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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 님의 서재입니다.

음영잔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임제
작품등록일 :
2012.05.15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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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4.12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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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14

DUMMY

일 각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관도 뒤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경사진 곳을 돌아 나오는 마차에서 두 인영이 솟구치더니 육전호와 조원들 앞으로 가볍게 착지했다. 절정의 경공술이었다.

두 사람은 공동파의 고월과 풍운각의 부각주인 태산파(泰山派)의 냉무원이었다.

“계조장, 어디요?”

“대략 이백 장 앞입니다.”

계응걸의 손끝을 따라 고월이 격노한 기색으로 비가 내려 흐릿한 관도의 끝을 노려보았다.

“뒤에서도 정체불명의 무리들이 따라붙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소.”

“어쩔 수 없소. 정면 돌파를 강행하는 수밖에.”

고월의 말을 듣고 있던 냉무원이 손을 흔들자 여섯 대의 호화로운 마차 주위에 있던 무사 가운데 이십여 명이 분분히 앞으로 몸을 날려 온다. 두꺼운 종이에 기름을 발라 만든 갈색 비옷을 걸친 풍운각의 무사들이다.

“예상대로다. 빠르게 정면 돌파를 감행한다.”

“예.”

냉무원의 말에 풍운각의 무사들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는 듯 짧고 굵게 한목소리로 대답한다.

“자네들은 후위로 가게.”

고월의 말에 따라 육전호는 다른 조원들과 함께 계응걸을 따라 본대의 뒤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선두에 서는 풍운각의 무사들 가운데에 언뜻 서문진철과 혁련기의 모습이 보였다. 비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현진과 대광 같은 여의각의 고수들도 선두로 나서고 있었다. 하지만, 서문영영이나 강소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마차 안에 있으리라 생각하며 조원들의 뒤를 따랐다.


“출발한다!”

마차행렬의 후위에 도착해 사 조와 인사를 나눌 틈도 없었다. 뒤에서 쫓아온다던 정체불명의 무리는 벌써 삼십 여장 가까이 접근해 있었다. 갖가지 번뜩이는 도검을 흔들며 기세 좋게 달려들고 있었다. 서서히 마차가 속력을 내기 시작하자 그 뒤를 따라 달리던 계응걸이 소리친다.

“절대 개인행동 하지 말고 마차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해!”


육전호는 조원들의 뒤에 붙어 달리며 계산을 해보았다. 풍운각과 상무각의 무사는 모두 육십여 명, 금가장의 호위무사는 대충 구십여 명은 되어 보였다. 거기에 자신들까지 하면 약 백 팔십 명 정도의 인원이었다. 상대가 몇 명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행렬이 길어서는 불리했다. 이런 추격전에서는 특히 뒤쪽에 있는 자신들이 고립될 확률이 높았다. 여의각의 고수가 몇 있다고는 하나 그들이 선두에 있는 이상, 뒤쪽에 있는 자신들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을 것이다. 가슴이 서늘해졌다.


빠르게 달리던 마차의 속도가 급격하게 줄어들더니 칼부림소리와 함께 비명이 난무했다. 마차의 선두가 적과 맞닥뜨린 모양이었다.

“이런 썅!”

원자춘의 외침에 뒤를 돌아보니 족히 이백 명은 넘어 보이는 무리가 관도를 꽉 채우며 어느새 서너 장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다양한 복장에 검과 박도(朴刀), 거대한 낫처럼 생긴 쇄겸도(鎖鎌刀) 등 다채로운 무기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패천문의 무사들이 아니었다. 아마도 패천문의 세력권 안에 있는 군소 문파의 무사들을 긁어모은 모양이었다.

온갖 험악한 소리를 지르며 다가오는 이들과의 거리가 이 장 정도로 좁혀지는 순간, 무리에서 한 사내가 뛰쳐나오더니 조금 뒤로 처져 있던 상무각의 무사를 향해 송곳처럼 날카로운 협봉검(狹鋒劍)을 찔러갔다. 이것을 신호로 적들이 분분히 날아올랐다.

육전호는 검을 빼어 들었지만 좁은 공간에 몰려 있어서 운신에 제약이 있을뿐더러 검을 맘껏 휘두를 수도 없었다.

봉천우와 담무원이 몇 명의 상무각 무사들과 함께 맨 뒤에서 막아서자 폭이 삼 장 정도인 좁은 관도가 꽉 차버렸다. 어느 순간, 쫓아오던 무리 사이에서 긴 쇄겸도가 튀어나오더니 뒤를 막고 있던 상무각 무사의 목이 떨어졌다. 그 틈새로 몇 명의 적들이 쓰러지듯이 밀려왔다.

걸리는 것은 모조리 부숴버리겠다는 듯이 대도(大刀)를 휘두르며 덩치 큰 사내가 뛰어들자 근처의 금가장 무사들이 흩어졌다.

