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 세자가 옹주에게 항아리를 내어준 까닭
“장 별감. 이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지 짐작이 되는가?”
세자는 삼베로 칭칭 감겨진 항아리를 툭툭 치며 장 별감에게 물었다.
“안에 물 같은게 들어있어 찰박거리니 탕국 같은게 아니겠습니까?”
“탕국이라. 혹시나 계탕(鷄湯)이라면 참 좋겠거늘.”
“이번에 청나라 사신들을 대접하는데 올라갈 음식 말입니까?”
“그대도 알고있었는가?”
“수라간을 지나갈 적에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사신단에 올라갈 음식을 준비하느라 정신없었습니다만, 그 중에 계탕을 맡은 숙수가 가장 고생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음식들도 만드느라 고생하긴 매한가지일 것을, 어째서인가?”
“이번에 오는 청나라 사신이 지난번 조선에 왔다가 계탕을 먹고 천하일미가 여기 있구나 했던게 화근이 된 모양입니다.”
청나라에서 사신이 온다 하면 임금의 수라상을 차리는 것 보다 귀한 식재료가 팔도에서 올라와 아낌없이 쓰여진다. 다만 음식이란 결국 먹는 사람의 취향에 갈릴 수 밖에 없는 법. 이번에 오는 사신은 지난번 먹었던 계탕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았다.
“이런.”
세자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계탕은 닭고기를 미세하게 부수어 녹두가루를 입혀 완자를 만들어야 하니 특히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었다. 그런 음식을 사신이 가장 좋아했다 하니 세자는 계탕을 맡아서 요리할 숙수가 안쓰러웠다.
“헌데 정말로 이 항아리 안에 들어있는 음식이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잘그락 거리는 소리도 나는걸 봐서는 안에 무언가 들어있긴 한 것 같은데..”
“계란 프라이에 간장계란밥을 만든 솜씨를 봐서는 분명 맛있는 것이겠지?”
세자가 잔뜩 기대한 표정으로 항아리를 톡톡 치자, 장 별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인의 말뽄새나 성품은 본래 천한 장사치들이 그렇듯 거세고 맹랑했지만 내어준 음식만큼은 여기에 있는 숙수들과 견주어도 전혀 꿇리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게 있었다.
“그런데 저하. 혹시 안에 있는 것이 독이면 보통 큰 일이 아니겠습니까? 일면식도 없는 이가 내어준 음식은 한 번쯤은 확인을...”
장 별감의 말에 세자의 눈썹이 꿈틀했다.
“설마 호의로 내어준 것에 독을 탔겠느냐. 값을 비싸게 치르긴 했지만 하귤을 구해온 정성과 참외를 구해온 것을 보니 먹고 죽을 것을 내어줄 성품은 아닌 듯 하다.”
장 별감은 그러면서도 세자에게 재차 물었다.
“허면 저하. 그 여인을 믿으시는 듯 하니 여쭙겠습니다. 그 여인의 고향은 어디인지. 언제부터 마포에 있었는지 모두 아십니까?”
“...”
허를 찔렸다.
‘이름이 김만덕이라는 것과 전라 병상의 서기라는 것 말고는 아는게 없지...’
고향도, 언제부터 마포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니 어느 날 우연히 마주했을 뿐.
다만 그녀가 귤을 가져오고, 참외를 구해오는 모습에 왠지 모를 신뢰가 싹텄으니 세자는 그녀가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은연중에 여기고 있었다.
“장 별감의 걱정도 이해가 되네. 그 여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않지만... 벌써부터 나를 견제하려는 영의정과 노론들 보다야 믿을 만하지 않겠는가.”
“저하...”
이번에는 역으로 장 별감이 허를 찔렸다.
편전에서 있었던, 대사간 이창의가 괜히 세자를 건드렸다가 망신을 당한 일은 벌써 궁에서 최고 화젯거리가 되었다. 그저 성품이 순하고 영조에게 매일같이 깨지던 모습만 보아왔기에 당연히 유약하거니 생각했던게 노론의 실수였다.
관료들은 모두 다 언제 동궁께서 저런 제왕의 기운을 갖고 계셨는지 놀라워했다. 매일같이 세자를 호위하는 장 별감도 말로만 들었을 때 귀를 의심했을 정도였으니까.
