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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 님의 서재입니다.

음영잔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임제
작품등록일 :
2012.05.15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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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13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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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09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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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DUMMY

육전호가 정원을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세광이 남궁우를 향해 다시 허리를 숙였다.

조용히 걸음을 옮기던 육전호에게 뒤따르던 세광이 주저하며 말을 건넸다.

“저…… 그때 비무에서 보여 준 검법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삼재검법을 쓰기 전에 그…… 유운검법은 아닌 것 같던데…….”

“무당의 검법이 아닙니다.”

무뚝뚝한 육전호의 대답에 세광이 겸연쩍어 했다.

“그렇군요.”

그 후로 옥양의 전각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전각 안에는 옥양이 홀로 앉아 있었다. 다소 지쳐 보이는 모습이었다.

“오늘 자네한테 들은 그대로 사문에 보고하겠네. 아마 별 다른 징계는 없을 것이야. 하지만 언제고 또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사문에서는 반드시 자네를 징계하려 할 걸세.”

몰라서 저지른 실수는 용서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고개를 넘기엔 아직 이었다. 내친 걸음이었다. 언젠가 무당산을 다녀온 후부터 체한 것처럼 늘 가슴 한 구석을 답답하게 하던 의문을 풀어야했다.

“알고 싶습니다, 제가 그렇게 불편한 존재인지를.”

육전호의 질문에 한동안 말이 없던 옥양이 힘겨운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자네보다는 유세명이 불편한 것이겠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현진 도장께서 말씀하길, 유세명 대장군께서 관의 힘으로 무당의 무공을 강탈했다 하더군요. 사실을 알고 싶습니다.”

거듭된 육전호의 질문에 옥양이 허탈하게 웃었다.

“현진이 그렇게 말하던가?”

“…….”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하는지…… 다소 힘들고 긴 얘기가 되겠지만 자네가 외인도 아니고, 더구나 이젠 당사자가 되어버렸으니 일의 전후를 명확하게 밝혀야 하겠지.”

옛 생각을 하는 듯 잠시 눈을 감았던 옥양이 입을 열었다.

“삼십여 년 전 사천혈사가 끝나고 난 뒤, 어린 유세명이 입문을 했네. 당시 무당은 사천혈사의 후유증으로 무척이나 힘든 시기였어. 사문의 많은 어른들이 목숨을 잃었고 경제적으로도 무척이나 궁핍했었네. 그런 와중에 장차 황제의 자리에 오를 황태자와는 죽마고우이자 유력한 가문의 적장자가 무당에 입문을 했으니 사문의 어른들께서 크게 기뻐하신 건 당연한 일이었지. 속가제자임에도 불구하고 적전제자에게만 전수하던 비전 몇 가지를 아낌없이 베풀었네. 유세명은 기재였어. 또래의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었지. 대단했지.”

그 시절의 유세명을 떠올리고 있음인지 옥양의 얼굴에 넉넉하고 푸근한 미소가 흘렀다.

“시간이 흘러 지금의 천자께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유세명이 출사를 했네. 그리고 그 사이, 사문의 형편도 많이 나아졌네. 팔아버렸던 인근의 농토도 거의 다 다시 사들였으니. 유세명의 집안을 비롯해 몇몇 부유한 속가제자들의 가문에서 기부한 금전 덕을 본 셈이었지. 그런데…….”

옥양은 뭔가가 걸리는 듯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어느 순간, 화를 내듯이 몸을 일으키더니 창가로 다가갔다. 한참동안 창밖만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앉으면 눕고 싶은 게 사람 마음 아니겠나. 유세명의 입문을 계기로 곯던 배를 채웠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문도들이 몇 있었네. 오래 전, 전전대의 천자께서 소림과 무당에 친필 편액과 봉토를 하사하신 적이 있네만, 알고 있는가.”

“몰랐습니다.”

육전호의 무덤덤한 대답에 옥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세명이 입문했을 당시부터 몇몇 문도들 사이에는 또 다시 그런 황은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네. 그런데 유세명이 출사를 한 뒤, 일 년이 지나고 이 년, 삼 년…… 십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나도록 고대하던 천자의 황은은 없었네. 그리고 그 사이, 무림인들이 사문을 우러러 칭송하던 무림제일검문이라는 수식은 화산파를 가리키는 것이 되고 말았네.”

