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9. 수연이 암영상단주와 재회하다
“나주 쪽 상황이 그렇게 심각하다고요?”
“나주 뿐만 아니라 전라도 전체가 난리가 아니겠소. 오죽하면 암영(暗營)이라는 이름을 걸고서도 이런 백주대낮에 여기 제주에 왔겠는가요.”
그림자가 짙게 깔린 밤에만 움직인다는 암영상단. 그들을 이끄는 상단주 권태식은 연거푸 술을 들이키며 답답한 마음을 풀어내었다.
술 냄새가 회의실 안에 퍼져나가 수연을 비롯한 몇몇은 표정을 찌푸렸지만 그보다는 강진과 전라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정보가 더 중요했기에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
“모두가 미쳐버린게 아니라면 내가 본 것들은 납득이 안되는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수연의 물음에 권태식은 아무 말 없이 술을 들이키기만 했다.
“...이번엔 놈들이 기어코 끝장을 보려는게요.”
조용히 듣고있던 최두식은, 주름만큼이나 근심이 깊게 드리워진 권태식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덧붙였다.
“도방께서는 지난날 전란이 발발한다면, 육지에서 제주가 필요한 물목을 구하는데 어려울 것이라 하셨던걸 기억하십니까. 전란이 일어난지 이제 달포쯤(15일) 되었는데, 도방의 말씀이 현세에 도래했습니다.”
“내 말이 현세에 도래했다고요?”
자신을 아주 용한 점쟁이나 무당같이, 경외심이 곁든 눈빛으로 바라보는 최두식에게 수연은 조금은 황당한 듯 되묻자, 최두식은 자리를 고쳐앉고는 말을 이어갔다.
“예. 그 이상입니다 도방. 병마절도사 조동제가 이끄는 일만 오천의 군세와 나주, 광주, 익산 등 전라 각 지의 군현에서 모인 삼만 군세가 합쳐져 총 사만 오천이 모였는데, 한양으로 진격하기는커녕 오히려 한양으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고, 성문을 걸어잠그고는 성벽을 보강하고 있다 합니다.”
“대체 어째서 그런 것인가!”
듣고있던 세자가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는 듯 큰 소리로 묻자, 최두식은 그를 힐끔 보더니 자신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이는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나, 한양으로 올려보낼 조운선들을 죄 불태우고 바다에 가라앉혔다는 소문이 크게 돌았습니다. 하여 제가 짐작하는 바는...”
“이번 전란이 단순한 역모가 아니라, 아예 전라 땅에서 개국(開國)이라도 하겠다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도방.”
‘이런 미친...’
전란이 일어날 것이야 예상했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 모습에 수연은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생각한 전란의 전개는 이랬다.
1. 전라 각지에서 군사를 모은 다음,
2. 누구보다도 빠르게 한양으로 진격하면서,
3. 그들을 요격하려는 중앙군을 궤멸시킨 후,
4. 한양을 점령하고 영조를 축출한 다음 누군가 왕으로 추대하는 것.
그게 이 땅에서 역모가 일어났을 때 반란군들이 택한 방법이자 역모의 교과서나 다름없는 것이었지만 최두식이 전한 이야기들만 놓고 본다면 위 전개는 2번에서부터 틀려먹었다.
“저들이 대체 왜 전라도 바깥으로 움직이지 않을까요. 수상하지 않아요?”
섣부른 짐작보다는 우선 최두식과, 여전히 말을 꺼내지 않고 술을 들이키는 암영상단주 권태식의 의견을 먼저 들어보기로 했다.
그녀는 반란군이 왜 저러는지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갖고있었지만, 현장에서 구르고 구른 이들의 경험과 판단을 제외하는 것 만큼 멍청한 일이 없을테니까.
“아까 도방께서도 말씀하신 바, 저들이 전라도에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 하면 저러는게 납득이 되긴 합니다만...”
최두식은 아까 수연이 말한 개국이라는데에 판단을 같이 했지만 권태식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동의하지 않는다며 입을 열었다.
“내가 생각한 바는 조금 다른디...”
수연을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권태식으로 향하자 그는 당장이라도 터질듯하게 붉어진 얼굴과는 다르게 신중하게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놈들은 기다리고 있는게요.”
“기다리다니. 무얼 말입니까?”
“뭐긴 뭐요. 한양서 놈들 잡으러 내려올 중앙군이지.”
