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임제 님의 서재입니다.

음영잔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임제
작품등록일 :
2012.05.15 07:19
최근연재일 :
2012.05.13 07:04
연재수 :
35 회
조회수 :
1,022,875
추천수 :
7,844
글자수 :
212,785

작성
12.04.22 07:07
조회
27,202
추천
275
글자
21쪽

23

DUMMY

장내는 언제부터인가 묘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자신과 서문진철만이 깨닫지 못한 고요.

냉무상과 다른 한 명의 무인이 일어선 채 한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표일구를 부축하며 서 있는 정우태였다. 풍운각의 무인들 또한 냉무상과 정우태를 번갈아 바라보며 영문도 모른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산동남검 정우태. 자네를 이런 곳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고요함만이 흐르던 장내에 냉무상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부축하고 있던 표일구를 천천히 빈 의자에 내려놓은 정우태가 허리를 꼿꼿이 폈다.

“저 역시 이런 곳에서 냉무상 선배를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마음속에 고통이 남아있던 탓일까. 언제나 넉넉한 인상이던 정우태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냉무상과 함께 정우태를 노려보던 젊은 사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비룡방이 봉문을 깬 것이냐! 네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이냐!”

삼십대 초반 쯤 되었을까. 호리호리한 체격과 산발한 머리, 날카로운 눈매를 한 사내는 풍운각의 무인 구요서. 태산파 출신이었다.

“구요서, 오랜만이구나. 비룡방은 내가 떠난 이후 봉문을 했다들었다. 이미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무인된 자로서 수치를 모르는 구나, 네가 소사형과의 비무에서 패했기 때문에 네 사문이 봉문을 했는데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니.”

“너는 내가 소흥기에게 패했다고 생각하느냐?”

정우태의 안색이 어느새 평온을 되찾고 있었다. 입가에는 가벼운 미소마저 감돌았다.

“네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구요서가 평정심을 잃은 듯 소리를 질러댔지만 정우태의 표정은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냉무상 선배, 선배도 내가 소흥기에게 패했다고 생각하시오?”

“정우태. 네가 소사질에게 패했다는 것은 산동의 모든 무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걸 부정할 셈이냐?”

“정녕 그렇게 생각하시오?”

한층 더 차분하게 가라앉은 정우태가 재차 질문을 하자 냉무상이 당황한 듯 조금 더듬거렸다.

“그……,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게냐?”

“소흥기는 나와의 비무가 끝난 뒤 지금까지 폐관수련 중이라고 들었소. 그가 수련을 끝내고 나온다면 직접 한 번 물어보시오.”

말을 마친 정우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이 뒤돌아서서 표일구를 들쳐 업었다. 그때였다.

“무례하다!”

챙!

어느새 검을 빼어 든 구요서가 정우태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하지만 다가선 속도만큼이나 황급히 뒤로 물러서야 했다. 불쑥 튀어나온 시커먼 검집이 그의 앞을 가로막아선 것이었다. 육전호의 검이었다.

“네놈이 지금 나를 막아선 것이냐?”

잠시 어리둥절한 모습이던 구요서의 두 눈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와는 반대로 진작부터 구요서와 냉무상에 대한 불쾌함으로 차오르던 육전호의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고 있었다.

“싸울 의사가 없는 이의 등 뒤에서 검을 드는 것은 무례하지 않은 것이오?”

육전호의 음성이 울려 퍼지자 구요서의 낯빛이 붉어졌다. 지켜보던 풍운각의 무림인들 중에도 고개를 끄덕이는 이가 있었다.

냉무상이 질책의 의미를 담은 눈빛으로 구요서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실수를 자각한 구요서가 입술을 깨물었다.

“너, 너는…… 내가 저자를 암습이라도 하려 했다는 말이냐?”

“그건 모르겠습니다. 다만, 나는 우태형님이 걱정되어 나선 것뿐입니다.”

육전호의 대답은 듣는 이에 따라 그 의미가 애매모호했다. 하지만 구요서에겐 자신이 정우태를 암습하려 했다는 의미로 들렸다.

