고 있다 유종의 추천으로 낙양, 중앙으로 불려와 다시 출세할 수 있었다.


“황명이 지엄하되 심연에 자리한 의중을 뚜렷이 알 수 없으니 칼날 위에 오른 듯 해 이를 받잡는 충신들을 멀리서 보는 고충도 시릴 듯 아립니다.”

“하하, 공은 오히려 즐겁지 않소? 내 붉은 나무 의자에 기대어 공의 부형(父兄)을 심문하고 치도곤하며 괴롭힌 지 오래지 않았거늘.”

“세월이 그러하였지요. 또 다 충(忠)이란 이름 아래 늘어선 죄인들 아니었겠습니까? 천의가 변모하면 사람만 다칠 뿐이라서 산천초목은 고요한 법입니다.”


조조와 부합(附合)한 낙양과 허도, 연주 인근의 역적들을 가려내어 수천 인사를 벌하고 유융이 비운 낙양을 지켰으며 이후 출전해 기주와 청주에서 조조의 잔당을 몰아내며 활약한 공으로 위북군의 자리에 오른 유휴인지라 진태의 행동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그 세월의 충(忠)은 황실이 둘로 갈라선 터라 입맛에 해석을 달리했소. 나는 흐름을 읽어 결코 공정한 적이 없었으니 지금이라도 죄인이라 불려도 할 말이 없는 처지지요.”


진태의 말을 비꼬아 들은 유휴가 그리 말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진태가 아쉬워하며 말을 늘였다.


“그리 잘 아시는 분이 그러하십니까. 어찌 당장 내달려 사공께 죄를 청하지 않으십니까?”

“어찌 죄를 청해야 목숨을 부지할지.”

“전장에 선 장수는 적의 목으로 충심을 내보이고 출세합니다. 헌데 조정의 요직이든, 지방의 요직이든 결국 이를 꿰차는 것은 흰 얼굴에 섬섬옥수를 지닌 먹물쟁이이니 다 어떤 탓입니까? 위북군께서 잠시 전공(戰功)을 세웠다하여 말로 떠드는 조당에서도 버릇처럼 그리할 것이 있습니까.”


미간을 잔뜩 모아 진태를 노려보며 그의 말을 예의상 듣고 있던 유휴의 콧구멍이 아주 잠깐 벌렁거렸다.

이후 유휴는 미간을 그대로 모아둔 채 고개를 숙여 감사를 전했다.

이에 진태는,


“세월이 흘러도 이름은 남아있다는 것만 잊지 말아주십시오.”


하고 조용히 자리를 물렸으니 유휴는 자신이 죽여 몰아낸 자들의 후손에게 큰 빚을 진 셈이 되었다.

이후 유휴는 유융이 길게 식사하는 자리를 찾아가,


“아버님께 거듭 권해지던 옥새가 소자에게 당도함은 허도에 머무시며 심신 미약해진 황상께 음심을 품은 자들이 접근해 혹(惑)한 말로 권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필시 부자간을 갈라놓아 조당을 혼란에 몰아넣어 과거의 영광을 찾고자함이니 이 유휴가 허도를 방문해 황상을 다시 모셔 와도 될는지요.”

“네 이미 옥새를 얻어 무서울 것이 없는데 어찌 사공부를 찾아와 그를 묻는가?”


유융의 허락인 듯 허락 아닌 듯 묘한 다그침을 들은 유휴는 옥새를 낙양에 두고 측근만 거느린 채 자리를 비웠다.

유휴가 도망치듯 낙양을 벗어난 지 하루가 지나서야 유융은 유휴를 다시 찾았고 유휴가 사라진 것을 사마의가 공식석상에서 고했을 때 조당의 신료들을 둘러보며 말하길,


“이는 천하귀물을 돌보듯 한 유휴의 진심이구나. 못난 아비를 둔 탓에 억울한 죄를 얻었으니 죽어도 조상을 볼 낯이 없다.”


하였다.

조당의 권신들은 그제야 유융의 마음을 눈치 채고 아무도 위북군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으나 오직 진태만이,


“위북군은 황명에 도망을 놓았으니 그 죄가 없지 않습니다. 만일 사공께서 진정 자식을 걱정하시거든 천하에 그를 수배함이 옳습니다.”


