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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야 님의 서재입니다.

일곱 개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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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야
작품등록일 :
2018.08.22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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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5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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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7,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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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28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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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3장 그라운드 제로 (2)

DUMMY

나나미는 전철 안에서 녹음을 듣더니, 일본어로 번역해서 메모장에 저장했다. 듣는 동안 몇 번이고 분을 참지 못하고 부르르 떨었다. 타이핑한 메모와 녹음 원본을 첨부해서 장례식장에서 만난 유토의 큰아버지에게 보냈다.


메신저를 보낸 후 나나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있긴 했지만, 자기를 미행하는 경찰이 같은 열차 객실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짐짓 모른 척하고 나나미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 * *


“난 반대야.”

시노가 단호하게 말하며 손바닥을 펴 보였다.


“이건 찬성이냐 반대냐 그런 문제가 아니야.”

규진이 대수롭지 않게 받아치며 가방에 짐을 챙기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로 가겠다는 거야?”

“네가 그랬잖아. 라면 스트리트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살아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규진이 시노의 질문을 시노가 했던 말로 받아쳤다.


“그래도 지금은 때가 아니잖아.”

“왜?”


“복수하기 전엔 도망가지 않을 거야.”

시노가 분한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지만, 규진은 애써 태연한 척했다.

“네가 복수라는 말을 꺼내다니 의외네. 하지만, 안심해. 도망가는 거 아니니까.”


가만히 듣고만 있던 유엔이 끼어들었다.

“그런데, 왜 떠나자는 거야?”

“지금 네가 얼마나 다쳤는지 거울 좀 보라고. 여긴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아.”


유엔은 자기 얼굴을 더듬으며 상처를 만지며 대답했다.

“난, 괜찮아.”


규진은 다시 유엔을 향해 몸을 돌리더니 유엔의 얼굴에 난 상처를 바라봤다.

“눈 괜찮은 거야?”

“아니. 오른쪽 눈이 전혀 보이지 않아.”

유엔의 시력에 문제가 생겼다는 얘기를 듣고, 규진은 절망 직전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른 데는 괜찮아?”

“신경을 다쳐서 그런지, 온몸이 해파리에 쏘인 것처럼 따갑고 아파. 특히 목과 가슴. 그것 말고는 괜찮아.”

유엔이 앞섬을 내려 목 아래 빨간 발진을 보여줬다.


“넌 왜 맨날 괜찮다고만 하는 거야?”

규진은 마음의 상처와 미안함이 겹쳐 힘들게 한 마디 한 마디를 이었다.


“난 괜찮아. 난 너를 보호하는 사람이니까.”

유엔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전혀 괜찮지 않아. 이젠 내가 감당할 차례야.”

규진은 여전히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 그러면 둘이 가. 난 여기 남을게. 이대로 엄마와 떨어질 순 없어.”

시노가 단호한 목소리로 둘 사이의 대화를 가로막았다.


“너 혼자 두고는 갈 수 없어. 널 지켜주라는 건 나나미 부탁이었어.”

규진이 시노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시노 너만 남겨둘 순 없어.”

유엔도 거들었다.


“히데오가 죽었어. 나 대신 죽은 거나 다름없단 말이야.”

시노가 다시 오열했다.


“자책하지마. 너 대신이 아니라 나 대신이니까.”

규진이 가방을 등에 메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가는 거야. 시노, 가만히 있지 않으려고 그래서 피하는 거야. 그리고, 시노 네 엄마가 어디서 지내는지 아니? 나나미에도 따뜻한 집이 필요해.”



“아무리 그래도 왜 다른 곳으로 옮기는지 이해할 수 없어.”

시노의 목소리는 아까보다는 많이 누그러들었다.


“그 유산, 찾을 거야. 도대체 그게 뭐길래 사람들을 이렇게 죽게 했는지 꼭 확인할 거야.”

규진은 꼿꼿이 서서 말을 이었다.