천천히 말을 이어가는 곡양의 목소리가 가늘게 흔들렸고 사이사이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선대에 이뤄놓은 명예가 당대에 이르러 끝도 없이 추락하고 있었지만 사문의 그 누구도 이를 자신의 탓이라 하지 않았네. 그리고 유세명에 대한 기대가 애증으로, 분노로 변한 것도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네. 자네를 향한 일부 문도들의 불편한 시선도 사실은 유세명에 대한 애증의 결과라고 보면 될 것이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무당파의 침체를 유세명 탓으로 돌리는 것인가.

육전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 지…… 어렵습니다.”

“모든 제의(祭儀)에는 희생물이 따르는 법 아니겠는가. 사문의 쇄신에는 공감했지만 자신의 어리석음을 직시할 수 없는 용렬한 자들이 밖에서 찾은 변명거리에 불과할 뿐이네. 그렇게 이해하게.”

옥양의 얘기가 이어지자 비로소 유세명과 무당파 사이에 얽힌 일들이 조금은 눈에 들어왔다. 품어왔던 의문들이 하나 둘 풀리고 있었다.

“하지만 무당의 모든 문도들이 그와 같은 건 아니라네. 유세명을 어릴 때부터 지켜봤던 이들 중에는 그의 공평무사한 성품으로 미루어 당연할 일일뿐이라고 평하는 이들도 많다는 걸 기억해두게.”

자신을 바라보는 옥양의 두 눈이 어떤, 알 수 없는 신념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였다.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이란 게 늘 완전하진 않은 법이었으니 사람에 따라 일의 전후와 본말이 전도되는 건 다반사였다.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속을 벗어나 장생불사를 꿈꾸며 수행한다는 이들에게 천자의 황은이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육전호의 의문에도 불구하고 옥양의 얘기는 이어졌다.

“자네의 경우를 얘기하자면, 유세명이 사문의 허락 없이 자네한테 유운검법을 가르친 것은 분명 청규에 어긋나는 짓이네. 하지만 유세명의 평소 성정을 아는 장문인과 몇몇 장로들은 그의 이런 행동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네. 무공이란 게 뭔가. 도를 얻거나 사람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수단 아닌가. 허울에 불과한 사문의 청규를 지키기 위해 다른 죄 없는 생명들이 헛되이 스러지는 것을 외면한다면 무공을 익혀야 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네. 무공을 목적으로 한다면 애초에 산골짜기 도관이 아니라 성시로 나가 무관을 열었어야 하는 일. 더구나 전쟁 중에 일어난 일이기에 사전에 허락을 얻기에는 불가능했을 터, 비록 나중이지만 그래도 사문의 허락을 구했으니 다행인 셈이지. 하지만 이런 점들을 깊게 헤아리지 못하고 유세명을 사문의 청규에 따라 파문시키라는 요구를 하는 장로와 문도들이 분명 있네. 그들은 장문인과 일부 장로들이 유세명을 감싸고, 파문이 아니라 징계에 그친 이유를 그의 신분과 배경에서 찾고 있지. 유세명 때문에 사문이 관에 굴복했다고 보고 있네. 장문인과 몇몇 장로들의 힘만으론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을 설득시키기가 쉽지 않다네.”

유세명이 징계를 받았다는 것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더구나 자신이 그 원인이었으니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징계라 하시면 어떤 징계를 말씀하시는 건지 궁금합니다.”

“이미 조정에 출사를 했고 더구나 병부의 수장인 이에게 무슨 큰 징계를 내릴 수 있겠나. 허락이 있기 전까지 사문 출입을 금한다는 게 전부이네.”

얘기를 하면서 스스로도 답답했는지 옥양이 긴 한 숨을 내쉬었다.

“다른 이들이 알게 되면 비웃을 부끄러운 얘기지만 자네를 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얘기할 수 있었네. 내 말 이해할 수 있겠나?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아들었습니다.”

표정을 보아하니 육전호가 자신의 뜻을 이해한 것 같았다. 옥양은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자네가 내 말 뜻을 알아듣는 것 같아 내 마음이 한결 편안하다네. 들어주어서 고맙네.”

