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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공장 님의 서재입니다.

격동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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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창작공장
작품등록일 :
2021.11.22 10:37
최근연재일 :
2022.03.23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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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8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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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시대 시즌1 - 9화

DUMMY

트럭에 묘목을 가득 싣고 온 흙투성이 남자가 물었다. 강태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제 꽃이 얼마 남지 않은 나무들을 가리켰다.


“저 벚나무들을 다 베고, 그곳에 무궁화를 심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사장님. 저 나무들을 전부 다요? 보기 드물 정도로 하나같이 관리가 아주 잘 됐습니다. 지금도 정원 조경이 아주 멋있고요. 아깝지 않으세요? 마당이 넓으니 무궁화는 다른 곳에 심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벚나무를 확인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인부의 얼굴에 오히려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만큼 정원의 나무들은 상태가 아주 좋았다. 상관없으니 모두 베어 버리라고 말하려던 강태수는 잠시 고민하다 생각을 바꾸었다.


“원하신다면 전부 가져가도 좋습니다. 대신,”


인부의 얼굴에 물음표가 떴다. 강태수는 웃으며 이야기를 이었다.


”공짜는 아닙니다.“

”하하! 당연한 이야기 아닙니까! 이렇게 훌륭한 나무들인데요! 값을 받지 않는다면 제가 도둑놈이 될 정도로 말입니다.“


몇 번 더 대화가 오간 후, 인부는 사람들을 더 불러 모으러 갔다. 나무뿌리가 상하지 않게 들어낸다면 비싼 값에 팔 수 있을 것이었다.

저 강태수라는 남자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로서는 횡재였다. 남자가 내건 ‘조건’도 그에게는 그닥 어렵지 않았다. 인부는 노동자들이 일을 구하는 장소로 향하며 조금 전 강태수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조건은 제게 소문을 하나 가져다주시는 겁니다.’

‘소문이요?’

‘국밥집 오 사장님께 듣기로는 사장님께서 발이 아주 넓으시다고 하던데, 최근 노역장에 새로 나타난 청년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저와 비슷한 키에, 왼쪽 동공 바로 밑에 점이 있는 강철수라는 청년입니다.’

‘강철수라 하면은···?’


인부는 비슷하고 익숙한 이름이 들리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태수는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겸연쩍게 웃어 보였다.


‘예, 부끄럽지만 제가 찾고자 하는 이가 제 동생입니다. 며칠 전 집을 나갔는데, 제 능력으로는 소식이 닿질 않더군요. 동생의 소문만 가져다주신다면, 이 벚나무들을 모두 드리겠습니다.’


*


강철수가 떠난 지 약 한 달이 지났다.

강태수는 거실 창문을 통해 키 큰 나무들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 똬리를 튼 무궁화들을 바라보았다. 아직 개화 시기는 아니었으나, 이삿짐을 정리할 때 강철수가 이야기한 것처럼 금세 필 터였다. 강태수는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돌아올 때가 되지 않았느냐, 철수야.“


한숨을 내쉰 그는 다시 눈앞의 책에 집중했다. 두꺼운 영어사전이었으나, 이미 반으로 얇아진 상태였다. 무서울 정도로 집중하던 강태수가 손을 들어 거침없이 종이를 찢었다.


찌이익!


강태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잘 찢긴 종이를 입 안으로 구겨 넣었다.


꿀꺽.


강태수는 몇 시간 동안 자리에 앉아 외울 때마다 사전을 한 장씩 찢어 먹었다. 다시는 잊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종이를 씹어 삼키는 그의 얼굴이 결연했다.

어느새 저녁이었다.


탁.


사전을 덮은 강태수가 몸을 일으켰다. 강태수는 ‘형제상회’에 직원을 구해 놓고, 한 달 동안 계획만을 위해 움직였다. 비로소 때가 되었다.

강태수는 겉옷을 걸치며 인부가 가져다준 소문들을 상기했다.


‘강철수 군은 딱히 신원을 밝히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노가다나, 잡일을 하며 지낸다고 합니다. 제일 최근 일했던 곳에서 임금을 받지 못했다고 하네요. 강 사장님 말씀대로 알아는 보았으나, 찾아가지는 않았습니다.’


빈손으로 나갔으니, 제일 최근 일했던 곳에서 임금을 받지 못했다면 낭패를 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강태수는 동생을 걱정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번듯한 차림으로 가방을 들고 미군정청으로 향했다.


”미스터 강! 오랜만이군. 잘 쉬었어?“

”덕분에 좀 나아졌지. 알렉스는? 잘 지냈어?“

”나야 뭐, 매일이 똑같지.“


알렉스는 씨익 웃으며 안부를 물었다. 강태수도 그 미소에 맞장구쳤다. 미국에서 원조 쌀이 들어오기 전, 한 달 동안 휴식을 가질 것이라고 알렉스에게 미리 언질을 해 둔 참이었다. 강태수는 매일을 치열하게 보냈지만 그 사실을 밝힐 생각은 없었다.


