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숙한 아이 - 11
드디어 초딩의 겨울 방학이 시작되고, 94년에서 95년도로 넘어갔다. 올해로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이 되는 것. 슬슬 중학교 과정 공부도 마무리 지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과정으로 넘어간다. 우선 사회 과목은 뺀다.
내가 수능을 볼 때는 7차 교육으로 사회과목이 11과목으로 늘어나서 그 중에 4개를 골라 수능을 친다. 하지만 지금 사회는 11과목이 전부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시중에 풀린 고등학교 사회 교재로 공부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더군다나 사회 과목은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해도 충분하니 언수외 위주로 공부를 하는 것이다.
책꽂이에 꽂혀있던 위장 중학교재들은 전부 고등학교 교재들로 바뀌었고, 교재 값을 모으기 위해 또 열심히 아빠의 구두를 닦았다.
방학이 되니 공부할 시간이 많아져서 좋았다. 그래도 너무 집 안에만 틀어 박혀 있으면, 엄마가 걱정 할 수도 있으니 가끔씩 나가서 애들이랑 놀기도 했다.
집 안에서 공부를 하다가 지치면 잠시 TV를 틀었다. 우리 집은 유선방송을 신청한 집이라 겨울방학이 되면 낮 시간에도 만화를 틀어주었다. 그럼 예전에 방영했던 만화를 보면서 시간을 때우는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만화들이 많았다.
시간탐험대(돈데기리기리 돈데기리기리 돈데크만! 하면 다 알거다.)
보거스(거울 속을 왔다 갔다 하는 녀석)
톰과 제리(불쌍한 우리 제리……. 아니 톰!)
피구왕 통키(아빠가 피구하다 죽었다는 전설의 만화. 그 시절에는 피구 공에 새겨진 불꽃 마크에 손가락을 맞추면 불꽃 슛이라도 나가는 줄 알았다.)
축구왕 슛돌이(시저의 총알 슛이 골키퍼의 몸을 밀고 골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참 신기했다)
슈퍼 그랑죠(이건 배경음악이 좋다)
달려라 부메랑(이게 94년도에 방영했구나. 어쩐지 밖에 돌아다니면 초딩들이 개나 소나 미니카 들고 있다 했어)
등등. 심심해서 틈틈이 본 만화만 이정도이다.
한 번은 엄마, 아빠와 함께 눈썰매도 타러갔다. 역시 눈썰매는 겨울방학의 묘미였다.
타임리프 이후 그럭저럭 적응하면서 잘 보낸 것 같았다. 내 정신연령이 낮아서 그런지 애들이랑 어울리면서도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다행이라 생각했다.
어느 날이었다. 나는 어김없이 부모님 몰래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엄마가 불렀다.
“동우야!”
“네?”
갑자기 왜 부르지? 일단 책을 덮고, 우리 방을 나와서 엄마한테 향했다. 엄마는 안방 화장대에서 화장을 하고 있었다.
“엄마랑 같이 외출해야 하니까, 옷 입어.”
“밖은 왜요?”
“응, 잠깐 갈 데가 있어.”
“갈 데?”
엄마가 대답하지 않자, 약간 궁금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그리고 난 내방으로 들어가서 외출복을 입었다. 1월이라 밖은 춥기 때문에 든든히 입어야 했다.
엄마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니 쌀쌀한 바람이 얼굴을 얼얼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사방을 뿌렸다.
엄마는 왜 이런 날씨에 밖으로 나가자고 하는 거야? 여탕이면 가주겠는데……. 쩝……. 여탕. 이제 몸이 어느 정도 커져서 더 이상 갈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래도 괜찮다. 이미 머릿속에는 그때의 상황들이 저장되어 있으니까.
“점심은 밖에서 먹자.”
“네.”
“근데 뭐 먹을까?”
엄마가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외식의 선택권이 나한테 있는 건가? 그럼 뭘 먹지? 감자탕? 삼겹살? 아니, 이 나이에 해장국이니 감자탕이니 이런 말 하면 좀 이상하게 보이겠지? 점심시간에 삼겹살은 조금 안 어울리는 것 같고……. 무난하게 자장면으로 갈까? 아니면 초딩틱을 내야 하나?
“피자!”
패스트푸드의 대표적인 음식. 피자, 햄버거, 치킨 중에서 심각하게 갈등했다. 그리고 그나마 끌린 것이 바로 피자였다.
“그래. 그럼 일단 피자먹으러 가자.”
엄마가 나를 향해 웃어주는 미소가 오늘따라 과하다. 이건 왠지 느낌이 조금 이상하긴 한데……. 아니지, 엄마의 미소를 거짓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나는 엄마와 손을 잡고 동네 피자가게로 향했다. 그리고 콤비네이션 피자 한 판!
초딩의 위장을 가져서 그런지 피자 한 조각만 먹어도 배가 불러왔다.
“동우야, 맛있어?”
