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임제 님의 서재입니다.

음영잔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임제
작품등록일 :
2012.05.15 07:19
최근연재일 :
2012.05.13 07:04
연재수 :
35 회
조회수 :
1,022,424
추천수 :
7,844
글자수 :
212,785

작성
12.04.16 06:31
조회
25,020
추천
200
글자
12쪽

18

DUMMY

지붕과 담장의 기와 틈새에 자리를 잡고 있는 잡초들. 걸음을 방해하는 멋대로 자란 화초와 다듬지 않아 가지가 무성한 나무.

남궁성도가 머물고 있다는 곳은 이전까지 보던 남궁세가가 아닌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았다. 커다란 전각 여러 채가 있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것처럼 퇴락한 기운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앞서가던 시비가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작은 전각 앞에 멈추어 서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손님을 모셔왔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전각 정면의 문이 덜컥이며 열렸다.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남궁성도였다.

“형님!”

“왔구나. 들어오너라.”

며칠 동안 제대로 씻지 않은 듯이 추레한 몰골을 한 남궁성도가 손짓을 했다. 마치 어제 헤어졌다 오늘 다시 만난 것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육전호는 눈을 뜨고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기억 속에 있는 남궁성도는 언제나 단정한 모습이었다. 오랫동안 함께 했지만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은 처음이었다.

“연홍이는 가서 술상 좀 봐오너라.”

시비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자 남궁성도가 육전호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형님, 저는 형님이 이런 모습으로 계실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나 역시도 그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우선 앉아라.”

한쪽 벽면이 수백 권의 책으로 채워진 서재로 들어선 남궁성도는 육전호에게 의자를 내주고 자신도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덥수룩한 수염과 쑥대머리 사이로 언뜻 보이는 영준하면서도 강인한 외모는 예전모습 그대로였다.

“그래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무당산으로 간다는 얘기는 들었다만.”

남궁성도는 육전호의 질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육전호의 근황을 물었다.

“참 형님도…….”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무당장로 옥허자를 사부로 모신 일부터 무림맹 교육대 시절. 그리고 경비단에서의 활동까지. 육전호는 자신의 행적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얘기했다. 하지만, 서문영영과의 일은 부끄러운 마음이 있었는지, 본심은 숨긴 채 흑금단두와 연관된 것만 얘기했다.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듣던 남궁성도는 육전호가 얘기를 끝내자 장난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육전호를 바라보았다.

“처음 봤을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눈물만 짜던 열다섯 꼬마였는데 많이 컸구나. 첫사랑이더냐?”

“네? 무슨 말씀이신지…….”

육전호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웃고 있는 남궁성도의 눈빛을 피하며 얼굴을 붉혔다.

“하긴 열다섯에 군문에 들어 지금껏 전쟁터만을 전전했으니 네 인생도 참으로 측은하다. 이제야 연심(戀心)을 알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인 셈인가?”

어느새 남궁성도의 목소리가 독백을 하는 것처럼 낮고 작아졌다. 육전호의 마음도 그에 따라 가라앉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형님, 형님의 이런 모습은 정말 뜻밖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육전호가 침중한 기색을 한 채 입을 열자 남궁성도의 안색이 다시 밝아졌다.

“아무 일도 아니야. 다만, 전쟁터에서 죽었어야 할 내가 살아 돌아온 것이 문제라면 문제지. 하하하.”

예전 정위군 시절처럼 호탕하게 웃는 남궁성도였지만, 육전호는 그 웃음 속에 숨어있는 허탈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경비무사에게서 들었던 세가 내의 갈등이 그 이유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곧 여인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저 왔어요.”

“들어오너라.”

남궁성도가 대답하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더니 두 여인이 술과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 연홍이라는 시비와 십대 후반의 나이로 보이는 아름다운 소녀였다.

탁자 위에 술과 음식들을 차리고 나서 시비가 나가자 남궁성도가 입을 열었다.

“연아, 인사드려라. 언젠가 내가 얘기했었지? 육전호야.”

남궁성도의 말이 끝나자 연아라 불린 소녀가 허리를 숙였다.

“오빠한테서 얘기 들었어요. 남궁소연이라고 해요.”

“네, 육전호라고 합니다.”

육전호가 인사를 하고 의자에 앉자 남궁소연도 남궁성도의 옆자리에 앉았다.

“오빠한테 외부에서 손님이 찾아 오셨다기에 궁금해서 와봤어요. 그동안 오빠를 찾는 손님이라곤 아무도 없었거든요.”

아직 소녀티가 가시지 않은 남궁소연이 눈빛을 반짝거리며 육전호를 바라보았다.

“세가에서 배척당하는 나를 누가 찾겠느냐? 장례식이라면 또 모를까.”

“오빠!”

남궁소연이 눈을 흘겼지만 남궁성도는 태연히 육전호에게 잔을 내밀었다.