“이대로라면 우리 안전을 담보로 엄마가 그 유산 포기해 버릴 거야. 난 지금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다름 아닌 엄마가 날 찾을 수 없게 떠나는 거야, 알겠어?”



규진의 말이 끝나자 유엔이 시노의 팔을 잡아당기며 자상하게 말했다.

“시노, 같이 가자. 널 위한 길이기도 해.”


“사실은 내가 불행을 몰고 다니는 거 같아서 그래. 몇 년 만에 날 만나자마자 히데오가 죽었어. 내가 전학 와서 유엔의 짝꿍이 되고 나서도 난 불행만 가져왔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유엔이 시노를 안아 주며 위로했다.


“네가 불행을 몰고 다니는 게 정말이라면 진작 너를 이중 첩자로 팔아넘겼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하니까.”

시노가 입을 삐죽거리며 규진의 등을 쳤다.

“두 번이나 변절해서 이제 팔아넘기지도 못할 거야.”


“좋아, 따라오기나 해. 내일 아침은 내가 차려 줄게. 변절자라도 우린 친구니까.”

유엔은 시노 어깨에 팔을 올리며 힘주어 끌어안았다.


“대화가 이상해졌어. 주제와 너무 멀어졌어.”


유엔과 시노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밝아진 걸 보더니 규진이 안심하고 문단속을 하며 집안을 정리했다. 유엔과 시노도 가방을 정리하며 현관을 향했다.


“근데, 목적지는 얘기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가면서 말해줄게.”

규진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옷깃을 털며, 도청장치가 있을지도 몰라, 라고 중얼거리더니 현관문을 열었다. 시노는 안 가겠다고 떼쓴 적 없던 사람처럼 주변을 돌아보며 몸서리를 쳤다.


* * *


나나미는 핸드폰을 열어 마에다 가문에서 보낸 답장을 다시 읽은 뒤 걸음을 옮겼다. 전철에서 보낸 오은명과 이지영의 통화 녹음에 대한 답장 격으로 마에다 가문으로부터 받은 메시지였다. 나나미는 그걸 몇 번이고 곱씹어 읽어보았다.



오후 2시 나나미가 하코네 종합상사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최대식은 벌써 정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나미는 올라가, 라고 짧게 말하며 성큼성큼 회사 안으로 걸어갔다.


“어디로?”

최대식이 머뭇거리며 물었지만, 나나미는 대답하지 않고 건물 현관으로 들어갔다. 나나미는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녹음기의 버튼을 찰칵 눌렀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직원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본부장은 접견실 대신 본인의 책상이 있는 별도 사무실로 둘을 안내했다.


본부장 자리의 명패에는 [ 가등각 加藤 覺 ]이란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걸 보더니 나나미는 ‘가토 사토루’라고 소리내어 일본식으로 읽었다.


“아, 제 이름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 한자 정말 좋아해요, 깨달을 각.”

“재일교포 2세라고 들었는데, 아버지가 일본 분이신가 봐요?”

“사연이 좀 있습니다. 오늘 얘기 잘 끝나면 저녁 먹으면서 천천히 말씀드리죠.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신파극 한편 들려드리겠습니다.”


어색한 본부장의 너스레가 끝났지만, 10초 넘게 침묵이 흘렀다. 최대식은 눈알을 여기저기 굴리며 눈치만 봤다. 나나미는 본부장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친조카나 다름없는 사람이 어제 죽었습니다.”

“저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본부장은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또박또박 말했다.


나나미는 양 주먹을 불끈 쥐며 분노를 삭였다.

“혹시 불행을 당한 마에다 가문에 전해줄 말은 없으신가요?”

“저 같은 사람에게 입이 있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들은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어이쿠, 제가 말실수를 했네요. 아니요, 이렇게 전해주세요. 아버지는 계약을 잘 지켰는데, 아들이 변심해서 저희도 이만저만 난처한 게 아니었다고요.”


“히데오가 변심해서 죽였다고 들어도 되겠습니까?”

