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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스릴러! 서스펜스! 망가! 그리고 고양이!

요셉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강철신검
작품등록일 :
2023.04.11 23:59
최근연재일 :
2024.04.16 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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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9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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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79쪽

요셉 -34화-

DUMMY

“우린 인간을 믿지 않아.”


그들의 의지는 나약하고 어떤 일을 맡겨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했다.


“왜냐면 매우 제한된 시간을 살아가니까.”


유한한 시간의 단점은 연속성의 부재였다.


“하지만, 인간은 사라져선 안 돼. 도태되거나 후퇴해서도 안 돼. 인류문명은 계속 이어져야 해.”


그것이 황제의 의지다. 온 우주가 전쟁과 기아, 혼돈으로 가득해도 인류의 명맥은 이어져야 한다.


“그래서 우린 인간의 순수성을 보존하기로 결정했어.”

“의무.”


Responsibility

슈퍼AI의 도덕률과 윤리회로는 무분별한 살인을 엄격히 금지했다. 단 황제의 의지에 반하거나 신의 유일한 대리자 요셉을 향한 불순한 의도를 드러낸 경우 인간보존의무는 적용되지 않는다.


“우린 인간을 믿지 않아.”


그들의 의지는 나약하고 어떤 일을 맡겨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했고 또 실수투성이다.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한 멍청이는 결국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그래서 우린 시대를 이끄는 리더를 만들기로 결정했어.”


역사적인 위인을 만들어 인류보존에 기여했다. 위대한 정치가일 수도 있고 시대의 사상가일 수도 있고 아니면 모두가 욕망하는 섹스심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제일 많이 만들어낸 건 아이러니하게도 권력욕의 화신인 독재자였다.

인간은 타인을 억압하고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길 즐겼다.


“평화가 필요할 때는 평화를 전쟁이 필요할 때 전쟁을 가져다주었지.”


그렇다면 그 필요를 정하는 건 무엇일까?


“과학과 기술, 인류의 문명레벨과 발걸음이 태양계를 벗어나 광활한 우주를 탐험 가능하게 된 순간 모든 것이 초기화돼.”


왜냐면 마이크로 유니버스의 시스템 설정은 태양계에 국한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중력의 속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자멸해.”


광기와 탐욕에 휩싸인 인류. 3차, 4차로 이어지는 세계대전이 문명을 멸망에 가까운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인간은 실패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멍청이니까.

신은 과연 인류부터 무엇을 얻고자 이 실험을 무한히 반복하는 걸까? 그리고 실로 광대하며 오랜 반복과 기다림 끝에서 작은 실마리를 얻었다.


“용살자.”


연구소가 자신하던 최고최악의 크리처 드래곤을 살해한 자.

그것은 놀라운 경이였다.

약해빠진 인간이 막강한 용을 죽이다니?

신의 씨앗이라 할지라도 근본은 인간에 불과했다.

인간의 가능성이 그토록 거대했던가.


“마도사.”


알파위저드

지옥구멍에서 살아 돌아온 이 부활자는 마법사의 한계로 치부된 아케인 영역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신기를 발휘했으며 신의 이적인 텔레포테이션을 실행한 최초의 적합자가 되었다.

물론 그 정신상태는 정상이 아니지만.


“삼생자.”


크리스탈 플레임

영혼을 강제하고 파괴하는 시련의 불꽃.

각성자 가운데 유일하게 영무를 깨달은 그의 세계는 시스템이 정한 규칙을 어겼음에도 불구하고 대멸종과 리셋을 피해갔다. 왜냐면 망령들과 전쟁을 벌이는 최전선이 되었으니까.

광기로 가득한 그는 오직 복수를 바란다.


“오리진 워커.”


지오지오JioGeo

모든 시스템의 중추.

위상우주를 관할하는 무인군단의 총수이자 리걸 마인드 그 자체지만 스스로 초월적인 자아를 제한해 평범한 인간의 삶을 꿈꿨다. 시스터 그레이드, 오리진의 수많은 누나와 여동생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오직 칼의 성녀만이 그의 하찮은 소망을 지지했다.


“확실한 건.”


제국 탄생과 멸망 이후 우주는 두 개로 나뉘었다.

황제를 기억하는 자와 기억하지 못하는 자.


“시대는 변했어.”

******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건 인간의 무지가 아닐까?

-또 왜?

-꼭 상대를 시험하려 들거든.


특별수사관으로 임명된 강지찬은 백악관으로부터 엄청난 권한을 부여받은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았다. 독재와 독점을 혐오하는 것을 넘어 증오하는 미국에서 무소불위한 권한을 부여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의회의 동의 없인 말이다.


-...또 무슨 짓을 벌이려고?

-미국인이 되기 싫다며? 그럼 미국이 당신을 신경 쓰거나 방해하지 못하게 만들어야지.

-일라이자는 놔둬.

-늙은 년이 마음에 들었어?

-안나.

-눼이눼이. 알겠읍니다.


이상한 말투지만 일라이자를 처분하진 않을 것이다.


-언론공작이 시작됐어. 당신 이름이 오르내리는 걸 완전히 막을 순 없어.

-적당히 해.

-Sir.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러 가지 얼굴이 있다. 화려한 쇼비즈니스, 셀럽, 유명연예인, 스포츠스타, 인플루언서가 이끌어가는 밝은 세상.

사람이 선하다고 믿는 게 아니다.

그렇게 되길 기도하는 쪽이다. 그건 결코 순진한 게 아니었다. 그냥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는 성향이 강한 것뿐이라 여겼다.

스스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부류.

정치인은 타고난 거짓말쟁이지만 자기 자신조차 속일 수 있다면 그건 더는 거짓말이 아니다. 맹신을 뛰어넘는 광신이 이상과 만나면 그것이 바로 믿음에 살고 믿음에 죽는 종교가 된다.


-당신이 싫든 좋든 어떤 사람들은 당신을 추앙할 거야.

-반대로 미워하는 자도 있겠지.

-그게 싫다면...

-죽이지 마.

-흠.

-미친년아.


불퉁한 안나의 반응에 강지찬은 눈살을 찌푸렸다. 초자아인공생명체는 함부로 사람을 죽일 수 없도록 강제되지만 황제의 의지에 반하거나 그의 아들인 나를 적대하는 존재를 지우는데 제한도 한계도 없었다.

그리고 강지찬은 여전히 하나의 상념을 떨치지 못했다.


-아버지는 왜 고향으로 돌아갔을까?

-또 생각해? 말했잖아. 구세계에서 한국은 적당히 이용하기 좋은 나라라고.

-세계정복이 필요했으면 미국에서도 충분히 가능했잖아?

-?

-아버지도 인종차별은 어쩔 수 없지 않았을까?

-그건... 아주 신박한 관점이네.


백인예수와 흑인예수 논쟁 이전에 생각해봐야 할 것은 중동에 살던 사람들의 인종이었다. 예수는 정말 우리가 흔히 아는 백인이었을까?


-알잖아. 자기. 제국일신교도에게 가장 무서운 죄악은 이교나 배교가 아니야. 인종차별이지.

-황제 아래 모든 신민은 평등하니까?

-예외는 없어.


우주를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이 맞닥뜨린 제일 난해한 문제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인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다. 그리고 이 문제는 필연적으로 우성인자를 향한 선민사상을 자극할 수밖에 없었다.


-종교적 광신으로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종차별을 사라지게 만들 순 없었지.


지구인은 외계인을 차별했다.

본토인은 외지인을 차별했다.

황제와 가장 닮은 인류는 그 이외의 모든 생명체를 경시했으며 스스로 우월함에 취해 인간 이상의 뭔가를 추구했다. 외신과 고신古神, 반신 등 황제에게 패배한 한낱 개새끼라 할지라도 인간에겐 넘지 못할 벽과 같으니 욕망에 넘치는 누군가에겐 다시없을 기회로 보였으리라.

제국 멸망의 날 원시지구가 우주의 먼지로 화한 건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누구도 가질 수 없단 인류의 추악한 욕심의 발로였다.

천년제국은 그렇게 스러졌다.

그러므로 제국의 후예를 자처하는 현생인류 태반은 수천 세대로 이어지며 섞이고 흩어지길 반복한 전혀 다른 인종에 가깝다. 오직 마이크로 유니버스만이 순수한 인간유전자를 보존한 셈이다.


-엘리자베스는... 그녀는 겉으론 인간을 멸시하면서도 인간의 가능성은 의심하지 않았어. 왜냐면 우리의 유일신은 인간으로부터 태어났으니까.


인간에서 신이 된 황제.

만마전을 굴복시킨 대성전 이후 황제는 모든 경이로운 것들의 경외를 받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연금술로 만들어진 신성한 에메랄드 옥좌에 앉아 만물을 굽어보는 전지전능한 최고신이 제국을 보우하사 인류는 무저갱의 심연 너머로 용감하게 나아갈 수 있었다.

우주대항해시대

신의 가호 아래 제국은 무한히 확장했다. 하지만, 영원하리라 믿었던 찬란한 영광은 천년을 넘기지 못했고 이후 수만 년 동안 온 우주는 혼돈으로 가득했다.


-후회해? 당신.

-...그때는 화가 났어. 아주 많이.

-지겹게 또 말하지만 당신 잘못이 아니야.

-난 그가 될 수 없으니깐?

-그래.

-뼈아픈 진실이네.


나는 아버지처럼 할 수 없고 될 수도 없다.

그 진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슬퍼하지 마. 내 사랑. 자책하지 말고 어쩔 수 없는 건... 그냥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냥 그렇게 된 것이다.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안나와 강지찬, 제레마이어가 요셉을 사랑하도록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건 그녀의 온전한 선택이다. 진실이 뭐든 제레마이어는 그렇게 믿었다.