“전호야 한 잔 받아라. 그리고 연아는 그만 나가 보거라.”

축객령에 화가 난 듯 의자에서 발딱 몸을 일으킨 남궁소연이 한참동안 남궁성도를 쏘아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오빠는 이렇게 숨어 살면서, 매일 술이나 마시면서 그저 그렇게 살 건가요? 무림맹에 숨어 있는 아버님처럼 그렇게요? 이럴 거라면 차라리 그분들이 원하던 대로 전쟁터에서 죽을 것이지 왜 돌아오셨나요?”

남궁소연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지만 남궁성도는 아무 말 없이 잔을 비울 뿐이었다.

원하지는 않았지만, 남궁세가의 비밀스런 부분을 엿본 기분이 든 육전호 또한 입을 열 수 없었다.

눈물을 글썽이던 남궁소연이 육전호에게 목례를 하곤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좁고 가냘픈 어깨가 흔들리고 있었다.



“형님…….”

“…… 궁금하냐?”

“…….”

“내 아버지 남궁우를 사람들은 제왕검이라 부른다. 삼십 년 전에 벌어졌던 정마대전에서 얻은 별호지…… 나조차도 가끔은 궁금해. 나이 삼십이 채 안 된 청년의 무위가 어느 정도였기에 그렇게 칭했을까…… 사람들이 그러더군, 세가의 자랑거리이자 무림맹의 큰 자랑거리였다고…….”


그랬었다. 제왕검 남궁우는 정마대전 당시의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후기지수 중 가장 검공이 뛰어난 인물로 인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었다. 비견될 인물이라고는 화산파의 천하제일검 곡진과 현 무림맹주인 상관세가의 패왕검(覇王劍) 상관월, 혁련세가의 용비검(龍飛劍) 혁련광 정도였다.

무림맹에 속한 문파들이 정마대전에서 큰 피해를 보았고 더구나 상당수의 문파가 따로 의정회를 결성하며 무림맹을 탈퇴한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젊은 나이에는 갖추기 어려운 뛰어난 무공과 담대한 성품, 영웅다운 기개를 지닌 남궁우와 함께 강대한 세력을 유지했던 남궁세가 또한 절정의 시절이었다.

이런 남궁세가의 영화는 가주인 남궁무원이 쓰러지면서 빛을 잃기 시작했다.

정마대전에서 당한 부상의 후유증 때문에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면서도 세가를 굳건한 반석 위에 올린 남궁무원이 돌연 쓰러지자 세가는 곧 혼란에 휩싸였다. 가문을 승계할 이는 남궁무원의 장남인 남궁천이었으나 세가의 안팎에서는 차남인 제왕검 남궁우가 가주위에 오를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던 것이다.

남궁천은 동생인 남궁우와는 달리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해 가문의 무공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그 성품 또한 편협해 억울하게 고초를 겪은 세가의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때문에 세가의 상당수 젊은 무사들은 남궁우가 세가의 가주가 되길 내심 바라고 있었다.

병석에 누워있었지만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던 남궁무원은 세가의 미래를 위해 남궁우에게 가주위를 물려주려 했다. 그러나 적장자(嫡長子)가 가계를 승계한다는 전통의 가법을 들고 나온 장로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가주위의 승계문제로 인해 혼란스럽던 와중에 남궁무원이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치르고 탈상(脫喪)을 하고 난 뒤, 장로들에 의해 남궁천이 가주위에 오르자 세가에는 달갑지 않은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남궁우를 따르던 젊은 고수들이 세가의 한직으로 물러나야 했고, 무림맹의 여의각과 풍운각에 파견되어 있던 세가의 무인들이 모두 새롭게 교체됐다. 남궁우 또한 가주의 명에 의해 세가를 떠나 무림맹의 여의각으로 가야 했다. 남궁성도가 세상에 태어난 지 육 년 째 되던 해였다.


“그때가 아마 내가 열네 살 때였을 거야.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난 세가의 또래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며 글공부를 하고 무공을 익히고 있었어. 가끔 집에 오시는 아버지한테서도 무공을 배웠고. 그런데 어느 날 성문 아우가 내게 비무를 신청해왔어. 아무 생각 없이 응했지. 기본무공을 세가의 무공교두에게서 함께 배웠지만 성문 아우의 실력은 형편없었어. 단 몇 수만에 나가떨어졌지. 지켜보던 성진 형님이 화를 내며 달려들었지만, 나한테는 세가의 무인들에게서 전해 들었던 아버지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어. 상대가 아무리 가주의 아들들이라 해도 제왕검의 아들인 나로서는 양보를 할 수가 없었지. 치기 어린 마음에 손을 과하게 썼지…… 상당한 내상을 당해 몇 달을 누워 지냈다고 들었어. 그것 때문에 몇몇 장로들이 소가주에게 살수를 썼다며 내 무공을 폐하려 하더군. 아버지를 따르던 세가의 무인들이 중재에 나서지 않았더라면…… 나중에 알았지만, 그분들은 그 일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고…… 나 역시도 그일 이후로는 이곳에 갇혀 지내다시피 했어. 일 년에 두어 번은 발걸음을 하시던 아버지도 그 일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세가로 오시지를 않으셨지. 무림맹의 여의각에서 원로원으로 자리를 옮기신 것도 그때쯤이야. 나 또한 그렇게 근신하고 있다가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 가주와 장로들의 결정에 따라 정위군에 합류한 것이고…….”


