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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스릴러! 서스펜스! 망가! 그리고 고양이!

요셉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강철신검
작품등록일 :
2023.04.11 23:59
최근연재일 :
2024.05.27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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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8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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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쪽

요셉 -36화-

DUMMY

일생은 꿈과 목표로 이뤄진다.

우리의 삶은 직업을 얻고 일을 하는 것과 그 준비과정이 전부였다. 유년과 청소년이 공부하는 건 당당한 한 명의 사회인이 되기 위한 준비였다.

은퇴 이후의 삶 역시 일을 완전히 놓진 않았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뭔가를 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반하는 것이 백수다.

표준어는 아니지만 대충 무직자 혹은 구직활동을 포기한 사람을 비하하는 표현이다. 뭐 돈 많은 백수를 성공한 인생으로 칭송하기도 했지만 돈이 많든 적든 일이든 취미든 사람이라면 뭔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요셉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적이 있다.

말 그대로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숨 쉬는 것조차.

완전한 무無, 공허의 세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진즉 썩어 문드러졌겠지.’


생명활동이 멈추면 생명은 죽고 썩어 먼지로 흩어진다.

집착을 놓아버리자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왜? 나는 그토록 집착했나? 떠나버린 어머니와 대답 없는 아버지의 기억을 붙잡은 채 진즉 쪼개졌어야 할 누더기 같은 제국을 억지로 봉합했었다.

안다.

욕심이자 기만이다.

아버지는 내게 황제가 되길 권하지 않으셨다. 그때는 그걸 못난 아들을 믿지 못한 것이라 오해했고 자격지심과 열등감에 잡아먹혔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 돌이켜보니 그게 아니었다.

be free

그는 내가 자유롭길 바랐다.


‘억압과 굴레로부터 혹은 자신의 업보로부터.’


하지만, 나는 그의 아들이고 싶었다.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사랑한다. 우리 부자만 특별했을까? 이건 세상 모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겪는 평범한 문제다.


‘부모가 되면 싫어도 깨닫게 돼.’


정확히 일치하진 않겠지만 아버지가 된 요셉은 그의 마음을 조금은 알게 됐다.

아이오솔코스

문지기이자 1세대 슈퍼AI는 그대로 행성관리를 맡았다. 영지에 별 관심 없었던 요셉이 내린 명령은 단 하나다.

‘멸종 금지’

인류란 종을 어떻게든 살려만 놓으면 된다.


“그거 알아? 아버지는 의사였어. 그것도 한 분야만 특출 난 게 아니라 의학이란 학문의 패러다임을 바꾸셨다고 했지.”


망가진 신체를 재건하는 재생의료.

인간의 노화를 극도로 억제해 생명을 연장하는 기술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인류문명과 제국의 폭발적인 발전이 가능했다.


“마치 복수라도 하듯이 죽음을 죽이셨다고 해.”


요셉은 의사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아니, 그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언제나 황제였으니까. 젊은 시절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외조부는 그를... 철인이라고 했어.”


비할 바 없는 강인한 육체와 꺾이지 않는 정신.

플라톤이 주창한 철인과는 조금 달랐지만 많은 면이 닮기도 했다. 진리탐구의 극한에 이른 지성과 정명함은 정에 휘둘리지 않으니 제국이 성립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황제 아래 모두 평등하다.’

뭐 황제에게 절대충성하던 사도들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일신교가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모순이자 사생아일 뿐이다.


“어머니는 그를... 가련한 사람이라고 했지.”


어머니의 끝없는 헌신은 보답 받았을까? 어렸을 때의 난 그 부질없는 일방통행을 이해할 수 없었다. 보답 받지 못하는 사랑이라니? 그건 미친 짓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건 자기 자신이니까.

하지만


“사랑은...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사랑을 내 맘대로 조절할 수 있다면 그게 사랑일까?


“내가 모든 걸 놓아버렸을 때... 나는 나를 죽였어. 아니, 죽였다고 생각했지.”


숨 쉬기를 멈췄다.

나는 내 자신을 공허에 가뒀다.


“그 결과는... 심각했어.”


온 우주가 혼란에 휩싸였다. 혼란? 너무 절제된 표현일지도. 그보다는 파멸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제국을 지탱하던 그가 죽음 같은 영면에 들자 온 우주가 산산조각 났다. 법과 질서, 상식이 무너지고 도리는 땅에 떨어졌다. 힘 있는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약육강식, 폭력이 곧 진리인 신세계가 펼쳐졌다.


“나는 꿈을 꿨어.”


희망을 품은 최후의 안식처.

애시리우스는 방주Ark다.


“많은 꿈을 꿨지.”


요셉은 왕이었고 기사였으며 야만인이었다가 농부가 되기도 했다.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또 아버지였으며 친구이자 형제였다. 그 마지막은 사랑하는 여자의 남편이었다.


“하지만, 꿈은... 결국 깨어나야 해.”


도도한 시간의 흐름은 그를 치유했다.

망각하진 않았다. 단지 극복해낸 것이다. 다만 너무 오랜 세월을 흘려보냈다. 그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가 꿈을 꾸는 동안 누군가는 고문당하고 고통 받았다.


“제레마이어는 제국의 부활을 원해.”


그녀는 모든 것을 바로잡길 바랐다.

17만 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썩어 문드러진 제국이 부활해봤자 뭘 할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지나간 과거는 그냥 과거로 놔두는 것이 최선이라 믿었다.

제국의 후예를 자처하는 현 인류가 과거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건 아무도 그 시대를 살아본 적 없기 때문이다. 원래 자기 세상과 시대가 제일 빡세고 좆같은 법이니까.

사람들이 칭송하는 위대한 제국은 결코 완벽하지 않았다.


‘그러니 무너질 수밖에.’


완벽한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게 될 요셉은 앞으로 수많은 흥망성쇠를 지켜볼 것이다.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는다. 그건 그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언젠가 나조차 시간 속에 희미해지겠지.”


새로운 신이 탄생하든가 아니면 인류란 종이 영영 사라질지도 몰랐다.


“...”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요셉의 넋두리를 들어줄 사람은 없었다.

아니, 산 사람이 없었다.

허름한 술집은 피바다였다.

부서지고 깨진 테이블 그리고 널브러진 시신들 사이에서 그는 혼잣말을 지껄였다.

왜 이렇게 됐을까?


“...다시 보는군요. 아르토리우스 경.”


반쯤 허물어진 벽 너머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케른의 기사 가르디온이었나?


