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1화. 4강(1)
4강을 대비한 전술 회의는 이미 전에 끝냈기 때문에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다만 다시 한번 입을 맞춰 보고 조금씩 진형을 갖추어 움직여 보는 것이 지금 할 일이었다.
철혁 선배도 오늘만큼은 불만 없이 누나의 지시에 잘 따르고 있었다. 그만큼 오늘의 십인대전은 모두에게 자신의 성과를 보여 줄 좋은 기회이자 실력을 뽐낼 수 있는 자리였다.
전술 복습이 끝난 후 쉬는 시간이었다. 여은 선배가 우리를 보고 말했다.
"아, 너희들 십인대전 상위 입상팀한테는 상금이 걸린 거 알고 있어?"
엇,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십인대전 자체를 준비하는것만 생각했지 상금도 있다니?
"아니요!"
"거액은 아니지만 1등을 하면 꽤 좋은 곳에 가서 뒷풀이를 할 수 있을 정도야~"
"우와? 진짜요? 우리 무조건 이겨요!"
유나의 표정엔 굳은 결의가 보이는 듯 했다. 뒷풀이라니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이겨야 하는 이유가 하나 추가됐다.
그리고 또 이겨야 하는 이유, 마도경 자식이다. 이 녀석이 있는 십인대라고 하니 절대로 져선 안 되겠다는 생각 뿐이다.
"철혁 선배는 이 시간에도 영력 투입 연습인가."
해성이가 수련장 구석에서 목각인형을 상대로 주먹질을 하는 철혁 선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음..."
나는 손을 꿈지럭거렸다. 영력 투입을 위해 수도 없이 테니스공을 주물럭 거렸던 손이었다. 영력투입이 거의 될 듯 말 듯 줄다리기를 했지만 매일같이 지는 건 나였다. 달리기 결승선 바로 앞에서 숨이 차서 그대로 쓰러져 버리는 기분이었다.
해성이가 내 모습을 봤는지 말을 걸어왔다.
"영력 투입이 잘 안되고 있나."
"처음부터 잘 될 거란 생각은 안 했어. 그런데 나한테는 재능이 없나 봐. 눈 앞에 투명하고 얇은 벽이 하나 있는 기분이야."
"낙심하지 마라."
해성이도 막연히 잘 될 거라는 근거 없는 응원보단 위로를 해주는 것 같다. 하지만 난 의외로 욕심이 많아서 포기할 순 없어. 꼭 완성시킬 거야.
문득 시선을 돌려보니 십인대의 여자 조원들이 모여서 얘기를 하는 것이 보였다. 다섯 명이나 되니 은근히 왁자지껄한 느낌이다.
호준 선배는 부적을 늘어놓고 심사숙고하는 모양이네. 어차피 십인대전엔 부적을 갖고 가지도 못하는데. 어떤 부적술을 사용할지 고민하시는 중인가.
다른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수련장에 벌러덩 누웠다. 흙바닥이라서 머리에 흙이 묻긴 하겠지만 뭐 어때.
"아, 좋다."
누우니까 온 몸의 긴장했던 근육이 풀리는 것 같았다. 오전에 있었던 장기자랑의 후유증도 없어지는 기분이다. 아직 하루의 절반도 안 지났는데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다.
"피곤한가."
"아니, 그냥 눕고 싶었어. 조금 있다가 대전을 해야하니 가능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겠다는 거지."
해성이의 실소가 들려왔다.
"누워있는 것이 앉아있는 것 보단 낫겠다만 유의미 하진 않을 것 같다."
"너도 누워 봐."
"으음..."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해성이는 보다보면 의식적으로 하지 않는 행동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나도 이런 행동을 즐겨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아직 시간 여유 있을 걸? 십 분만이라도 누워 봐. 어차피 머리야 더러워지면 나중에 감으면 되지."
곧 이어 옆에서 털썩하는 소리와 함께 약간의 흙먼지가 올라왔다. 해성이도 누웠나 보다.
"쟤네들 지금 흙바닥에 누워있는 거야?"
"아웃 당하는 연습 하는 거 아니에요?"
"푸핫..."
우리를 보고 선배들과 유나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지만 잠깐 눈 좀 붙이자.