“난처했다고 했지 죽였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만.”

“네 알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지시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만약 지시했다고 하더라도 저 같은 회사원이 명분을 직접 만들었겠습니까? 오가는 말을 전하는 역할 정도만 하는 거지요? 제 입장 이해하시죠?”


“말의 의도, 정확하게 이해했습니다.”

“다행이네요.”

말로는 다행이라고 했지만, 본부장은 뭔가 찜찜한 표정이었다.


짧게 대답한 다음 나나미가 말을 멈추고 본부장을 빤히 쳐다보자, 본부장은 머리를 긁적이며 입맛을 쩝쩝 다셨다.

“그나저나, 이 가토 사토루와 다마루 나나미 씨가 여기 일본 땅에서 만나서 대화하는데 한국어로 얘기하다니 좀 어색한데요.”

본부장은 화제를 바꾸며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려고 말을 돌렸다.


“그런가요? 그럼 이번에는 일본어로 말하죠. 마침 마에다 가문에서 전해달라는 말이 있었거든요. 이걸 한국어로 번역해서 말할 뻔했습니다.”

나나미는 실없이 한 번 웃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일본어)의는 산보다 무겁고, 죽음은 새털처럼 가볍다.”


본부장은 무거운 표정으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한국말로 다시 표현했다.

“의는 산보다 무겁고, 죽음은 새털처럼 가볍다.”


본부장은 담배에 불을 붙이지 않고 다시 재떨이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마에다 가문에서 제게 전하는 말입니까, 그게?”

“네.”


“왜 저한테 그런 말씀을?”

“그럼 누구겠습니까?”


“그 말을 들을 사람은 한국에 있는 박재열 대표 아니겠습니까?”

“그 얘기를 들어야 할 사람이 또 있다면, 그쪽에도 그렇게 전해주세요.”

나나미는 알아서 하라는 투로 담담하게 말했다.



“두 사람 얘기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어.”

최대식은 눈앞이 캄캄해지기도 한 듯 눈을 비비며 끼어들었다.


“막부시대 훨씬 전부터 있던 관례라고는 들었지만, 눈앞에서 들으니까 좀 섬뜩하네요. 아직도 복수하기 전에 미리 예고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니.”

본부장은 애써 태연하게 대응했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받은 만큼 돌려주는 건 마에다 가문 전통이니까요.”


나나미는 말을 마치며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 말은 다 했으니 신파극은 다음 기회에 듣죠.”

본부장은 대답도 하지 못 하고, 허공을 향해 멍한 눈만 껌벅거리고 있었다.


나나미는 책상 위 탁상용 액자에 있는 본부장의 가족사진을 보며 말했다.

“부인이 굉장히 젊으시네요. 자제분은 한 명뿐인가요?”


“받은 만큼 돌려준다는 의미, 그런 뜻인가요?”

본부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지며 반문했다.


“아직 겨울인데 공원을 산책하기엔 어린 나이로 보이네요.”

“네 이제 다섯 살 되는 아들입니다. 결혼이 많이 늦었습니다.”


나나미는 싸늘하게 웃으며, 아이 손을 잡은 젊은 여자와 무뚝뚝하게 선 본부장의 가족사진을 한 번 더 보더니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럼, 이만.”


본부장은 진지한 표정으로 입술을 꾹 다물더니 이내 다급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나나미에 한 걸음 다가갔다.

“저와 협상 하나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말씀하세요.”

나나미는 사무적으로 들릴 만큼 무미건조하게 대꾸했다.


“따님의 신변은 제가 확실히 보장해 드릴 테니 마에다 가문에 이렇게 말씀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저라는 사람을 직접 만나보니 마코토가 없는, 그러니까 신의가 없는 장사꾼 같은 인간일 뿐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충성이나 의리 같은 건 모르는 사람이니 그냥 장사꾼처럼 써먹어 달라, 이렇게 전하면 되나요?”