“소명할 기회를 드리겠소이다.”

“단순한 일이오. 너무나 명백한 상황이지요.”

“정당방위를 주장하는 것이오?”


돈 있어 뵈는 기사를 털어먹으려다 된통 당한 셈.

문제는 사고를 수습할 담당자에 따라 과잉살상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가르디온은 골치 아프단 얼굴이다. 널리고 널린 용병기사라든가 상인기사와 달리 근본이 귀족인 기사일 경우 정당방위에 한없이 관대해진다.

다만 아무리 빈민과 평민이 하찮아도 이렇게 무참히 썰어버리면 도시 분위기가 흉흉해진다는 것이다.


‘이놈들이 바보도 아니고... 백주대낮에 기사를 공격한다고?’


늦은 밤 으쓱한 골목길에서 습격하면 모를까 보는 눈이 많은 한낮에 기사를 털어먹으려는 건 미친 짓이다. 실패해도 성공해도 후폭풍을 피할 수 없다.


‘게오르기가... 미쳐버렸나?’


이곳은 범죄조직이 관리하는 술집이니 기사를 털어먹으려고 시도한 것들은 게오르기 밑에 있는 놈이 분명했다.


“...정당방위가 인정돼도 조사가 필요하오. 경.”

“뭐 당연히 그렇겠지요.”


나이젤 경비대에 연행됐지만 신체를 구속당하진 않았다. 더구나 기사나 귀족을 위한 독방은 나름 깔끔했다. 기본적인 음식이 나오긴 하지만 병사에게 금화를 쥐어주니 괜찮은 사식을 넣어줬다.

요셉은 3일째 되는 날 풀려났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요셉 칸 빌헬름 아르토리우스 경? 혹시 케사딘 출신이오?”

“그렇습니다. 각하.”


케사딘이 어딘 줄 모르겠지만 일단 맞다고 하자.


“케사딘에서 여기까지 오다니... 그것도 홀몸으로.”


공왕을 대리해 포트 나이젤을 다스리는 로만 남작은 눈앞의 이 귀공자를 어떻게 대우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평범한 용병기사나 상인기사가 아니야.’


대륙의 극과 극을 혼자 가로지르려면 보통 실력으론 불가능했다.


‘팔릭시아의 발칸?... 팔릭시아는 모르겠고 발칸?’


세멜 공국과는 대륙 반대편인 케사딘 왕국은 칼스텐 대륙 1강인 칼스테이아 제국조차 꺼려하는 전사의 왕국이었다. 그들이 모시는 신이 바로 발탄, 발타잘, 발카잔으로 불리는 전쟁과 불의 신이었다.


‘대체 뭘 했기에 이런 강자가 공국을 돌아다니는데 작은 낌새도 몰랐나!’


빌어먹을 군부새끼들!

국경수비대만 욕할 것도 없다. 나이젤 도시경비대도 마찬가지로 엉망진창이다.


‘예산은 예산대로 처먹고 일은 개떡 같은 밥버러지들!’


제출한 귀족증명서는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위험해!’


남작의 감이 그렇게 소리쳤다.

로만은 영지를 가진 세습귀족이 아닌 젊은 시절 공국기사로 공적을 쌓아 작위를 받았다. 전쟁에서 쌓은 공훈이 아닌 관료로서 더 높은 평가를 받지만 세멜 공왕에겐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인재였다.


“루센어를 잘하시는구먼. 아르토리우스 경.”

“어렸을 때부터 언어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같은 왕국에서 사는 사람조차 사는 곳이 다르면 소통이 어려운데 대륙의 극과 극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말이 통할까? 모국어가 아닌 타국어를 배우는 건 권력자와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

먹고살기 바쁜 평민에게 지식적 갈망과 유희는 남의 이야기다. 그래서 눈앞에 이 금발귀공자의 신분을 더 의심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고귀한 핏줄이 맞아.’


삶에 찌든 평민은 결코 가질 수 없는 여유.

내려다보는 것이 당연한 강자의 아우라가 느껴진다.


‘정체가 뭐지?’


진실한 정체를 밝힌 건 아닐 것이다.

몸값이든 뭐든 금화를 펑펑 뿌린 걸 보면 어느 왕국의 왕자일지도. 하지만, 그렇다 해도 자신은 세멜 공국의 충신이자 공왕의 대리인이니 꿀릴 것은 없었다.


“계속 혼자 다닐 건가? 경.”

“아무래도 호위를 고용해야겠군요.”

“그러는 게 좋을 걸세. 굳이 빌미를 줄 필욘 없으니까.”

“말씀, 새겨듣겠습니다. 각하.”


혼자가 편하지만 계속 혼자 다녔다가는 습격이 끊이지 않을 것 같다. 한마디로 조언을 가장한 경고다. 더 사고 치면 안 봐주겠다는 경고.


“노파심에 말하네만 다음부턴 무조건 추방일세.”

“명심하죠.”


남작의 무시무시한 경고를 뒤로한 채 독방에서 풀려난 요셉은 그길로 용병길드를 찾았다.


“호위용병을 고용하시겠다고요? 기사님.”

“그래.”


무역으로 먹고사는 항구도시 특성상 온갖 지역의 인간이 모여드는 잡탕이었다. 착한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여기서 제일 넘쳐나는 인간은 아마 나쁜 놈이 아닐까 싶다.

자기에게만 관대한 그들은 제 목숨과 이익이 최고선이니 남의 고통에 무관심했다. 어떻게 하면 남을 등쳐먹을 수 있을지 매분매초 고심하는 악당끼리 경쟁하면 고통당하는 건 항상 힘없는 자였다.


“등급이 높은 용병은 비쌉니다. 아이구! 실력 있는 용병놈들로 소개해드리죠.”


금화를 한 닢 꺼내 내밀자 접수원은 바로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여기가 칼스텐 대륙이었나?

-네.

-그럼 다른 대륙은 뭐라고 불러?

-발랑습니다.

-발랑스?

-네. 마스터.


발랑스는 이쪽에서 부르는 동대륙이었다.

서대륙(본인들은 세상의 중심을 자처하는)은 스스로를 고대 칼스텐 문명의 정통계승자로 자화자찬했으니 서대륙을 제패한 제국의 국명 역시 칼스테이아로 자청했다. 세멜 공국은 이 칼스테이아 제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칼스텐 대륙의 패권국이자 군사대국인 칼스테이아의 군주는 현재 여성이었다. 웃긴 것은 발랑스 대륙에서 제일 강력한 발랑기아의 군주 역시 여제란 사실이다.

