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 수연의 큰 그림
항해학당이 개소한 직후 이듬해 설날까지 조선물산 모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을 보냈다.
수연은 밧줄 염전에서 만든 소금을 포작선에 실어다가 흑산도로 가서 전복을 사오는데 집중했고, 장 별감은 각 목장에 소금을 가져다 주고 말총을 받아다가 매우 공손해진 병상 최두식에게 넘겨서 쌀이나 무명으로 바꿔왔으며 박 객주는 밧줄 염전을 확장하는 동시에 인부들을 관리하는 총괄 책임을 맡아 하고 있었다.
수연은 퀭한 눈으로 흑산도에서 가져온 전복을 확인하고는 쓰러지듯 구들장에 누워 멍하니 등잔을 바라보았다.
등잔을 채운 동백 기름 타는 향기가 방 안에 맴돌며 수연의 코를 자극했는데, 지금껏 전복과 씨름을 하고 왔던 그녀에게는 왠지 고소한 커피향 같이 느껴졌다.
‘커피...커피 한 잔만...라떼까지는 바라지도 않을테니까 제발.’
수연의 눈 앞에, 대한물산에 다닐적에 늘 물처럼 마시던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아른거렸다.
회사든 어디든, 발에 채일만큼 많았던 카페들.
적어도 커피 못 마실 일은 없었던 그 때가 떠올라 쓴웃음을 짓고는 수연은 저만치 치워든 종이를 집어 펼쳤다.
필체가 곱고 매끄러운 것을 보니 분명 사도세자가 남긴 듯 싶었다. 진행되는 모든 일을 일일히 직접 일러주기가 어려우니 글로 써서 던져주었으리라.
‘항해학당에서 필요한 것들이라.’
세자가 쓴 글에는 학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필요한 책과 붓 그리고 다른 물건들의 목록을 빼곡이 적혀 있었다.
수연은 세자가 남긴 글을 읽으며 그의 대한 평가를 조금은 바꿔보기로 마음먹었다. 여전히 무언가 시키면 툴툴대긴 했지만, 그가 남긴 글만 봐서는 그녀의 생각보다 일을 잘 해내고 있는 듯 싶었다.
특히 항해학당 개소 전, 당장 들어가는 돈을 아끼기 위해서 학당을 새로 짓는 대신에 사람들이 살다가 도망쳐 빈집이 된 집을 적당히 고쳐서 학당으로 쓰겠다는 세자의 제안에 수연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보통 서원이나 학당을 세운다 하면 건물부터 으리으리하게 짓는게 마련인데.’
세자는 건물을 크게 짓거나 하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학당이 개소하면 어떤 것을 가르칠지, 학당에 다닐 아이들은 어떻게 들일 것인지 그녀에게 한참을 이야기 했었다. 그러고도 모자라면 지금처럼 서찰을 남겼었는데, 나름 고민을 많이 했는지, 글씨 중간중간마다 고쳐 쓴 흔적이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나 열심히 하실줄이야.”
수연은 종이를 바라보며 풋 하고 웃었다.
처음에 항해 학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라는 말에 세자의 표정이 참 볼만했었지만 이제는 그 누구보다도 진심인 채 매달려 있으니. 수연은 항해 학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 싶었다.
“아유 애기씨. 안 자고 뭐혀요.”
그때, 박 객주가 눈을 비비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낮에 염전에서 일하느라 힘들었을 법 한데도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었다.
“객주도 피곤할텐데 더 안주무셔요?”
“지금부터 또 염전 나갈 준비를 해야 해야지 않겠어요. 근디 애기씨는요.”
박 객주는 그러면서도 하품을 하고 눈을 비볐다.
앞으로 한 시진 (2시간) 뒤 쯤 닭이 울텐데, 그 전에 염전에 미리 나아가 밧줄이 썩은데는 없는지, 소금죽은 잘 만들어졌는지, 비가 와서 함수(농도가 짙은 소금물)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지는 않는지 일일이 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누가 하품도 전염이 된다 했던가. 수연도 박 객주를 따라 하품하고는 멋쩍게 웃었다.
“저도 이 시간까지 일 하는게 익숙해서요.”
“애기씨 그러다 탈날거여요. 아직 어리니께 몸이 버티는거지.”
박 객주는 혀를 쯧쯧 차면서도 책상 한 켠에 전복과 관련된 글이 적힌 종이를 보고서 수연에게 물었다.
“흑산도로 갔던 일은 잘 된거여요?”
“네 객주. 이번에 들어온 전복으로 내년 여름까지는 엄젱이말에서 부담 할 공물은 다 납부한 셈이에요.”