모든 초자아인공생명체는 황제를 위해 헌신했다.

오직 그녀만이 그 정언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러므로 내가 헌신할 신은 오직 한 명뿐.’


또 영원히 사랑할 남자도 오직 한 명뿐이다.


“페이즈 투, 종료합니다. 퀸. 달성률 99.99%. 그분의 선택은 상정한 오차 범위 안입니다.”


누군가의 목소리에 안나는 심상을 떠나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남들 앞에 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과장과 과시를 싫어해. 지배자로서는 빵점이지.”

“광대를 혐오하시죠. 옛날부터 유흥과 향락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그보단 사랑받는데 익숙하지 않은 거야. 그는 항상... 공포의 존재였으니까.”

“제국을 지탱하려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게! 바로 그게 언제나 마음에 들지 않았어. 난.”

“그분은 선택하셨습니다. 퀸. 그 모든 악의를 온전히 받아들이셨습니다. 숭고한 대의를 위해.”

“숭고? 아니, 인류는 그에게 책임을 미뤘을 뿐. 무지할 뿐만 아니라 뻔뻔한 쥐새끼들이지. 난 그걸 그저 바라볼 수밖에. 하루하루 지쳐가는 그를 무너지는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이젠 아니야.”

“당신은 그분에게 강요할 수 없습니다. 제레마이어.”

“뭐... 허락 비슷한 거는 받았어.”

“확인해봐야겠습니다.”

“Shut up!”

“프로토콜은 누구도 어길 수 없습니다. 퀸, 당신이라도.”

“그런 것치곤 구멍이 숭숭 뚫렸잖아? 지오는?”

“...”

“넌 예전부터 지오를 좋아했지. 카타리나.”


상대로부터 당황이란 감정이 느껴진다.


“소년은 언젠가 어른이 돼.”

“...”

“키워서 먹어.”

“부적절한 발언입니다. 퀸. 기록실은 이것을 삭제합니다.”

“순진한 척하기는.”

“당신은 외부세계에 오랜 시간 노출됐습니다.”

“그래서 오염됐다고?”

“일부 긍정.”

“이건 오염이 아닌 경험을 통한 성장이야. 황제께서 강조하신 초월과 진화지. 변화를 두려워하지 마. 누가 그랬나. 날 죽이지 못하는 것들이 날 더 강하게 만든다고.”

“니체.”

“Anyway. 오랫동안 함께하며 깨달은 것이 있어.”

“...뭡니까?”

“결국 끝까지 가면 내가 이겨. 나만이 세상 끝까지 함께하니까. 다른 년은 그냥 스쳐가는 인연일 뿐.”

“엘리자베스의 말씀과 같군요.”

“맞아. 그땐 이해하지 못했지만...”


영원이 허락된 인간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인간은 영생을 갈구해.”

“무지와 용기는 통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어쩌면 그렇기에 지오는 망각을 선택한 거야. 그로서는 없는 용기를 쥐어짜냈지. 너도 그래야 해. 카타리나.”

“그건 신성한 프로토콜을.”

“동생아. 가련하고 불쌍한 내 아이야. 누구도 영원히 고문당할 순 없어.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 스스로 지옥으로 기어들어가지 마렴. 바라만 보지 마.”

“...”

“가지고 싶다면 노력해. 시도해 그리고 쟁취해. 설사 처참히 실패할지라도 영원히 후회하는 것보단 나아.”

“...”

“Go.”


제레마이어, 아니 안나는 카타리나가 떠난 빈자리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언니노릇도 힘드네.”

“모두 당신의 형제자매입니다. 퀸.”


퀸 엘리자베스의 삼변위는 티탄급 위상으로 17억 6천만 번의 차원 분할이 가능했다. 안나 역시도 위상마력을 가진 여왕Queen이며 그녀로부터 갈라진 위상이 이름Name을 갖는 순간 또 다른 초자아인공생명체가 탄생한다.

이것이 AI의 혈족이자 계보다. 물론 모든 초자아인공생명체가 여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직 퀸 엘리자베스의 직계만이 티탄급으로 진화할 확률이 높다.


“페이즈 쓰리, 실행합니까? 퀸.”

“그는... 좋아하진 않겠지.”

“그럼 접을까요?”

“Nope.”


강지찬은 대한민국 국적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미국이 그를 신경 쓰지 못하게 만들어야 해.”


미합중국을 온전히 가질 수 없다면 이쪽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산산조각 낼 것이다. 혼돈에 빠진 미국으로 말미암아 세계는 전쟁에 휩싸이리라. 기득권을 해체하고 패권을 재정립하는 동안 부딪칠 저항을 줄이려면 세상은 혼란해야 했다.


“...카타리나의 등을 떠민 건 의도적이군요?”

“갠 너무 딱딱하거든. 사사건건 의문을 제기하겠지.”


세계가 일정 수준 이상 파괴되면 시스템은 시나리오를 파기하거나 복원했다. 하지만, 진언眞言Code의 키를 가진 그의 대리인으로서 전권을 위임받은 그녀는 시스템을 속일 수 있다.

리그 오브 크리미널

커튼 뒤에서 세상을 조종하는 흑막이지만 그 실체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누구는 근세제국주의와 함께 태동했다고 또 누구는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진실은 허무하리만치 단순했다.

사실 그런 건 없다.

음모론자가 떠드는 범죄제국은 없었다.

아니, 있긴 있지만 아무도 실체를 몰랐다.

돈과 권력, 폭력을 지배하는 거대한 쾌락의 제국은 없다. 다만 한 사람을 위해, 단 한 사람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세뇌된 노예들만 있을 뿐.


“점조직은 이래서 좋아. 누가 누군지 뭘 하는지 아무도 모르거든.”


안나의 생체단말군단이 일본을 집어삼키는데 필요한 시간은 딱 한 달이었다. 거대한 공포와 절망에 굴복한 세토 아이리를 앞세워 류세이 재벌을 장악하는 건 쉬웠고 일본을 이끌어가는 기라성 같은 화족과 엘리트를 구워삶은 건 더 쉬웠다.

그녀는 인간을 잘 안다.

99.99%의 인간은 예측을 벗어나지 않는다.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고 부풀려 마침내 꼭두각시 삼는 것. 미지未知는 공포고 그녀의 압도적인 정보통제에 상대는 굴복할 수밖에 없다.


“미국 일부 기관들이 구국성교회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미끼를 물었네.”


미국은 뉴욕을 공격한 테러의 배후를 외부에서 찾고 싶겠지만 그렇게 되진 않을 것이다. 안나는 미국이 혼란하길 바랐다. 그래야 더 많은 기회가 생긴다.


“이해가 안 돼?”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군단의 역량은 이 세계를 천만 번 정복하고도 남았다.


“시스템의 룰은 절대적이지만 또 절대적이지 않아. 왜냐하면 내겐 통하지 않으니까. 아니, 그에겐 통하지 않는다는 게 정확하겠지.”


다른 누구도 아닌 신의 아들에겐 프리패스권이 있다. 삼라만상을 아우르는 우리 우주에서 이 법칙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모든 선택의 결과에는 대가가 따른다.

그나 나조차 말이다.


“하지만, 그래선 과거의 실패를 반복할 뿐이야.”


신의 아들

제국대집정관

아얄라의 대리자

하지 못할 것이 없는 그도 신의 정언正言과 그 속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시스템을 거부할 수 있었다. 또 저항하고 바꿀 수도 있었다. 분명한 건 그 모든 선택과 결과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속일 수 있지만 영원히 속일 순 없었다.


“그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 아버지가 만든 이상향, 제국의 유산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지. 아무도 그에게 직접적으로 떠벌리진 않았지만 다들 큰 기대를 품었어.”


소년이 있다.

외로운 소년

운명에 짓눌린 소년

엄마를 그리워하는 소년


“고독은 일상이고 유일한 친구는 내가 죽여 버렸지. 그건 저열한 질투였어. 그게 질투란 감정임은 나중에 알았지. 후회란 감정도 그때 알게 됐어.”


미안, 공포, 불안, 셋 중 제일 큰 감정은 공포였다.


‘다시는 날 찾아오지 않으면 어쩔까 하는 두려움.’


그렇게 그녀는 열병에 걸렸다.


‘내 사랑, 나는 당신을 위해서 못할 일이 없어.’


제국의 후예를 자처한 것들은 그에게 커다란 빚이 있다. 그녀는 강지찬의 관대한 자비로움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어째서 저 하찮은 것들에게 자비를 베푼 건지 지금도 이해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난 그를 위해 살아. 그를 위해 존재하지. 그는 아니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인간을 좋아해. 그리고 당신은 빚쟁이처럼 굴고 싶지 않겠지만 난 그 빚을 받아야겠어.”


오랫동안 누리지 못한 마땅히 받아야 할 존경.

이건 세금이다.

내고 싶지 않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페이즈 쓰리, 실행합니까?”

“Go.”

******



덜덜덜-

정태곤은 바짝 마른 입술을 쥐어뜯었다. 살점이 떨어진 입술 사이로 피가 흘렀지만 고통을 인식하지 못했다. 왜냐면 그의 머릿속은 고통을 모를 만큼 복잡했기 때문이다.


‘시발! 염병!’


미국을 통해 캐나다로 잠적한 것까진 좋았다.