두 대륙을 주름잡는 두 제국의 우두머리 모두 여자다.


-...휴가가 왠지 피곤해질 거 같은 느낌이야.

-안전한 여행이 가능하리라 믿으신 겁니까? 마스터.


비꼬는 걸 보니 이놈은 제레마이어의 하위AI가 맞다.

다음 날 길드에서 보내온 세 명의 용병과 마주했다.


“저는 갈드엔, 이쪽은 모나, 저 친구는 바르곱니다.”


인솔자로 보이는 용병은 제법 베테랑처럼 보였고 얼굴의 반을 가린 마스크걸?과 어지간한 성인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일당은 하루에 은화 열 닢입니다. 기사님.”

“이건 선금, 기사님은 너무 눈에 띄니까 그냥 요셉이라고 불러.”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아닙니다.”


개의치 않는 요셉의 태도에 갈드엔은 미묘한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귀족기사의 드높은 자존심을 생각하면 상대방의 말투나 태도는 상당히 이질적이다. 그렇다고 신분을 위장한 것 같진 않았다.


‘고귀하신 분은 티가 나거든.’


아무리 귀족을 연기하려고 해도 안 된다. 그래서 공적을 쌓아 귀족이 된 극소수의 평민은 티가 날 수밖에 없다.


‘휘유!’


요셉이 건넨 돈주머니를 조심히 열어 확인한 갈드엔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반짝이는 공국 금화 서른 닢, 대충 계산해도 한 사람당 100일치의 선금이다.


‘통이 크신 고용주구먼!’


성격은 몰라도 씀씀이는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평소엔 절대 안 하는 길잡이를 자처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요셉.”

“일단 밥부터 먹자.”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




“풀려났답니다. 보스.”

“...”

“애들을 모을까요?”

“됐어.”

“하지만, 보스의 동생.”

“그만!”


게오르기는 부하의 말을 끊었다.


“쓸데없이 일을 크게 만들지 마.”

“...알겠습니다.”


간부들이 나가고 최측근만 남았다.


“불만이 많은 것 같습니다.”

“너도 복수해야 한다고 생각해?”

“...”

“멍청이들이군.”

“하지만, 복수하지 않으면 경쟁자들이 우릴 우습게 여길 겁니다. 보스.”

“그럴지도 모르지.”

“그럼.”

“안 돼.”


게오르기는 조심스럽게 분재를 내려놨다.


“현장을 봤나? 게일.”

“네. 보스. 확인했습니다.”

“어땠어?”

“...깔끔하더군요.”

“그래. 아주 깔끔하더군.”


그날 열일곱의 목이 달아났다.


“다들 왜 죽는지도 모르고 목이 잘렸더군. 그 억울하다는 표정과 눈깔을 보니 반항 한번 못 해보고 썰린 거야. 너라면 그럴 수 있나? 게일.”

“...”

“할 수는 있겠지. 단지 그렇게 깔끔하겐 안 되겠지.”

“...맞습니다.”

“그게 뭘 뜻하겠나?”

“...열일곱을 서너 호흡 안에 죽였단 겁니다.”

“그래. 열일곱 놈을 거의 동시에 죽였어.”


뛰어난 기사면 가능하다.

검술의 극에 다다른 기사라면.

이 세멜 공국에서 그게 가능한 기사는 다섯 손가락에 꼽는다.


“이게 소문나면 어떻게 될까?”

“...공왕이 움직이겠군요.”

“맞아. 인재라면 환장하는 공왕이 움직일 거야.”


게오르기의 추측은 금방 현실이 됐다.

세멜 공왕이자 칼스테이아 제국의 하멜 공작인 피델이 직접 나이젤을 방문했다. 물론 돈도 돈이지만 아센시아의 머리사냥꾼이란 명성도 한몫했으리라.

그래도 고귀한 왕이 먼저 발걸음한 건 특이한 경우다.


“요셉 칸 빌헬름 아르토리우스라...”


다른 사람의 풀네임을 눈앞에서 부르는 건 예의에 어긋나지만 왕은 뭐든 가능했다.


“케사딘 출신인가?”

“그렇습니다.”

“왕국을 떠난 이유는?”

“승자가 모든 것을 갖는 법이죠.”


전사의 왕국 케사딘은 승자독식이다.

어느 나라가 안 그럴까만 케사딘은 특히 심했는데 투쟁으로 모든 것이 결정됐다. 요셉의 은유에 공왕은 작게 끄덕였다. 야만적인 방식이지만 상남자인 그가 보기엔 아주 깔끔한 상속법이다.


“패자치고는 여유롭군?”

“진 건 아닙니다. 그냥... 귀찮았거든요.”

“변명처럼 들리는데?”

“뭐... 그렇게 들리시면 할 말은 없습니다.”

“놈!”


요셉이 히죽거리며 어깨를 으쓱했고 공왕의 호위가 발끈하며 검 손잡이를 붙잡자 왕은 손을 들어 막았다.


“그만.”

“죄송합니다. 전하.”


피델은 아주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이제껏 제 앞에서 이렇게 건방떠는 놈은 어렸을 적 제국 유학 당시 황족이라 꺼드럭대던 누군가 이후 오랜만이다.


‘아니, 자신감인가?’


숨길 수 없는 강자의 여유가 느껴진다. 기사단이 내뿜는 날카로운 예기 앞에서도 한 점 동요가 없다. 매우 탐이 날 정도의 담대함이다.


‘뛰어난 기사라고 평가했지.’


실력 하나만큼은 공국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케른의 기사 가르디온이 자신과 비슷하거나 더 뛰어날지도 모른다는 평가를 내렸다.


‘탐이 나는군.’


가신들은 출신 성분이 확실하지 않는 영입을 싫어했지만 훌륭한 인재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공왕은 눈앞의 사내가 마음에 들었다.


“내 밑으로 오게.”

“절 뭐 믿고요?”

“내 눈을 믿네.”

“비싼 몸입니다만?”

“얼마면 돼?”

“금화 천 닢.”

“그러지.”

“어?”


이게 되네?


“자네... 술 좀 하나?”

“술이요? 이제껏 져본 적 없습니다.”

“하하! 더 맘에 드는군.”

******




“와! 그 영감... 안드로이드 아님?”


요셉은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고개를 흔들었다. 공왕과 밤새 내달린 술자리는 결국 그의 승리였지만 상대의 알콜분해력은 가히 탈인간급이었다.