“애기씨는 참으로 대단허요. 내년 여름까지 바칠 것을 모두 구해두었다니.”
수연은 박 객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덕에 포작인들이 청어를 잡고 학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되었어요. 그의 아내들, 딸들도 잠녀일을 그만 두고 염전에서 일을 하게 될거구요.”
현대 한국에서 염전에서 일을 시킨다고 하면 어떻게 그런 고된 일을 시킬수 있느냐 기함하겠지만, 여기 조선시대 제주에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염전 일이 고되기는 하지만 잠녀 일은 매번 바닷속에 들어갈 때 마다 죽음을 각오해야 했으니까.
“참 잘 되었어요 애기씨.”
수연의 말에 박 객주는 어쩐지 쓸쓸해보이는 미소를 짓고는 아참! 하면서 중요한 걸 말하지 않았다는 듯 낮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낮에 최두식 그 작자가 염전에 다녀갔었다는거 아니어요?”
“최 행수가요?”
“예. 어쩐 일로 왔냐고 물으니 염전 일 때문에 애기씨 뵈러 왔다 하던데. 적당히 둘러대서 쫒아내긴 했지만 영 찜찜한 것이...”
“염전 일이라...”
“뭐라도 짚이는게 있는거여요?”
박 객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자, 수연은 잠시 고민하더니 추측한 바를 말해주었다.
“염전 일 때문에 최 행수가 저를 찾은거라면 이유는 딱 하나일거에요. 자기네가 염전을 크게 일구려는데 경험해본 바가 없으니 사람은 얼마나 필요하고, 어떤 땅에서 염전을 일궈야 하는지를 물으러 왔을 거에요.”
“병상에서 염전을 크게 일구려 한다 하였어요?”
“네 객주. 지금 병상의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으니까요.”
수연은 지난번 최득수에게 소금을 팔러 갔던 일을 떠올리며 말해주었다. 박 객주는 수연의 말에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병상이 얼마나 큰 상단이었던가. 전라도 전체를 주름잡는 거대 상단이자 전라 병마절도사도 함부로 못 한다는 상인이 아닌가?
“병상같이 큰 상단에서 소금을 많이 만들면... 제주에서 만드는 소금이 밀리지 않겠어요?”
박 객주의 말에 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객주 생각이 맞다며 답했다.
“당연히 밀릴거에요. 병상에서 대량으로 소금을 만들게 되면 제주에서 만든 소금을 사려는 이는 없을거에요.”
“...애기씨. 지금 태평한 소리를 할 때가 아니잖어요?”
답답해 하는 박 객주에게, 수연이 씨익 웃어보였다. 그 웃음에 박 객주가 더 화가 난 것은 당연했지만, 일단은 그녀가 뭐라고 할지 궁금했기에 박 객주는 입을 다물고 그녀를 지켜보았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천지신명께서 점지해주셨는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난관을 극복한 애기씨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자신이 보기에는 절체절명의 위기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저리 태평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수연은 그런 박 객주의 표정을 읽고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당장 내년에 균역법이 시행되고, 그에 따라 균역청이 설치되면 지금 갖고 있는 염전은 모두 균역청 아래로 몰수된다는 것은 수연만이 알고있는 미래 지식.
수연은 그녀와 가장 가까운 박 객주라 할지라도 미래에 관련된 것 만큼은 차마 이야기 할 수 없었다.
이미 수연이 사도세자와 엮임으로 하여 조선의 역사가 뒤틀리기 시작한 상황에서 자신이 미래에서 왔고, 그 지식들을 전달한다면 어떤 또다른 나비효과를 불러올지 전혀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신에 수연은 박 객주에게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목표 지점을 살짝 일러주었다.
“객주. 제가 왜 항해학당을 만들고, 포작인들로 하여 청어 잡는 법을 가르치도록 하려는지 아세요?”
뜬금없이 청어 이야기를 꺼낸 수연에게 박 객주는 전혀 알지 못하겠다며 물었다.
“쇤네가 그걸 알면 이러고 있겠어요? 제주에서 농사가 안되니 청어라도 먹이려는거 아닌가 싶긴 헌데...”
“그 이유도 있긴 한데, 청어를 잡아다가 팔려구요.”
“청어를 판다고요?”
“네. 저기 경상 땅에 가면 청어를 잡아올려서 바닷바람에 말려 과메기로 만들어 팔아요. 저도 그렇게 해서 팔아볼까 해요.”
“그거야 쇤네도 알지만... 헌디 들어가는 품도 만만찮고, 말리던 중에 비라도 오면 청어가 죄 썩어버리는게 문제 아니어요?”
박 객주의 말에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 대신에 청어를 소금에 절이면 오래 보관할수도 있고, 오래 보관할 수 있게된 만큼 가져다가 팔 수도 있어요.”