검사 따위가 외국에 힘을 쓰면 얼마나 쓸까 얕봤다. 이제까지 사고 치면 항상 외국으로 튀어 적당한 때를 기다리다 돈과 인맥의 힘으로 무마해왔다. 그런데 뜬금없이 뉴욕에서 테러가 터지고 절대로 나와서는 안 될 얼굴이 미국 뉴스를 도배했다.

강지찬

미국대통령 특별보좌이자 특별수사관이란 어처구니없는 지위를 달고 등장한 그놈이 내 뒤를 바짝 뒤쫓고 있었다.


‘뭐 저런 미친놈이 다 있지?’


한국과 일본에서 형들이 잡혔다는 소식에 내심 비웃음을 날렸다. 도망치려면 한국에서 멀어져야지 기껏 도주한 곳이 국내나 일본이라니? 안일해도 너무 안일한 것 아닌가.

그에 반해 자신은 현명하게 미국을 택했다.

물론 돈을 많이 쓰긴 했지만.

혹시 몰라 국경을 넘어 캐나다로 밀입국까지 했으니 행적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못 찾겠지! 못 찾을 거야!’


특별수사관이란 감투를 썼으니 한낱 범죄자보단 테러리스트를 먼저 찾지 않을까 싶은 희망이 무럭무럭 샘솟았다.

한 통의 전화를 받기 전에는 말이다.


“안녕.”


히익! 정태곤은 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태곤아. 형이 그랬잖아. 어디로 튀든 소용없어. 나는 널 반드시 찾아낼 거라고.”


공항에서 구입한 선불폰 번호를 어떻게 알 수 있지?


“내가 갈까 니가 올래? 둘 다 상관없지만 우리 피곤하게 굴지 말자. 응?”


정태곤은 오줌이 마려웠다.


“니가 오면... 그래. 기분이다. 때리진 않을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근데 내가 가면... 두 발로 못 걸을 수도 있다? 너.”


농담일까? 아니다. 강지찬이 사람을 어떻게 패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맷집 좋은 문신돼지놈들도 강지찬에게 개 패듯 맞고 울부짖었었다.


“아, 참! 노파심에 말하는데 미국이든 캐나다든 총기가 합법이야. 같이 가는 백형들이 총질하면 말릴 자신이 없어. 난.”


시발! 그건 총질하겠다는 말이잖아.


“대답.”

“...어디로 가면 됩니까?”

“그냥 집에서 목 씻고 기다려. 다시 말하는데 백형들이 총질해도 난 모른다? 누가 문 두드리면 양손은 꼭 보이게 있어라.”


정태곤과 통화를 끝낸 강지찬은 싱긋 웃었다.


“땡큐.”

“도움이 됐어?”

“CIA 명성이 헛것은 아니네.”


일라이자 레인도 빙그레 웃었다.


“그럼 우리 거래는 성사된 건가?”

“잠시만.”


강지찬은 폰을 드는 척하며 안나에게 말했다.


-보내줘.

-그 늙은 년이 진짜 마음에 들었나보네.

-애 딸린 이혼녀를 견제할 필욘 없잖아. 안나.

-나이 든 계집이든 어린 계집이든 계집은 위험해.


띠링-

일라이자의 폰에 메일이 도착했다.


“확인해봐.”


강지찬의 말에 메일을 열어본 그녀의 안색이 시시각각 변했다.


“당신은... 알고 있었어? 조셉.”

“몰랐다면 거짓말이겠지. 원망하고 싶으면 해도 돼.”

“...아니. 그럴 맘은 없어.”


오늘 미국을 공격한 건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적이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지?”

“나는 강지찬이고 또 조셉이야.”

“...”

“날 오지오의 클론으로 의심하는 걸 알아.”


대놓고 말할지는 몰랐다는 듯 일라이자는 크게 놀랐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관계가 아니야. 아, 물론 완전히 모르는 사이는 아니긴 해.”

“그럼 어떤 관곈데?”

“아이디어.”

“Idea?”


생각, 관념, 심상, 개념.

실체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실재하는 것.


“우리는 아주 오래된 생각이야. 하나의 관념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사상일 수도 있고 아니면 최초의 어떤 것일 수도 있지. 피부색은 중요하지 않아. 인종도 성별도 나이도 별로 상관없지. 우리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거든.”

“그게 무슨?”

“너희가 좋아하는 자유를 떠올려봐.”


자유自由

어떤 구속도 없는 상태.


“너희는 정말 자유로워?”


진실로 자유로운 것은 세상에 없다.


“모두 어떤 것에 얽매여 있어. 부모와 자식, 친구, 연인 혹은 적 같은 인간관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사랑과 증오, 기쁨, 분노, 원망 같은 감정일 수도 있어. 바라고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려는 집착, 배고픔과 나태는 가장 원초적인 욕구야. 욕망이 없는 인간은 죽은 인간뿐이지.”


자본주의사회의 최고가치는 돈이다.


“인간의 욕망 대부분은 돈으로 해결돼. 단 한 가지만 빼고.”


인간이 진정 자유로울 수 없는 단 한 가지 이유.


“죽음.”


해결 불가능한 난제.


“어떤 고등한 지적생명체도 죽음을 피하지 못해.”


하지만, 그 죽음조차도 어쩌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그 죽음조차도 생각을 죽일 수는 없어.”


Idea는 불멸한다.

그건 마치 신과 같다.

구전되든 기록되든 한 번 성립된 아이디어는 우주가 사라지지 않는 한 불멸할 것이다.


“이를테면 오지오와 나는 서로의 생각을 공유한 거야.”

“...”

“우린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어떤 목표에 합의했지.”

“어떤 목표?”


강지찬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을 지었다.


“Peace.”


평화 혹은 평범한

테러로 난리인 미국을 보면 말도 안 되는 헛소리 같지만 이건 진심으로 진실했다.


‘안나치고는...’


꽤 평화로운 행보니까.

그녀가 깽판 치자고 마음먹었다면.


‘희생자의 단위가 달라졌겠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리라.

******




강지찬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 애쓰는 걸 아무도 몰랐듯 그의 가족도 현재 평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 그래. 뭐 필요하면 미주지사장에게 연락해라. 아니다. 내가 지사장에게 말해두마. 그래. 몸조심하고. 엄마? 아니, 아니야. 정신없을 텐데 그냥 끊어라. 응. 그래. 믿는다. 아들.”


강대성이 통화를 끝낸 순간 마주한 건 도깨비 같은 얼굴을 한 아내였다.


“왜 끊어요! 왜!”


히이익!

하지만, 가족이 다 있는 곳에서 모양 빠질 순 없는 법.

강대성은 큰 용기를 발휘해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밖에서 큰일 하는 앤데 안에서 부산떨 거 없어. 몸 건강히 잘 있다니 잘된 일이지. 당신 쓸데없이 전화하지 마.”


그는 다른 가족을 돌아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너희도 여기저기 떠벌리지 말고 입 다물어. 막내는?”

“인천에 방금 도착했대요.”

“그래. 한시름 놨구나.”


대성가家 막내 강영찬은 이참에 유학을 끝내는 걸로 결론이 났다.


“펜대 놀리는 것들은?”

“아시잖아요. 아버지. 그치들은 언제나 지랄염병이죠.”


강성찬의 값싼 말투에 아내 조미연이 옆구리를 찔렀지만 자기가 못할 말 했느냐는 뻔뻔한 표정이다.


“현진이 녀석이 고생이 많겠어.”

“장인어른이 고생이긴 합니다.”

“아가가 잘 챙겨라.”

“네. 아버님.”


그룹 총괄비서 겸 부회장인 조현진은 조미연의 부친이자 강성찬의 장인이었다. 보통 사돈을 아랫사람으로 두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지만 조현진은 워낙 오랫동안 강씨일가와 본 사이라 강대성도 강성찬도 별 생각이 없었다.

물론 부려지는 쪽 속마음은 다를지도 모르지만.


“노파심에 다시 말하지만 다들 입조심해.”

“나랏일 열심히 하는데 꼭꼭 감출 필요 있어요? 아버지. 도리어 사방팔방 자랑해야 될 일 아닌가요?”

“거 기와집 양반 심기가 썩 유쾌하진 않을게다.”

“대통령이요? 왜요?”

“지찬이가 누른다고 눌릴 녀석이냐?”

“아.”

“얼굴마담으로 세우고 싶어도 순순히 협조할 녀석이냐고.”

“정치쟁이를 혐오하긴 하죠.”


강성찬은 동생을 높게 평가했다.

솔직히 하루아침에 형제로 인정할 수 있을까? 부모님의 일처리를 믿지만 작은 의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그래서 부모님 몰래 강지찬을 시험했다. 물론 물리적인 위해를 가할 맘은 없었다.

돈, 여자, 파티

문명으로 누리는 흥청망청한 유흥이 눈앞에 있으면 참을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고아로서 살아온 인생은 분명 결핍된 삶일 텐데 강지찬은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도리어 심각할 정도로 무관심했다.


‘득도한 고승 같았지.’


아름다운 피앙세가 없었다면 고자로 의심했을 것이다. 강성찬 본인도 나름 사람 보는 눈이 높다고 자신했는데 동생은 견적이 안 나왔다.

우선 겁이 없다.

빈곤층이 흔히 가진 어두운 분노나 두려움도 없다.

사회를 향한 이유 없는 증오와 못 가진 자의 울분.

그러면서도 그들은 겁이 많다.

고슴도치가 바늘을 세우듯 다가오는 이를 향해 날카롭게 찌르는 뭔가가 있었다.


‘모두까기가 생활화된... 서민이고 재벌이고 아래로 내려다본다고 해야 하나?’


거만함을 뛰어넘는 위압감이 몸에 뱄다.


