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일벌 님의 서재입니다.

잿빛용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벌
작품등록일 :
2019.01.02 21:31
최근연재일 :
2022.05.28 20:30
연재수 :
31 회
조회수 :
2,848
추천수 :
68
글자수 :
178,991

작성
19.01.05 07:20
조회
108
추천
1
글자
12쪽

3. 이상징후(1)

DUMMY

퍽!


무자비하게 휘둘러진 메이스가 블랙팽의 목을 덮치자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메이스를 감싼 오러가 놈의 목을 분쇄하기 위해 맹렬하게 회전했지만, 블랙팽 역시 녹록치 않았다.


목을 두들겨 맞고도 전혀 기세가 죽지 않은 블랙팽이 아빌라드의 허리를 노리고 이빨을 들이밀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버클러를 내밀어 놈의 공격을 저지하고 메이스를 쥔 손에 힘을 주어 그대로 목을 찍어 눌렀다.


일반적인 둔기로는 효과적이지 않은 공격이지만,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메이스에 실은 오러가 가죽을 모조리 찢어내고 놈의 살과 뼈를 짓뭉개버렸다.


목이 너덜너덜해진 녀석이 짧은 단말마를 내지르고 무너지자 뒤에 있던 녀석은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치더니 그대로 달아나려 들었다.


“피곤하게 만드는군.”


곧바로 활을 꺼내든 아빌라드가 놈을 겨냥했다. 다시금 체내의 힘을 쥐어짜 화살에 오러를 깃들게 하자 화살촉에서 바람을 찢는 소리가 나더니 순식간에 사냥감의 등을 향해 날아갔다.


콰직!


화살로 맞혔다고 믿기 힘들 정도의 굉음이 난다. 화살촉에 응집된 오러가 철저하게 블랙팽의 가죽을 뚫고 척추를 발라내어 장기를 완전히 망가뜨렸다. 메이스로 당한 녀석과 달리 놈은 그 위력적인 화살을 맞고도 꿋꿋이 도망가려 했지만, 결국 힘이 다해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아빌라드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내며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오러가 잘 듣지 않는 마물을 상대하기 위해 쥐어짜다시피 힘을 쓴 결과였다. 자신의 몸을 점검한 아빌라드는 이 이상의 전투는 힘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캐트시가 마물이 더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 덕분에 그렇게 몰아치듯이 싸운 것이었지만.


“아빌라드 씨! 괜찮으세요?”


아이들을 지키던 캐트시가 한걸음에 달려와 아빌라드를 부축했다.


“아직은. 마물은 확실히 더 나타나지 않는 거겠지?”


“네, 믿으셔도 돼요. 그런데 지금 이 쪽으로 여러 사람들이 오고 있네요. 다들 아르키잔인 것 같아요.”


“성직자들이겠군. 그 마을 주민이 제 할 일을 잘 해준 모양이야.”


자기 마을을 구해달라며 애원하던 남자의 얘기였다. 그는 도시로 가서 교단에게 구조를 요청하라는 아빌라드의 말을 성실히 수행한 것 같았다.


“시간이 많이 지나진 않은 것 같은데 꽤나 빨리 도착했네요.”


“칼리고 정도의 대도시라면 각 근교에 포탈을 여러 개 두고 있어. 침입만 감지한다면 언제든 즉각 대응이 가능한 수준이지.”


말을 마친 아빌라드가 마른기침을 내뱉자 캐트시는 허리춤에 매달아놓은 수통을 열어 아빌라드에게 건네주었다.



&



아빌라드의 말대로 신속하게 도착한 성직자들은 마을의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마물의 시체들을 옮기고, 부상당한 주민들을 치료하는 등 마물이 헤집어놓던 때보다 마을이 더 소란스러워졌다.


다행히 다치기만 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여럿 있었기에 마을 곳곳에서 들려오는 곡소리들 역시 마을의 소음에 일조하고 있었다. 피로 얼룩진 포대기를 끌어안고 목 놓아 우는 아낙의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군.”