이 일이 무림에 소문이라도 난다면 자신은 물론 태산파에도 부끄러운 일이 될 터였다. 스스로 깔끔하게 마무리를 지어야했다.

상대는 낭인들이 주류인 내원 경비단원. 게다가 이제 겨우 이십대 초반의 어린나이였다. 냉무상을 바라보았다. 그의 고개가 희미하게 끄덕였다. 이제 모든 일은 자신이 처리해야 했다. 서서히 흥분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길게 심호흡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해 한 순간 검을 들었다만, 네 놈이 나를 등 뒤에서 암습이나 하는 흑도의 무뢰배 취급을 하는구나. 명예를 태산처럼 여기는 사문의 법도에 따라 태산파의 제자 구요서가 네놈에게 비무를 청한다!”

구요서의 갑작스런 비무 신청에 장내에 있던 무림인들이 술렁거렸다. 술을 마시며, 혹은 늦은 저녁식사를 하며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구경을 하던 손님들이 황급히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육전호 또한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기에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정우태가 다가왔다. 수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전호야, 나 때문에 너까지 곤란을 겪게 되었구나. 내가 구요서에게 사과를 할 터이니 여기서 그만 끝내도록 하자.”

육전호는 고개를 저었다. 한참이나 어린 구요서에게 수모를 당하면서도 참아야하는 정우태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 모습 속에서 무당파의 문도들에게서 받은 모욕을 참아야만 했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형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육전호의 단호한 표정에 정우태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구요서는 비무를 핑계로 너를 죽여 자신과 태산파의 위신을 세우려는 것이다. 나는 명예나 위신 같은 허울은 비룡방을 떠나오며 이미 버린 몸. 고개를 숙인들, 무릎을 꿇은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

“형님이 구요서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은 제가 구요서에게 무릎을 꿇은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육전호의 눈빛에서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음을 깨달은 정우태가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구요서가 자신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가 발산하는 살기에 온 몸에 전율이 일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육전호가 비무 요청을 받아들이자 구요서의 입가에 미소가 걸리다 멈췄다.

“무뢰배는 네 놈이었구나. 네 놈은 사문도, 사부도 없느냐, 아니면 나와 태산파를 업신여기는 것이냐!”

구요서의 외침에 육전호는 잠시 다른 무인들 틈에 서있는 일광과 세광을 바라보았다. 슬며시 고개를 돌려 자신의 시선을 외면하는 일광과 당황한 모습으로 자신을 보는 세광이 보였다. 미련 따위는 없었다.

“무창 금성무관 출신의 육전호입니다.”

또다시 장내가 술렁거렸다. 구요서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걸렸다. 진한 미소였다.

다른 무인들 틈에서 팔짱을 낀 채 상황을 주시하던 냉무상이 앞으로 나섰다.

“아무래도 장소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 후원이 어떠하냐?”

구요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냉무상과 함께 계단을 내려가자 남아있던 풍운각의 무인들이 그 뒤를 따랐다.

육전호는 자신의 앞을 지나 계단으로 향하는 풍운각의 무인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서문진철이 걱정스럽다는 눈빛을 보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지, 육전호 앞에서 잠시 멈칫 거리던 세광이 일광의 손에 이끌려 계단을 내려갔다. 무심히 지나가는 혁련기의 뒤에 서문영영이 어두운 얼굴로 서 있었다.

“육소협…….”

서문영영의 수심 가득한 얼굴을 보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달래주고 싶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한마디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허나 서서히 젖어가는 서문영영의 눈매를 바라보는 순간 가슴이 차가워졌다. 되돌리고 싶지 않은 과거였다. 젖은 눈빛으로 자신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다 마는 서문영영을 그저 무심하게 바라만 보았다.


“괜찮으냐?”

정우태가 다가와 계단을 내려가는 서문영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가 없구나. 태산파의 검법은 다른 도가의 검법과는 달리 매우 실전적이다. 초식의 변화는 많지 않으나 진퇴가 분명하며 가볍고 빠르다. 조심해야 한다.”

