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숙한 아이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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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남자들은 전역할 때쯤이 되면 이런 고민들을 한다.
그동안 이루어 놓은 것도 없는데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나도 그 부류에 속했다.
수능 대충보고 꿈과는 상관없이 점수에 맞춰서 학교가고, 대학가서는 빈둥빈둥에 밤에 마실 술 생각과 예쁜 여자 자빠뜨릴 생각만 하고……. 하지만 이래서는 안 된다. 반드시 인생을 바꾼다.
94년도면 나는 지금 아홉 살.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기 때문에 학용품이 있을 것이다.
난 방안을 뒤적이며 필기구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찾은 연필과 글씨쓰기 연습장.
맨 위 칸에 엄마, 아빠, 나비, 바다 이런 것이 쓰여 있는 연습장에 나의 미래를 설계하기로 다짐했다.
큰 목표를 그리자면 내가 해야 할 것은 두 가지다.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에 부를 축적해야 하고, 모든 것을 기억하기 때문에 지금부터 수능공부를 하는 것이다.
로또복권의 당첨번호가 기억나지 않지만, 군 시절에 재테크에 관한 책을 보았기 때문에 앞으로 2008년까지 돈을 벌 수 있는 대략적인 경제흐름을 알고 있다. 예를 들자면 IMF때 우량주식을 사둔다던가, 앞으로 개발이 될 신도시. 그리고 중국펀드를 비롯한 펀드열풍들!
전역하기 전에 정권(MB를 뜻하는 것입니다)이 바뀌고 주가 폭락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대략적으로 손을 털 타이밍까지 알고 있는 지금, 돈을 모으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종자돈이 필요하니 일단 자금이 많이 드는 부동산은 패스한다. 첫 번째 돈을 불릴 수 있는 타이밍인 IMF는 내가 초등학교 때 일어날 일이니 도저히 어찌 해 볼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시기에 내가 돈이 급하게 필요한 것도 아니니, 부모님한테 은근슬쩍 주식투자를 권유하는 것으로 간다. 그 다음이 바로 중국을 비롯한 펀드투자!
이때까지도 내가 미성년내지 대학교 1학년생이 되겠지만,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서도 돈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현금거래가 활성화된 온라인 게임 ‘리니지’이다. 내 인생을 망친 것에 어느 정도 기여를 한 리니지가 인생 역전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 것이다.
리니지로 노가다를 해서 돈을 벌 것이냐고? 천만에! 내가 2008년도에 왔듯이 리니지에서도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첫 번째가 바로 양손검이라는 아이템.
리니지 초창기 양손검은 일본도라는 초창기 리니지 국민검에 밀려서 천대받던 시절이 있었다(지금도 천대받지만). 그때는 유저들이 양손검을 땅에 버린다거나, 거래를 하더라도, 100아덴(리니지화폐) 안 밖의 저렴한 가격대가 형성이 되었다. 그러던 그것이 업데이트를 통해 상점에서 9800아덴으로 사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무려 98배가 뛴 가격이다.
양손검의 가격이 이렇게 오를 때까지 모은다고 치면, 한 계정에 캐릭터 슬롯 세 개(초창기에는 세 개였음)를 전부 군주로 하여 혈맹을 창설하고 창고에 맡긴다면 혈맹창고에 총 300개, 개인 창고 100개로 400개를 보관 할 수 있다. 이때 필요한 자금은 겨우 4만 아덴. 그리고 업데이트 후에 팔고 나면 392만아덴.
그때 현 거래를 어떤 비율로 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최소한 100만 아덴 당 6만 원 이상은 호가했다. 그러니 최소한 현금 20만원을 버는 셈이다. 게다가 다른 서버에서도 할 수 있으니 내가 마음만 먹고 달려든다면 학생의 신분으로 100만원 이상을 벌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멈춘다고? 아직 내가 기억하고 있는 아이템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양손검보다 더 대박인 바로 마나지팡이! 마나지팡이가 나왔을 당시 이것을 구하기가 어렵지 않아 만 아덴을 넘지 않는 저가이면서도 실속 있는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업데이트로 인해 더 이상 물량이 풀리지 않으면서 98배가 뛰었던 양손검보다 더 높은 배수인 수백 대까지 가격대가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 나는 양손검으로 벌어들였던 아덴을 고이 모셔두었다가 모조리 마나지팡이를 구입하여 업데이트 이후에 되파는 것이다. 이렇게만 된다면, 추후에 중국펀드에 투자할 종자돈은 확실하게 모이게 된다.
물론 다른 아이템이 더 있을 수도 있지만, 일단 내 기억 속에는 두 가지 아이템이 생각나고,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종자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과한 욕심은 피한다.
난 이런 사실들을 까먹지 않기 위해 연습장에 돈을 벌 사건과 그 시기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이 수능공부에 대한 것. 나는 중학교 때까지 아무 생각도 없이 놀다가 고등학교에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기본이 부족했었다. 지금은 수능을 볼 때까지 10년이라는 짱짱한 시간이 있기 때문에 기본부터 착실히 다져나갈 생각을 했다.
예전에 주경야독을 8년 해서 서울대 간 사람도 있었다. 10년이면 수능에 전공공부까지 마스터할 시간이다. 불가능은 없다!
“우리 동우 뭐해?”
갑자기 엄마가 내 방에 들이 닥쳤다. 나는 화들짝 놀라면서도 엄마에게 나의 메모를 보여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재빠르게 연습장을 덮었다. 하지만 한 가지 실수한 부분이 있었다.
“병장 이동우!”
난 자리에 벌떡 일어나면서 절도 있게 관등성명을 말했다. 난 이제 막 전역을 한 예비역 병장이었을 뿐이다. 아직 군대의 말버릇이 남아 있었다.
엄마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애가 약을 잘못 먹었나? 하는 표정이었다.
“전방 수류탄! 적군이 사살되었습니다.”
난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전쟁놀이를 하는 것처럼 위장했다. 그런데 위장 한다는 게 스페셜 포스 따라 하기냐! 하긴 이때는 그 게임이 없으나 알아차릴 방법도 없지.
엄마가 나의 이런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동우 전쟁놀이 하는 거야? 아까 관등성명 한 거는 너무 진짜 같던데…….”
“관등성명? 그게 모야?”
난 정말로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제야 엄마의 의심이 풀어졌는지 웃었다.
“응 군인아저씨들이, 자기 이름 말하는 거야.”
“아하~ 그렇구나.”
난 TV유치원 하나둘셋이나, 뽀뽀뽀에 나오는 아이들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하는 척 해줬다.
“우리 동우 저녁 먹자.”
“네에~”
엄마가 먼저 방을 나가자, 나는 재빨리 메모 해 놓은 연습장을 침대 아래에 숨겨 놓고 따라 나섰다.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말투고치기 인 것 같다.
주방에 가자 아빠가 있었다. 아빠도 이때 보니까 정말 젊게 보인다.
식탁위에는 갖가지 반찬들이 놓여 있었다. 먹음직스럽게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 하며 계란말이며 기타등등!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내 밥그릇이 심하게 작았다는 것뿐이었다. 이걸로 충분하나?
“잘 먹겠습니다~”
아무튼 난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었다. 타임리프 때문인지 허기가 든 참이었다.
나는 다른 생각 없이 열심히 먹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부모님이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동우~ 이제 젓가락질도 잘 하네~”
이런……. 내가 너무 긴장을 풀었나? 어린이인척 하기 위해서는 이것저것 세심하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구나.
난 하루 만에 모든 것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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