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숙한 아이 - 3
![DUMMY](http://cdn1.munpia.com/blank.png)
다음날 오후……. 엄마가 해주는 점심을 먹고 하루 종일 방바닥에서 뒹굴 거렸다. 이 시간에 공부라도 하면 좋으련만, 내 방에는 공부를 할 만한 교재가 없으니 그냥 아까운 시간만 흘러가는 것이다.
교재를 구한다 쳐도 문제다. 그걸 그냥 가지고 있기에는 부모님의 시선이 부담스럽고, 그렇다면 위인전기나 동아전과 같은 책 사이에 끼워버리던가 해야 하는데…….
교재 살 돈을 준비하는 것도 문제다. 지금 물가로 보아 책 한권에 3~4천 원 정도 하는 것 같은데, 그것도 과목마다 있어야 하고……. 하지만 초등학교 2학년생이 그런 돈을 어디서 모아야 하는지도 참…….
정중히 부모님에게 자습서를 사달라고 말 할 수는 있고, 그렇게 하여 초등교과정을 건너뛰고 바로 중등, 고등으로 갈수야 있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부모님의 기대치는 끝을 모르게 상승 할 것이다.
하지만 이만하면 다행이지 학교에서도 분명 천재가 나타났다고 현수막을 걸어놓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나는 그것에 부응하기 위해 머리 터져라 공부를 해야 할 것이고, 게다가 고등학교를 벗어난 공부에 대해서는 분명 한계를 드러날 테니 주변에서 느껴지는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내 생각에는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노는 척 하다가 고3때 바싹 공부하는 척 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이 우리가족이 행복해 질수 있는 방법이다.
나는 하도 심심해서 거실에 있는 TV를 틀었다. TV가 특이하게 화면이 볼록하게 튀어나왔다. 이게 언제부터 평면으로 바뀐 거지?
TV는 역시나 채널이 네 개다. 오직 공중파밖에 볼 수는 없다. 난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KBS1TV에서 멈췄다. 막 송해 선생님이 사회를 보는 전국노래자랑이 끝나고 있었다.
“아~ 이게 이때도 했던 프로야?”
나는 흥미 있게 보고 있었다. 하지만 전국노래자랑은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그리고 KBS1TV의 특성상 광고 없이 바로 다음 프로로 건너뛰기 시작했다. 다음프로는 ‘날아라 슈퍼보드’였다.
“오오~~ 이거 오랜만이네.”
나는 TV앞으로 바짝 다가가 추억의 만화영화를 감상하기로 마음먹었다.
-치키치키챠카챠카쵸코쵸코쵸! 치키치키챠카챠카쵸코쵸코쵸! 나쁜 짓을 하면은~~
구수한 노래가 내 어깨를 들썩인다. 난 신이 나서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해도 난 적응력이 빠른 것 같다.
그렇게 날아라 슈퍼보드를 재미나게 감상 후가 되니 다시 할 게 없어졌다. 보통 이 시간에 TV에는 평일 밤에 방송했던 드라마를 재방송 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드라마가 참……. 사람들 모습이 너무 촌스러워서 흥미가 떨어진다.
할 것이 없어지자 나는 다시 내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군대에 있어서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 치지만, 아무리 그래도 컴퓨터와 인터넷, 핸드폰이 없는 시절이라니! 정말 할 것도 없고 심심하기만 하다.
스타크래프트가 언제 발매되었지? PC방은 언제부터 생겨났지? 제발 그것만이라도 나왔으면 좋겠다.
그렇게 얼마동안 누워있었을까? 엄마가 우리 방으로 왔다.
“동우야 엄마랑 밖에 나가자.”
“밖에?”
그래, 심심한데 그냥 바깥구경이나 하면서 시간을 때워야겠다. 난 그렇게 생각했다.
“응. 엄마랑 같이 시장도 보고, 목욕도 가자.”
응? 시장보고 그 담에 뭘 한다고? 목욕? 헉!!
엄마와 함께 목욕이라 함은 여탕을 간다는 뜻이고, 여탕이라 함은 남자들의 로망이 아닌가!
난 이 순간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마치 꿈만 같다. 꿈인지 생시인지 볼이라도 꼬집어보고 싶지만, 엄마 앞이라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순간 너무 기뻐서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웃으면 안 된다.
동우야! 넌 웃으면 안 돼!
미칠 듯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막으려 난 겨우겨우 참아내고 있었다. 그 때문에 눈물도 찔끔찔끔 세어 나오는 것 같다.
“아들, 엄마랑 목욕가기 싫어?”
겉으로 드러나는 내 표정이 이상했는지 엄마가 걱정스런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아니!! 나 엄마랑 같이 목욕 갈꺼야!”
이 좋은 기회를 날려버릴 내가 아니지. 나는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강한 부정을 했다. 그제야 엄마가 웃었다.
“그래,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나가자.”
그리고 엄마가 내 옷을 챙겨서 갈아입혀주었다. 초등학교 2학년생인데 난 아직도 옷 하나 제대로 못 갈아입었던 거야? 내가 성장이 조금 느렸나보네.
목욕 갈 준비를 모두 끝마치고, 나는 엄마 손을 꼭 붙잡고 목욕탕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날씨가 참으로 포근했다. 하늘의 맑은 햇살이 나의 타임리프를 축복해주는 것 같았다. 귓가에서는 초원의 활기찬 음악이 들리는 것 같고, 세상 사람들이 전부 밝게 웃고 있었다.
정말이지 군대를 다시 한 번 가는 한이 있더라도, 타임리프는 정말 해봄직한 것이었다.
목욕탕 입구 계산대에 도착했다. 오른쪽이 남탕. 왼쪽이 여탕이다. 이제부터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난 왼쪽으로 가겠지?
“어른하나 어린이 하나요.”
엄마가 오천 원짜리 지폐를 냈다. 목욕탕집 주인아줌마가 힐끔 내 얼굴을 보고는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다.
“나이가 조금 찬 것 같은데…….”
“아니에요 이제 6살이에요.”
엄마도 나랑 같이 목욕탕에 들어가고 싶었는지 9살인 나보고 6살이라고 해줬다. 이건 순전히 성장이 더딘 나도 한 몫을 하겠지? 이럴 때 나도 도움을 줘야 한다. 절대로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음흉한 표정을 지으면 안 된다.
순진한 사슴의 눈망울처럼 초롱초롱하게 주인아줌마를 쳐다보았다.
“그런가?”
주인아줌마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엄마의 말을 믿기로 했다. 그리고 난 통과가 되는 것이다.
엄마와 나는 발걸음을 옮겨 여탕 입구로 향하기 시작했다. 불투명 유리문에 쓰여 있는 큼지막한 빨간색 글자.
여! 탕!
그 두 글자가 나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든다.
점점 여탕입구와의 거리가 좁혀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엄마의 손이 손잡이에 맞닿았다. 난 너무도 긴장한 나머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서서히 여탕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틈 속에서 눈이 부실 정도의 강렬한 빛이 세어 나오고, 내 안면에 따뜻한 바람이 품어져 나와 내 머리카락을 흩날리게 한다. 그리고 코에서 느껴지는 향긋한 향기……. 정녕 이곳이 낙원이 아니라면 그 어디가 낙원이겠는가!
Comment '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