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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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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창작공장
작품등록일 :
2021.11.22 10:37
최근연재일 :
2022.03.23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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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8,619

작성
21.11.29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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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격동의 시대 시즌1 - 10화

DUMMY

평생을 듣다가, 이 몇 달 듣지 않은 목소리였으나 몸은 반사적이었다.


멈칫.


강철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형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강태수의 모습은, 강철수에게 있어서 지우고 싶은 모습이었다. 강철수는 짓씹듯 말을 뱉었다.


저벅, 저벅.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다가오던 걸음이 멈추었다. 등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더 다가오지 않고, 거리를 둔 채 멈췄다.


”네가 나에게 실망한 것은 알고 있다. 그날 그렇게 손찌검한 건 이 형이 사과하마. 미안하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형도, 가족도 없는 고아입니다.“

”···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큰형님이 계시질 않느냐. 그게 무슨 말이야.“


이어지는 강태수의 목소리에는 간절함마저 담겨 있었다.


”우리끼리의 우애가 이렇게 흔들리면 부여에 계신 큰형님을 뵐 낯이 없지 않으냐.“


강철수는 멈칫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걸음을 디뎠다. 아니, 디디려고 했다.


”우리 형제들을 위한 방법은 성공뿐이라고 생각했다. 네가 수단과 과정을 생각하는 것처럼, 나는 결과를 생각했어. 이것이 틀린 방법이라 매도한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철수야, 큰형님은 아니다. 너도 큰형님께는 아무런 감정이 없지 않으냐. 집으로 돌아와라, 철수야. 네가 돌아온다면, 시간이 좀 더 지난다면 우린 예전처럼 지낼 수 있어. 내가 그렇게 하겠다.“


강철수는 강태수의 말에 속에서 울컥 치미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예전! 예전이라니!’


휙!


강철수가 손에 쥔 봉투를 있는 힘껏 구기면서 뒤돌았다.


”!“


그리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놀랍게도 형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했는지 잔뜩 충혈된 눈에 맺힌 눈물은 ‘한’ 그 자체였다. 강철수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형의 얼굴이었다.


”철수야, 이 형은···.“

”···.“

”희수를 잃은 마당에 너까지 잃을 수는 없다.“


둘은 한참 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강철수였다. 강철수는 이해해 보려고 했다. 형이 지고 있는 무게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짐작은 할 수 있었다.

강철수는 무엇을 이야기해야 되돌릴 수 있을까 생각했다. 결론은 생각보다 쉽게 났다. 생각을 정리한 강철수가 입을 열었다.


”그럼 그 집을 처분하겠다고 약속하십시오. 야마다의 집 말입니다.“

”··· 그러마.“


강태수는 조금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철수의 대답은 이미 강태수가 예상한 것이었다. 계획의 아귀가 하나둘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


맴, 맴.


때가 잔뜩 묻은 민소매를 입은 남자 셋이 손부채질을 하며 모여 있었다. 지독한 땀 냄새가 코를 아프게 할 정도였지만 그들은 무감해 보였다.


”어이, 자네들. 그 소문 들었는가?“

”또 무슨 소문? 하여간 박 씨 자네는 소문을 너무 좋아해.“


남자들의 손에는 과즙이 흐르는 수박이 들려 있었다. 강철수가 친하게 지내던 박 씨는 남들과는 달리 수박을 한 입도 먹지 않은 채 바쁘게 말을 늘어놓았다.


”아니, 조 씨. 내 말 좀 들어 봐. 이번에는 박창수라던데?“

”그게 무슨 말이여?“


박 씨를 타박한 조 씨가 모기 물린 곳을 벅벅 긁는 걸 멈추고 ‘박창수’라는 이름에 눈을 빛냈다. 박 씨가 주변을 살피며 목소리를 죽였다.


”그 왜! 자네가 징글맞게 싫어하는 그 지독한 박창수 말이야.“

”그 새끼가 왜?“

“박창수도 곧 밀린 임금들을 지불한다더라고. 자네한테는 좋은 일 아닌가? 근데 박창수까지면 이번이 세 번째란 말이지. 이준철 그 개자식한테 여기 조 씨도 받고, 이 씨 자네도 받았잖아. 나도 그렇고. 광복 후에도 안 변한 그 치들이 갑자기 그동안 입 싹 닫고 안 준 돈을 준다는 게 말이 돼?”