육전호는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날렸다. 살갗을 찢어발길 것 같은 도풍(刀風)이 목을 스쳐 지나가자 온몸을 뻗어 힘차게 검을 내질렀다. 목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사내를 뛰어넘으며 검을 내리쳤다. 협봉검을 들어 막던 사내의 눈망울 속에 암울한 하늘이 보였다. 머리가 쪼개지며 동강난 검 조각이 허공을 날랐다. 거추장스런 방립을 벗어 던졌다.

팩!

두 조각으로 잘리는 방립 사이로 거대한 낫이 크게 휘어지며 쇄도했다. 상대의 가슴으로 몸을 던졌다. 검신에 이어 검격(劍格)이 상대의 가슴에 부딪쳤다.

“마차가 전진한다. 따라붙어!”

계응걸의 고함이 들려왔다. 마차가 천천히 앞으로 가고 있었다. 날아드는 칼을 비켜 치면서 뒷걸음질 쳤다. 계속 이렇게 갈 수는 없었다. 거리를 벌려야 했다. 옆자리의 담무원을 쳐다보았다. 짧은 눈길 속에 몇 마디 말들이 오갔다.

“타앗!”

육전호와 담무원이 뒷걸음치다 말고 적에게로 뛰어들자 약속이나 한 듯이 봉천우와 섭평위, 사조의 조원 몇 명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봉천우의 기세는 사나웠다. 튀어나오는 두어 개의 도를 잘라내며 위협하자 주춤거리는 무리. 하지만 그도 잠시. 다시 전진을 시작했다.

거대한 파도였다. 좁은 관도를 밀려오는 적들의 선두는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는 상태였다. 앞에 선 동료를 밀치며 전진하는 그들을 상대하기에는 숫자가 턱없이 부족했다. 이미 앞으로 나섰던 사조원들도 물러서고 있었다.

뒷걸음질 치는 발에 사체들이 걸렸다. 갈색 비옷을 걸친 시신도 보였다. 풍운각의 무사다. 어느새 관도 앞에서 행렬의 선두와 싸움을 벌였던 무리가 옆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마차 뒤로 붙으라는 계응걸의 고함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마차는 이미 멈춰 서 있었다. 마차를 제외한 삼면이 포위된 형국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걸치고 있는 도롱이의 허리 부분이 여기저기 베어져 덜렁거리고 있었다. 옆구리가 따끔거렸다. 하지만 살펴 볼 틈이 없었다.

사선으로 떨어지는 박도를 힘겹게 퉁겨냈다. 상대의 거친 호흡이 얼굴로 뿜어졌다. 두려움을 떨치려고 화주라도 한 잔 했던가. 가슴에 박아 넣은 검을 뽑으며 뒤로 물러섰다. 흘러내린 핏물이 자꾸 시야를 가렸다. 피에 젖어 덜렁거리는 도롱이가 천근만근 같았다.

“헉!”

쉴 새 없이 울리는 비명 가운데 왠지 익숙한 소리. 고개를 돌려보니 담무원이 한쪽 팔을 잃은 채 정지된 듯 서 있었다. 그 순간 목이 날아갔다. 몸을 날렸다. 담무원의 목을 친 사내가 얼굴을 피로 칠갑을 한 채 박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신형을 위로 뽑아 올리는 순간, 박도를 든 사내의 팔이 날아가고 목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허무하게 착지하는 순간 봉천우가 팔을 잡아끌었다.

“여기서 벗어나야 해!”

육전호는 고개를 돌려 주위상황을 살폈다. 멈추어선 마차는 육전호 일행이 의지하고 있는 맨 뒤의 한 대뿐이었다. 이미 마차의 문이 활짝 열려있다. 다른 마차들은 이미 관도를 빠져나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함께 있던 사십여 명의 인원도 절반 정도만이 남아있었다. 탈출할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자춘아, 퇴각한다!”

계응걸의 외침이 들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원자춘이 송석구와 함께 관도 옆 비탈진 곳으로 뛰어내렸다. 그 뒤를 몇 명의 상무각 무사들이 따랐다.

무림맹의 무사들이 가파른 산비탈을 뛰어내리자 박도를 든 인원이 그곳을 재빨리 막아섰다.

끈질기게 달라붙던 사내의 목을 베어 낸 계응걸이 뒤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다.

“나와 천우가 뒤를 맡는다. 빨리!”

봉천우가 뒤로 물러나고 등오와 섭평위가 검을 휘두르며 다가오자 육전호는 주저하지 않고 몸을 날렸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사내의 눈이 보였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눈빛이다. 휘두르는 박도를 검으로 막으며 발바닥으로 사내의 어깨를 찍어 내렸다. 무너지는 사내의 가슴을 밟고 서자 오른쪽에서 또다시 박도가 날아들었다. 몸을 틀며 팔꿈치로 상대의 얼굴을 찍고는 산비탈을 향해 몸을 날렸다.