장 별감은 그 순간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저 항아리 안에 들어있는 것을 확인하고자 할 의도였지만, 마포의 장사꾼 여인을 언급하며 자칫 이창의처럼 세자를 견제하려는 듯 한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신이 실언을 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장 별감은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하자 세자가 크게 당황하여 그를 말렸다.
“지금 뭐 하는가! 어서 일어나게!”
그 때, 멀리서 화완 옹주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둘을 발견하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오라버니! 장 별감!”
“네가 동궁에는 어쩐 일이냐?”
의아해 하는 세자의 얼굴에 화완 옹주는 웃음이 나오는 얼굴을 손으로 살짝 가리며 말했다.
“아바마마께 올릴 조청을 구하려 취선당 밧소주방에 가려던 길에 오라버니 목소리가 들려 와보았어요. 그런데 장 별감은 어째서...”
옹주의 말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나려던 장 별감은 귀가 빨개진 채 고개를 숙였다.
“소신이 저하께 실언을 하였습니다 옹주 자가.”
“실언이라...”
화완 옹주는 장 별감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해맑았지만 묘한 서릿발같은 냉혹함이 서려있었다. 세자와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자리에서 비키라는 뜻에 옹주의 눈빛을 읽은 장 별감은 허리를 숙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보며 세자가 옹주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조청을 구하러 가는 길이라고? 그걸 왜 나인을 시키지 않고 네가 그걸 직접 가느냐?”
세자의 물음에 화완 옹주는 싱긋 웃어보이고는 함껏 어깨를 뽐내며 말했다.
“그야 아버지께 올릴 것이니까요. 뭐든지 정성이 중요한 법이랍니다.”
“아버지께 조청을?”
궁금해 하는 세자에게, 화완 옹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어떤 일들을 해내고 있는지 하나 하나 짚어주었다.
“지난번에 오라버니께서 참외를 구해다 주신 덕에 아버지께서 기력을 되찾으심은 아시지요?”
“그게 어찌 참외 덕이겠느냐. 아버지께서 그 후로 수라를 입에 올리신 덕이지.”
“맞아요. 그런데 그 수랏상. 누가 올린 줄 알아요?”
화완 옹주의 말에 세자는 하나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저에요. 저.”
“화완 네가 수라를 직접 올렸다고?”
세자가 놀란 표정을 짓자, 화완 옹주는 배시시 웃으며 부끄러워했다.
“그건 아니고요. 숙수들이 음식 하는 것을 옆에서 보면서 간단한 것들만 조금 만들었지요.”
“참으로 장하구나. 손수 음식을 만들어 아버지께 올릴 생각을 하다니.”
“지난 밤에 구운 떡과 조청을 가져다 드리니 아버지께서 잘 드셨다고 상선 영감이 그러는거 있죠?”
한껏 신난 얼굴에 세자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아버지 영조는 떡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밤에 올린 떡을 모두 비웠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떡을 모두 양보했을 것이고 옹주에게는 잘 먹었노라 전하라 했을 것이다. 아마도 가져온 이의 정성에 보답하기 위함이었을 터.
“그런데 오라버니. 그건 뭔가요?”
화완옹주는 세자 옆에 놓여있던 삼베로 칭칭 감긴 항아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세자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해주었다.
“이 것 말이냐. 마포에 암행을 다녀오면서 받아온 것인데 요리라고 하더구나.”
“요리요?”
순간 화완옹주의 눈이 반짝거렸다.
“어떤 요리에요? 탕? 국? 전? 다식? 삼채?”
“글쎄다. 어떤 요리라고 듣기도 전에 준 사람이 사라졌지 뭐냐. 당시에 워낙 소란해서 말이다.”
“그냥 열어보면 안될까요?”
화완 옹주의 말에 세자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사흘. 사흘을 꼭 기다리라고만 했단다. 나는 그 후에 열어볼 생각이다.”
“사흘이라...”
한참을 고민하는 듯 한 화완 옹주는 항아리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그렇다면 오라버니. 이 항아리를 제게 주시면 안될까요?”
“이걸 달라고? 어째서?”
“저 안에 뭐가 담겨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만약 정말로 맛 좋은 요리라면 제가 배워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그거야...”