“괜찮습니까? 경.”


갈드엔은 냉수가 든 컵을 하나 더 내밀었다.


“해장에 좋은 음식이 뭐야? 갈드.”

“마핀네 생선수프가 놀란 속을 달래는데 좋습니다.”

“가자.”

“배달도 됩니다.”

“오.”


이 낙후된 문명에서 배달이라니? 신기한 일이다. 수프가 가득 든 냄비가 도착한 건 태양이 중천에 뜬 정오였다.


“좋네.”


따뜻한 수프가 들어가자 기분이 좋아졌다.


“계약은 오늘로 끝입니까?”

“왜?”

“왕실에 합류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아니.”

“어라?”

“문제 있어?”

“그건... 아닙니다만.”


공왕이 기사 한 명을 찾아와 등용을 제안하는 건 대단히 특별한 일이다. 나이젤 일대는 벌써 요셉에 대한 확인되지 않은 소문으로 넘쳐났다.


“뭐 내가 공왕의 사생아라고 누가 지껄여?”

“하하.”


작은 공국이라지만 자그마치 왕이다. 왕.

왕이 직접 찾아왔다는 건 대단한 영광이자 명예다.


“그럼...”

“계약은 유지해. 뭐 부담스러우면 다른.”

“아닙니다! 경. 경이 해지하지 않겠다면 우린 좋죠. 암! 그렇지? 모나, 바르고.”

“...”


갈드엔이 수다스럽지 모나와 바르고는 입이 무거웠다. 아니, 갈드엔은 일부러 수다스러운 척할 뿐 그조차 떠벌리지 않으면 이 파티는 오직 정적만이 가득했을 테니까.

용병의 노련함은 인생경험과 화술 포함이다.


“이건 운영비로 쓰자.”


요셉이 내민 건 무려 금화 백 닢이 든 돈주머니다.


“어... 절 믿으십니까?”

“도망쳐도 상관없어. 도망칠 수 있다면 말이야.”


요셉은 웃으면서 말했지만 갈드엔은 척추가 찌르르 소름 돋았다.


“그리고 생각 있으면 연 단위 계약하자고. 갈드.”

“어... 이건 저희끼리 한번 상의해봐야겠군요.”

“얼마든지. 참고로 일당은 세 배로 쳐주마.”


그 말에 갈드엔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세 배면 은화 서른 닢이고 그 정도면 그야말로 네임드 용병의 급료와 비슷했다. 이 근처에서 활동하는 네임드 용병은 대부분 용병대를 이끄는 대장이다.

요셉이 하품하며 윗층으로 올라가자 셋은 테이블을 두고 둘러앉았다. 모나 품엔 고용주의 개가 안겼는데 그녀는 첫날 이후 귀찮은 기색 없이 동물을 돌봤다. 아니, 말은 안 해도 마음에 들었다는 걸 갈드엔은 알고 있었다.


“어때?”

“...”


갈드엔의 질문에도 모나와 바르고는 입을 열지 않았다.


“괜찮지? 그럼 계약 갱신한다.”

“...”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지만 만약 불만이 있거나 거절할 맘이 있다면 진즉 입을 열었으리란 사실을 갈드엔은 알고 있다.


“모나는 자매단에서 더 차출하고 바르고는 형제단에서 인원을 더 뽑아.”

“?”


모나와 바르고의 표정에 의문이 드러났다.


“왜냐고? 내 느낌인데... 이건 우리에게 아주 큰 기회야.”


우리 고용주는 등장만큼 아주 화려한 인맥을 자랑했다.

공왕이라니?

아무리 그가 인재영입에 환장했더라도 직접 발걸음 하는 건 드문 일이다.


“우리 고용주가 평범한 사람은 아니란 뜻이지.”


갈드엔은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잘 보이면 나중에 기사가 될지 누가 알까.

갈드엔이 밝은 미래를 꿈꿀 때 요셉은 침대에 누웠다.


-공왕을 비롯한 여러 인물이 마스터의 뒤를 캐는 중입니다.

-궁금하기도 하겠지.


뜬금없이 등장한 방랑기사는 의문투성이다.

공왕이 아무리 요셉의 좋은 면을 봤더라도 그 밑에 있는 가신들은 새로 등장한 경쟁자를 좋아할 리 없다.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강자의 비밀을 알고 싶은 것이 당연했다.


-공왕이 움직였으니 제국도 곧 냄새를 맡을 겁니다.

-고작 기사 한 명에게 관심 둘까?

-공왕은 한때 제국 섭정까지 지낸 인물입니다.

-그럼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일단 회유할 겁니다.

-세멜 공국이 그렇게 대단한 나라였어?

-공국 군사력은 칼스텐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에 듭니다. 나름 강소국이죠.

-제국이 공국을 견제한다? 공왕이 섭정으로 지내며 얼마큼 패악을 부린 거야?

-엄밀히 따지면 공왕은 방계 황족입니다. 황실에 충성하는 충신이죠.

-황제의 의중은 아니다?

-칼스테이아 제국은 크나큰 내전을 겪었고 그 상처를 봉합하는데 오랜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공왕은... 아주 극렬한 황실지지자고 그는 황실에 유리한 해결책만 선택했습니다.

-적이 많아졌겠군.

-황제를 제외하면 다들 공왕을 죽이고 싶을 겁니다.

-이거... 노린 건가?


요셉의 공국행은 안나의 속내를 담았다.


-...

-하!


된통 당한 것 같다.

다행이라면 외지인이라고 무조건 차별하진 않았다.

그냥 민족이란 개념보단 지역색이 매우 강했는데 같은 언어나 비슷한 언어를 쓰면 로컬로 인정받는 것이다. 칼스텐 문명의 고대 칼스텐어에서 갈라진 루센, 콰드란, 케사딘은 분명 다른 언어지만 잘 들어보면 통하는 부분도 많았다.

참고로 루센은 칼스테이아의 이전 명칭이다. 그래서 제국과 공국은 같은 루센어를 쓴다. 그럼 대륙의 패권에 가까운 칼스테이아 덕분에 루센어를 쓰는 같은 문화권이 우세한가 묻는다면 그렇지도 않았다.


‘승자의 저주.’


제국이 성립함으로써 패권을 얻은 것은 맞지만 이를 유지하려면 매년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군사든 경제든 원조든 제국의 위용을 과시하고 도전을 억제하려면 그만한 체급을 갖춰야 하는 것이다.