가시덩굴과 잡목이 우거지고 경사가 심한 비탈을 오륙 장 가량 날아가 떨어졌다. 한동안 정신없이 구른 후에야 겨우 몸을 가눌 수 있었다. 앞서가는 원자춘의 꽁무니를 쫓아 정신없이 달렸다.



위치를 알 수 없는 숲은 여전히 깊고 어두웠으며 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도롱이를 젖히고 옆구리를 더듬어 보았다. 찢어진 옷 사이로 세 치 가량의 상처가 벌어져 있는 것이 느껴졌다. 싸우고 달릴 때는 몰랐지만 이제야 뒤늦은 통증이 둔탁하게 밀려왔다.

“전호, 괜찮나? 어디 좀 보자.”

송석구가 다가오더니 육전호의 옆구리를 살폈다.

“다행히 깊게 베이진 않았네. 우선 지혈부터 해 놓자.”

송석구가 쪼그리고 앉아 지혈을 하는 동안, 지쳐 쓰러진 상무각 무사들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던 원자춘이 다가와서 살펴보았다.

“이봐, 걱정하지 말라고. 비를 피할 곳만 찾으면 내가 아주 보기 좋게 꿰매어주지.”

원자춘 특유의 빈정거리는 말투가 들려왔지만 육전호의 눈길은 자신들이 지나온 어두운 숲 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전이 벌어졌던 관도를 빠져나와 방향도 모른 채 반 시진 가량을 무작정 달렸다. 원자춘의 뒤를 따른 것은 백준서를 포함해 상무각의 무사 넷, 경비단 사조의 조원 셋, 자신과 송덕구, 등오, 섭평위. 모두 열두 명이었다.

담무원의 죽음은 자신이 직접 보았으니 그를 제외하더라도 계응걸과 봉천우, 소응박이 보이지 않았다.

원자춘의 뒤를 따르던 상무각의 무사들이 지쳐 쓰러지자 그 자리에서 휴식을 취한 지 벌써 이각이 흘렀다. 자신들의 뒤를 따라 탈출했다면 흔적을 쫓아 벌써 왔어야 했을 시간이다.

“됐어, 이제 더 이상은 출혈은 없을 거야.”

송석구가 육전호의 어깨를 다독이며 일어섰다. 출혈은 멈췄지만 통증은 여전했다.

“그나저나 조장은 왜 이렇게 늦는 거지?”

육전호는 송석구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어쩌면 자신이 지나온 저 검은 숲이 이승과 저승을 나누는 경계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온 몸에서 더운 김을 발산하던 일행들의 체온도 침묵과 함께 식어갔다.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만 들려왔다.

그로부터 약 일 각의 시간이 더 흐른 후, 경계를 서던 사 조의 조원과 함께 계응걸이 나타났다.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였다. 큰 부상을 당한 듯, 봉천우와 소응박이 계응걸을 옆에서 부축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모르겠소. 협봉검에 복부를 찔린 것 같소.”

원자춘은 봉천우의 말에 계응걸의 상의를 걷어 살핀다. 복부와 등에 난 작은 상처. 관통을 당한 흔적이었다.

“오면서 간단히 지혈을 했지만 내장이 상한 것 같소. 빨리 치료할 곳을 찾아야 하오.”

봉천우의 말에 원자춘의 얼굴에 다급함이 어린다.

“자춘아. 어차피 순안강(淳安江)을 건너야 하니 우선 북서쪽으로 가면서 쉴 곳을 찾자.”

“젠장,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는데, 북서쪽이 어딘지, 순안강이 어딘지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이오?”

원자춘이 짜증을 내자 계응걸이 힘들게 손을 들어 방향을 가리켰다. 계응걸이 가리킨 방향을 응시하던 원자춘이 머쓱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뒤를 쫓는 놈들은?”

“오면서 계속 살폈지만 뒤를 쫓는 움직임은 없었소. 금가장의 마차가 놈들의 주목적인 듯하오.”

봉천우의 말에 원자춘의 안색이 밝아졌다.

“조장…… 무원형님은…….”

“…….”

원자춘의 옆에 서 있던 송석구가 눈치를 살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계응걸은 부리부리한 눈만 끔벅이며 앞으로 가야할 어두운 숲을 바라볼 뿐, 아무런 말이 없다. 대답을 기다리던 송석구의 눈매가 젖어들었다. 지켜보던 원자춘이 나섰다.

“이제부터는 등오와 평위가 조장을 부축해라. 준비되는 대로 출발한다.”

일조원들이 출발할 준비를 하자 백준서가 계응걸에게 다가가 말을 건넨다.

“계조장, 뒤에 남은 상무각의 무사는 없소?”

계응걸이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곁에 있던 봉천우가 나섰다.

“없을 것이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빠져나왔으니.”

“…….”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본대와 함께 무사히 빠져나간 상무각의 무사들이 많을 터이니.”

“알겠소, 고맙소.”

백준서가 힘없이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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