“예?”
세자가 황당하다는 듯 되묻자 권태식은 별것 아니라는 듯 손으로 턱을 괴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지난 무신년 전란을 기억하는 이가 있는가?”
“쇤네가.. 있긴 했었는디요.”
권태식을 제외한 이들 중, 오로지 박 객주만이 대답하자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 때는 아까 김 도방이 말한대로 반란군이 한양으로 진격하다가 청주 부근에서 된통 얻어맞고 작살이 나버렸지. 군사를 일으켜 한양으로 갈 줄만 알았지 야지(也地)에서 군사를 어떻게 부리는지 다들 몰랐으니께. 원래 고향 떠나면 개고생이게요.”
“그래서 이번에는 전라도 바깥으로 아예 나가지 않겠다는 것인가요?”
“그거야 내가 역모를 일으킨 놈이 아니라 잘은 모르겠다만, 짐작이 그렇다는게 아니요. 게다가 이번에는 정말로 군사를 부릴 줄 아는 양반이 반란군 수괴가 되었다니.”
권태식의 말이 끝나고 잠시 침묵이 회의실 안에 감돌았다.
그의 말을 종합해보면 지난번 반란은 성급하게 한양으로 진격하다가 일격에 패하였으니, 이번에는 아예 전라도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전략을 택한게 아니냐는 것.
“다만 결국 한양으로 가야 임금님을 갈아치우든 뭐든 할텐데요.”
수연의 말에 세자가 고개를 저으며 권태식 대신 답을 해주었다.
“...저 노인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전라도 각 지의 군세를 합쳐 총 사만 오천에 이른다고 하지만, 결국 대부분이 제대로 조련받지 못한 속오군이거나 노비들 터.”
세자가 핵심을 짚었다는 듯, 권태식은 호오? 하며 조용히 경청했다.
“저들을 수만명 데리고 종군한다 한들 중앙군 일만에 못 미칠 것이니 병마절도사라는 자가 제법 머리를 쓴 것이다. 속오군같은 잡병들을 데리고 공성(攻城)을 하느니, 수성(守城)을 하는게 그나마 승산이 있을 테니 말이다.”
그의 말이 끝나자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고 권태식은 흥미롭다는 듯 세자를 바라보았다.
“...김 도방이 이끄는 상단에 저리 군사에 밝은 이가 있었구려. 내가 생각한 바도 이와 같게요.”
“다만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수성을 택해 군사들을 전라도 밖으로 진군시키지 않는다면, 조정에서 저들의 의도를 알아차릴텐데, 중앙군을 전라도 인근에 배치한 뒤 농성을 벌이지 않겠습니까?”
최두식이 잘 이해가 안된다는 듯 세자에게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해주었다.
“최 대행수의 염려가 무엇인줄은 알지만, 조정에서는 그런걸 염두할 수 없을 거라는게 내 생각이오만.”
“어째서 입니까?”
“아까 암영상단주께서 말씀한게 맞다면, 당장 한양으로 올라가야 할 쌀들이 단 한톨도 올라가지 않을테니까 말이네.”
“아..!”
“조운선을 모두 불살라 없앴다면... 상상하기 끔찍한 일이지만 한양은 문자 그대로 난리가 날테지. 당장 조선 팔도에서 쌀이 가장 많이 나는 곳이 어디던가. 바로 전라도가 아닌가.”
“조선 팔도 중에서 전라도가 부담하는 세금이 대략 사 할 (40%) 정도 되니까, 조정에서는 당장 군사를 보내지 않고는 못 배길꺼에요. 딱 일 년만 지나면 조정에 돈이 없어 군사를 일으킬 수도 없을테니까...”
수연의 덧붙임에 최두식은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병마절도사 조동제가 안심하고 수성에만 전념할 수 있는 이유이자, 한양 조정이 시급히 중앙군을 보내어 반란군을 진압해야 할 가장 큰 이유는 매 해마다 전라도에서 한양으로 올려보내는 막대한 세금에 있었다.
만약 그 세금이 차단당한다면, 당장 급료를 지불하면서 운영중인 중앙군은 축소하거나 해체를 해야 할 것이고, 영조에게 올라가는 수랏상은 잡곡밥과 게장만 올라가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그래서 내가 저들더러 미친게 틀림없다 한게요. 정말 끝장을 보려고 저러는 것인디...”