애써 그곳에서 시선을 뗀 아빌라드가 입을 열자 캐트시가 귀를 쫑긋했다.


“어떤 게요?”


“성직자들은 멍청이가 아니야. 마물이 이렇게 접근해올 때까지 감지를 못했을 리가 없을 텐데. 더군다나 낙후된 도시도 아니고, 여긴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큰 도시인데 말이야.”


그가 말을 끝맺기 무섭게 하얀 판금갑옷과 간결한 장식의 무기들로 무장을 한 성기사가 그들에게 답했다.


“저희는 멍청이가 아닙니다만, 지금 이 상황을 보면 그보다 더한 욕을 들어도 할 말이 없겠군요. 그나마 여러분이 근처에 있어서 재빨리 막은 게 불행 중 다행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성기사는 고개 숙인 채로 그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모든 공로를 아빌라드와 캐트시에게 돌렸다. 그의 말마따나 도시에서 가까운 마을에서 이런 참사가 벌어질 때까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성직자에게 있어서는 수치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타종족인 캐트시는 이런 이야기가 거북해서 입을 다물고 있었고, 본의 아니게 뒷담화를 하다 들킨 기분이 든 아빌라드가 그의 자책에 반응했다.


“그저 푸념일 뿐입니다.”


그 성기사는 척 봐도 아빌라드보다 어려 보였지만, 그는 성기사에게 존댓말을 썼다. 사실 모든 아르키잔은 성직자들에게 존대를 하는데, 그것은 신성에 의해 강요되는 허례허식이 아닌 순수한 경외에서 비롯한 관습이었다.


앞장서서 마물과 싸우며 내륙을 지키는 성전사들과 성법을 통해 다치거나 아픈 자들을 치료하는 사제들. 이 성직자들은 말 그대로 신의 뜻을 충실히 이행하며 동족들을 보살피는 신의 사자나 다름없었다.


아빌라드에게 위로 받은 성기사는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혹시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지 않나요?”


“잘 기억나지 않는군요.”


“그건 좀 씁쓸하네요. 전 당신을 기억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성기사의 말에 아빌라드가 고개를 들어 그 얼굴을 확인했다. 성기사의 말을 듣고 보니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했지만, 영 확실하지 않았기에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뵀을 땐 머리도 짧게 깎았고, 성기사도 아니었지요. 아빌라드 님, 전 갈란입니다.”


그 이름을 들은 아빌라드가 고개를 끄덕인다.


갈란.


센티누스에게 가족을 모조리 잃은 그 날, 센티누스를 몰아낸 성기사들과 함께 있던 자였다. 7년 전엔 앳된 소년이었는데 지난 세월동안 꽤 늠름하게 자란 모양이었다.


성기사들이 센티누스와 맞서 싸울 땐 의식이 흐릿했기 때문에 얼마나 잘 싸우는지는 보지 못했으나, 일이 정리되고 몸을 추스를 때 유독 살뜰하게 대해줬던 소년이었기에 그런 모습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몰라보게 자라셨군요. 이젠 갈란 경이라고 불러야 합니까?”


성전사 중에 우수한 자들은 성기사로 승격되는데, 성기사는 어떤 나라에 가더라도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경(sir)이란 칭호 역시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것.


일반적인 성기사라면 하찮은 마물사냥꾼인 아빌라드에게 이렇게까지 예의를 차리지 않았겠지만, 갈란 경은 손사래를 치며 겸손을 떨었다.


“편하신 대로 부르셔도 됩니다. 분에 넘치게도 일찍 성기사가 되었지만 전 아직도 어리숙하고 갈 길이 멉니다.”


기본적으로 성기사 쯤이나 되는 인물이 이렇게 겸양을 갖추는 일은 흔하지 않았기에, 아빌라드는 의심 반 호의 반으로 갈란 경의 말을 경청했다.


“어쨌든 다행이네요. 마침 아빌라드 님께 부탁할 일이 있었는데 이렇게 금방 만나게 되다니, 이것도 마일디아님의 은총이겠죠.”