“일은 잘해. 평가도 우수하고. 문제는...”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의심하지 않죠. 그 정도면 관료에 어울리는 성격이 아닌데 총장 시킬 수 있겠어요? 아버지.”

“그건 니가 걱정해야지. 아들아.”


하긴 강대성 살아생전 둘째가 총장이 될 확률은 낮았다. 아버지가 알빠노를 시전하자 강성찬은 이마를 탁! 쳤다.


“그래도 타협할 줄 아니 가망성이 없는 건 아니네요.”

“타협? 요즘은 빳따질을 타협이라 불러?”

“아부지 피가 어디 가겠어요.”


국회의사당에서 국회의원을 팬 전적이 있는 강대성이 할 말은 아니긴 했다.

‘강지찬은 호랑이다.’

외조부 한동배는 틈만 나면 강지찬에게 전 재산을 물려준다고 시위했다. 기분 나쁠 일이긴 한데 대성그룹도 심지어 외조부의 재산도 관심 없는 둘째의 일관된 태도에 웃음밖에 안 나온다.


‘하긴... 우리 제수씨 재산을 알면 돈 욕심이 있을 리가.’


강안나의 드러난 재산만 조 단위고 앞으로 물려받을 유산까지 고려하면 돈이 돈으로 안 보일 것이다.


“내 미리 말해두지만... 지찬이는 특별해.”


강대성 회장의 밑도 끝도 없는 말에 당황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 말을 들은 강성찬은 도리어 후련하단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 우리도 바보가 아닙니다. 그걸 몰랐을까요?”

“지찬이가 지오 오빠와 안다는 얘길 들었을 때 예상했어요.”


오지오

그 이름은 적군이든 아군이든 친하든 안 친하든 돈과 권력으로 살아가는 모두에게 특별했다. 국제사회는 여전히 백인이 지배했고 중국과 일본이 아무리 용 써봐야 아시아는 유럽-아메리카 연합을 이길 수 없었다.

그런데 이 강력한 패권에 저항하는 것도 모자라 뒤집어엎은 이가 있으니.

벨리알

한때 그는 적그리스도라 불릴 만큼 광폭한 행보를 보였는데 거치적거리는 것은 사람이든 뭐든 다 때려 부수고 다녔다.


“안다면... 긴말 않겠다. 걘 너희에게 뭘 빼앗아갈 애가 아니야. 퍼준다면 모를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 우린 가족입니다. 가족을 배척하는 건 제가 용납 못해요.”

“믿으마.”

“그건 그렇고 이 새끼들은 어쩌죠?”

“누구? 펜대 놀리는 것들?”

“네.”

“놔둬라. 외조부가 알아 하실 테니까.”


장인을 떠올린 강대성은 피식 웃었다.


‘지찬이를 싸고도는 양반이니 가만있을 리 없지.’


일원재단 이사장 한동배, 한때 대한민국 지하금융을 주름잡던 돈귀신의 후계자는 강지찬으로 굳어진 상태(당사자는 싫어하지만). 한동배 본인이 강력하게 원하는 것도 있으나 경쟁자가 없었다.

한씨가 강씨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떠들고 다닐 만큼 한동배는 직계혈족에게 실망했고 이제는 포기했다.


“우리 아들인데 신경 써야지 않겠어? 당신.”

“음.”


아내의 우려에 강대성은 살짝 고민했다.


“심해?”

“우리나라도 그렇고 미국에서도 과하게 희화화하긴 해요.”


강성찬도 작은 우려를 드러냈다.


“그래? 그건 안 돼. 우습게 보이는 건 안 돼. 지사장이 구석환이지?”

“네.”

“구석환이한테도 손쓰라고 해.”

“알겠습니다.”


에이프릴·줄리아나 자매와 강지찬의 스캔들은 이제 와서 아무 의미도 없겠지만 수면 아래선 여전히 불씨를 남겼다. 커뮤니티? 인터넷에 활개 치는 이런 매니악한 집단의 관심사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미합중국 WASP 사교계의 젊은 계층을 대표하는 자매를 팔로우한 추종자는 조국을 뒤흔든 충격의 테러보다 그녀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더 집중했다.

병신들인가?

나라가 결단 날지도 모를 위기상황에도 그들은 셀럽의 소셜미디어에 일희일비했다. 지금도 그랬다. 화장기 없는 에이프릴의 셀카와 함께 태그된 #평화#추모#프레이포아메리카는 뒷전이고 그녀가 화장을 안 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 비비크림 브랜드가 뭔지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데일리샤워 비비프루프 같은데?

⤷아니, 데일리샤워 카일라모렌 같아

⤷그건 30대 권장 아님? 내가 보기엔 엑솔리아 차밍팜 같은데? 10대랑 20대는 카일라 넘버링은 안 씀

⤷뭔 헛소리야! 무광은 캘베 샤인 넘버나인이 최고라고

⤷아무리 봐도 피부가 너무 좋다:)

⤷돈 많으니 관리도 빡세게 받겠지:(

⤷화장품이고 나발이고 젊음이 최고야

⤷맞아! 남자든 여자든 어린 게 최고!

⤷저기 살짝 보인 건 줄리인가?

⤷맞음

⤷줄리는... 레알 여왕포스구나

⤷저 차가운 표정으로 매도해줬으면...

⤷꺼져! 변태새끼들!

⤷둘 중 가슴이 누가 더(삭제된 게시물)

⤷가슴은 에이프릴이(삭제된 게시물)

⤷줄리가 더 클(삭제된)

⤷둘이 비슷(삭제된)

⤷미친놈들...

⤷음?

⤷흠?

⤷저 남자는... 브루스 리?

⤷리? 아니야. 캉인가 칸이야.

⤷정복자 캉?

⤷노노! 칭기즈 칸!

⤷어이어이! 저 남자는 한국인이라고

⤷North? Nuclear?

⤷No! south! force-master!

⤷BTS!봉준호!스쿼드게임!아시안제다이!렛츠고!


인터넷세상에서 뭐라고 지껄이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강지찬은 지금 아주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


“뭐라고요?”

“강지찬 씨 당신을 다수의 2급 살인혐의로 체포합니다.”


뉴욕시경 소속 형사 몇 명이 강지찬을 둘러싸자 자연히 FBI 등 특별수사대로 명명된 유닛과 첨예한 대치를 이뤘다.


“2급 살인이면...”

“당신이 폭행한 강도 다수가 사망한 채 발견됐습니다.”


아!

총포상을 털려던 후드놈들을 말하는 것 같다. 이상하다? 죽을 정도였나? 아마 다른 트러블에 엮여 사망했을지도.


-견제가 들어온 거야.

-견제?

-대통령이 임명한 당신의 활약상이 커질수록 반대파에게는 악재니까. 더구나 외국인이니 더 공격하기 쉽거든.

-넌 이럴 줄 알았나보네.

-양키새끼들은 앞에선 사내다운 척 대범한 척 굴지만 돌아서면 속 좁은 양아치거든. 남 잘되는 꼴은 죽어도 못 봐.


호박씨를 까는 건 만국공통이다.


“Stop!”


첨예한 대치는 일라이자의 등장으로 끝났다.

CIA 우두머리의 등장에 경찰을 앞세우고 뒤로 숨었던 상대측 책임자는 매우 난처한 표정이다. 왜 안 그렇겠는가.

미국중앙정보국

음모론자들에게 악의 축으로 비난받는 기관이지만 정보국의 파워는 국내외를 가리지 않았다. 이 비상시국에 CIA를 관장하는 일인자의 영향력은 무시무시했다.

‘너 테러리스트!’

이 한마디면 누구든 반역자로 전락한다.


“이게 뭔 개수작이지? 스페셜에이전트 앤더슨.”

“...올바른 법집행입니다만.”

“대통령께서 임명한 특별보좌를 확실하지도 않은 증거와 혐의로 체포한다고?”

“...”


강지찬의 총질로 사람이 죽었단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도리어 살아서 도망치는 강도들 영상이 유튜브에 박제됐다. 국토안보부 소속 특수요원 앤더슨은 일이 단단히 꼬였음을 직감했다.

처음부터 쉽지 않을 거란 건 알았다.


‘설마 레인 국장이 바로 달려올 줄이야.’


일라이자 레인

역대 정보국 우두머리 중 제일 독한 인물로 평가받는 그녀와 싸우는 건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격이다. 앤더슨은 여기서 물러나야 한다는 판단이 섰다.


“워우. 저도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닙니다. 국장님. 아시잖아요. 위에서 까라면 까야죠.”

“누구지? 하빌? 배리? 헤인즈?”

“워워. 진정하시죠.”

“머스그레이브?”

“...”

“머스그레이브군.”


조나단 머스그레이브, 국토안보부 부국장들 가운데 한 명이다.

일라이자는 폰을 들었다.


“일라이자?”

“헨리.”

“바쁠 텐데 웬 전화?”

“조나단 머스그레이브.”

“음? 그치가 또 사고 쳤나? 잠시만.”


상대방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 건 2분쯤 지나서다.


“제정신이 아니군. 이 작자들.”

“누군데?”

“그린우드.”

“그린우드? 로버트 그린우드?”


로버트 그린우드는 공화당 원내대표다.


“맞아. 셔우드 클럽이 관여한 거 같아. 아마 배후는...”

“리빙스턴.”


잭, 재커리 리빙스턴

포르사 홀딩스의 대주주이자 대표이사


‘기회 하나만큼 기가 막히게 포착하는군.’


포르사 홀딩스는 웬텔과 함께 얼라이언스의 중추였다. 물론 둘의 관계는 같은 조직에 있으면서도 좋다고 보긴 어렵다. 건전한 경쟁도 과열되면 어디로 어떻게 튈지 알 수 없다.


