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화. 코인 노래방(1)
"...내가 잘못 본건 아니지?"
유나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나도 그랬다. 그 차에서 수린이가 걸어 나왔고 운전 기사처럼 보이는 사람이 에스코트 하고 있는 것을 보니 말이다.
해성이는 안경을 고쳐쓰더니 말했다.
"이미 와 있었나 보군."
감상이 그게 다냐고.
수린이는 운전 기사에게 뭐라고 하더니 그대로 우리들에게 걸어왔다. 운전 기사는 그대로 다시 차에 탑승했고 차는 어디론가 가 버렸다.
수린이가 우리들에게 가까이 올때까지 뭐라 반응할 틈이 없었다. 수린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뭐? 왜?"
차갑다.
그 말에 퍼득 정신을 차린 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니, 아무것도. 자, 그럼 다 모였으니 가볼까."
이 조합을 어떻게 이끌어야 할 지 조금 막막하다. 수린이와 유나는 약간 데면데면한지 전혀 말을 안하고 있었다. 해성이는 애초에 붙임성 있게 말을 거는 타입이 아니니, 결국 이 조합의 운명은 내가 쥐고 있는거군. 흐아.
우리는 유나가 추천하는 분식집으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가면서 자꾸 시선이 우리 일행에 모이고 있는게 신경 쓰인다. 정확히는 앞서 걷는 유나와 수린이에게 말이다. 뒤에서 걷고 있어도 시선이 느껴질 정도인데 늘 이런 시선을 받는 걸까.
유나가 종종 수린에게 말을 붙이려고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 같았다. 수린이도 딱히 싫지는 않은지 고개를 끄덕이거나 적당히 대답하고 있었다. 다행인가.
"어쩌다 수린이를 알게 된 건지 말해줄 수 있나."
해성이가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사실대로 말해주긴 좀 그렇긴 한데. 문득, 별관 옥상에서 있던 일이 다시 떠올랐다. 옥상에서 떨어지던 수린이의 표정이 다시금 생각났다.
"말그대로 어쩌다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할뿐이었다. 해성이도 더 이상은 안 물어보기로 했는지 그런가하곤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렸다.
눈 앞에 유나가 말했던 분식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딱 봐도 간판부터 새빨간 것이 엄청 매운 떡볶이를 팔 것 같은 분식집이었다.
"짜잔, 여깁니다! 여러분!"
유나는 마치 해외 여행 가이드라도 된 것 마냥 우리들을 향해 팔을 번쩍 들어올리며 말했다. 내가 다 부끄러워.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분식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내게 쿨하게 무시당한 유나가 방방 뛰는 소리를 뒤로 하곤 우리를 맞이하는 주인 아주머니에게 손가락 네개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4명이요."
"이쪽으로 와서 앉아요. 학생들!"
내 뒤로 일행들이 들어왔다. 아주머니가 안내한 자리는 4인석이었는데 내가 먼저 한 쪽 자리 안으로 들어가자 해성이가 내 옆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반대편은 수린이와 유나가 앉은 모양이 되었다.
해성이 녀석 덩치가 크다보니 내 자리가 좁다. 크.
"내가 주문한다?"
유나가 자신스럽게 메뉴판을 들곤 우리들에게 말했다. 딱히 뭘 골라야 할 지도 모르니 고개를 끄덕였다. 수린이는 뭐가 신기한 건지 주변을 자주 두리번거렸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유나는 능숙하게 아주머니를 불러 메뉴를 불렀다. 뭔가 굉장히 많이 시키는 것 같은데, 기분탓이겠지. 이후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의 시간은 수다 시간이었다.
"담임 선생님 너무 무서워. 진짜, 어쩔때는 호랑이도 '미안합니다.' 하고 도망칠거 같다니까?"
유나가 과장된 자세를 하며 말하자 수린이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우리반 담임은 신주호 선생님이야. 다들 알고 있지?"
수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반 담임이 호랑이라면 2반 담임은 곰이로군. 주호 선생님이 거대한 덩치에 안 어울리게 껌종이 같은 부적을 이리저리 태우시던 모습이 눈 앞에 펼쳐졌다.
"그래서 우리반 애들이 진짜 무서워 했는데 알고보니 순한 곰, 아니 순한 양이더라."
"진짜? 부럽다아."
유나와 수린이가 대화하는 걸 보고 있자니 수린이와의 첫 만남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평범한 느낌인데 왜 그땐 '별관 옥상 그림자' 사건까지 만들었던 걸까.
그리고 그 원인이 뭔지 문득 떠올랐다. 츠쿠모가미다. 그 빨간 구두 말이지. 뭐, 아직 확실한 건 아니긴 하지만.