육전호의 머릿속에서 표홀하게 흐르던 종리연의 검이 그려졌다.

“네 유운검의 성취라면 동수는 어렵더라도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구요서는 우선은 네 목을 노릴 것이나 그것이 어렵다면 사족 중 하나라도 받아내려 할 것이다. 그전에 적당한 기회를 보아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서는 것을 생각해 보거라.”

“제가 알아서 판단하겠습니다. 형님.”

육전호는 침중한 안색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정우태를 위로하고는 계단으로 향했다.



마구간과 창고가 늘어 서 있는 옥소반점의 후원은 건물 여기저기에 매달려 있는 등불로 인해 어둠이 한걸음 비켜 서 있는 곳이었다.

십여 장 정도의 공간을 비워두고 풍운각의 무인들이 외곽에, 중앙에는 구요서와 육전호가 서로를 마주보며 서 있었다.

“시작해라.”

냉무상의 음성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구요서가 검을 빼들었다. 그런 구요서를 보며 육전호도 검을 들어 중단세를 취했다.

구요서의 투기가 느껴지자 온몸의 진기가 용솟음치며 반응을 했다. 검신이 부르르 떨리는 느낌이 전해져왔다. 가늘고 길게 심호흡을 했다. 거리는 삼 장. 한 번의 도약이면 충분했다. 그 순간이었다.

구요서의 신형이 순식간에 흐릿해지면서 짧은 바람소리가 일었다. 실전적인 검을 추구하는 태산파의 적전제자다웠다. 고수가 하수에게, 선배가 후배에게 선수를 양보하는 관례는 구요서에겐 허례일 뿐이었다.

대기가 둘로 찢어지면서 격한 파동이 일었다. 어느새 구요서의 검이 천지를 가르는 듯 매서운 기세로 자신의 머리를 향해 내리쳐오고 있었다. 일격필살의 의지를 검에 담고 있었다.


장내는 두 사람의 비무 준비로 인해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지만 냉무상은 잠시 고민에 빠져 있었다.

내원주인 독심수사 강수명 때문이었다. 육전호가 죽는다면 필시 구요서를 소환해서 조사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그것이 정당한 비무과정에서 일어났다 해도.

그만큼 무림맹의 내원과 외원 사이에는 알게 모르게 알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결국 비무 후의 일들을 원만하게 처리하는 것은 풍운각의 부각주인 자신의 일이었다. 더구나 구요서는 자신의 사질. 태산파를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이제 막 육전호를 향해 몸을 날리는 구요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구요서가 먼저 선공을 취하자 풍운각의 무인들과 함께 지켜보던 냉무상은 가슴이 뜨끔거렸다. 실전적인 무도를 추구하는 태산파의 제자다운 자세였지만 아쉬웠다. 어차피 육전호의 목을 취할 거라면 선수는 양보했어야 했다. 여러 명문의 젊은 문도들이 지켜보고 있는 자리기에 더욱 그러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시선을 고정시켰다.

사나운 기세를 몰아 내리치는 구요서의 일검을 육전호가 검을 들어 막아서고 있었다. 하지만 그 대응이 평범했고 빠르지도 않았다.

구요서는 정우태와 비무를 했던 소흥기의 사제였다. 태산파에서 심혈을 기울려 키우고 있는 소흥기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 내력이나 무공수준은 삼 년 전 폐관수련에 들어가기 직전의 소흥기와 비슷했다. 그런 구요서의 검을 육전호와 같이 허술하게 막다가는 검과 함께 목이 날아갈 것이 뻔했다. 동백꽃이 툭 떨어지듯이 또 한 명, 젊은 무인의 목숨이 차가운 검날 아래 스러져 가고 있었다.

‘헉!’

냉무상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구요서의 기세 앞에 위태롭게 대응하던 육전호가 몸을 슬쩍 틀며 검을 비껴가고 있었다. 평범한 동작이었지만 구요서의 날카로운 검을 생각한다면 지극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조금이라도 빨랐거나 느렸다면 구요서의 변초에 당했겠지만 너무나 절묘한 시점이었다.