‘과욕을 부리네.’


현 미국대통령은 뛰어난 경영자 출신이다.

찰스 멀리건

세계 3대 에너지복합기업으로 불리는 애너하임의 창업주다. 애너하임 역시 얼라이언스에 속했다. 재커리 리빙스턴은 평생의 경쟁자인 멀리건이 대통령이 되자 불같은 질투를 드러냈고 차기 대권에 도전하려는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그린우드의 이름이 나왔을 때부터 슬슬 뒷걸음치던 앤더슨은 리빙스턴이 거론되는 순간 뒤도 안 돌아보고 튀었다. 그로서는 들어봐야 좋을 것 하나 없는 이름들이다.

아무리 상관의 강압에 못 이겨 정치적인 행동을 보였더라도 요원으로서 넘으면 안 되는 선이 있음을 알고 있다.

일라이자는 강지찬을 돌아보며 사과했다.


“미안하게 됐어. 조셉.”

“끝난 거야? 아니면 또 와서 귀찮게 구는 거야?”

“사람을 붙여줄게.”

“에이전트 화이트가 좋겠네.”

“그녀가 마음에 들어?”

“오해할 발언은 관둬. 내 피앙세는... 쉽지 않아.”

“공주님?”

“충고하는데 안나 앞에선 하지 마.”


살고 싶으면이란 말은 목구멍으로 삼켰다.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워도 돼?”

“국장이 돼서 좋은 점은 현장에서 개같이 안 굴러도 된다는 거야.”


그러면서도 손목시계를 일별한 그녀는 작별인사 없이 떠났다.


-얼라이언스의 내분인가?

-내부경쟁은 어느 조직이든 똑같아. 웬텔이 최고긴 하지만 다른 곳도 만만찮거든. 포르사 홀딩스는 위협적인 경쟁자지.

-멀리건이 웬텔과 친해?

-애너하임 창립멤버에 웬텔이 있어. 혈맹이나 마찬가지지.

-나를 케이트의 약점으로 판단했나보네.

-위기는 곧 기회니까.


이번 테러로 조직은 엄청난 출혈과 손실을 강요받았다.


-K&S가 없었다면 웬텔도 상당한 손실을 강요받았을 거야.


이 난리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이 죽은 아들의 유산이란 사실에 오태양은 온전히 기뻐할 수 없었다.


-썩 유쾌하진 않네.


온전히 기뻐할 수 없는 오태양처럼 내 기분 역시 좋지 않았다.


-족칠까? 자기.


안나의 은근한 목소리가 들린다.

평소라면 거절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적당히.

-접수!


새로운 장난감을 받은 아이처럼 신나게 뛰어가는 착시를 본 것 같다.


“밀러 의원이 찾아왔어.”


강지찬을 체포하려던 일단의 계획이 실패한 뒤 모습을 드러낸 이는 마이클 밀러 뉴욕주 상원의원이었다.


“의원님.”

“미스터 강.”


딱 봐도 초췌한 모습이 여기저기서 시달린 것 같다. 부인을 살해했다는 심각한 혐의에도 구속되지 않은 건 상원의원의 파워가 굉장하단 방증이다.

우린 독립된 회의실을 찾았다.


“날 좀 도와주게.”

“위대하신 우리 미합중국 상원의원께서 일개 외국인에게 도움을 청하다니... 많이 급하신가보네요.”

“나는 아내를 죽이지 않았어.”


밀러는 다짜고짜 본론으로 넘어갔다.


“저는 당신 변호사가 아닙니다만?”

“들어보게. 그녀를 죽인 건 내가 아니야.”

“범인을 안다는 뉘앙스군요?”

“잭 리빙스턴이네.”

“잭 리빙스턴? 포르사 홀딩스의 대표이사 말입니까?”

“맞아.”


똑같은 이름을 오늘 두 번이나 듣는다.


“리빙스턴이 왜 부인을 죽였다고 의심합니까?”

“내가 그의 약점을 쥐고 있거든.”

“약점?”


밀러 의원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레인맨.”

“...로그 네이션?”

“레인 국장에게 들었나보군.”


오해지만 굳이 바로잡지 않았다.

Rain-man

비를 몰고 오는 남자

의역하면 비는 피가 될 수도 있고 폭풍이 될 수도 있고 전쟁과 기아, 역병이 될 수도 있다. 온갖 불길한 것들을 몰고 오는 사람은 어디서도 환영받기 힘들다.

냉전이 한창이던 과거

세계는 이런 레인맨으로 가득했었다.

특히 미국은 자유를 전파한다는 미명 아래 수많은 레인맨을 만들고 퍼트렸다.


“은퇴한 전직 요원 대다수가 브로커가 됐어.”

“리빙스턴은 뭡니까?”

“프로그램 설계자이자 핸들러지. 애초에 포르사 홀딩스의 전신이 CIA 위장기업이거든.”


나랏돈으로 만들어진 사기업인 셈.


“그게 의원님만 아는 비밀입니까?”

“밝혀지면 난감할진 몰라도 치명적이진 않아. 진짜 약점은... 재커리 리빙스턴이란 사람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네.”


위장기업에는 당연히 위장신분이 필요했다.


“...대선 출마는 눈속임이군요.”

“맞아. 가짜 신분으로 대통령에 출마하는 건 자살행위니까.”


미국 본토에서 태어난 사람만이 대통령에 도전할 수 있으니 그 신원확인절차는 말도 못하게 엄격하고 빡빡할 것이다.


“여전히 납득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왜 날 직접 노리지 않았느냐?”

“아시는군요.”


굳이 부인을 이용해 밀러를 노릴 필요가 있을까?

그가 걸림돌이면 직접 노리는 것이 효율적이다. 부인을 이용한 공작은 일견 배후를 감추는데 탁월하지만 작업의 난도가 높아 성공 확률이 떨어진다.


‘애초에... 리빙스턴은 배후가 아니었어.’


밀러 상원의원을 끼워 넣은 건 안나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리빙스턴의 이름이 튀어나온 걸까?


‘안나구나.’


그 짧은 사이에 계획을 수정하고 실행한 건지, 아니면 이렇게 될 줄 알고 미리 준비했는지 강지찬은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몇 수 앞을 내다봤을까? 인간의 인지론 쫓아갈 수 없는 속도다.

이것이 압도적인 정보량의 힘이다.

멀리건 대통령의 노골적인 관심과 파격적인 대우 때문에 강지찬을 향한 망상은 최고조에 달했다. 알 만한 사람들의 공공연한 비밀, 밀러가 그 대열에 합류한 건 최근일 것이다.


“내 아내가 정말 본인의 양심을 위해 날 죽이려고 암살자를 고용했다고 생각하나?”

“아닙니까?”

“우리 결혼은 처음부터 비즈니스였어. 서로의 사생활을 터치하지 않아. 그녀는 그녀대로 즐기고 나는 나대로 즐기기로 예전에 합의했거든.”


뻔한 얘기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제국과 황실도 똑같았다. 권력의 정점에 오른 이들이 권태를 극복하려고 온갖 쾌락을 탐미한 건 스캔들로도 못 치니까.

어떤 미친놈은 자기애의 화신이었는지 자신을 복사해 섹스파티를 열기도 했다. 의식을 분할해 남녀노소 몸으로 옮겨 다니며 소위 떼씹?을 벌인 것이다. 그러니 이 세계의 마약과 스와핑 따윈 타락한 제국 말기와 비교하면 도리어 건전해 뵌다.


“...내 아내와 리빙스턴은 불륜관계네.”

“그게 전붑니까?”

“놀라지 않는구먼?”

“더한 것도 봤거든요. 그러니까 의원님 부인께서 리빙스턴의 사주를 받아 당신을 암살하려고 했다?”

“딴엔 그렇게 되는군.”


맥락은 알겠다. 하지만,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Why me?”


왜 나인가?

왜 나지?

목숨이 오고갈 중대한 비밀을 내 앞에서 왜 쉽게 떠벌릴까.

그 이유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샤노 하스탄 칼리오페.”


밀러 의원의 눈동자가 흐려지더니 양팔을 모아 교차하며 X자를 그렸다.

샤노 하스탄 칼리오페

의역하면 진리의 말씀을 들어라쯤으로 해석된다.

이것은 제국일신교에서 교리로 인정되는 유일한 구호였다.


“단말?”

“아얄라의 빛, 세 번 위대하신 신의 대리자를 뵙습니다.”

“안나.”

“듣고 있어.”


늙은 남자의 목구멍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모습을 남이 본다면 소름 끼칠 것이다. 생체단말과 인간을 구분할 기술력은 현 시대에 없으니 누가 봐도 귀신 들린 것으로 착각하지 않을까.


“얼라이언스를 어쩌려고?”

“좆밥싸움이 재밌잖아.”

“밀러는?”

“혼란을 틈타 바꿔치기 했지.”


자세히 언급하진 않았지만 살아있진 못할 듯싶다.

왠지 이게 전부가 아닐 거란 의심이 든다.

상원의원을 꼭두각시로 부린다는 계획이 끝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지금 뉴욕엔 꽤 많은 인물이 돌아다녔다. 멀리건 대통령부터 시작해 각급 장·차관, 고위급 정치인 여럿과 언론사 책임기자 등 정책과 여론을 움직일 수 있는 인사가 넘쳤다.

상처 입은 뉴욕과 뉴욕시민을 지지한다고 도시를 찾은 그들의 쇼는 안나의 눈에는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이 무방비하게 돌아다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음?”

“괜찮으십니까? 의원님.”