하고 건의하였고 유융의 눈짓에 배잠이 나서서,


“이는 천하에 둘도 없을 불경(不敬)으로 큰 죄이니 황상께 고하여야 그 죄의 벌을 정할 수 있으리다.”


하였으니 조당의 권신들 중 그 의견에 반대하는 자 없었고 유융도.


“허면 허도에 기별을 넣어 황상께 이를 고하고 못난 자식의 죄를 정할까 한다.”


하며 조카 유순(循)을 허도 황궁으로 보내니 황제가 어찌 유융의 눈치를 보지 않을까.

오히려 몸을 떨며 반듯이 선 유순에게 물었다.


“유 사공은 자식을 얼마나 걱정하던고?”

“머리는 학 떼가 놀다간 듯 희시고 이마는 황하가 넘친 듯 어지러이 너울거리며 눈은 타버린 듯 그을음으로 탁하시더이다.”

“짐은 결코 의로운 위북군을 헤할 생각이 아니었다. 병이 깊어 판단이 흐려졌을 뿐이니 위북군을 크게 벌할 것 없다. 마침 옥새가 그곳이 있을 저, 유순은 황명을 다시 전하라. 이 황제가 유 사공에게 황위를 전하고자 한다고.”

“폐하!”

“어허, 짐의 말이 곧 법이거늘! 짐의 몸이 업을 떠난 후 과히 좋지 않아 언제 세상을 등질지 모르고 황자들이 너무 어려 평화롭지 않은 제국의 만사를 안심하고 맡길 수 없으니 노쇠하나 기력 있고 경험 많으나 결코 아집을 품지 않는 사공이야말로 제국의 영광을 이을 수 있을 저!”


유순은 황제의 마음이 진심이며 다급함을 어렴풋 느끼고 낙양에 돌아와 이를 전했다.

유융이 대노하며 유순을 잡아 가두어 벌하려 하였으나 백관이 나서서 이를 부당하다 말하며 황명을 따를 것을 강권하니 유융이 못 이긴 척, 심궁(深宮)에 박혀 열흘간 나오지 않았다.

허도에 도망오듯 당도한 유휴에 의해 소식을 접한 황제가 당황해하자 곁에서 황제를 수행하던 제갈서가 조언하길,


“유 사공께서 심궁에 칩거하심에 황하도 흐르길 멈추고 구름도 비를 내리지 않는다 합니다. 천하에 원성이 자자한 때 황위가 빈 것 같으니 이는 큰일이라. 상황(上皇)께서 친히 낙양에 가셔서 양위를 강제하사이사.”


라 청했다.

황제는 제갈서의 뜻과 같은 마음을 품은 무리가 허도궁에 가득함을 진즉 알고 있었기에 아프지 않으나 아팠던 몸을 움직여 낙양으로 돌아와 황궁을 찾았다.

황제가 찾았으나 유융이 나오지 않음에 다시 열흘이 흐르니 황제는 문득,


“유융이 진심으로 충정에 벅차 저러는 것인가?”


하였으나 그의 물음을 들은 마속이,


“상황 폐하, 유 사공의 마음을 모두 알진데 어찌 이제 와 의문을 품으시나이까?”


라 말하고 마속과 함께 황제를 시중들던 유순도,


“이대로 열흘이 더 흐르면 상황께서 부덕한 때문이다 말하는 자들이 생길 것입니다.”


하고 거들자 희망을 접었다.

유융은 사흘이 더 흘러서야 심궁에서 나와,


“폐하!!!”

“사공........”


유융은 어린 황제를 기쁜 낯으로 바라보며 메마른, 허나 당당한 풍채를 내보였고 상황이 친히 옥새를 손에서 손으로 건네서야 옥좌에 당당히 앉아 정무를 보기 시작했다.


상황 유돈은 그 일가를 거느리고 장안으로 이주했다.

다만, 유돈의 차남, 겨우 돌이 지난 아이가 낙양에 남아 유융의 양자로 입양되니 생모 원(袁)씨의 울음만 가득 남았다.