”자네와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있어. 시간 괜찮아?“

”그럼! 어제 미스터 강이 온다는 연락을 받고, 시간도 다 빼 뒀어. 지금 바로 나가도 돼.“


강태수는 짐을 챙기려는 알렉스를 말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전에 할 말이 있어, 알렉스.“

”음, 중요한 일이야?“

”앞으로 우리 관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이야기가 될 거야.“


털썩.


알렉스는 소파에 앉아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미스터 강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걱정되는데.“

”하하. 알렉스 자네가 손해를 보는 일은 없으리라고 맹세하지.“


‘손해’라는 단어가 알렉스의 흥미를 끌었다. 강태수는 알렉스가 타인으로 인해 피해를 입는 상황을 극히 꺼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강태수는 준비한 이야기를 막힘없이 자연스럽게 꺼냈다. 진실한 표정을 꾸미는 것도 잊지 않았다.


”부끄럽지만 자네한테 이미 털어놓았던 대로, ‘그날’ 이후 철수와 연락이 닿지 않았어. 그러다 최근에 소식을 알게 되었지.“

”오! 그게 정말이야? 잘됐군, 미스터 강! 내내 동생을 찾아다녔잖아.“

”고마워, 알렉스. 하지만 좋은 소식만은 아니야. 철수가 최근에 완공된 ‘명동상가’ 노역에 있었는데, 거기서 일한 노동자들이 전부 급여를 받지 못했다고 하더군.“

”흐음.“


알렉스가 미간을 좁혔다. 강태수의 진정한 요구가 무엇인지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리틀 강을 찾고, 받지 못한 임금 역시 해결해 달라는 건가?’


강태수는 알렉스의 얼굴을 한 번 확인한 후 금방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야, 알렉스. 나는 미군이 이 일로 ‘이미지’를 챙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미지?’“


알렉스는 자신의 예측과는 다른 이야기가 나오자 솔깃했다. 더군다나 미군의 이미지라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알렉스는 미군이 곧 미국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강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명동상가’의 주인은 ‘배경석’이라는 자인데, 광복 전 ‘일국회’의 핵심 간부 중 하나였어.“

”일국회? 그게 뭐지?“

”친일파가 만든 ‘소셜 클럽’ 중 하나야. 표면적으로는 해산됐지만, 아직도 그들이 실권을 잡고 있는 곳들이 많다고 하더군.“

”음, 그렇군.“

”나는 이 일이 나와 철수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오히려 ‘진실’을 알릴 기회라고 봐. 다수의 조선인들이 외면하지만, ‘미군은 조선의 편이다.’라는 진실 말이야.“


알렉스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먹히고 있군.’


강태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바로 말을 이었다.


”알렉스 자네도 알 거야. 공산주의자들은 친일 청산을 주장하지. 그리고 실제로도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대개 친일파야. 그러니 우린 이 일로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어.“


톡, 톡.


강태수는 고뇌하는 표정으로 손끝을 세워 테이블을 두드리다 겨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 일에는 알렉스 자네가 아니라 다른 인물이 행동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왜?“

”그들은 의심이 많거든. 그리고 알렉스 자네는 이미 얼굴이 꽤 알려져서, 자네가 전면에 드러나면 그들은 다른 의도가 있다고 오해하기 쉬울 테고. 방법은 두 가지야.“


강태수가 주먹을 쥔 채 손을 뒤집었다. 그러고는 말에 맞춰 검지와 중지를 하나씩 차례대로 폈다.


”첫 번째, 미군이 ‘명동상가’에 직접 감찰 가는 것. 두 번째, 배경석에게 압력을 넣고 ‘친일파의 임금 체불을 미군이 해결했다’는 소문을 내는 것. 사람들의 입을 이용한다는 사실은 변함없어. 다만 어느 방법이든 미군은 이득을 얻어낼 수 있어.“


알렉스는 이미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것 같은 눈을 연거푸 번득였다. 강태수는 그런 알렉스에게 여유로운 표정으로 마지막 한 방을 날렸다.


”앞으로도 이런 일들이 있을 거야. 내가 이번 일로 흥미가 좀 생겼거든. 내가 ‘흥미’를 느낄 때마다 자네에게는 다른 보상이 하나 더 있을 거고.“

”나에게?“


툭.


강태수가 소파 앞 테이블 위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알렉스는 가방을 열어 안을 확인했다. 그 안에는 알렉스도 본 적 있는 나카무라의 금괴 더미와 달러 뭉치가 있었다. 강태수는 고개를 든 알렉스와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었다.