"수린이는 삼사 중 어떤 과정을 지망할 생각인가."
약간 대화가 소강상태가 되자 해성이가 수린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수린이가 해성이의 말투에 놀란 것처럼 동그랗게 눈을 뜬 것을 보니 재밌다.
"신수사를 생각하고 있어."
"그런가, 신수친화력이 좋은가 보군."
해성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린이는 그런 해성이의 말투에 처음엔 놀란 것 같았지만 모두가 가만히 있자 적응이라도 한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소?
"말투가 독특하네. 원래 그래?"
수린의 말에 해성이와 나는 자연스럽게 눈을 마주쳤다. 해성이의 눈빛은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이걸 또 설명해야 되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애석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 표정에 자포자기한 듯, 해성은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나와 유나에게 했던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수린이는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나서야 수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정도 이해는 했나보군. 근데, 그게 바로 돼?
"오래 기다렸지, 학생들?"
그렇게 생각할무렵 아주머니가 음식을 우리들 앞에 놓기 시작했다. 한가운데에는 떡볶이가 놓였는데, 빨갛다 못해 검붉었다. 어떻게 하면 떡볶이가 이런 색이 되지?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하지만 유나를 보니 매우 행복해 보인다. 매운 걸 진짜 좋아하나 봐.
아주머니가 놓고 간 음식들을 지켜보다 가장 만만한 순대를 하나 집어 소금에 찍어 먹었다. 유나는 떡볶이부터 집어서 먹는데 안 매운가?
하나를 오물오물 씹던 유나는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맛있나?"
해성이도 의아해하며 떡볶이를 하나 입에다 넣었다. 그리고 곧 얼굴이 시뻘개지더니 물을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괜히 웃음이 나온다. 그러다 유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오싹하다. 방금 살짝 섬짓한 미소를 본거 같아.
"너도 하나 먹어 봐."
"오... 괜찮을까."
떨떠름한 표정을 짓곤 떡볶이를 하나 젓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빨간 국물이 뚝뚝 흐른다. 눈을 딱 감고 음미하자 별이 보였다.
진짜 별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스흐흐흐흡!"
숨을 거칠게 빨아들인 뒤 빠르게 마실것을 찾았다. 물을 찾아서 먹는데 눈 앞에 유나가 음흉하게 웃고 있는 게 보였다. 일부러 매운 걸 시킨 거구만?
수린이도 나와 해성의 얼굴을 번갈아보더니 자기도 하나 집어 올렸다. 유나가 뜨악한 표정으로 말리려고 했지만 떡은 이미 수린이의 입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수린의 얼굴이 처음엔 무표정이었다가 점차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하더니 손을 들어올려 입 안에 부채질을 시작했다. 게다가 눈물까지 그렁그렁... 뭐?
"수, 수린아! 이거 마셔, 마시면 괜찮아!"
놀란 유나가 자신의 앞에 놓였던 슬러시를 수린에게 건넸다.
수린이가 재빨리 슬러시를 받아 몇 모금 마시자 그제야 좀 괜찮아 진 듯 한숨을 내쉬었다. 유나의 표정은 미안함으로 가득이었다.
"원랜 쟤네들만 먹이려고 한 건데..."
유나가 말끝을 흐리며 말했다. 그럴 줄 알았지.
"우릴 매운 맛으로 죽이려고 한거야?"
"그래, 매운 맛을 보여주려고 했다!"
내가 비아냥대듯 말하자 유나는 혀를 빼꼼 내밀고 말했다. 수린이는 눈가에 맺혔던 눈물을 닦아 내곤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어."
"나도 그렇다."
수린의 말에 해성이도 지금은 괜찮은 듯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 말에 유나는 다행이라는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난 안 괜찮은데."
"넌 그래도 돼."
내 말에 유나가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나하고 수린이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잖아!
그렇게 우리는 유나가 알려 준 매운 맛의 신지평을 경험한 뒤 평범한 떡볶이를 다시 시켰다.
* * *
이제 코인 노래방을 가야 할 시간이다. 분식집 밖으로 나와서 길거리를 헤매다 적당해 보이는 코인 노래방을 찾았다. 들어서자마자 방음부스를 뚫고 나오는 괴성이 들려왔다. 노래를 부르는 건 맞겠지?
"어디로 들어갈까?"
유나가 발꿈치를 들어올려 좀 더 멀리 보려는 듯 주위를 살폈다. 수린이는 처음이니까 조금 신기한 듯이 쳐다보고 있는데 해성이는 눈을 감고 명상중이었다. 이 시점에 명상을 하고 있는 이유가 뭐냐.
