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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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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작품등록일 :
2012.11.16 14:10
최근연재일 :
2018.03.26 19:27
연재수 :
360 회
조회수 :
190,508
추천수 :
4,145
글자수 :
2,037,868

작성
17.01.26 20:09
조회
547
추천
9
글자
7쪽

엽인들 [사명..사제 3]송영감

DUMMY

약수터에서 만난 여편네들이 건강히 오래 사시라며 따라주는 막걸리를 한 잔만 덜 마셨어도..


“어찌나 구수한지.”


술에 취하고 산의 수려한 풍경에 매료돼 발길이 닿는 대로 걷지만 않았어도..


“수묵화를 보는 것만 같아서.”


여하튼 그러지만 않았어도 일흔이 넘은 나이에 미아가 되는 일은 없었으리라. 널따란 바위가 보여 잠시 엉덩이를 걸쳤는데 그대로 잠들었나 보다.


“이걸 어쩐다.” 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지만 어찌하랴, 이미 벌어진 일인 것을.


하늘을 뒤덮도록 우거진 나무가 낮에는 절경이 되어 가슴 떨리게 하였건만, 야밤이 되자 길잡이인 달빛을 가려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이 나이를 먹어도 어둠이 무섭구나.’


혹시나 해서 주머니를 뒤적이던 송영감은 낡은 가죽지갑 말고는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자 길게 한숨을 뱉었다. 딱히 쓸데도 없고 무겁기만 해서 소파 위에 두고 온 휴대폰이 왜 이리도 아쉬운 건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노구를 찾아 오밤중에 헤맬 이 없으니 폐는 끼치지 않겠구나. 어쩌면 이렇게 가는 것도 인생이겠지.’


때때로 외로움이 사무칠 때면 명절에도 찾아오지 않는 자식과 먼저 떠난 여편네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는데, 막상 이런 일이 벌어지고 나니까 혼자인 게 다행이라 그는 마음을 편히 먹기로 했다.


‘이제는 어쩐다?’


어스름한 달빛 아래 보이는 거라곤 커다란 나무와 바위, 그리고 괜히 섬뜩한 수풀이 전부라 한숨만 쉬던 중, 문득 드는 생각이 있어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별반 다를 것도 없구나.”


적막하고 쓸쓸한 방구석이나 여기 이 산속이나 혼자인 건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들자 스멀스멀 찾아들던 두려움이 덧없이 흩어졌다.


‘마음먹기에 따라 이렇게 다른 것을.’ 하지만 찬바람에 으슬으슬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어 일단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크게 기지개를 켜고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니 잠시나마 가졌던 우울한 생각이 훨훨 날아가는 게 느껴졌다.


“내가 주접을 떨었구나, 주접을 떨었어. 이대로 기다렸다가 멋들어진 일출이나 보고 내려가면 되겠어.”


앞이 잘 보이지도 않는 산속에서 멋모르고 움직였다가는 사달이 난다는 걸 오랜 경험으로 체득한 송영감은 잠들었던 바위에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자정은 넘은 것 같은데..’


그는 습관적으로 손목을 보다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평생을 시간에 쫓겨 살다가 아내와 자식을 떠나보냈다는 생각에 벗어 던진 손목시계가 있을 리 만무했다.


‘시간은 무슨.. 그냥 해가 뜨면 아침인 것을.’


드문드문 달빛이 비치는 게 귀신이라도 나올 듯 으스스한 풍경이었지만, 아침을 기다리기로 마음먹고 보니 또 나름의 운치가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고.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귀신이라도 한 번 봤으면 좋겠네. 살면서 한 번씩은 다 본다는 귀신을 왜 나만 보지 못했을꼬.’


고희를 훌쩍 넘은 나이였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참 별의별 일을 다 겪어왔지만, 안타깝게도 초자연적인 현상의 치읓 자도 본 적이 없었다.


‘이 노구를 잡아먹지는 않겠지.’


송영감은 묘한 기대를 품은 채 고즈넉한 밤 풍경을 둘러보다 괜히 흥이 나서 중얼댔다.


“별유천지비인간이라, 여기라고 다를 게 또 뭐 있으랴? 그래도 시선[詩仙]을 기리려면 술이라도 한잔 놓아야 할 텐데..”


그렇게 너스레를 떤 노인은 산중답속인에서 월하독작에 이르기까지 생각나는 대로 시조를 읊으며 나름의 신선놀음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세속에의 미련을 훌훌 털어 낸 진짜 도인은 아니었기에.. 외로움이라는 이름의 고질병이 불쑥 찾아들자 청승맞게 추억이나 기리며 하염없이 시간을 죽였다.


‘여보, 그곳은 어떻소? 나도 곧 갈 건데, 어디 살만하오?’


병사한 아내의 달덩이 같던 모습에서부터 첫째가 태어났을 때의 기억을 더듬다보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어린다. 자식의 얼굴에 손자의 미소까지 겹쳐지자 다문 입술을 비집고 너털웃음까지 터져 나왔다.


‘한창 클 때니까, 2년이면 참 많이 컸겠구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꼬마 숙녀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아 그를 흥겹게 했다. 홀로 집에 있을 때와는 달리 좋았던 기억만을 떠올리며 추억과 담소를 나눌 때, 멀리서 귓가를 자극하는 소리가 들려와 그의 사색을 깨트렸다.