권태식이 말끝을 흐리자, 모두는 이번 전란이 가져올 결과를 상상하고는 저마다 창백해지거나 허탈해 하는 모습이었다.
“...이건 흔히 알고있었던 역모나 전란이 아닌 것 같아요.”
수연의 말에 모두가 그녀를 주목했다. 여기있는 사람들 중에 그녀만큼 이번 전란에 대해 예측하고 준비를 해왔던 사람 또한 없었기에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자신들이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에 대한 조언과도 같았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조금은 창백해 보였고, 긴장한 듯 보이기도 했으며, 슬퍼보이기도 했다.
약간의 침묵 끝에, 수연은 무거운 입술을 움직였다.
“정말로 누가 하나 죽어야 끝날, 내전(內戰)이 발발한 거에요.”
내전이라는 말에 처음에는 모두가 의아한 표정으로 대체 무슨 뜻인가 생각해보더니 박 객주가 깜짝 놀라며 수연에게 물었다.
“서...설마 조선이라는 나라가 두 쪽으로 쪼개져서 서로 싸울거란 말이어요?”
박 객주의 말에 모두가 흠칫 하더니 수연을 바라보았다. 특히 세자는 방금 박 객주의 말이 절대 사실이 아니기를 바랐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조동제가 그리고 있는 모습은 별반 다르지 않을거에요. 그가 지금 전라도 바깥으로 나가지 않거나 수성에 공을 들이고 있는건, 이번 전란을 결코 짧은 시일내로 끝내지는 않겠다는 생각일 꺼에요.”
“그렇다면 도방, 우리는 어떻게 해야허요?”
“지금은 당장 전란이 발발했으니 진행되는 것을 지켜볼 뿐이겠지만, 어느 순간에는 둘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할 거에요. 그렇지 않으면 제주 사람들은 모두 굶어죽게 될 테니까...”
어느 쪽이 승기를 잡느냐에 따라, 제주와 조선물산은 조정에 충성을 다할수도 있고 반대로 반란군에게 손을 내밀수도 있다는 말에 모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와중에 세자는 복잡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괴로워했다.
‘당장 내전이 발발할 지경인데도, 나라는 사람은 여기에서 편안히 지내고 있구나...’
아버지 영조를 피해 달아난 제주.
조만간 전란의 참화가 팔도로 번져나갈 동안에도 자신은 안전할 것이었다.
누가 이기고 지고는 세자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왕이 되기 싫어 도망친 자가 감놔라 배놔라 할 부분도 아닌데다가 아버지 영조가 자신을 폐세자 하고는 다른 이를 세자랍시고 끌어다가 앉혔을게 뻔했을 터.
그저 한 사람의 백성으로서 지켜볼 일이겠지만, 이 전란에 휩싸일 백성들이 고통받고 유리걸식 하며 돌아다니게 될 모습이 상상되니 가슴 한 켠이 아파올 뿐이었다.
“다만, 반드시 둘 중 하나를 택해 가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 스스로가 세 번째 세력이 된다면 말이에요.”
놀란 표정을 지은 세자가 수연에게 물었다.
“혹 외해로 나아갈 생각을 품었던 것이, 이번 전란에서 어느 한 쪽도 편을 들지 않으려 했던것이냐?”
세자의 말에 수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전란이 발발하면 물목을 어떻게 구해와야 하나 고민했던 것이었지만, 만약 제 예상대로 내전으로 격화된다면 우리 상단과 제주는 대외 무역이 아니라면 생존하기 어려울거에요. 다만 아예 조선에서 독립해서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말에 모두가 납득하는 모양새였다. 세자도 그녀의 목표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게 아님을 분명히 하자 조금은 안심한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 김 도방의 말은 이해했게요. 그렇담 우리 암영상단이 무얼 어찌 도우면 되는가요?”
가만히 듣고있던 권태식이 수연에게 묻자, 그녀는 활짝 웃어보였다.
“어르신께서는 제주 혹은 경상 인근에서 황당선(荒唐船)들을 본 적 있지요? 그들과 접촉하고 싶어요.”
“황당선 말이요?”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이 수연의 입에서 나오자 권태식은 지금껏 마신 술이 확 깨는 듯한 기분이 들며 간담이 서늘해졌다.
Comment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