“아닙니다. 당연히 제가 고마워해야 할 일입니다.”

겸양어린 육전호의 모습을 보며 옥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광에게 듣자하니 자네가 구요서를 그리 어렵지 않게 다뤘다고 하던데…….”

“운이 따랐을 뿐입니다.”

“허허, 세광의 무위가 그리 높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안목까지 나쁜 것은 아니라네. 너무 겸손해할 필요는 없네. 구요서, 그 아이는 태산파의 적전제자 중에서도 무공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어. 무당의 비슷한 또래 중에서도 그를 상대할 만한 제자는 그리 많은 편이 아니지. 그러니 이제 스물 둘, 겨우 약관에 불과한 자네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정말 놀라운 성취이네. 지금도 이럴진대 앞으로 십 년, 이십 년 후면 또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무당의 홍복이자 무림의 홍복이네, 홍복이야.”

“…….”

옥양의 웃음소리가 무척이나 시원스러웠다.


무당의 홍복이 되기를 바랐던 적이 있었던가.


눈을 뜨면 도산지옥(刀山地獄)이었고 시산혈해(屍山血海)였다.

내일을 생각하는 이가 있었던가. 꿈을 꾸는 자 있었던가.

아귀처럼 탐욕스럽게 무공을 익혔다. 모질고 사악하게 검을 휘둘렀다. 천자를 위한 것도, 무당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내가 가야할 길을 찾을 것이다. 내 길을 찾아 흔들림 없이 걸어갈 것이다.

육전호는 남궁우의 말을 끊임없이 뇌리에 새겨 넣었다.




해가 질 무렵.

숙소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조원들이 연무장을 가로질러 오는 육전호를 보자 황급히 육전호 주위로 달려들었다.

“전호, 무당파에서 자네를 징계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무슨 일이야? 태산파와의 비무는 또 뭐고?”

계응걸의 얼굴에 수심이 깃들어 있었다.

“별 일 아닙니다. 잘 해결되었습니다.”

“무슨 얘기가 그래? 그러지 말고 좀 알아듣게 얘기해봐.”

등오가 답답하다는 듯이 짜증을 냈다.

육전호는 연무장 한 가운데에서 조원들에게 둘러싸여 구요서와의 비무 당시 있었던 자신의 실수와 그 일 때문에 옥양자를 만난 일을 설명해야 했다.

“개새끼들, 사문이랍시고 해준 것도 없으면서 징계는 무슨 얼어 죽을 징계…….”

등오가 눈을 부라리며 한소리를 내뱉자 육전호와 무당과의 관계를 대충이나마 알고 있던 조원들이 쑥덕거렸다.

“무당의 속가제자임을 밝혔으면 무당파의 위신이 서잖아. 무당파의 속가제자가 태산파의 적전제자를 때려눕혔으니, 요즘 한창 하락세인 무당파의 위신을 한껏 세울 기회였는데 아까웠겠지.”

“아깝기는 개뿔, 이름은커녕 얼굴도 몰랐던 속가제자가 태산파의 적전제자를 꺾었으니 오죽이나 배가 아팠겠어? 그래서 꼬투리를 잡아 징계 하려 한 거고.”


중단했던 숙소 청소를 말끔히 해놓고 조원들과 떠들썩하게 반주까지 곁들인 저녁식사를 했다.

긴장감이 풀어진 탓이었을까. 오랜만에 과식을 한 육전호는 소화도 시킬 겸 천천히 걸어 태이산 자락을 올랐다.

빈터는 발목이 잠길 만큼 웃자란 잡초로 뒤덮여 있었다. 꽤 오랫동안 인적이 끊긴 모습이었다.

나뭇가지에 걸어놨던 검수(劒穗)가 보이지 않았다. 산짐승이 물어 갔을 수도 있었고 다른 이가 가져갔을 수도 있었다.

좌정을 하고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상념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슬며시 다리를 풀고 나무밑동에 등을 기대어 누웠다.

밤하늘엔 어디론가 흘러가는 구름이 가득했다. 습기를 머금은 봄바람 속에선 가끔씩 송진 냄새가 묻어났다. 밤이 늦도록 서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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