* * *
점심 시간이 끝나고 전교생이 보고 있는 운동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 이제 곧 십인대전 4강 시합을 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4강에서도 첫 번째 시합이었다. 맞은 편을 보니 마도경 자식이 먼저 눈에 띄었다. 동치미 한 사발 들이키고 싶은 느끼한 얼굴을 보니 지금이라도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번 상대할 도초아 선배의 십인대 대전에서 내 역할은 '별동대'였다. 측면을 파고 들어가 내게 시선이 쏠렸을 때 정면에서는 여은 선배의 '지'조가 상대의 본진을 휩쓰는 형태였다. 그리고 도초아 선배의 신체적 능력은 신수술에 비해 떨어질 거라고 판단해서 이번엔 수호석이 아닌 1조장을 아웃 시켜서 승리하는 전술을 쓰기로 했다.
당연히 1조장을 아웃 시키는 것은 나를 제외한 '천'조인 해성이와 유나, 그리고 '지'조인 2학년 선배들 세 명의 몫이었다.
나는 그저 뒤를 열심히 흔들어서 정신을 쏙 빼놓기만 하면 된다. 힘 내야지.
차례대로 줄을 서서 상대 팀과 인사를 한 뒤 정해진 대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부터는 우리의 전력이 모두 노출 될 것이다. 사뭇 예선전과는 다른 기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 긴장감을 주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희열이 느껴지기도 했다.
관심을 받는다는 건 부담스럽지만 생각보다 기분 좋은 일일 지도 모른다.
"자, 자, 이번에도 잘 해 보자!"
수호석 앞에 서 있을 누나의 목소리였다. 나는 차분해지기로 했다. 눈 앞에 맨 앞에서 마주보고 서 있는 마도경 자식이 눈에 띈 탓이었다.
"저쪽 1학년들도 우리들처럼 '천'조 인 것 같다."
"그러게, 의왼데. 아니, 마도경 성격을 보면 애초에 통제가 안 됐던 걸 지도."
해성이의 말에 괜히 입을 비죽거렸다. 요새 마도경은 조용히 다니며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한 적은 없지만, 어쩌다 마주칠 때마다 꿍꿍이가 가득한 면상을 보고 있자면 내 속이 비틀렸다.
나와 마도경의 관계는 그저 마주치는 것 만으로도 구역질이 나오는 그런 사이인 거다.
"조심해..."
유나가 불안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마도경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손바닥 유나에게 보였다. 괜찮다는 신호였다.
"자, 시작한다."
이번 대전의 심판인 차유경 선생님의 휘슬이 울렸다.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시합장 내의 모든 인원들이 차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방울을 흔들어 적술 세 마리를 소환했다. 그리고 측면으로 내달렸다. 나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최소 두세 명은 와야 할 거야.
붓으로 만들어 낸 문양들이 빛나고 냉병기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기합 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내가 목표로 해야 할 곳은 도초아 선배가 있는 '인'조다.
"어딜 가냐? 호위기사 짓은 때려쳤나 봐?"
눈 앞에 마도경이 보였다. 분명 이 자식은 '천'조일텐데 내 앞에 있다는 건 그냥 나를 따라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도경의 말은 무시해야겠다. 내 방울이 짤랑거리자 적술들은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도경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앞에서 날아오는 빙결부들이 적술들을 차례차례 맞추기 시작했다. 마도경의 뒤를 쳐다보니 은설이가 나를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적이야! 전력으로 갈 거야!"
은설이의 말에 미간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상대하기 위해 두 명이 왔다는 건 우리 십인대의 전략이 얼추 맞고 있다는 지표지만 반대로 나에겐 두 명을 상대해야 하는 압박감이 몰려왔다.
방울을 살짝 흔드니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 대결에서는 웬만하면 불꽃 도깨비는 아껴야지. 결승전을 위해서 말이야.
정석대로의 전술이라면 지금쯤 해성이와 유나가 나를 지원하러 와야겠지만 지금은 나 혼자서 얘네들과 맞서야 해. 좀 더 신경을 긁어서 시간을 끌자.
"'천'조 같아 보이는데 여기까지 와서 날 막고 있는거 보니까 내가 신경 쓰이긴 했나 보네."
"뚫린 입이라고 허세 부리고 있네? 너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돼?"
일부러 속을 긁는 말을 했더니 마도경은 여유롭게 씨익 웃는 표정이었다. 숫자로 우월하다고 다 이겼다고 생각하나 봐?