"저기 안 쪽은 어때?"
유나가 제일 안 쪽에 어둡고 비어있는 부스를 가리켰다. 모두들 동의한 듯 그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부스 안은 넓진 않았다. 당연하지만 4명이 들어가기엔 상당히 비좁았다. 2인용 의자 2개가 나란히 있었는데 나하고 해성이가 앉으면 아주 꽉 찰 것 같았다.
"음, 나하고 자리를 바꾸지. 유나."
해성이가 턱을 매만졌다. 아마 해성이도 나와 앉으면 자리가 터져나갈 거 같다는 생각을 했나보다. 유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와 유나가 한 의자, 해성이와 수린이가 한 의자에 앉게 됐다.
"조오았어, 그럼 누구부터 부를래?"
유나의 의지가 충만한 느낌인데. 유나의 말에 수린이는 약간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처음은 안 하겠다는 뜻이로군. 해성이는 진지한 얼굴로 노래 책자를 살펴 보고 있었다.
유나의 시선은 내게로 돌려졌다.
첫 번째로 할 사람이 아무도 없나보군. 유나도 딱히 먼저 하고 싶은건 아닌 거 같고.
"글쎄? 오랜만이라 딱히 떠오르는 노래가 없긴 한데. 어디."
이럴 땐 누구라도 첫 곡을 불러 줘야 다른 애들도 노래 고를 시간이 생긴다. 마침 부르고 싶은 노래도 생각 났으니까 도전!
리모콘을 들고 번호를 눌렀다. 익숙한 전주가 흘러 나오며 부스 안이 어두워졌다. 마이크를 잡고... 전주 점프가 어딨더라.
노래가 시작되자 유나는 노래 찾는 걸 멈추곤 가사가 나오는 모니터를 멍하니 쳐다봤다. 해성이가 뭘 부를지 결심한 듯 리모콘을 들고 번호를 입력하는 것이 보였다. 수린이는 아직까지 못 찾은 것 같네.
내가 노래를 아주 잘 하는건 아니지만 어디가서 못 부른다는 소리를 듣지도 않는다. 음, 평범하다고 해야 하나. 역시 고음이 나오는 부분은 내 성대가 버티기 힘들어 한다. 이제 클라이맥스다.
"어떤 시련에도 버티고 또 버텨내, 우리 둘이 서로 손잡고 미래를 향해 가자. 영원히~"
내 노래가 끝나자 모니터에는 점수가 나왔다. 96점이군. 만족스러웠어.
유나가 박수를 짝짝쳤다. 멋쩍게 자리에 다시 앉았다. 나도 모르게 이 노래를 부를 때는 일어서게 된다니까. 이 좁은 부스 안에서도 말이지.
"기계가 고장났나?"
"뭐?"
"농담이야, 생각보다 잘 부르네?"
"음치일 거라고 생각했던거야 설마?"
자리에 앉자마자 유나가 한마디 하길래 받아줬다. 생각보다라니 본인은 얼마나 잘 부르는지 내가 확인해주마.
곧 해성이가 선곡한 노래의 전주가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이 노래는... 고음으로 유명한 가수의 노래다. 여자 음역대까지도 올라간다는 전설의 명곡인데. 이걸... 해성이가?
전주가 나오자 유나도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이 노래를 설마 해성이가 선곡할 거라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을테니 말이야.
해성이가 첫 소절을 부른 순간, 나는 등줄기부터 시작된 전율을 느꼈다. 엄청난 내공이 느껴진다. 목소리의 울림부터가 나와는 다르다.
수린이조차 노래 찾는것을 멈추고 멍하니 해성이를 바라보고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 노래의 클라이맥스는 숨이 가쁠 만큼 긴 호흡으로 유명하다.
"널!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나의 마음을 잊지- 말아줘."
깔끔하게 노래를 끝낸 해성의 마이크는 꺼졌다. 그리고 나오는 모니터의 점수는 99점이었다. 이게 99점이라니. 100점을 줘도 모자를텐데.
"어, 엄청 잘 한다, 가수 같아! 보컬 트레이닝 받은거 아니지?"
유나가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해성에게 엄지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쩐다. 이 두글자로 설명 가능!"
"칭찬들이 과하다."
해성이가 쑥쓰러운듯 헛기침을 하며 몸을 웅크렸다. 귀여운 녀석.
이제 유나의 차례인듯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유나가 선곡한 노래는, 요즘 한창 유행중인 여자 아이돌 그룹의 노래인 것 같은데?
이 작품은 픽션입니다. 나오는 지명이나 단체, 인물은 실존하는 것과 일체 관계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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