목표물을 잃어버린 채 허공을 가른 구요서의 검풍에 후원의 땅바닥이 들썩거리며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제법이군.”

자신의 공세를 가볍게 피해버린 육전호를 보며 구요서는 다시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지체 없이 검을 찔러갔다. 쏜살처럼 빠르고 정확한 일격이었다.

육전호 역시 가볍게 몸을 틀며 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번갯불이 번쩍거렸다.

전력을 다해 명치를 노렸던 검이 육전호의 검에 의해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지자 구요서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육전호의 검이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태산압정(泰山壓頂)의 초식이었다. 앞뒤 분간할 겨를이 없었다. 재빨리 땅바닥으로 몸을 던지고 대여섯 번을 구른 뒤에야 위기를 벗어난 구요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강호의 삼류초식 따위에 땅바닥을 구른 자신의 모습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 초식이 태산압정이었으니.

“이, 이런 개…….”

무언가 뱉어야할 말이 있는 구요서였지만 입을 열다말고 다시 몸을 날려 뒤로 물러서야 했다. 육전호의 검이 그의 허리를 양단할 기세로 휘둘러왔기 때문이다.

[정신 차리지 못할까! 그게 네가 익힌 태산의 검이더냐!]

겨우 두 초식을 받는 동안 흐트러져 버린 머릿속을 울리는 전음성.냉무상의 격노에 구요서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방심이었다. 상대를 가벼이 여긴 까닭에 온몸에 쓸데없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중검(重劍)은 태산의 검이 아니었다.


육전호는 차분하게 가라앉는 구요서의 눈빛을 보며 느낄 수가 있었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태산파 본류의 검법이 구요서의 검에서 펼쳐지리라는 것을.

아니나 다를까.

구요서의 보법이 가볍고 빠르게 변해갔다. 그의 검 또한 상처 입은 짐승을 노리는 늑대의 그것처럼 기민하게 변화했다. 목을 노리는가 싶으면 어느새 옆구리를 찔러 왔으며 가슴을 노린다 싶으면 어느새 물러나 있었다. 종리연이 가끔 보여주던 검의 특징과 조금 닮아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많이 허술했다. 검을 잡은 육전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육전호와 구요서의 비무는 일 각(刻)이 넘어가도록 승부가 나지 않았다. 구요서의 검은 여전히 빠르고 날카로웠지만 그런 검을 꺾고 비틀거나 흘려보내는 육전호의 검은 여유가 있었다.

비무를 지켜보던 풍운각의 무인들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가기 시작했다. 구요서가 누구이던가. 이제 겨우 삼십의 나이였지만, 몇 년 이내에 절정의 초입을 바라보는 경지에 오를 것이라 예상되는 무인이었다. 더구나 태산파의 적전제자 중에서 소흥기를 제외하곤 겨우 십여 명만이 그와 비슷한 경지이거나 조금 높은 경지일 뿐이었다. 풍운각에서의 위치 또한 다르지 않았다. 비록 사문의 어른인 냉무상의 후광 있다고는 하지만 무공실력 만으로 구요서를 앞선다고 자신할 풍운각의 무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구요서가 일개 경비단원을 상대로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광과 함께 나란히 서 있는 일광 또한 굳게 입을 다문 채 비무를 지켜보고 있었다. 구요서는 자신도 쉽게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자였다. 그런 그를 육전호는 비교적 여유 있게 상대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유세명에게 사사했다는 무당의 유운검법은 사용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일광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비무가 길어지자 육전호는 걱정이 앞섰다. 아직까지는 내력이 받쳐주고 있지만 언제까지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구요서는 자신보다 내력이 앞서 있었다. 구요서의 검과 부딪힐 때마다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무리를 해서라도 승부수를 던져야 했다.

구요서의 검이 단전을 향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뒤로 물러서기가 무섭게 구요서가 몸을 날리며 검을 내리쳐 왔다. 왼쪽으로 틀며 구요서의 하체를 쓸어갔다.

쇳소리가 날카롭게 울려퍼졌다.