”내가 주는 선물 말이야.“


*


강태수와 알렉스의 만남 후 보름이 지났다.

땀내가 가득한 작은 방에서 이곳저곳 헤지고, 기운 옷을 걸치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강철수는 옷을 펄럭이며 바람을 만들었다.


”이봐. 자네는 이 바닥하고는 영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 자네 같은 샌님이 이 노가다 판에 어쩌다가 들어왔어?“


강철수가 노가다를 시작한 첫날부터 한 달 반 동안 수없이 들은 질문이었다. 강철수는 웃으며 대답했다.


”먹고 살려다 보니···.“

”쯔, 쯔. 불쌍하군. 고아야?“

”어릴 적에 두 분 다 돌아가셨습니다.“


작은형의 마지막 표정이 떠올랐지만, 강철수는 애써 모른 척했다. 그때 누군가가 나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소식통이나 다름없는 박 씨였다.


끼이익!

쾅!


”어이, 강 씨 청년! 소식 들었는가?“

”박 씨 아저씨! 오랜만입니다. 무슨 소식 말입니까?“

”거, 왜! ‘명동상가’에 임금 못 받은 사람들 오늘 저녁에 명동상가 앞으로 모이라던데? 드디어 돈 주려나 봐!“

”그게 정말입니까?“


며칠째 끼니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피로가 가득했던 강철수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그렇다니까! 김 씨가 가져온 소식이니 확실할 테지. 이미 다들 거기에 가 있대. 우리도 얼른 가자고!“


강철수는 노동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방에서 박 씨와 함께 빠져나왔다. 그의 행색은 누가 보아도 좋지 못했으나,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조금 이상하긴 해.“

”예? 왜요?“

”배경석 그 자식이 이렇게 순순히 나올 리가 없잖아? 그놈이 어떤 놈인데. 아, 강 씨 자네는 나이가 어리니 잘 모르겠군. 그놈이 광복 전에도 정말 악질 중에서 제일 악질이었어. 광복 후에도 사람들 종처럼 부려먹는 건 똑같지만, 독립군들도 전부 밀고했다고. 쯧, 쯧. 그놈 때문에 죽은 독립군이 한둘이 아니야.“


강철수는 혀를 차는 박 씨 옆에서 기억을 되짚었다.


‘배경석이라면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 정말 야비하게 생겼었지. 우리말보다 일본어를 더 많이 쓰고. 그런 인간이 어떤 연유로 갑자기 밀린 임금을 지급한다는 거지? 밀린 게 이번뿐이 아니라고 하던데.’


조금 고민하던 강철수는 박 씨에게 질문을 던졌다.


”박 씨 아저씨, 그럼 혹시 명동상가 이전에 밀린 임금들도 지급한답니까?“

”어잉? 그걸 강 씨 청년이 어떻게 알았어?“


박 씨는 군데군데 구멍 난 조끼에서 낮에 피우고 반쯤 남은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


타닥!


”후우. 꿀맛이군. 강 씨 청년 말이 맞아. 오늘 우리뿐만이 아니라, 임금도 주지 않고 내쫓았던 고용인들까지 불렀다고 하던데? 자택 고용인들이 얼마 전에 반은 넘게 쫓아냈거든. 노망이 났나? 아니면 뭐, 죽을병이라도 걸린 건가? 어느 쪽이든 우리한테는 좋은 일이지. 하하! 드디어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려나 보다.“


박 씨는 밀린 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뛸 듯이 기뻐했지만, 강철수는 고뇌했다.


‘분명히 뭔가가 있다.’


”얼른 가자고! 줄이 길 테니까 말이야!“


박 씨의 재촉을 따라 명동상가 앞에 도착하자, 예상했던 대로 적지 않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허이고, 아직 세 시밖에 안 됐는데 사람이 이렇게 많네. 좀만 늦었으면 오늘 못 받았을 뻔했어.“


차례를 기다리다 보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강철수와 박 씨가 봉투에서 돈을 꺼내 금액을 확인했다. 명동상가에서 인부를 구했을 때 처음 제시한 금액이 정확히 들어 있었다.


”와, 긴가민가했는데 정말이었군.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저놈이··· 괜히 나중에 무슨 일에 휘말리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도 돈이 다 떨어졌었는데 한동안은 걱정 없겠어요.“

”이런 날엔 막걸리를 마셔 줘야 하는데! 강 씨 청년도 오늘 술 한 잔 어때?“

”하하. 저는 괜찮습니다.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에이, 아쉽네. 그럼 김 씨를 찾아야겠구만.“

”네, 다녀오세요.“


강철수는 박 씨와 헤어져 방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철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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