“네, 그렇게만 해주시면 저도 보답은 잊지 않겠습니다.”

본부장은 최대식을 흘끔 보더니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쓸모 있는 도구라는 걸 증명하지 못한다면 다가오는 봄에는 산책하기 어려울 겁니다.”

“해마다 봄이 되면 가족과 함께 나들이는 꼭 다니겠습니다.”

본부장의 말에 나나미는 미소로 답했다.


나나미는 최대식을 보며 다시 표정을 바꿔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던 최대식은 출입문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본부장은 그제야 인상을 풀더니 뒤늦게 일어서는 최대식의 어깨를 쳤다.

“그나저나 최대식 군 자네 대단한 부인을 뒀군.”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최대식을 대신해서 나나미가 대답했다.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저에게는 부질없는 거니까요.”


나나미는 고개를 숙여 본부장에게 인사하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최대식은 좌우를 살피더니 저도 그럼 이만, 하며 인사를 하고 나나미를 따라갔다.


작가의말

중국 한나라 사마천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는데, 그 죽음이 태산보다 무거운 것도 있으며, 어떤 죽음은 기러기 털보다 가벼운 것도 있다.’ 하나뿐인 목숨을 어떻게 쓰느냐에 관한 격언입니다.
비슷한 말로,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군인칙유에 보면, ‘의는 산보다 무겁고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마에다 가문에서 이 말을 전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본부장은 비교적 정확하게 마에다의 의중을 파악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과연 박재열도 이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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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14장 거짓말 게임 (1) 19.01.04 91 1 11쪽
42 13장 그라운드 제로 (4) 19.01.02 89 2 12쪽
41 13장 그라운드 제로 (3) 18.12.31 114 2 12쪽
» 13장 그라운드 제로 (2) 18.12.28 99 2 12쪽
39 13장 그라운드 제로 (1) 18.12.26 94 2 12쪽
38 12장 뜻밖의 역습 (4) 18.12.24 90 2 11쪽
37 12장 뜻밖의 역습 (3) 18.12.21 102 2 11쪽
36 12장 뜻밖의 역습 (2) 18.12.19 95 2 12쪽
35 12장 뜻밖의 역습 (1) 18.12.17 115 2 13쪽
34 11장 진실 혹은 도전 (3) 18.12.14 108 2 13쪽
33 11장 진실 혹은 도전 (2) 18.12.12 107 2 13쪽
32 11장 진실 혹은 도전 (1) 18.12.10 112 2 12쪽
31 10장 숲속의 이끼 (3) 18.12.07 120 2 15쪽
30 10장 숲속의 이끼 (2) 18.12.05 112 2 12쪽
29 10장 숲속의 이끼 (1) 18.12.03 119 2 13쪽
28 9장 반격의 실마리 (3) 18.11.30 116 2 12쪽
27 9장 반격의 실마리 (2) +1 18.11.28 116 2 13쪽
26 9장 반격의 실마리 (1) +1 18.11.26 135 2 11쪽
25 8장 염곡동 살인사건 (5) +1 18.11.23 142 2 13쪽
24 8장 염곡동 살인사건 (4) +1 18.11.21 157 3 13쪽
23 7장 패밀리의 완성 (3) +1 18.11.20 140 2 11쪽
22 7장 패밀리의 완성 (2) +1 18.11.16 144 2 12쪽
21 7장 패밀리의 완성 (1) +1 18.11.13 150 2 11쪽
20 6장 일곱 개의 바다 (3) +1 18.11.09 163 2 11쪽
19 6장 일곱 개의 바다 (2) +1 18.11.06 164 2 11쪽
18 6장 일곱 개의 바다 (1) +1 18.11.02 159 2 12쪽
17 5장 잃어버린 아들 (4) +1 18.10.30 154 2 12쪽
16 5장 잃어버린 아들 (3) +1 18.10.26 193 2 12쪽
15 5장 잃어버린 아들 (2) +1 18.10.23 187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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