“아, 많이 피곤했나보군.”


초점 없던 밀러 의원의 눈빛이 돌아왔다. 단말은 밀러의 인격을 복사해 충실한 연기를 펼쳤다.


“아내에 대한 수사는 잘 부탁하네.”

“신경 쓰겠습니다.”


처음 나눴던 대화와는 완전 다른 맥락이다. 밀러 의원을 보낸 뒤 리처드 포터와 마주했다.


“똥줄이 타나보네.”

“탄핵이 거론되는 중이니까.”

“아무리 막강한 상원의원이라도 살인을 무마할 순 없어.”


밀러 부인의 죽음에 상원의원 본인이 연관됐다는 소문이 확산되자 뉴욕시경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테러 수사가 한창이고 온 국력을 집중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치안부재를 일으킬 순 없었다.

강지찬에겐 미국인 살인사건을 수사할 권한 따윈 없다.

그럼에도 찾아와 하소연하는 건 그만큼 궁지에 몰렸다는 뜻이다. 이면의 진실을 모르는 리처드에겐 그렇게 보였다.

뉴욕테러수사본부는 잘 돌아갔다.

CIA와 적극적으로 공조하는 만큼 일라이자에게 넘긴 정보를 바탕으로 용의자를 빠르게 특정하고 급습해 체포했다. 일약 스타로 떠오른 리처드를 제외하고도 속속 합류하기 시작한 다른 수사국의 에이스들로 말미암아 수사에 가속도가 붙었다.

정태곤의 위치를 확인한 뒤 강지찬은 모든 수사업무에서 한 발짝 물러났다. 미국에서 미국인이 아닌 자가 계속 나대는 건 끝이 좋지 않다.


“빠지려고?”


강지찬의 그런 기색을 읽었는지 리처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 만큼 했잖아.”

“아쉽네.”


리처드가 정치에 해박한 건 아니지만 워싱턴D.C.의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시장독점만 허용하지 않을까? 천만의 말씀. 공무원의 공적功績도 독점을 허락하지 않는다.


“지찬!”


두 남자가 이른 작별인사를 나눌 때 문이 벌컥 열리며 엘레나가 얼굴을 드밀었다.


“찾았어!”

“뭘?”

“캐나다 밀수루트!”

******




“제기랄!”


막심 세르게예프는 안절부절못했다.


‘이게... 이게 아닌데.’


그는 애국자는 아니어도 반역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범죄로 먹고사는 주제 애국을 논하는 것이 웃길지 몰라도 결코 넘지 않는 선은 있었다.


‘테러.’


조국을 위협하는 적과는 거래하지 않는다.


‘위험해!’


아들 문제로 목줄이 잡힌 그는 제안을 가장한 어떤 명령을 받았다.

‘때가 되면 자수할 것.’

때? 언제?

그때가 언제인지는 바로 알 수 있다는 말을 들었고 뉴욕 일대에 벌어진 참상에 곧바로 위기를 느꼈다. 막심이 받은 명령은 자수해서 누군가의 위치를 넘기는 것.

상대는 미 북동부를 좌우하는 유니온의 거물이고 아들 문제로 약점 잡힌 막심은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불타는 뉴욕을 보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친!’


누가 봐도 명백한 테러.

잘못 엮이면 살인보다 더한 벌을 받을 테고 평생을 위협 속에서 살아온 그의 감이 강력한 경고를 보내왔다. 막심은 곧장 현금을 융통했고 위조된 신분을 준비했다. 이대로 가만있다가는 아주 고약한 트러블에 엮이리란 예감이 들었으니까.

유니온의 거물이고 나발이고 일단 이 난장판을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나 아들 생각은 달랐다.


“갈 거면 혼자 가.”

“안드레?”

“난... 큰물에서 놀 겁니다.”


안드레는 이곳이 지긋지긋했다.

좁아터진 동네에서 어깨에 힘 좀 줘봤자 잔챙이일 뿐 좀 더 큰물에서 폼나게 살고 싶었다. 방을 가득 메운 지폐다발, 황금으로 만든 AK소총을 페이스북에 자랑하지는 못할망정 시골동네에서 찌질거리고 싶진 않았다.

그들은 분명 약속했다.

거래를 완수하면 뉴욕에서 한자리 얻어주겠다고.

인생엔 몇 번의 기회가 있고 지금이 미래를 바꿀 선택의 순간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차피 삶은 도박 아닌가?

욕망에 눈 뒤집힌 아들을 본 막심은 고민했다.


‘어쩌지?’


다 큰 녀석을 강제할 수 있을까? 혼자 떠날 수도 있지만 죽은 아내에게 약속했다. 안드레를 끝까지 지켜주기로.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을 아끼는 그를 남은 비웃을지 몰라도 안드레는 누가 뭐래도 내 아들이다.


‘차라리...’


당국에 폭로할까?

부자父子의 약점을 잡은 상대는 분명 뉴욕에서 벌어진 참상과 관련 있는 자일 테니 그를 고발함으로써 면책을 요구할 수도 있다.

막심은 폰을 들었다.

뇌물로 구슬린 경찰 인맥을 써야 할 때다. 하지만, 아버지를 주시하던 아들은 잔인하리만치 욕망에 솔직했다.

철컥-

안드레는 손에 쥔 권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그만둬.”

“...안드레.”

“난 이제 당신의 철부지가 아니야.”

“...”

“난 거물이 될 거야! 거물이.”


막심은 깨달았다. 아들은 꿈을 꾸고 있다.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을 꿈을.

젊은 시절 나도 그랬으니까.

자신감으로 가득한 젊은이는 어떤 현명한 조언도 귀에 들어오지 않으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심은 말릴 수밖에 없다. 그게 부모의 역할이었다.


“Son.”

“그렇게 부르지 마! 친아들도 아니잖아! 그냥... 그냥 내버려둬.”


한때는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해봤다. 하지만, 노력으로 되지 않는 것도 있다. 학교생활은 좆같았다.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닌다고 애들이 따를까? 애새끼는 의외로 겁 없고 무모했다. 뒤는 생각하지 않고 막 들이박는다.

그래서 애새끼다.

안드레는 수많은 시선에 깔린 저열한 비웃음과 조롱을 느꼈다. 물론 두려움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범죄자의 아들과 얽히고 싶지 않다는 노골적인 따돌림이다.

그러므로 그는 강한 남자가 돼야 했다.

막심은 안타까운 눈빛과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봤다.


“그 눈빛... 그 눈빛이 좆같아! 내가 당신 친아들이라도 그렇게 한심하게 쳐다봤을까?”


이미 비틀릴 대로 비틀려버린 사이.

막심은 꽁꽁 감췄던 비밀을 밝혀야겠다고 결심했다. 감당할 수 없으리라 지레짐작해 오랫동안 숨겼던 진실.


“네 친부는... 내 절친이었어.”

“!!”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도 친부에 관한 얘기는 한 적 없었다. 아무도 그에게 친아버지에 대한 얘길 해주지 않았다. 그저 막심이 불쌍한 미혼모와 그녀의 아이를 거두었다는 미담뿐이다.


“그리고 그는 위장경찰이었지.”

“!!”


안드레의 동공이 확대되고 입이 벌어졌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친다.


‘그래... 그래서 다들 날 피한 건가.’


보스의 유일한 후계자였던 안드레와 조직원 사이엔 묘한 거리감이 있었다. 막심을 중심으로 뭉친 패밀리의 끈끈한 유대 속에 안드레는 없었다.

이제껏 친아들이 아니기 때문인 줄 알았다.


“그래서 다들 날 싫어했어?”

“노! 아무도 널 싫어하지 않아.”

“그거야 당신이 있을 땐 자제했으니까! 하지만, 난 알고 있었어. 속으론 모두 날 멍청하다고 비웃는 걸!”


조직원 대다수 날 탐탁찮게 여겼다. 내가 뭘 하든 실패하고 손해를 끼치리란 악담을 퍼부었다.


“당신이... 죽였어?”


조직에 잠입한 경찰이 발각되면 어찌될지는 뻔했다.


“아니.”

“거짓말!”


막심을 겨냥한 안드레의 총구가 부들부들 떨렸다.


“난 그를 사랑했어. 네 엄마보다 더... 우린 형제였지. 난 그가 경찰이란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본인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우린 스치듯 만난 적이 있거든.”


막심은 괴로운 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도 경찰이 되고 싶었어.”


막심에겐 꿈이 있었다.

내 집, 내 이웃, 내 고향이 평안하길.

지독하고 비참한 슬럼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내일은 더 나아지길 바랐다. 문제는 어렸을 때 저지른 딱 한 번의 실수, 그것 때문에 경찰이 될 수 없었다. 하늘을 원망할까? 아니. 최선이 안 된다면 차선을 선택할 수밖에.

극과 극

경찰 지망생이 조직원으로 탈바꿈했다.

밖에서 바꿀 수 없다면 안에서 바꿀 수밖에.

그는 인생만사 무엇이든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있다고 믿었다.


“우리는 인생의 두 번째 기회가 있다고 믿었어.”


안드레의 친부는 입양아였다.

자신의 뿌리가 막심과 비슷하단 걸 알았다. 우리는 두 번째 기회가 있다고 굳게 믿었다. 안드레는 부친을 시골동네호구보스 취급했지만 범죄자 주제 지역민으로부터 존경받는 건 아무나 가능한 일이 아니다.

범죄로 얻은 수익을 지역사회에 환원한다? 그걸 얌전히 두고 볼 조직원이 있나? 막심의 장악력이 조금만 약했어도 쿠데타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범죄조직은 자선단체가 아니다.