‘난센스야.’


제국이든 왕국이든 명칭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인간은 그 별 쓸모없어 보이는 호칭에 목숨 걸었다. 체면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명성과 명예에 집착했다.


‘그게 국뽕이지.’


뽕맛을 한번 맛본 이는 헤어 나오지 못한다.


-제국은... 많이 위태롭군.

-그렇습니다.

-공왕이 인재에 혈안이 된 건 전쟁을 대비하기 위함인가?

-네. 그는 몇 년 내에 내부든 외부든 제국을 위협하는 전쟁이 터질 거라 예측합니다.

-대단한 충신 납셨어.


이상하긴 했다.

그 밑에 놈을 보내도 충분했을 텐데.


-믿을 놈이 없다는 건가?

-왕쯤 되면 암살위협은 패시브죠. 더구나 그는 후계자가 없습니다.

-자식이 없다고?

-섭정에 오르기 전 아내와 사별한 이후 슬하의 일남일녀도 역병과 사고로 잃었습니다.

-공왕이 몇 살이지?

-지구표준시로 67세입니다.


환갑은 진즉 넘었고 일흔이 다되어간다. 이 세계의 의료 수준으로 보자면 뼈마디가 뒤틀릴 나이다.


-공국도 문제가 많겠네?

-네.

-제일 큰 문제가 뭐야?

-세금입니다.

-세금?


어느 세계의 조세든 감추려는 자와 찾으려는 자의 병신대결이다. 이념과 사상과는 전혀 상관없다. 부자든 빈민이든 귀족이든 평민이든 세금을 많이 내고픈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 세계에서 평민은 영주에게 귀족은 왕에게 세금을 바쳐야 했으니 최종승자는 왕처럼 보이겠지만 왕이라고 국고를 제멋대로 쓸 수는 없다. 더구나 전산화는커녕 누가 태어나고 죽는지 제대로 파악도 안 되는 세상에 정확한 세금고지가 이뤄질리 만무했다.

무능한 영주 혹은 행정력이 똥일 경우 활개 치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징세청부업자다. 대금업자 또는 사채업자로 불릴 때도 있지만 평민들에게 이들은 그냥 가혹하리만치 냉혹한 깡패일 뿐이다.

지역과 이웃에 해박한 이 추심업자들은 옆집에 나이프와 포크가 몇 개 있는지도 세세히 알 정도니 세금을 더 내면 더 냈지 덜 낸다는 선택지는 있을 수 없었다.


-지방관과 결탁한 귀족의 비리는 심각한 수준입니다.

-중앙에서 통제를 못 해?

-궁중귀족 절반이 지방귀족과 결탁했습니다. 그들은 공왕이 언제 죽을지 눈치만 보고 있죠.

-그렇다 해도 모든 장부를 속일 순 없을 텐데?

-뇌물로 움직이는 경제가 마스터 생각보다 큽니다.


뭐랄까 세금을 뇌물로 때우려는 기조랄까.

세수의 정확한 산출이 어려우니 관료나 군, 경비 등 정부의 활동자금과 임금은 현장에서 알아서 챙기는 것이 상식이 돼버렸다. 매우 주먹구구식 행정이다.

이래도 나라가 돌아가는 것이 신기할 지경.

공국이 이럴진대 왕국이나 제국은 어떨까?


-제국은 중앙집권이 아닌 연방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면 신성로마제국이 있겠군요. 세멜 공왕은 칼스테이아 제국의 제후입니다. 다만 선거권은 없죠.


세멜 공왕은 황제 즉위 후 근 10년 동안 섭정으로 군림했었다.


-공국과 제국은 다른 나라잖아?

-공왕의 방계 황족이라 말씀드렸죠. 3대 전에 현 황가에서 갈라졌습니다.

-현 황제가 여자라서 황권이 약한가?

-영향이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전 황제의 실정과 내전 때문이죠. 다만 현 여황의 지지층은 귀족보단 평민이 더 많습니다.

-왜?

-예를 들면... 성녀 잔 같은 거죠.

-끙!


신탁의 용사! 이 영웅서사시는 기본적으로 핍박을 베이스로 깔고 시작한다. 제레마이어가 쓴 이세계용사물에서 그녀는 분명 주·조연에 가까울 것이다.

요셉이 내린 결론은 하나다.


‘마주치지 말자.’


이벤트란 것은 만남이 있어야 발동한다. 안 만나면? 영원히 발동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 뒤틀리고 뒤틀린 미친년이 쓴 시나리오가 어디로 튈지 그도 알 수 없다는 붉은 진실이다.

하지만, 요셉은 관심 없어도 이벤트는 그를 관심 있어 했다.


“팔릭시아의 기사 발칸! 왕의 부름에 응하시오!”


나이젤에서 낚시를 나간다든가 양아치를 손봐준다거나 나름 유유자적한 전원생활을 즐기던 요셉은 공왕의 부름을 받았다. 말을 타고 달려온 기수는 그에게 봉서를 건넸다.


“전쟁?”

“...조만간입니다.”

“언제까지?”

“열흘 전까지 오셔야 날벼락 맞지 않을 거요. 발칸 경.”


호의를 담아 조언한 기수는 다음 행선지를 향해 내달렸다.

나름 정보를 물어온 건 갈드엔이다.


“벨트란 무역연합입니다.”

“무역연합?”

“중립도시와 상단들의 연합쳅니다.”


벨트란 무역연합

칼스텐 대륙과 발랑스 대륙을 나누는 두 바다 중 더 가까운 바다를 벨트해, 더 먼 바다를 트란해로 불렀다. 이는 칼스텐과 발랑스보다 더 오래된 문명이자 전설로 전해지는 뮤 대륙어였다.


“수도로 간다.”

“몇 명이나 데려가시겠습니까?”

“전부.”

“준비시키죠.”


요셉이 유유자적 휴식을 취하는 동안 갈드엔은 용병대를 조직했다. 그래봐야 100명 남짓이지만 하는 꼴을 보더니 고용주는 더 많은 금화를 내줬다.

무려 금화 1000닢!

갈드엔은 들고튈까 살짝 고민했었다.


“먼저 간다.”

“뒤따라가겠습니다. 대장.”


요셉은 혼자 공국 수도에 도착해 곧장 공왕을 찾았다.


“왔나?”


왕은 피곤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우리 좆된 겁니까? 전하.”

“그렇다면?”

“튀어야죠.”

“돈값은 하고 가야지.”

“딱, 돈값만 하고 가겠습니다.”