“부탁할 일? 제게 말입니까?”


“네. 우선 이 마을의 피해를 수습하고 나서 교단에서 말씀드리도록 하죠. 모쪼록 기다려주셨으면 합니다.”


말을 마친 갈란 경은 다시 마을 안으로 걸어갔다. 여전히 마을 안은 아비규환이었고, 도움의 손길은 많을수록 좋은 법이었다. 그리고 갈란이 저 멀리로 가자 줄곧 침묵하던 캐트시의 말문이 트였다.


“성기사님과도 알고 지내는 사이였어요?”


어째선지 약간 들뜬 목소리다.


“알고 지낸 적은 없어. 언젠가 한 번 만났던 사이였지.”


“헤, 언제요?”


“센티누스를 만났을 때.”​


아빌라드의 대답에 눈을 초롱초롱 밝히던 캐트시의 귀가 푹 가라앉았다. 미묘한 표정으로 입을 달싹이던 그녀는 요란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더니 갑자기 뛰쳐나갔다.


“그, 그럼 저는 성직자님들을 도우고 올게요!”


“...”


아빌라드는 말없이 그녀의 등을 쳐다봤다. 아무래도 며칠 전에 들려줬던 그 얘기는 그녀에게 있어서 피하고 싶은 주제인 모양이었다. 아마도 아빌라드에게 그 일을 더 떠올리지 않게 하려는 그녀 나름대로의 배려였을 것이다.


‘그럴 만도 하지.’


다 듣고 나서 그 자신보다 더 눈물을 글썽였으니 딱히 더 말을 덧붙일 필요가 있으랴. 요 며칠 사이 계속 같이 다니긴 했으나,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그의 이야기에 그토록 공감하는 것은 그녀의 상냥한 천성 탓이리라.


잠깐 사색에 빠졌던 아빌라드는 그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 캐트시가 뛰쳐간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싸움으로 지친 몸도 어느 정도 회복됐겠다, 습격당한 주민들의 신음소리를 가만히 앉아서 듣고 있기도 곤란했으니까.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사투를 벌여 마물을 몰아냈건만 주민들이 입은 피해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사제들이 열심히 치유의 성법을 펼치며 주민들을 치료하고 있었지만 다들 부상상태가 너무 심해서 그다지 진척은 없었다.


성직자들이 이미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는 통에 아빌라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보였다. 의료행위에 대해선 문외한인 아빌라드가 다른 곳을 도우러 갈까 고민하던 차에, 웬 여사제가 아빌라드에게 말을 걸었다.


“형제님, 왜 가만히 서 계시는 건가요?”


여사제는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닿는 붉은 단발에, 매력적인 주근깨를 가지고 있었다. 그 가냘퍼보이는 몸의 어디에서 힘이 나오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제 몸보다 더 커 보이는 짐들을 등에 지고 있었다.


“혹시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없을까 찾아보고 있었습니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여긴 도움이 필요 없답니다. 괜찮으시다면 집 안에 남아있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주셨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하죠.”


아빌라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사제는 밝게 웃으며 다시 씩씩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등에서 흔들리는 거대한 짐들을 보며 아빌라드는 저 여사제가 사실은 사제복을 입은 성전사가 아닌가라는 실없는 생각을 떠올렸다.


여사제가 부탁한 대로 아빌라드는 마을의 집을 돌며 아직 구출되지 않은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마물이 습격했다는 것을 보여주듯 대부분의 집 내부가 피칠갑이 되어있었고, 외벽이 발톱에 뜯겨나간 흔적이 즐비했다. 참혹한 현장을 보며 아빌라드는 캐트시가 다른 쪽 일을 도와주러 가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아빌라드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사람을 찾으려 했지만, 어떤 집에서도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아빌라드는 끝으로 외딴 언덕에 있는 작은 집을 수색하기 위해 들어가고 그곳의 상태를 보고서 위화감을 느꼈다.


‘왜 이곳만 깨끗한 거지?’