유융은 원씨를 딱히 여겨 상황에게 청해 그녀를 낙양 황궁에 거두니 이후 장안에 상황후(上皇后) 양씨가 있고 낙양에도 상황후 원씨가 있었다.

유융은 이를 이유로 내궁의 일을 처리하는 것도 본인이 직접 했으니 모든 일을 처리한 후 유융의 측근이 상황후 원씨를 만나 의례적인 보고만 내뱉었다.

또 유돈이 유융에게 양위해 고결한 신분을 유지했으나 이후 유융 앞에서 유돈을 칭할 때 태황(太皇)이라 부르지 않고 상황(上皇)이라고만 칭했으나 그마저 오래가지 않아 질제(姪帝-조카)로 격하하였다.

또한 장안에 질제만을 위한 고(庫)를 두고 이를 자유롭게 쓰도록 배려했으나 현을 관리하는 독우(督郵)를 고의 관리감찰에만 여럿 두고 엄격하게 관리하도록 정하니 크고 작은 쓰임이 모두 유융에게 보고되었다.


장안 12년(232년) 가을.

질제가 유융을 찾아 옥새를 손수 전한 일이 있은지 반년이 지났으나 유융의 양위 의식은 그제야 이루어졌다.

유융이 옥새를 받아 법을 다시 손보고 관직을 정리하며 내궁을 수중에 두고 군사와 군비를 두루 관찰한 이후였다.

그는 정식으로 황위에 오른 후 연호를


천려(天麗) 원년(232).


이라 명명했다.


천려 원년.

위북군 유휴를 촉(蜀)왕으로 익양후 유의를 오(吳)왕으로 임명했다.

탕서군 유희를 진(晉)왕으로 은양군 유구를 농(籠)후로, 안능군 유연은 기(冀)후로 임명했다.

유융이 진공이었지만 큰 의미가 없었기에 탕서군이 이를 물려받은 것이나 진공부가 형남 무한에 위치한 터라 대신들이 다시 주청해 진왕을 무한(武漢)왕으로 바뀌었다.

질제의 차남이자 유융의 양자인 유정(訂)은 제남(齊南)왕이 되었으나 어리다는 이유로 세금을 징수할 권한도 없었고 그저 이름 뿐이었다.


유융은 유장의 아들들 또한,

유순은 완(宛)후로, 소제의 양자로 입적되었던 유천은 중산(中山)왕으로 각기 임명하였다.


이들 뿐 아니라 현 황제와 가까운 유씨 인척들이 크게 출세하니 천하에 다시 유씨가 흥하기 시작했다.

물론 큰 실권이든 작은 실권이든 실권을 쥔 유씨는 두 손으로 셀 만큼 적었다.


천려 2년(233년) 여름.

자칭 광주자사 유회가 교주자사 사광을 짐살하고 황제를 참칭(僭稱)했다.

황제는 촉왕과 오왕으로 하여금 이를 벌할 것을 명했다.


요동 태수 공손연은 유융이 황위에 오른 이후 제 몫이 작음에 불만을 품어 스스로 요동왕 경 대장군을 칭한 후 주변 이족과 손을 잡고 어린 아이를 골라 선황(유돈)의 장남이라 내세우며 반란했다.

황제가 친히 정병을 이끌고 토벌할 것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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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ㅇㅅㅇ 헉헉헉.

이제 정말 끝이 목전에 놓여 있구녁.

황위에 조용히(?) 오른 유융입니다.

지방 곳곳에 아들들이 왕을 해먹으니 역시 천하 곳곳을 떠돌며 본인의 씨;;를 뿌려둔 보람이 있겠네용.


+지적받죠!

++솔직히 유종이 중간에 어떻게 되었더라 고민했다능.◑ㅅ◑;;

여전히 기억 안나는 건 비♥밀

+++유장의 자식들은 후와 왕작을 받았지만 정작 유장은 아무것도 없죵.

++++아직 조비가 살아있습니다. 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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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예 - 낙양(단(斷)-2) +6 15.09.03 1,730 22 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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