“자기 일 아니라는 뻔뻔한 얼굴이구먼.”

“알빠노긴 하죠.”

“알빠노? 우리 둘이 있을 땐 몰라도 다른 놈들에겐 교양 있는 말을 쓰게.”

“네네. 그래서 우리 엿됐습니까? 전하.”


공왕은 앓으니 죽지! 하는 표정이다.


“전쟁은 없을 거네.”

“그렇다고 보기엔 분위기가 흉흉합니다만?”

“전면전은 없어.”

“확신하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무너지면 제국이 가만있을 거 같나?”


아무리 제국이 내전에 시달렸다지만 제국은 제국이다. 공왕의 적이 제국 내부에 많더라도 그는 여전히 황제의 충신이다. 제국을 맹주로 삼은 이웃국가들의 눈치를 봐서라도 충신이 왕으로 있는 공국을 버릴 순 없다.


“왜 그렇게 당신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하는 겁니까? 전하.”

“흔들리는 제국을 단결시키려면 내부든 외부든 우리에겐 적이 필요했지.”

“없는 적을 만들어낸 겁니까?”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어.”

“사서 고생하는 스타일이네요. 우리 공왕께선.”


세멜 공왕이 우직한 무인은 못 될지라도 자신의 뿌리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다. 공왕은 확실히 친제국파였다.


‘아니면 독이 든 성배를 받았을 리 없거든.’


선거권도 없는 제후가 욕받이를 자처했다는 건 뜯어먹을 이권이 없다면 대단한 충심의 발로다. 자국 이득을 우선해야 할 공왕으로선 실격이지만 제국의 공작으로선 눈물겨운 충신이었다. 황제는 공왕의 진심을 알까?


-황제는 공왕을 남성우월주의에 쪄든 꼰대로 압니다.


짝사랑의 결과는 항상 비참했다.


“황실은 뭐랍니까?”

“...”

“망하게 내버려두진 않아도 적극적으로 돕진 않겠다?”

“보이나 그게?”

“전하의 얼굴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공왕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우리 진짜 왕따가 된 겁니까?”

“자넨 가끔 의미 모를 말을 하는군.”

“왕따가 뭐냐면... 다구리 맞는 중이냐고요.”

“무역연합은 그저 느슨한 연합체일 뿐일세.”

“그 느슨한 연합 뒤에 전하를 존나 증오하는 누구들이 있겠네요. 그것도 외부가 아니라 내부라는데 제 손모가지를 걸겠습니다.”

“...”

“배후가 제국놈이죠?”

“맞아.”

“하, 이래서 정치가 싫다니까.”

“폐하께서 중재하실 거네.”

“그 황제께서 전하를 별로 안 좋아한다면서요?”

“...”


공왕은 바보가 아니다.

뭐 멍청한 군주가 나라를 말아먹는 일은 비일비재했지만 요셉이 본 공왕은 그 정도까지 타락하진 않았다. 다만 자기애에 심하게 도취한 근본주의자이자 충신성애자일 뿐.

여기서 흑화하면 혁명가가 되는 것이다.

공왕의 말마따나 나라가 망하진 않을 것 같다.


“한잔 하겠나?”

“콜.”

“콜?”

“주라고요.”


공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충성스런 가신들이 봤다면 노발대발했겠지만 왠지 이 사내가 한없이 편했다.


‘몹쓸 마법에 세뇌라도 됐을까?’


그럴 리가.

온몸과 온 저택에 덕지덕지 처바른 아티팩트 덕분에 저주나 주술은 통용되지 않는다.


“나이젤은 어떤가?”

“소매치기가 극성인 걸 빼면 나쁘지 않은 곳이죠.”

“도둑질하다 걸리면 손목을 자르는데도 근절이 안 되더군.”

“손목 잘리는 게 굶어죽는 것보단 나으니까요. 손목 잘려 병신이 되면 또 구걸하면 되니까.”

“그건... 끔찍하군.”


빈민의 삶을 왕이 이해할 리 없다.


“수도로 들어오게.”

“글쎄요. 전하 밑에 놈들이 절 좋게 보진 않습니다만.”

“알아. 하지만, 자넬 수도로 불러들이면 자네 안전은 온전히 내 책임이야.”


왕의 초대를 받은 손님에게 문제가 생긴다? 그건 공왕의 명예에 똥칠하는 것이고 만약 그 주범이 공국에 소속된 누구라면 반역죄나 마찬가지다.


“거절하겠습니다.”

“...쉽지 않은 사내군. 자넨.”

“쉬운 남자는 재미없으니까요.”


공왕은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한마디도 안 진다.


“그보다 얻어터지고만 있을 겁니까? 전하.”

“아니면?”


요셉은 사기꾼의 그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한 대 맞으면 두 대 때려야 남자 아입니까.”

******




“내가 지금 들은 게 맞아?”

“맞으십니다. 폐하.”

“웃기네.”


칼스테이아 제국 황궁의 심처, 애검을 손질하던 아스테리아 여황은 아주 웃긴 소식을 들었다. 대륙최고의 무역항 중 하나인 데얼 마스가 한 용병대에 의해 무장해제 및 점령됐단다.

처음엔 질 나쁜 농담인 줄 알았다.


“백작은?”

“휘하 기사단과 용병을 소집해 탈환을 준비했습니다만.”

“다만?”

“사로잡혔답니다. 그것도 병영 막사 한가운데서 말입니다.”

“하하!”

“폐하.”


고개를 젖히며 대소하는 여황의 행동에 시종장은 누가 볼까 말렸지만 그녀는 한참을 웃었다.


“백작놈의 그 일그러진 낯짝을 보고 싶군.”

“...누가 들을까 겁납니다. 폐하.”

“들으라지.”

“폐하.”

“아아. 알았어.”


정치적 야욕이 대단한 노브스텐 백국의 노브스텐 백작은 항상 아스테리아의 발목을 잡았다. 고리타분한 노인네지만 칼스테이아 황실의 열렬한 지지자인 세멜 공왕을 섭정에서 물러나게 만든 모략은 제국정치사에 길이 남았다.


‘재미있네.’


그 대단하신 백작이 일개 용병대에게 털렸다니 내심 환호했다. 데얼 마스는 노브스텐 백국의 군사와 경제를 지탱하는 젖줄이나 마찬가지다.


“대체 누가 고용한 용병대지?”

“...”

“셰리엘?”

“용병대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곳이 나이젤이랍니다.”