수연은 확신에 찬 눈빛으로 박 객주를 바라보았다. 소금에 절인다라. 박 객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궁금한 것이 생겨 그녀에게 물었다.
“소금에 절이면 오래 보관이야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청어라는 것이 생각보다 금방 썩어버리는 건 애기씨도 아시잖어요?”
“말이 나왔으니까 궁금해서 그런데 객주라면 청어를 소금에 절일 때 어떻게 할 것 같아요?”
“...살아있는 째로 소금에 절이면 되는거 아니어요?”
한참을 고민하던 박 객주가 답하자, 수연은 고개를 젓고는 경제사를 배울때 영국이 네덜란드를 제치고 청어 강국이 된 비결이라는 과제의 배경 조사로 모았었던 자료를 떠올렸다.
‘객주가 말한게 영국에서는 야머스 블로터(Yarmouth Bloater) 방식하고 비슷하겠지. 다만 훈연 공정이 없으니 오래 보관은 못해.’
청어의 내장을 제거하지 않고 염도가 높은 소금물에 넣어 일주일 간 절이고서 짧은 훈연을 거친 영국의 그레이트 야머스에서 시작된 염장법.
영국 근해에서 잡히는 청어는 기름기가 적어 이 방식이 가능했지만, 조선 근해에서 잡히는 청어는 기름기가 많아 적합한 방식이 아니었다.
수연은 자신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바를 천천히 풀어내기 시작했다.
“객주. 청어를 소금에 절여 오래 보관하려면 반드시 내장을 비워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소금에 절인다 해도 한 달이면 상해버릴꺼에요. 그 보다는...”
하며 수연은 그림을 그려내더니, 박 객주에게 보여주었다.
“청어의 내장을 모두 비워낸 다음, 소금에 절이면 여섯 달은 족히 보관할 수 있어요.”
수연이 설명한 방식은 스카치 큐어(Scotch Cure)로, 야머스 블로터 방식보다 더 오랫동안 청어를 보존할 수 있었다. 박 객주는 수연이 그려준 그림을 바라보며 의아해 했다.
“애기씨. 내장을 비워내는 것과 안 비워내는 것의 차이가 그리 커요?”
“네. 만약 내장을 비워내지 않는다면, 소금에 절였다가 연기를 쐬어 구워야 해요.”
“연기를 쐬어 굽는다고요? 불에 굽는것도 아니고?”
“네. 반드시 더운 기운이 서린 연기로 오랫동안 구워야 해요. 이렇게 하면 일 년은 보관할 수 있을거에요. 만약 내장을 비워내고 소금으로 절였다가 연기로 굽는다면 그 이상도 가능할테고요.”
수연이 말하는 방식은 에스파냐의 사르디나스 아렌케(Sardinas Arenque)였다. 내장을 제거하지 않은 청어를 소금에 절였다가 오랜시간 훈연해 만든 보존 방식인데 더 오랫동안 보존이 가능했다.
박 객주는 수연의 해박한 지식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아니. 애기씨는 청어를 잡은 적이 없다면서 어찌 그런 방법들을 잘 알고 있었어요?”
“그야... 병상에 있을 때 이곳 저곳에 장사하러 다녔으니까요.”
미래 세상에서 배워왔어요. 라고 말 할 수 없었던 수연은 속으로 찔렸지만, 적당히 둘러대자 박 객주도 더 묻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수연이 그리고 있는 그림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병상이 소금을 만드는 동안, 애기씨는 청어를 잡아다 제주에서 만든 소금에 절여 팔 생각이구나.’
다만 박 객주는 한 가지 우려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애기씨. 아무도 청어를 사지 않는다면 어쩐대요?”
“여차하면, 저기 왜국에도 가져다 팔 수도 있지요.”
“왜국이라고 하셨어요?”
수연은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이었지만, 박 객주는 깜짝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쇤네는 애기씨 생각을 따라가지도 못하겠어요. 왜국이라니.”
두손 두발 다 들었다는 듯, 박 객주가 반쯤은 어이없는 얼굴로 답하자 수연은 씩 웃어보였다.
“아직은 먼 이야기지만, 오래 보존할 수 있는 청어는 왜국에서도 청나라에서도 잘 팔릴꺼에요. 뭐 그 전에 조선 땅에서 모조리 팔리겠지만요.”
“헌디 애기씨. 이제 겨우 내륙 땅에 배 타고 가는데, 왜국이며 청나라며 어찌 가려고 하셔요?”
박 객주의 말에 수연은 품 속에서 검게 타들어간 듯한 나무 패를 꺼내보이며 말했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을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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