내력이 실린 구요서의 검에 부딪히자 속이 울렁거렸다. 욕지기가 치고 올라왔다. 그때 종리연과의 비무 중 한 장면이 떠올랐다. 한 걸음 물러선 구요서를 향해 삼재검법 중 선인지로의 초식을 펼쳤다. 그러자 구요서가 다시 내력이 실린 검으로 부딪혀왔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비무를 지켜보는 냉무상의 마음은 초조했다. 손쉬워 보였던 육전호가 구요서를 상대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더구나 육전호는 태산파의 무공을 상대로 여러 가지 잡다한 초식들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무수히 많은 실전을 겪은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무위였다.

그에 비하면 구요서는 실전경험이 부족했다. 어쩌면 구요서가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사문인 태산파에 크나큰 누를 끼치는 건 물론이며 자신의 지위까지도 위태로울 수 있었다. 무슨 수를 내야 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선인지로(仙人指路)를 펼쳐가던 육전호가 맞부딪혀 오는 구요서의 검을 피하기 위해 상체를 숙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백사토신(白蛇吐信)의 초식으로 바뀌었다. 땅바닥을 기던 뱀이 혀를 날름거리자 순식간에 구요서의 허벅지에서 피가 튀었다. 이어 크게 휘두른 비홍횡강(飛鴻橫江)의 한 수가 옆구리에 긴 혈선을 그려 놓았다. 물이 흐르듯 자연스런 변화가 순식간에 일어났다.

“크윽!”

구요서가 왼 손으로 옆구리를 움켜쥔 채 절룩거리며 물러섰다.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비무를 계속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부상이었다. 육전호는 계속 손을 써야하나 싶어 잠시 망설였다.

그 짧은 순간이 구요서에겐 천금 같은 시간이었다. 재빨리 몇 군데 혈을 짚어 지혈을 한 구요서가 다시 기수식을 취했다. 살기는 더욱 짙어져 숨이 턱턱 막힐 것만 같았다. 육전호는 틈을 내준 자신을 책망하며 다시 검을 들었다.


“냉무상 선배, 그만 멈추게 하는 게 어떻소?”

정우태가 차분한 눈길로 바라보자 냉무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겨우 삼재검에 태산파의 후기지수인 구요서가 당했다. 얼굴이 화끈거렸고 속이 쓰라렸다. 하지만 머릿속에선 눈앞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하고 있었다.

“으음…… 알았다.”

비무가 벌어진 건 이 각의 시간에 불과했지만 그사이 몇 년은 늙어버린 것 같은 냉무상이 힘겹게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눈길을 주었다.

“요서야, 그만하면 됐다.”

“사숙!”

“그만 두어라!”

육전호를 향해 강한 전의를 불사르던 구요서였지만 사문의 어른인 냉무상의 명령을 거부하진 못했다. 눈빛이 흔들리며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더니 들고 있던 검을 천천히 갈무리했다.

“내 언제고 오늘의 빛을 값을 날이 있을 것이다.”

적의에 찬 눈빛으로 잠시 육전호를 응시하던 구요서가 빠른 걸음으로 풍운각의 무인 사이를 헤치며 사라져갔다.

“정우태, 네 놈도 경비단에 있느냐?”

“그렇소.”

정우태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냉무상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소흥기가 폐관을 끝내면 네 놈을 찾을 것이다. 그리 알고 있어라.”

정우태를 노려보다 고개를 돌려 한참동안이나 육전호를 노려보던 냉무상이 발걸음을 옮겼다. 풍운각의 무인들이 천천히 뒤를 이었다.


“다친 데는 없느냐?”

“괜찮습니다.”

육전호의 몸을 이곳저곳 살피던 정우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수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겨우 두어 달을 못 봤을 뿐인데 무섭도록 성장 했구나…… 하지만 이제 태산파와 척을 지게 생겼으니…… 미안하구나.”

“제가 자청했고, 단지 비무일 뿐이었습니다. 너무 마음에…….”