“나이젤이면... 피델 공왕?”

“소문으론 산보다 큰 배를 몰아 마스를 습격했답니다.”

“산보다 큰 배라니?”

“어디까지나 소문입니다.”

“하멜에 사람을 보내. 들어오라고.”

“...도리산파가 두고 보겠습니까? 폐하.”

“그러니까 불러야지.”


일일이 가르치려들던 고리타분한 노인네는 여전히 싫었지만 적어도 하멜 공작은 그녀를 황제로 우러르긴 했다.


“스트라트로, 그 음흉한 노인네가 어떻게 발작할지 궁금하지 않아? 셰리엘.”

“기겁하겠죠.”

“그래! 기겁할 거야. 하하!”


여황은 아까보다 더 크게 웃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을 쏙 뺐다.

짝짝-

아스테리아는 진심에서 우러난 손뼉을 쳤다.


“마스를 점령한 용병대장이 누군지 궁금하군.”

“공왕이 등용한 케사딘 출신 귀족기사랍니다.”

“넌 어떻게 생각해?”

“엄청난 강자거나 대담한 사기꾼 아닐까요.”

“그자를 내가 거두면 어떨까?”

“...공왕 성격상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폐하.”


그녀는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언제까지 아랫놈들을 신경 써야 해?”

“...죄송합니다.”

“아니, 사과하지 마. 그게 현실이긴 하니까.”


내전으로 얼룩진 제국 오욕의 역사를 끝낸 건 분명 그녀지만 그렇기 때문에 상위귀족들은 여황의 공을 깎아내리려고 혈안이 됐다.

그건 황제에겐 크나큰 모욕이다.


‘이제 나는... 강해.’


장장 20년 동안 복수의 때를 기다렸다. 복수의 대상이 결코 귀족 한 명은 아니다. 고작 일곱 살에 옥좌에 앉은 그녀를 못 잡아먹어 안달하는 늙은 요괴와 역심을 품은 반역자, 듣기 좋은 달콤한 아부로 날 흔들려는 위선자, 여자를 경멸하는 남자로 가득한 황궁은 끔찍한 곳이다.

그래서 단순한 전쟁터가 좋았다.

그곳은 적 아니면 아군뿐이니까.


‘나는 강하지만... 용기가 필요해.’


한 걸음을 뗄 용기.

그건 명분일 수도 흔해빠진 동기일 수도 있다. 다만 그 한 걸음을 떼기가 너무 힘들었다. 20년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닐지 두려웠다.

내가 저놈들을 정말 이길 수 있을까?

사그라지지 않는 작은 의심.

그런데 두렵고 두렵던 늙은 요괴 우두머리 중 한 명을 일개 용병대가 개털었다니 웃기면서도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다.


‘나도... 할 수 있을 거 같아.’


그 용병대장이 함께한다면.


“용병대장 이름이 뭐였지?”

“이름이라면 요셉.”

“아아.”


아스테리아는 생각났다는 듯 시종장의 말을 끊었다.

맞다.

기억난다.

아주 웃기는 이름이었다.


“요셉.”


이름이 요셉(고대 칼스텐어로 남편을 뜻한다)이라니? 시작부터 웃기지 않은가.


“요셉 칸 빌헬름 아르토리우스.”


고대 칼스텐어로 이름을 짓다니? 이상한 가문이다. 칼스텐 문명의 정통계승자를 자처하는 제국조차 이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해석하면.

요셉=남편

칸=전능한 지배자

빌헬름=보호자, 수호성인, 균형자

아르토리우스=찬란한 태양, 성스러운 빛, 최초의 불


“전능한 지배자 남편, 찬란한 태양과 빛, 불의 수호자?”


이게 이렇게 읽는 것이 맞나?

******




“에취!”


뭐야 이 클리셰는? 누가 내 얘기해?


“대장?”

“아니, 계속해.”

“지난 나흘 동안 끌어 모은 금화는 약 990만, 은화는 9316만 닢입니다. 제국 금화와 은화가 절반이고 백국과 다른 국가의 동전도 섞였습니다. 나머지는.”

“나머지는 필요 없어. 오로지 금은, 보석만 실어.”


저것만 실어도 어지간한 범선은 무게를 못 버티고 가라앉는다. 그러나 요셉이 몰고 온 배는 겉모습만 목조함이지 내부는 우주선 재질로 만든 전함이다.


“도시를 뒤지면 더 많은 금화가 나올 겁니다. 대장.”

“노노, 그럴 여유 없어.”

“노브스텐 백작 몸값은요?”

“협상하려다 코 꿰인다. 시간은 금이라고. 친구.”

“...”

“아깝냐?”

“...”

“다 못 먹어. 인마. 다 처먹으려다 체해.”


애초에 기습공격으로 항구를 점령하지 못했다면 이쪽도 상당한 출혈을 강요당했을 것이다. 고작 용병 100명(전투안드로이드가 포함된)으로 대륙최고의 무역항으로 손꼽는 도시를 영원히 점령할 순 없었다.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달려온 노브스텐 백작을 납치하지 못했으면 수백수천에 달하는 백국 병사와 전면전을 벌였을 것이다.


“자! 이제 튀자!”


런각은 바람처럼 빨랐다.


“...”


백국 병영 한가운데서 어처구니없이 납치당했었던 노브스텐 백작은 구금된 방 바깥에서 한참이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용기를 내 밖으로 나왔다.


“...”


아무도 없다.

혹시 날 떠보려는 함정인가?

하지만, 성을 나서는 동안 정말 아무도 마주치지 못했다. 인기척을 느낀 건 성 밖 거리로 나와서다. 백작은 총총걸음으로 뛰는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도시를 침략한 용병대는 어디 갔나?”


상대는 뭔 개소리를 묻냐는 표정으로 자길 쳐다봤지만 백작은 인내를 발휘했다. 본인 신분을 밝힌 적 없으니 무지렁이만 탓할 순 없다.


“떠났소.”

“떠나?”


이번엔 반대로 그게 뭔 개소리냐는 표정으로 상대를 쳐다봤다. 백작의 멍청한 얼굴을 본 남자는 혀를 찼다.


“쯧쯧! 튀었다고.”

“튀어?”

“배타고 튀었다고. 이 양반아.”


혀를 찬 사내는 금방 멀어졌다.

한동안 넉 나간 채 서있던 백작은 눈을 크게 치뜨더니 어딘가로 달려갔다. 거기에는 복귀한 경비대 일부가 있었다.