박 씨가 손짓하자 이 씨와 조 씨가 허리를 숙였다. 박 씨는 소곤소곤 이야기를 이었다.


“이 일에 미군이 개입했다는 말이 있어!“

”미군? 갑자기 미군이 왜 튀어나와?“

”배경석, 이준철, 박창수 셋 다 광복 전에 알아주던 친일파들인 건 다들 알지? 미군이 드디어 친일파 청산을 해 주려고 한다는 소문이 돈단 말이야, 계속.“

”!“


남자들이 시선을 교환하고 한층 더 죽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게 가능한 일이여? 그 양키 놈들이 뭣 하러?“

”그러게 말이야. 그 코쟁이 놈들이 대체 무슨 득을 본다고? 다 개소리 아니야? 박 씨, 다른 이야기는 없어?“

”그게···.“


박 씨가 더벅머리를 긁적이며 세상에서 아무도 아는 바 없는 비밀을 알려 주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김 씨 말로는 배경석이 안 보인 지 꽤 됐다고 하더군.“


*


강태수는 요즘 집보다 미군정에 더 자주 들렀다. 반팔 제복을 입은 알렉스가 매번 강태수를 배웅하러 나오는 모습은 이제 미군정의 누구에게나 익숙한 일이었다. 강태수가 원조 쌀의 담당자라는 게 공표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강태수를 발견한 알렉스가 클락슨을 눌렀다.


빠앙!


”오, 미스터 강!“

”알렉스.“

”함께 퇴근하려고 기다리고 있었어.“


알렉스의 시선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강태수의 가방에 향했다가, 다시 올라왔다. 하지만 강태수는 느낄 수 있었다. 이미 몇 번이나 있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어디로 갈 예정이야, 미스터 강?“

”오랜만에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고, 우리. 한동안 서로 일만 했잖아.“


강태수는 이제 알렉스 앞에서 도통 긴장하는 법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알렉스와 강태수는 대등한 입장에서 ‘거래’를 하는 사이였다. 강태수는 알렉스에게 어디로 가야 할지 익숙하게 길을 알려 주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배경석의 집이었다.

강태수는 너른 한옥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배경석의 넓은 한옥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이 하나같이 강태수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알렉스는 강태수와 고용인들이 주고받는 인사를 기민하게 지켜보았다.


”식사는 안채에 준비해 두었습니다.“

”고생했어요. 알렉스, 들어가지.“


알렉스는 익숙하게 걸음을 옮기는 강태수를 따라갔다.


드르륵.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만찬이 가득한 식탁과 의자만 있었을 뿐이었다. 강태수는 익숙하게 자리를 잡고, 알렉스에게 손짓했다.


”얼른 앉아, 알렉스. 자네가 아직 좌식을 불편해하는 게 기억나서, 한 번 준비해 봤어.“

”미스터 강, 이게 다 뭐야?“


알렉스는 이 상황을 전부 설명해 달라는 말이었으나, 강태수는 모른 척 음식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식사가 이어졌다.


툭.


강태수가 먼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우리가 의도한 대로 소문이 나고 있던데, 알고 있어?“

”미스터 강에게 여러모로 고마움을 느끼는 중이지.“


강태수는 배경석, 이준철, 박창수까지 이 셋을 정해 알렉스에게 미리 일러 주었다.


‘절대 동시다발적이어서는 안 되고, 차근차근 순서를 밟아야 해. 그래야 나중에 결국 하나가 되어 터지는 법이니까.’


강태수가 셋을 목표로 한 이유에는 공산주의자들의 영향이 컸다. 공산주의자들은 입을 모아 배경석, 이준철, 박창수를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소련도, 미군도 개입하고 싶지 않아 했다. 그래서 강태수는 묘수를 냈다.


‘알렉스, 오직 ’임금‘에 대해서만 그들을 문책하라고 해. 그들이 광복 전에 어떤 사람이었든, 그런 건 상관없어. 사람들이 멋대로 생각하게 둬야 해. 추징금 소문은 최대한 틀어막는 게 좋을 거야. 미군이 돈을 위해 움직인다는 말을 듣기 쉬우니까 말이야. 미군이 개입했다는 소문은 내가 사람을 써서 내도록 하지.’