육전호는 자책하는 정우태를 위로하다 시선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문영영이 후원을 나서다 멈춰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색이 한결 밝아져 있었다. 서문영영의 심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그저 바라만 보았다. 먼저 후원을 나섰던 혁련기가 다시 돌아와 서문영영의 손을 잡아끌었다. 육전호를 향하던 시선이 흔들리며 멀어져 갔다.


“저 아이를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

정우태가 말없이 서 있는 육전호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비무 결과에 대한 기쁨도 느낄 수 없었다. 스스로 놀랄 정도로 향상된 무공에 대한 성취감도 없었다. 왠지 모를 허탈함만이 가득했다.

“…….”

“지나간 과거일 뿐입니다.”



밤이 깊었다.

나흘 째였다. 오늘도 종리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해가 질 무렵이면 홀로 숲의 그 자리로 올라와 새벽까지 운기행공을 하고 무공을 수련했다. 허나 이제 몇 시진이 지나 날이 밝아오면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무림맹을 떠나야 했다. 가기 전에 종리연에게 고마운 뜻을 전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았다.

땀에 젖어 축축하던 무복이 차가운 바람에 식어갔다.

운기행공을 하려는데 갑자기 바람이 사그라졌다. 숲속을 떠돌던 바람소리가 잦아들자 온 세상이 깊은 물속에 잠긴 듯 고요했다.

고개를 들었다. 검붉은 기운이 어두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계절이 흐르고 있었다. 상서로운 기운이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운기토납법에 따라 내력을 주천시켰다. 들숨과 날숨을 따라 대기의 차디찬 기운이 단전을 휘감고 돌다 다시 대기로 환원하기를 거듭하였다. 새벽 찬 서리가 내리는 것처럼 천지간의 기운이 단전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한 번의 대주천을 끝내고 반개했던 눈을 뜨자 사방이 온통 하얗게 변해 있었다.

소리 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하늘에서 수만 송이 눈꽃이 어지러이 흩날리고 있었지만 세상은 적막하기만 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여명이 밝아올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눈 위를 거닐다 검수(劒穗)를 풀어 소나무 가지에 매달았다.

붉은 색 수실에 달린 비취옥이 어둠 속에서 천천히 흔들거렸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 흔적도 없는 흰 눈 위로 자신의 발자국만이 깊게 패이고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9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음영잔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감사드립니다 +90 12.05.15 20,677 24 -
35 34 +94 12.05.13 31,349 358 8쪽
34 33 +94 12.05.11 25,955 351 10쪽
33 32 +107 12.05.09 26,629 309 11쪽
32 31 +138 12.05.07 26,961 317 18쪽
31 30 +69 12.05.05 25,019 260 9쪽
30 29 +73 12.04.30 27,069 240 12쪽
29 28 +45 12.04.28 24,936 215 15쪽
28 27 +45 12.04.27 26,139 241 10쪽
27 26 +67 12.04.26 24,869 243 16쪽
26 25 +50 12.04.25 25,075 223 19쪽
25 24 +46 12.04.24 25,602 231 15쪽
» 23 +92 12.04.22 27,203 275 21쪽
23 22 +44 12.04.21 25,814 212 15쪽
22 21 +52 12.04.20 25,649 241 17쪽
21 20 +80 12.04.19 27,107 247 23쪽
20 19 +41 12.04.18 24,521 204 16쪽
19 18 +33 12.04.16 25,033 200 12쪽
18 17 +33 12.04.15 25,407 189 14쪽
17 16 +33 12.04.14 26,498 217 16쪽
16 15 +37 12.04.13 27,147 223 19쪽
15 14 +29 12.04.12 25,933 208 13쪽
14 13 +29 12.04.11 25,865 205 14쪽
13 12 +38 12.04.10 26,621 195 16쪽
12 11 +23 12.04.09 26,246 184 11쪽
11 10 +17 12.04.09 26,735 174 14쪽
10 9 +24 12.04.08 27,562 178 15쪽
9 8 +18 12.04.08 27,546 176 11쪽
8 7 +25 12.04.07 29,096 180 16쪽
7 6 +15 12.04.07 31,173 178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