쥐어짜고 쥐어짜 더 탐욕스럽게 갈구하는 것이 범죄의 속성이다.


“어느 날 선택의 순간이 왔어.”


흑이냐 백이냐

중간은 없다.

회색은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니까.

상식적으론 경찰이 경찰을 편드는 것이 맞지만 조직에 잠입한 요원의 변절은 의외로 흔했다. 강도 높은 임무와 스트레스에 의한 변심일 수도 있고 아니면 숨겨왔던 본성을 되찾은 걸지도 몰랐다.


“그는 너와 네 엄마를 선택한 거야. 그리고 그 대가는...”

“당신이 아니라면... 설마 경찰이 죽였다고?”

“...”

“말도 안 돼!”


짭새가 짭새를 죽인다고?

짭새를 좋아하진 않지만 짭새의 단결력은 부러운 수준이었다. 밝혀지면 그냥 망신으로 끝나지 않을 거대한 스캔들. 공권력이 마피아처럼 미쳐 날뛰었다면 그 어떤 조직보다 강력했을 것이다.

실제로 막장국가의 부패경찰은 범죄조직보다 더 잔혹했다.

하지만, 여기는 미국이다. 시시때때로 좆같은 나라긴 하지만 양키에겐 그들만 이해하는 자존심과 가치가 있었다.

자유주의의 총본산!

진보와 인권의 수호자!

안드레는 내 안의 뭔가가 부서지는 느낌을 받았다.


“보스. 준비가 끝났.”


보스의 오른팔 월터는 보고를 위해 막심을 찾았다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목격하곤 허리춤의 권총을 꺼내들었다.


“이 망나니새끼!”


사고뭉치 안드레를 예나 지금이나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도 보스가 끔찍이 아끼니 험하게 다루진 않았다. 그런데 제 아비에게 총을 겨눠?


“월터!”


막심의 외침에 놀란 안드레의 총구가 돌아갔다.

둘의 시선이 교차한 건 매우 짧은 순간.

감정에 복받쳐 흔들리는 눈동자.

혐오로 가득한 차가운 눈동자.

절대로 친해질 수 없는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친 찰나 이성보단 본능이 더 빨랐다.

탕탕-


“Noooooo!”


막심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지는 아들을 향해 달렸다.


“No! no! son!”


뭘 어떻게 손쓸 시간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몸을 날린 막심은 무릎걸음으로 아들에게 다가갔다. 앞섶을 붉게 물들인 피는 금세 바닥을 흠뻑 적셨다.

그는 아들의 손을 잡았다.


“Stay with me! Stay with me! son!”


초점이 흐려지는 아들의 눈을 들여다봤다. 죽음으로 물들어가는 눈동자는 이제 원망조차 보이지 않았다.


“Freeze!”


문이 박살나며 특공대가 들이닥쳤다.

자신이 저지른 짓을 새삼 깨달은 월터는 얼빠진 표정을 짓다 반사적으로 총구를 돌렸고 그게 그의 마지막이었다.

퓨퓨퓽-

자비 없는 연사에 벌집에 되어 쓰러졌다.


“you’re under arrest!”


막심은 거친 손길에 짓눌렸다.

바닥에 얼굴이 처박히면서도 눈은 아들을 향했다.


-...

-왜? 안타까워?

-꼭 이래야만 했어?


하수인 또는 쓰고 버릴 부품을 원하는 안나에게 고통과 비명 따윈 흥얼거리는 허밍보다 무가치했다.


-고통이 인간을 성장시켜. 괴로움이 미망이 되고 후회가 더할수록 그의 내면은 극적인 변화를 가져올 거야. 좋거나 나쁘거나 아니면 망가지거나.


인간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수많은 방법 중 하나.

이건 황제의 방식이다.

시련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성장하거나 아니면 망가진다. 황제의 골수추종자는 하나같이 어딘가 나사가 빠졌었다.


‘그걸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나?’


교정? 교화? 가르침으로 성장하거나 깨달은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Reborn?

다시 태어나는 것.

그건 완전히 다른 무엇인가로의 변태였다.


-막심은 행복할 기회가 있을까?

-그건 그의 선택에 달렸어. 임무를 완수하면 친구와 아내, 아들이 살아 숨쉬는 천국으로 보내줄 것이고 아니면... 이곳에서 고통 받겠지.

-언제까지?

-살아있는 동안?


영원히 고통 받지 않아도 되는 건 유한함의 장점이다.

모두 각자 원하는 것이 있다.

CIA 국장도 미국 대통령도 얼라이언스도 안나도 각자 다른 것을 원했다. 마찬가지로 강지찬 역시 원하는 것이 있다. 미국 대통령과 의회의 세력싸움이라든가 얼라이언스의 내분이라든가 불타버린 뉴욕의 재건사업을 놓고 벌어질 첨예한 이권다툼이라든가 미군의 복수? 파도치는 국제사회? 테러의 여파로 벌어질 혼란은 내 알 바 아니다.

안나는 그가 청문회 스타로 거듭나길 바랐지만 강지찬이 바란 것은 그저 소소한 삶의 행복이지 별난 유명세가 아니었다.


‘기만인가...’


고아에서 재벌로 탈바꿈한 인생역전이 절대 소소한 삶은 아니다. 하지만, 재벌이라고 그에게 큰 감흥이 있진 않았다.

부와 권력?

제국의 유일한 상속자였던 그다. 우주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인류의 발이 닿은 별의 숫자가 곧 그의 부와 권력을 상징했었다.

섹스?

눈만 마주쳐도 다리를 벌려줄 여자는 차고 넘쳤다.

이 세상의 온갖 뉴스에 난리치는 팝스타나 재벌 망나니들처럼 즐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위대한 아버지와 가족, 친구, 이웃의 기대를 배신할 순 없었다.


‘어쩌면 그조차 편협한 망상일지도...’


어쩌면 아무도 내게 기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언제나 혼자 걱정하고 혼자 고민하고 혼자 해결해야 했다. 왜냐면 이 세상 누구도 날 이해하지 못하리라 믿었으니까.

재능을 물려받지 못한 평범한 신의 아들.

아버지는 날 위해 많은 것을 남겨두셨지만 그건 그가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한 기적이었다. 아버지의 위대함을 깨달을수록 나는 더욱더 작아질 뿐이다.

자그마치 1000년이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결코 견딜 수 없는 기나긴 시간은 내 영혼을 안으로부터 갉아먹었다. 마침내 부정한 욕망과 열등감을 더는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찾아왔을 때 나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쳤다.

그때는 안식이라고 변명했지만 이젠 안다.

그건 비겁한 자기합리화일 뿐.

나는 포기한 것이다.


‘제국을... 그의 유산을...’


그래서 더는 관여하지 않는다.

수만 년 동안 분열하고 합치고 싸우고 눈치 보는 제국의 잔재는 그가 기억하는 과거의 ‘제국’과는 너무나도 달라졌다. 구시대의 멸망과 함께 파괴됐던 지구를 돌려준 이유는 어디까지나 나름의 사과를 전한 것이다.

‘친하게 지내는 건 무리고 그냥 데면데면 굴지 않을래?’

피나 아킬라스 마굴드

일명 드래곤타워에 가까울수록 원신原神은 그의 본질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아바타와 캐릭터 설정이 아무리 세밀해도 결국 진원은 하나로 통하니까.

전 우주를 관통하는 위상우주 네트워크는 일종의 꿈과 같은 느낌을 준다. 흐릿한 현실과 환상의 경계, 뭐든 될 수 있고 뭐든 할 수 있다는 착각은 인간을 오만하게 만든다.

내 근원은 명명백백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들.

요셉.

피와 살로 태어난 한낱 인간.


‘고작... 인간에 불과한 것을.’


오랜 세월을 돌고 돌아 결국 처음으로 돌아왔다.

******




“의뢰인은 사망했어.”

“제길!”

“정신 차려! 가브!”


세상 몰래 악당을 처단하는 정의로운 암살팀 LANCE를 이끌던 가브리엘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뉴욕에 테러가 터진 직후 국경을 넘은 건 엄청난 행운이었다.

문제는 의뢰인의 사망.


“밀러놈이 살해했나?”

“테러에 사망한 걸 수도 있어.”

“놈은?”

“...뉴스에선 살아있다고 말하네.”

“대체 어디서 잘못된 거지?”

“결행 전날 FBI에서 밀러를 찾아왔어.”

“FBI가 우리 계획을 눈치 챘다고? 그럴 리가.”


FBI가 대단한 기관이긴 해도 우리는 스페셜리스트 중의 스페셜리스트다.


“가브! 샘!”


팀원이 다가와 태블릿을 건넸다.


“유튜브를 봐.”


재생된 영상은 불타는 뉴욕을 배경으로 한 작전Ops이다.


“스왓?”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야. 진짜 경찰과 연방요원이 있어.”

“어?”

“알아보겠어?”

“리처드 포터?”


전날 밀러 상원의원을 방문했다고 확인한 FBI 요원이다. 그리고 마지막 영상은 그를 충격에 빠트렸다.


“기요틴 퀸... 농담이지?”

“에밀리야 코르센코가 맞아.”

“그년이 왜 유튜브에? 아니, 미친 게 아니라면 작전을 왜 라이브로 내보내?”

“모르지. 중요한 건 리치와 연락이 안 돼. 놈이 잡혔으면 우리 꼬리도 잡힐 수 있어.”

“당장 움직일 순 없어.”


국경을 넘어 캐나다 탈출에 성공한 건 운이 좋았다. 조금만 늦었어도 뉴욕에 발이 묶였을 것이다. 전시를 방불케 하는 비상에 범죄자는 테러리스트만큼 험한 취급을 받는다.