근데, 난 신수사라고.
빙결부에 맞고 낑낑거리는 적술들을 돌려 보낸 뒤에 이번엔 '적인'을 불러냈다. 거대한 불꽃 호랑이가 나와 마도경 사이에 소환 되자 은설이의 경악한 표정이 보였다.
"저... 적인이라고?!"
시합장 밖에서도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앞으로 내가 상대 할 사흉수에 비하면 너희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적인은 그대로 앞발을 마도경에게 휘둘렀다.
"피, 피해! 도경아!"
마도경의 표정이 흠칫하더니 그대로 몸을 데굴 굴러서 피하자 바닥이 적인의 앞발에 의해 움푹 파였다. 가공할 완력이네. 만족스러워.
은설이의 보호부가 마도경의 몸을 감싸는 것 같았다. 보호부를 아무리 겹쳐도 소용 없을거야, 은설아.
"적인은 내가 상대할테니 마도경, 넌 신수사를 공격해. 백은설은 나 대신 본대를 지원하고."
"네... 네!"
갑자기 들려오는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였다. 힐끔 바라보니 도초아 선배가 거대한 원숭이 신수를 대동한 채로 다가오고 있었다.
시선을 더 넓게 돌려보니 우리 십인대에서도 나를 지원하러 오는 듯 했다. 정확히는 목표인 1조장 도초아 선배를 공격하기 위해 오는 것이겠지.
우리팀 수호석을 바라보니 누나가 아직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서진 선배와 소윤 선배는 보이지 않았다. 그 말인 즉, 우리 십인대 여덟 명과 적 십인대 아홉 명의 싸움이 지금 이 근처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그 중 두 명은 내 앞에 있고 말이지. 내가 잘 붙들고 버텨내기만 하면 우리팀이 유리한 건 틀림 없어.
"우오!!"
차가운 기운을 띠고 있는 거대 원숭이 '흑신'이 힘찬 함성을 내지르더니 그대로 적인의 목덜미를 조르려고 했다. 속성은 불리하지만 적인은 지지 않고 그대로 몸을 일으키며 양 앞발을 치켜세웠다. 이윽고 쾅하는 소리와 함께 적인과 흑신이 시합장을 울리며 싸우기 시작했다. 상당한 크기의 신수들이 싸우는 장면은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장관이겠지만 감상할 새도 없이 곧 내게로 뛰어오는 마도경의 모습이 보였다. 장검을 뽑아든 채로 나를 내리치려는 모양새였다.
나는 왼손으로 방울을 흔들면서 오른손으로는 부채를 꺼내 들었다. 내 몸은, 내가 지켜야지!
"죽어버려!"
마도경이 점프해서 나를 향해 검을 내려쳤다. 나는 부채에 영력 투사를 해서 막아냈다. 마도경의 흰색 기운은 '금' 속성이다. 나의 '화' 속성 영력이 더 유리하다고!
부채에서 불꽃이 튀겼다. 장검에 실려있던 금 속성 기운이 일부 소멸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별 것도 아닌게 어떻게 4강까지 올라 왔냐?"
웃음이 새어나왔다. 지난 번 마도경과 싸웠을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마도경의 일격은 내게 조금의 흔들림조차 주지 못 했다. 마도경의 표정이 분노로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잠깐 신수전이 벌어지는 곳을 살펴보니 흑신이 바닥에 쓰러져 있고 적인은 쓰러진 흑신을 이리저리 공격하고 있었다. 도초아 선배의 얼굴도 일그러져 있었다.
"빌어먹을 새끼..."
마도경은 나를 향해 장검을 마구 휘둘렀다. 힘만 들어간 막무가내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고. 검을 상대로는 이미 해성이와의 수많은 대련으로 터득한 경험도 있고 말이지. 불과 얼마 전 까지도 이런 녀석에게 쩔쩔맸다니 그 때의 난 얼마나 약해 빠졌던 거야?
방울을 쥐고 흔들며 부채를 가지고 어렵지 않게 마도경의 장검을 막아내자 자신감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약이 오른 듯 마도경의 시뻘개진 얼굴을 보니 마음이 흐뭇하고 속이 다 시원하다.
"비켜라, 마도경!"
마도경의 뒤쪽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작품은 픽션입니다. 나오는 지명이나 단체, 인물은 실존하는 것과 일체 관계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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