블랙 팽이 침입한 흔적이 없었다. 집이 안팎으로 멀쩡했고, 주변에 발자국조차 찍히지 않은 상태였다. 마을 하나가 초토화될 정도의 습격이었건만, 유독 이 집만 이렇게 깔끔한 것은 뭔가 이상했다.


혹시 모를 전투에 대비해 버클러와 메이스를 꺼내든 아빌라드가 집 안에 들어갔다. 외관과 마찬가지로 집 내부 역시 깔끔한 상태였다. 낡은 바닥이 삐걱거리는 것을 막기 위해 최대한 살금살금 걷다보니 구석에 누군가가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웅크리고 있는 여자아이였다.


구석에 쭈그려 귀를 막고 있는 지라 누군가가 자기 앞에 서있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길게 늘어뜨린 금발을 내려다보며 아빌라드가 헛기침 소리를 내자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얼굴을 본 순간 아빌라드는 순간 모든 생각을 잊고 말았다.


집안에서 웅크려 있던 그녀의 얼굴이 자신이 꿈속에서도 그리워하던 그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밀리아?”


공포에 질린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고작 그런 표정의 변화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 그의 눈앞에 있는 여자아이는 5년 전 증오스러운 마물에게 살해당한 딸, 밀리아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정말 너니?”


아빌라드가 가까이 다가가 손을 뻗자 여자아이는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다. 그 모습을 본 아빌라드는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아이는 명백히 밀리아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기색을 봐서는 그를 전혀 알지 못하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머릿속이 하얗게 돼버린 아빌라드는 그저 말없이 아이를 데리고 치료를 담당한 사제들에게 데려가기로 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잿빛용사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재개 공지 22.05.05 25 0 -
공지 연재관련 공지 +1 19.01.14 85 0 -
31 9. 그만둬야 할 때(2) 22.05.28 17 0 13쪽
30 9. 그만둬야 할 때(1) 22.05.22 19 0 12쪽
29 8. 드래곤킵(7) 22.05.18 19 1 12쪽
28 8. 드래곤킵(6) 22.05.15 24 1 13쪽
27 8. 드래곤킵(5) 22.05.12 20 1 13쪽
26 8. 드래곤킵(4) 22.05.11 22 0 13쪽
25 8. 드래곤킵(3) 22.05.09 22 1 12쪽
24 8. 드래곤킵(2) 22.05.07 27 1 16쪽
23 8. 드래곤킵(1) 22.05.06 27 0 13쪽
22 7. 갈라드식 접대(3) 22.05.05 29 0 12쪽
21 7. 갈라드식 접대(2) 19.01.13 117 1 12쪽
20 7. 갈라드식 접대(1) 19.01.12 68 4 12쪽
19 6. 오래된 벗(4) 19.01.11 69 2 12쪽
18 6. 오래된 벗(3) +2 19.01.10 75 1 15쪽
17 6. 오래된 벗(2) 19.01.09 67 1 13쪽
16 6. 오래된 벗(1) 19.01.09 88 0 12쪽
15 5. 커다란 그림자(2) 19.01.08 88 1 13쪽
14 5. 커다란 그림자(1) 19.01.08 89 1 12쪽
13 4. 미련(3) 19.01.07 77 1 13쪽
12 4. 미련(2) +2 19.01.06 85 4 12쪽
11 4. 미련(1) 19.01.06 87 5 12쪽
10 3. 이상징후(2) +2 19.01.05 113 5 12쪽
» 3. 이상징후(1) 19.01.05 109 1 12쪽
8 2. 동행(3) 19.01.04 127 2 12쪽
7 2. 동행(2) 19.01.04 111 4 12쪽
6 2. 동행(1) 19.01.03 126 5 13쪽
5 1. 낙스빌(4) 19.01.03 157 3 12쪽
4 1. 낙스빌(3) 19.01.03 149 4 13쪽
3 1. 낙스빌(2) 19.01.03 194 5 13쪽
2 1. 낙스빌(1) 19.01.02 233 6 13쪽
1 Prologue. 약초꾼과 사냥꾼 +5 19.01.02 391 7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