밤벌레 울음소리가 창 밖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조용히 타오르는 촛불을 따라 벽에 비췬 두 사람의 그림자가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글쎄다. 세가 내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설령 있다 하더라도 다른 이들이 원하지 않을 테니…….”

“…….”

“너는 어쩔 작정이냐? 무림맹에 계속 남아 있을 것이냐?”

“계약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겁니다.”

“단지 그것뿐이더냐? 무공은?”

“네, 돌아가선 가족들과 함께 지내야죠. 무림에 남아있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무공은…… 가능한 한 계속 수련할 생각입니다.”

육전호의 대답을 듣고 있던 남궁성도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무공이 재미있더냐?”

“네.”

“네 얘기를 들어보니 고향으로 돌아간다 해도 무림을 영영 벗어나지는 못하겠구나.”

“무림과는 상관없습니다. 개인적인 수련일 뿐입니다.”

육전호의 부정에도 남궁성도의 미소는 점점 짙어져 갔다.

“알았다. 한 잔 받거라.”

조그만 술잔 안에서 호박색 액체가 넘실거렸다. 코를 자극하는 진한 술의 향기가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묘시 초.

희미하게 날이 밝아오고 있었지만 육전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벌써 한 시진을 침상 위에 앉아 운기조식에 힘을 쓰고 있었지만 마음과는 달리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아직 어젯밤에 남궁성도와 마셨던 술기운이 조금 남아 있는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남궁성도의 처지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운기조식을 취하는 데 방해가 되고 있었다.

육전호에겐 제왕검이 자신의 아들인 남궁성도에게 보여준 무관심도 이해하기 어려웠고, 남궁세가의 장로들과 가주의 행동도 이해하기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남궁세가와 제왕검 남궁우라는 천하에 부러울 것 없는 배경을 갖추고도 험한 세월을 살아온 남궁성도를 생각하자니 오히려 자신의 처지가 더 나아 보였다. 긴 한숨 끝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3

  • 작성자
    Lv.58 광무암무
    작성일
    12.05.23 10:42
    No. 31

    이당시 남궁세가의 장로들의 힘과 권한이 강했나보군요.. 안타깝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3 maru9
    작성일
    12.06.13 02:19
    No. 32

    장로들이 모자라는 가주를 밀어준 까닭은 정말 장자계승이 그렇게 중요해서 그랬을까?
    아마도 그들이 마음대로 요리할수 있는 가주가 필요했겠지요.
    남궁세가도 망조가 드는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마녀의솥
    작성일
    13.09.04 18:06
    No. 33

    잘 읽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음영잔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감사드립니다 +90 12.05.15 20,665 24 -
35 34 +94 12.05.13 31,334 358 8쪽
34 33 +94 12.05.11 25,933 351 10쪽
33 32 +107 12.05.09 26,618 309 11쪽
32 31 +138 12.05.07 26,948 317 18쪽
31 30 +69 12.05.05 25,005 260 9쪽
30 29 +73 12.04.30 27,057 240 12쪽
29 28 +45 12.04.28 24,926 215 15쪽
28 27 +45 12.04.27 26,130 241 10쪽
27 26 +67 12.04.26 24,857 243 16쪽
26 25 +50 12.04.25 25,060 223 19쪽
25 24 +46 12.04.24 25,589 231 15쪽
24 23 +92 12.04.22 27,181 275 21쪽
23 22 +44 12.04.21 25,805 212 15쪽
22 21 +52 12.04.20 25,643 241 17쪽
21 20 +80 12.04.19 27,084 247 23쪽
20 19 +41 12.04.18 24,506 204 16쪽
» 18 +33 12.04.16 25,021 200 12쪽
18 17 +33 12.04.15 25,386 189 14쪽
17 16 +33 12.04.14 26,493 217 16쪽
16 15 +37 12.04.13 27,133 223 19쪽
15 14 +29 12.04.12 25,925 208 13쪽
14 13 +29 12.04.11 25,853 205 14쪽
13 12 +38 12.04.10 26,610 195 16쪽
12 11 +23 12.04.09 26,237 184 11쪽
11 10 +17 12.04.09 26,727 174 14쪽
10 9 +24 12.04.08 27,555 178 15쪽
9 8 +18 12.04.08 27,534 176 11쪽
8 7 +25 12.04.07 29,085 180 16쪽
7 6 +15 12.04.07 31,162 178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