눈을 반짝거리며 다가오는 화완 옹주. 세자는 그런 옹주를 바라보며 웃음이 절로 나왔다.
‘어쩔 때 보면 참으로 고양이 같단 말이지.’
살금살금 다가와 자신을 놀라게 한 것은 부지기수요 소리를 악 지르고 도망가기는 얼마나 잘 하는지.
한편으로는 자신이 한번 관심을 보인 것에는 열과 성을 다했다. 그것이 아궁이 옆에 내내 서있는채로 음식을 지어 올리는 하찮은 일이라 할 지라도.
세자는 언제까지나 철부지인줄로만 알았던 옹주가 저렇게 진심어린 표정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참으로 대견해 보였다.
그런 옹주가 원하는 것 하나 쯤은 그냥 내어주어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둘 사이는 더욱 돈둑해질 것이고, 누이를 잃은 슬픔도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다고 옹주가 무언가 큰 것이나 귀한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세자가 얼떨결에 받아온 항아리 하나와 그 안에 들어있는 것. 고작 그것 뿐이었으니까.
‘그래. 아마 간장 같은 것을 새로 담아준걸테지.’
세자는 항아리 안에 담겨있는게 간장이라 여겼다.
그 여인에게 간장계란밥을 더 달라 했는데 못 해준게 미안해서, 아마도 그녀는 미리 만들어 두었던 달큰한 간장을 담아 주었으리라. 잘그락 거리는 소리는 메주가 잘게 부셔지는 소리였을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정말로 귀한 음식을 담아주었다면 객주 안에 사람들이 들어왔어도 이 음식이 무엇이니 하며 차분히 설명을 끝낸 다음 다른 이들을 맞이했을 것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세자는 그 날 자신에게 항아리를 떠맡기다시피 내어주고 다른 이들에게 달려가 희희낙락하던 여인이 조금은 괘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감정이 담겨있던 항아리였기에, 세자는 그다지 큰 고민 없이 화완 옹주에게 내어주었다.
다만 항아리를 내어주려는 순간, 여인이 자신에게 신신당부했던 말은 잊지 않고 해주었다.
“약조하거라 사흘간은 절대 열지 않기로. 그리고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르니 조금이라도 상했거나 사람이 먹을 수 없는 것이거나 하면 바로 버리도록 해라. 그리고 누군가에게 내어주어서도 안된다. 약조하겠느냐?”
“네! 오라버니!”
화완 옹주는 항아리를 받아들고는 환하게 웃었다.
**
“오늘은 낮것으로는 뭐가 올라오느냐?”
요즘 영조는 수라상이 올라온다는 말을 들을 때 마다 기분이 좋았다.
지난번 세자가 참외를 구해다 준 이후로 점점 입맛이 돌더니 전처럼 굴비에 보리밥을 물에 말아먹을 정도가 되었으니 메말라갔던 그의 몸도 조금씩 회복하고 있었다.
거기에 옹주도 떡이며 병과며 전이며 직접 수랏간에서 만들어와 바치니, 영조는 먹기 어려운 떡을 제외하고는 다른 것들을 제법 즐겼다.
“전하. 그간 야위었던 옥체가 다시 건강을 되찾으시니 만 백성의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박문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으로 기뻐하니 영조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하여 국사가 시급하오니 두루 나라의 일을 살피셔야 합니다 전하.”
그 말에 영조는 숟가락을 든 채 박문수를 바라보았다.
“이보게 영성. 꼭 수라를 올릴 때 국사를 논해야 하겠는가.”
“송구하오나 시급을 다투는 일인지라...”
“일이 그렇다 하니 들어보겠네.”
“전하. 조만간 청나라 사신 일행이 돌아갈 예정이지만 예상 외로 재정을 많이 쓰게 되어 나라의 곳간이 넉넉치 않습니다.”
“그 이야기라면 지난번에 송상을 이용하여 재정을 보충하기로 했던게 아니였는가?”
영조의 말에 박문수는 살짝 낙담한 얼굴이 되었다.
“하오나 전하, 송상에서 들어오는 재정보다 나가는 것이 더 많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던 영조는 문득 속삭이는 듯 한 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세자라면 어떻게 답을 할런지...”
- 작가의말
11월 1일 23:17분 기존 내용을 삭제하고 새로 작업하였습니다.
Comment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