강태수의 생각대로 노동자들은 밀린 돈을 전부 받았다는 사실에 기뻐했고, 자연스럽게 소문은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미스터 강, 미스터 강이 이 일을 통해 얻는 건 뭐야?’


알렉스가 그렇게 물었을 때, 강태수는 웃음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지금의 강태수도 그때와 같은 얼굴이었다. 알렉스는 이 집에 들어서고부터 느꼈던 위화감을 해결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미스터 강, 내내 궁금했던 건데. 그럼 배경석은 어떻게 된 건지에 관해서 말이야.“

”안 그래도 그 문제 때문에 자네와 이곳으로 온 거야.“


스윽.


강태수는 일어나 등을 대고 있던 벽을 짚었다.


드르륵.


금방 문이 열리고, 밑으로 뻗은 계단이 나타났다. 알렉스가 어느새 옆에 다가와 있었다.


”내려가지.“


지하실은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냉기가 가득했다. 한참 동안 말없이 계단을 내려갔을까, 옅은 신음이 들려왔다. 강태수는 품에서 성냥을 찾아 벽에 붙은 등에 불을 붙였다.


타닥.


그들이 있는 곳은 된 지하 감옥 같은 공간이었다. 통 시멘트로 된 벽에서 음습함이 느껴졌다.


”네 이놈!“


한쪽 구석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금방 노기에 찬 목소리가 밀실을 울렸다.


철컹!


배경석은 얼굴에 쥐어 터진 흔적들이 가득했다. 배경석은 오물이 그득 붙은 옷차림이었다. 감옥 안에 용변을 해결할 곳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철창을 붙들고 강태수를 노려보았다.


”언제까지 이, 이 나를 이곳에 가둘 수 있을 것 같으냐!“


강태수는 말없이 날짜를 가늠했다. 배경석을 이 지하 감옥에 가둬 둔 지 보름 정도가 지났다. 저택의 고용인들 중 배경석에게 호의가 남아있는 사람들은 없었다. 배경석이 이 감옥에 갇혀 있음을 밖의 누군가에게 알릴 정도의 호의 말이다.

그들은 전부 억울하게 잘렸다가, 배경석의 입김에 다른 일조차 구하지 못하고 주린 배를 안은 채 떠돌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그 고용인들은 강태수에 의해서 다시 일을 찾았다. 그들에게 강태수는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강태수의 말대로 죽지 않을 정도의 물과, 음식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것들을 배경석에게 주고 있었다.

숨이 끊기지 않을 만큼만.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거냐!“


하지만 보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배경석은 아직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강태수는 바닥에 흩뿌려진 채 썩어 가는 말간 죽을 보았다.

지하실에 음식이 썩는 냄새와 배경석에게서 나는 악취가 가득했다. 내내 상황을 살피던 알렉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강태수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입을 열었다.


”아마도, 평생이겠지.“

”네 이노옴! 내가 누군지 아느냐!“


쾅!


강태수는 강한 힘으로 철창을 움켜쥐며 배경석의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림자가 진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온기도 보이지 않았다.


”네놈이 누군지 안다. 모를 리가 없지. 배경석, 아직도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것 같아 친히 하는 말이다. 항상 가두기만 하다가, 당신이 거기 갇혀 있는 기분은 어떻지? 거기서 죽어 갔던 사람들이 이제 조금은 이해되나?“


배경석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죽, 죽다니! 그게 무슨! 난 모르는 일일세!“

”이정, 김진석, 홍원후, 우재룡, 지복준. 네놈이 여기서 죽인 사람들의 이름이지. 더 읊어 줄까?“

”나, 나는 죽이지 않았어!“


강태수가 이름들을 하나하나 읊는 내내 배경석은 고개를 흔들었다. 강태수가 말한 이름들은 모두 밀고를 당해 죽은 독립군들이었다. 배경석은 이 지하 감옥에서 은밀하게 일본 경찰들과 거래를 지속해 왔다.


”입 닥쳐! 독립군들을 이곳에 가두고, 일본 놈들에게 넘겨왔던 사실을 모를 줄 아는가!“


강태수는 광복 후 현재, 배경석이 우익들과 함께 공산주의자들을 목표로 물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언제 강철수가 그들의 목표가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강태수의 낮은 목소리가 악취를 뚫고 울렸다.


”너는 오늘 이곳에서 죽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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