‘어디서..?'


그것은 바람이 장난을 쳐 나는 소리가 아닌, 살아있는 뭔가가 산속을 뛰어다니며 내는 소음이 분명했다.


‘이 밤중에..?’


멀리서 메아리쳐오던 소리가 급격히 가까워지자 덜컥 겁이 난 송영감은 자신도 모르게 한 가지 단어를 떠올렸다.


‘호랑이?’


이렇게 묵직한 소리를 내면서도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산짐승이 호랑이 말고 또 뭐가 있겠는가?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실소가 흘러나온다.


“뒷산이 깊다 한들 호랑이라니, 드디어 노망끼가 왔구나.”


노인은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을 떠올리며 조용히 귀 기울여 소리를 쫓았다. 나뭇가지가 꺾이고 바위와 풀을 밟는 소리가 산 전체를 울리는 것만 같다.


“멧돼지가 있을 리 만무하고, 설마 저승사자가 이 늙은이를 데려가려고 진짜 호랑이를..?” 평소라면 입에도 담지도 않을 농이었지만,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무슨 생각인들 하지 못하랴.


때마침 멀리 달빛 사이를 휙 지나가는 그림자가 눈에 들어오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막상 눈으로 보고나니 입안이 바싹 마르고 등골이 싸해지는 게 오금이 저려온다.


‘분명히 사람의 몸놀림은 아니야.’


끊임없이 메아리치는 소음 속 사라진 그림자를 쫓던 그는 달빛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에 놀라 벌떡 일어섰다가 툴툴 웃음을 흘렸다.


“참 못났구나, 못났어.” 그리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허리를 꼿꼿이 편 채, 가만히 기다렸다.


‘내 살 만큼 살았는데 뭐가 무서워서.’ 혹여 화를 입어 떠나도 죄지은 게 없는 몸인데 당당하기라도 해야 되지 않겠는가?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로 뜨문뜨문 비치는 달빛 아래, 어둠과 어둠 사이를 휙휙 넘나들던 그림자가 어느새 가시거리 안으로 다가오자 그를 저승사자라고 믿기로 한 노인이 농을 던진다.


“이 늙은이 하나 때문에 밤이슬까지 밟고, 고생이 많으십니다.”


북망산이라는 단어를 항시 염두에 둘 나이였다. 산을 도깨비처럼 노니는 저 그림자가 무엇이든 호의적일리는 없다 여기니 오히려 담대해진다. 또한, 고독에 질려 눈시울을 적실 때마다 가슴 한켠에 차곡차곡 쌓아둔 어떤 열망이 조용히 속삭이기도 했고.


‘돌아가서 뭘 하려오?’

‘아무것도..’


비릿한 피비린내가 섞인 바람이 코끝을 찔러 대는 순간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것도 운명이겠지.’


우연히 닿아 가늘게 이어지던 인연의 끈이 오밤중 어느 산속에서 교차되며 곧 스러질 젊음을 구원하게 된 것은, 그가 본능적으로 느끼고 뱉은 유언처럼 아마도 운명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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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엽인들 [사명..사제 9]얽힘 +2 17.02.06 483 8 12쪽
115 엽인들 [사명..사제 8]송광극 - 천운 +4 17.02.02 564 10 15쪽
114 엽인들 [사명..사제 7]송광극 - 고뇌 +1 17.01.30 534 9 15쪽
113 엽인들 [사명..사제 6]송광극 - 계승자 17.01.29 455 10 13쪽
112 엽인들 [사명..사제 5]혼돈 17.01.28 505 9 13쪽
111 엽인들 [사명..사제 4]이어짐 17.01.26 468 11 16쪽
» 엽인들 [사명..사제 3]송영감 17.01.26 548 9 7쪽
109 엽인들 [사명..사제 2]마안 +1 17.01.25 512 8 15쪽
108 엽인들 [사명..사제 1]두 가지 말. 17.01.25 400 9 14쪽
107 엽인들 [사명..변화 13]남명진 17.01.24 428 9 13쪽
106 엽인들 [사명..변화 12]남명진 17.01.24 403 8 12쪽
105 엽인들 [사명..변화 11]이어짐 +1 17.01.23 470 12 13쪽
104 엽인들 [사명..변화 10]다프네 17.01.23 532 8 12쪽
103 엽인들 [사명..변화 9]다프네 +1 17.01.20 513 8 12쪽
102 엽인들 [사명..변화 8]다프네 17.01.20 447 10 13쪽
101 엽인들 [사명..변화 7]현 17.01.20 478 8 8쪽
100 엽인들 [사명..변화 6]그날 17.01.19 475 10 16쪽
99 엽인들 [사명..변화 5]최동민 17.01.19 497 12 16쪽
98 엽인들 [사명..변화 4] 17.01.17 414 10 12쪽
97 엽인들 [사명..변화 3] 17.01.17 438 9 13쪽
96 엽인들 [사명..변화 2] 17.01.16 525 9 14쪽
95 엽인들 [사명..변화 1] 17.01.16 455 12 12쪽
94 엽인들 [사명..무적자] +5 17.01.13 610 1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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