엄마가 흐뭇하게 피자 먹는 나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정말 부담스럽게 왜이래?
“맛있어요.”
하는 수 없이 나는 맛있다고 말해주었다. 난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는 착한 어린이이니까.
피자를 다 먹고 밖으로 나와 다시 어디론가 향했다. 나는 아직까지도 영문도 모른 채 끌려 다니기만 했고, 엄마가 길거리 노점상에서 자리를 멈췄다.
“동우야, 핫도그 먹을래?”
또 먹여? 오늘 엄마 진짜 왜 이러지? 그래도 먹으라고 주는데 거절하는 내가 아니지.
“네.”
한 손에는 핫도그. 다른 한손에는 엄마의 손을 잡고,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걸었다. 그리고 어디에선가 엄마의 걸음이 멈추어졌다.
“잠깐 여기 좀 들르자.”
엄마가 멈춘 곳은 바로 병원 앞이었다. 그런데 병원은 왜 가는 거지? 엄마 어디 아픈가?
별 생각 없이 병원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내 발걸음이 멈춰졌다.
젠장! 난 엄마한테 낚였다. 왜냐고? 병원 간판에는 ‘포! 경! 수! 술!’이란 넉자가 떡하니 쓰여 있었으니 말이다.
“왜? 동우야?”
내가 가던 길을 멈추자 엄마가 나를 쳐다보았다.
“여기 왜 가는 거 에요?”
“응, 병원 안에 엄마 아는 누나 있거든. 간호사 누나…….”
간호사누나? 그런 게 있을 일이 없잖아……. 내가 그런 말에 속을 줄 알고? 난 잠시 내 손에 쥐여진 핫도그를 쳐다보았다.
어쩐지 아까부터 자꾸 뭘 먹인다 싶었다. 이건 정녕 최후의 만찬이란 말인가?
난 잠시 생각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포경수술은 안하는 쪽으로 가지 않았던가? 그럼 그냥 안한다고 할까? 아니야, 아무리 안하는 쪽으로 가도, 내 또래는 다 하잖아. 그걸 묵과 할 수가 없다.
하긴 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난 마음의 준비조차 하지 못한 상태인데? 잠깐이라도 쉼 호흡을 해야 할 것 같다.
“동우야 왜 그래?”
병원에는 들어가지도 않고 가슴에 손을 얹고 쉼 호흡을 하는 내 모습을 보고 엄마가 갸우뚱거렸다.
“들어가요. 엄마.”
그리고 엄마와 함께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병원 문이 열리자마자 병원 특유의 약품냄새가 나의 공포심을 증폭시켰다.
두렵다……. 그냥 나간다고 할까? 23년을 산 나는 왜 이리 겁이 많은 거야!
“엄마 잠깐 아는 누나랑 얘기 좀 하고 올게.”
엄마는 나를 대기석에 앉혀놓고 접수대에 가서 내 수술을 예약했다. 나는 핫도그를 들고 주변을 훑어보았다. 여기 어디에선가 남자아이의 비명소리가 세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병원 한 켠에서 남자 아이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힘들게 걸어 나오고 있었다.
‘진짜 좆 됐다!’
난 두려움을 억제시키기 위해 들고 있던 핫도그를 먹기 시작했다. 그때 엄마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아는 누나랑 얘기 했는데, 여기 온 김에 동우 검사 하나만 받자.”
“검사?”
끝까지 거짓말 한다. 차라리 ‘우리 동우 고래 잡아야지!’란 말을 하란 말이야!
시간이 점차 흐른다. 보이지 않는 압박감이 내 가슴을 움켜쥔다. 대기석 옆자리에 앉아있던 남자 아이들이 점점 사라지고, 새로운 아이들이 앉기 시작했다. 이젠 정말 나보다 먼저 왔던 아이들은 없어졌다.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이동우 어린이!”
접수대에서 간호사가 외쳤다. 그리고 엄마가 자리에 일어났다.
“동우야, 네 차례인가 보다.”
엄마가 내 손을 잡고 접수대로 향했다. 그리고 간호사에게 나를 인계해주었다.
“간단한 검사 받고 끝날 거야.”
지금도 거짓말을 한다. 난 젊은 간호사 누나의 손을 잡고, 고래를 잡으러 발걸음을 옮겼다.
“남자가 되어서 돌아올게요.”
“응?”
군대 가는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이런 말을 할까? 엄마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결국 나는 수술대 위에 올라 누웠다. 그리고 간호사의 말에 따라 바지를 벗어, 하나 남은 마지막 자존심을 간호사들에게 들키게 되었다.
그리고 의사선생님이 들어왔다. 난 의사선생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앞으로 저 선생님이 어떻게 수술을 하느냐에 따라 내 미래가 좌우 될 수가 있다.
난 마음을 굳게 먹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의사선생님……. 예쁘게 까주세요.”
내 두 뺨에는 홍조가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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