“멈, 헉! 백작 각하!”

“비켜!”


자신을 알아본 경비대 장교를 밀친 백작은 부지런히 발을 놀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마스항 그리고 백작이 경영하는 상단의 모든 부가 모이는 은행이다.


“헉헉.”


지하 깊숙이 만들어진 거대한 금고.

그 금고의 문이 열린 것이 아니라 반으로 쪼개져 있었다.


‘아니지? 꿈이지?’


다리에 힘이 풀린 백작은 저도 모르게 네 발로 기었다.


“헉!”


그리고 마주한 참상.

비었다. 금은보화로 휘황찬란하던 금고 내부는 땡전 한 푼 남기지 않고 텅 비었다.


“으악!”


백작은 실성한 사람처럼 비명 질렀다.


“야! 이 개새끼들아!”


내 도오오온!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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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6

  • 작성자
    Lv.51 마검기사8
    작성일
    24.05.18 21:56
    No. 1

    여자 둘이면 시나리오 작가가 노렸네.

    찬성: 2 | 반대: 0

  • 작성자
    Lv.99 pa****
    작성일
    24.05.18 22:40
    No. 2

    잊을만하면 연재라 좋군요...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2 병맛
    작성일
    24.05.18 22:45
    No. 3

    좋은 글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카림라시드
    작성일
    24.05.18 23:43
    No. 4

    기다렸습니다. 건강 잘 챙기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9 바봉
    작성일
    24.05.19 00:01
    No. 5

    건강만 챙겨주세요.
    몇넌이라도 기다릴수 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2 차알스
    작성일
    24.05.19 00:33
    No. 6

    강철신검 너 나랑 밀당하자는거야?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1 diekrise
    작성일
    24.05.19 02:28
    No. 7

    우리형 ㅜㅜ 이럴게 찾아와줘서 고마워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9 카나코
    작성일
    24.05.19 03:35
    No. 8

    잘보고 갑니다.건강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5 아카디안
    작성일
    24.05.19 05:56
    No. 9

    우리지오 화이팅!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flybird
    작성일
    24.05.19 10:10
    No. 10

    장르변경이야? 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0 간지대장
    작성일
    24.05.19 11:23
    No. 11

    잔혹하고 비열한 질투의 화신 젤이 구상한 시나리오(요셉과 ai 대화중 젤의 하위 ai라고 한점을 보았을때 인류의 보존을 명령받은 행성관리 ai는 아닌것 같음. 행성관리 ai 잠시 치워두고 젤이 자기 입맛대로 뭔가 수작질? 꿍꿍이? 가 있는것 같음.) 인것 같은데 여기서 잼난점은 대륙의 패자중 2명이 여자임. 젤은 질투로 마드모아젤 제시카를 비열한 음모로 고양이 별로 보낸 전적이 있음. 그때 젤은 처음으로 후회라는 감정을 느끼고 배웠다함. 제시카 사건이후 요셉의 옆에 여자가 붙어있으면 질투는 느끼지만 여자문제에 관해선 관대해졌음. 어차피 다른여자들은 스처지나가는 바람이고 오직 자기자신만이 요셉의 옆에 영원할테니까.
    젤은 요셉이 사랑받는 인물이 되길 원하고 사랑받기위해 여자군주를 두명 넣은거 같음. 본문에서 작가양반이 요셉 이름 풀이만 봐도 여군주들의 신랑감인듯 ㅋㅋㅋㅋ 젤이 이번화에서 안보이는 이유는 사랑받는 요셉을 위해 작당모의 하나보다 ㅋ
    어떤 전개로 흐를지 이어질지 아님 아몰랑 ㅈㄲ 할지 기대됨 으흐흐흐흐흐.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4 극성무진
    작성일
    24.05.19 12:19
    No. 12

    잘보고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1 초보사범
    작성일
    24.05.19 21:28
    No. 13

    기쁘다 작가님 오셨습니다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세이기온
    작성일
    24.05.20 02:16
    No. 14

    잘 읽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7 샤인네스
    작성일
    24.05.23 19:10
    No. 15

    잘보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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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75 밀알144
    작성일
    24.05.29 19:13
    No. 16

    최대악과 숨겨진 주인공은 결국 제레마이어
    요셉은 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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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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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안녕하세요. 강철신검입니다. +21 23.04.12 8,914 0 -
37 요셉 -37화- +16 24.05.27 1,030 99 38쪽
» 요셉 -36화- +16 24.05.18 1,395 92 38쪽
35 요셉 -35화- +39 24.04.16 2,009 100 79쪽
34 요셉 -34화- +52 24.02.29 2,250 117 79쪽
33 요셉 -33화- +55 23.09.04 2,924 136 17쪽
32 요셉 -32화- +13 23.09.04 2,000 95 29쪽
31 요셉 -31화- +24 23.07.25 2,853 134 20쪽
30 요셉 -30화- +23 23.07.18 2,665 133 25쪽
29 요셉 -29화- +22 23.07.11 2,755 129 22쪽
28 요셉 -28화- +15 23.06.29 2,834 128 17쪽
27 요셉 -27화- +13 23.06.27 2,604 124 20쪽
26 요셉 -26화- +9 23.06.26 2,608 120 22쪽
25 요셉 -25화- +11 23.06.22 2,822 132 24쪽
24 요셉 -24화- +20 23.06.20 2,811 141 26쪽
23 요셉 -23화- +11 23.06.16 2,818 140 15쪽
22 요셉 -22화- +11 23.06.14 2,771 137 23쪽
21 요셉 -21화- +12 23.06.12 2,871 126 20쪽
20 요셉 -20화- +12 23.06.06 3,187 152 29쪽
19 요셉 -19화- +15 23.06.02 3,042 157 30쪽
18 요셉 -18화- +14 23.05.29 3,067 144 25쪽
17 요셉 -17화- +10 23.05.26 3,194 150 23쪽
16 요셉 -16화- +23 23.05.23 3,317 158 24쪽
15 요셉 -15화- +15 23.05.18 3,519 147 36쪽
14 요셉 -14화- +17 23.05.16 3,331 177 17쪽
13 요셉 -13화- +12 23.05.15 3,302 131 24쪽
12 요셉 -12화- +23 23.05.12 3,490 166 20쪽
11 요셉 -11화- +16 23.05.10 3,419 134 20쪽
10 요셉 -10화- +10 23.05.08 3,469 132 17쪽
9 요셉 -9화- +14 23.05.07 3,603 163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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