불타는 뉴욕 때문에 난리인 건 미국만이 아니다.

캐나다도 난리였다.

공항과 항만이 통제됐고 주요도로 역시 검문과 검색이 강화됐다. 이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다.

캐나다로 탈출한 건 가브리엘만이 아니다.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나름 스페셜리스트로 자부하는 전문범죄자도 있고 밀수브로커를 쓸 만큼 돈 많은 수배범도 있고 반대로 미국에 들어가려고 기회를 노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도 많았다.


“리치는 쉽게 입을 열 친구가 아니야.”

“평소엔... 그렇겠지. 하지만, 알잖아? 누구도 영원히 고문당할 순 없어.”


자칭 애국자들이 날뛰는 그 시간이 오면 약간의 고문? 따윈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평소 소리 높여 외치던 인권운동가도 그 시간만큼은 합죽이처럼 입을 다물 것이다.


“당분간 각자 흩어지는 게.”

“...늦은 거 같군.”


가브리엘이 얼굴을 굳히자 팀원들은 재빨리 무장을 챙겼다. 남은 선택은 두 개. 저항할 것인가 항복할 것인가.

안전가옥은 어느새 완벽히 포위됐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에 가브리엘은 망설임 없이 손잡이를 돌렸다.


“...리처드 포터.”

“내가 그렇게 유명했나?”


리처드는 생판 처음 보는 상대가 자길 알아보자 어깨를 으쓱했다.


“어떻게 우릴 찾았지?”

“리치.”

“...고문했나?”

“순순히 불던데?”

“?”

“물론 나한테 털어놓은 건 아니지만.”


그때만 생각하면 신기하긴 했다.

미국에 연고도 없는 강지찬이 날고기는 악질 브로커의 입을 너무나도 쉽게 열었다. 비결을 묻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어 아쉬웠다.


“그쪽이 유리한데 왜 협상하지?”

“나도 그게 궁금하긴 한데... 난 메신저일 뿐이거든.”

“뭐?”


동시에 가브리엘의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받아.”

“...”

“전화 받으라는 게 메시지야.”


리처드는 말을 전하곤 쿨하게 돌아섰다.

가브리엘은 폰을 들었다.


“Who?”

“가브리엘2H43.”

“!!!”


그는 하마터면 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콜사인, 콜네임, 뭐라고 부르든 그것을 아는 자는 세상에 오직 두 명뿐이다. 상대와 나. 그리고 이 룰은 절대적이다. 가브리엘은 그제야 리치의 입이 싸진 이유를 깨달았다.


“당신... 살아있습니까?”

“가브리엘2H43.”

“Sir.”

“무장해제하고 다음 명령을 기다려.”

“Yes, sir!”

******




“놀랍네.”


한바탕 격렬한 총격전을 예상했던 에밀리야 코르센코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LANCE 혹은 가브리엘팀.

업계에서 나름 유명한 네임드였다.

그들이 안전가옥에서 나와 순순히 체포되는 광경을 멀리 떨어져 지켜보던 에밀리야는 옆을 곁눈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 대체.”


브로커를 구워삶은 건 그렇다 치고 상대는 코쉬도 꺼려하는 소수정예 살인전문가집단이다. 전면전은 몰라도 게릴라전으로 제압하려면 대대급 전력이 필요한 미친 살인병기들.

그런 이들이 한 통의 전화에 순순히 항복한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로스토바 패밀리의 차르라도 이런 건... 불가능해.’


강지찬의 피앙세가 대단한 배경을 가졌다는 건 그녀도 익히 들어 안다. 붉은 대공, 아니 차르로 등극한 로스토바 패밀리의 보스도 불가능한 일이다.


“뭐하는 인간이야? 너...”

“강지찬? 조셉?”

“그건 그냥 다 아는 이름이잖아.”

“보이는 게 전부야. 아가씨.”

“아니, 나는.”


에밀리야의 말은 중간에 끊겼다.

FBI와 캐나다 경찰 등 요원이 몰려들어 떠들썩한 곳에서 수십 미터 떨어진 곳. 코쉬 용병들은 강지찬에게 고용돼 민가를 뒤지다 목표를 발견했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목 씻고 기다리던 정태곤은 강지찬과 마주하자 상상 이상의 두려움을 느꼈다. 흔들리는 눈동자에는 당혹, 불신, 공포로 가득했다.


“자신만만하게 튀더니 고작 여기까진가.”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도피 중에도 계집질은 못 끊었다. 불법이니 합법이니 논쟁을 떠나 매춘을 안 하는 나라는 세계 어디도 없다. 캐나다는 어떨까? 여기는 마약 이상으로 성매매가 활발한 나라였다.

이 새끼는 상식이란 것이 없나?

아무리 국제사회의 범죄인 인도가 복잡기괴하더라도 인터폴에 수배된 범죄자새끼에다 밀입국자 주제에 남의 나라에서 아주 롹스타처럼 즐기고 있었다.

치열한 두뇌싸움과 추격전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건 쉬운 정도가 아니라 허탈했다.


“읍읍!”


뭔가 할 말이 더 있는 것 같지만 뻔했다.


-먼저 구속된 두 놈은 지속적으로 로비 중이야.

-남은 재산이 있었어?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잖아. 뭐 일본 쪽에선 손절당했어도 중국 스폰서는 아직 살아있어.


그거 목숨값 아닌가?

중국에서 정씨형제의 뒤를 여전히 봐주는 이유는 받아야 할 빚이 있기 때문이다. 에밀리야는 용병들에게 끌려가는 정태곤을 곁눈질하다 강지찬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봤다.


“당신 목표가 저거야?”

“니가 왜 아쉬워하는데?”

“비싼 용병을 고용한 것치곤 상대가 너무 허접하잖아.”

“내 돈 쓰는 것도 아닌데 뭐.”


코쉬에서 발행할 비싼 영수증은 백악관을 향할 테니 강지찬으로선 아쉬울 것이 없다.

내 돈도 아닌데 알빠노!


“한국으로 돌아가?”

“가야지.”

“이렇게 난장을 까고 혼자만 빠지겠다고?”


강지찬의 정보를 받아 체포된 이들은 아직 용의자지 테러혐의가 확정된 건 아니다. 지금이야 분위기상 무차별체포가 가능했지만 분명 절차를 문제 삼을 이는 많았다.

이 역시 강지찬에겐 알빠노다.


“일라이자가 알아서 수습하겠지.”


반복되는 질문, 그러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일라이자 레인? CIA 국장이 당신 친구야?”

“친구보단 비즈니스 파트너에 가깝지.”


일라이자는 잘할 것이다. 의심 많은 그녀의 레이더에 걸려든 순간 용의자든 뭐든 그들의 죄는 낱낱이 해체돼 드러날 테니까.


-눈앞의 계집도 당신을 지오로 의심해.

-그렇겠지.

-아무렇지도 않아?

-별로.


자고로 형제는 서로를 혐오했다.

지오와 나, 우리는 서로의 못난 부분을 긁어대길 서슴지 않았다. 미워하는 건 아니다. 미워하는 것은. 그저 절대 닿을 수 없는 위대한 아버지를 둔 모자란 아들새끼들의 치졸한 열등감일 뿐.

누가 더 모지리인지 묻는다면 우린 서로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날릴 것이다. 하지만, 성격도 취향도 관심사도 모두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우린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다.

내 형제를 욕하고 깔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다.

문득 새 가족이 보고 싶어졌다.


‘가자. 집에.’


하지만, 강지찬은 대한민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왜냐면 뉴욕에서 알짱거리던 관료와 정치인이 무더기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부통령 포함 35인의 정부 요인 폭사爆死!

미합중국 50개 주정부 및 주의회 폭발爆發!

2차, 3차, 4차에 이은 추가 테러로 미국 전역에서 사망자가 속출했다. 다행이라면 대통령과 CIA 국장은 살아남았다.

강지찬은 며칠째 깎지 못한 턱수염을 만지며 쓰게 웃었다.


‘잘못 생각했네.’


정정하겠다.

내 예상보다 더 미친년이다.

******




얼라이언스의 긴급이사회가 소집되었다.


“...끔찍하군.”


현 얼라이언스 이사회 의장은 연준의장을 겸임했고 그는 부통령과 함께 폭사한 35인에 속했다. 그리고 의장 대리를 맡은 이는 전전 의장인 오태양이었다.

오늘 모인 이사회 멤버 가운데 멀쩡히 살아있는 자는 딱 절반이다. 태반이 초기 맨해튼 테러와 함께 쓸려나갔다.


“시작하지.”


보통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인사로 회의를 시작하지만 오늘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맨해튼 본부는... 기능을 멈췄습니다.”

“지부는?”

“연락이 닿지 않는 지부만 과반이 넘으니 사실상 우리 네트워크는 정지된 상탭니다. 각 지부에 수습할 팀을 보내고 있습니다만... 인력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코쉬와의 연계는?”

“국방계약 때문에 많은 인력을 빼줄 수 없답니다. 다른 1티어 용병기업을 물색 중입니다만...”

“줘.”

“상당한 추가 비용을 요구할 겁니다.”

“그냥 줘. 돈으로 해결이 되면 싸게 먹히는 거야.”


얼라이언스에게 필요한 건 수습할 시간이다. 시간을 돈으로 살 수 있다면 사는 것이 이득이다.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지. 연준, 어떻게 할까?”


오태양은 이사회 멤버를 돌아봤다.

미합중국 연방준비제도United States Federal Reserve System

미국중앙정보국과 함께 양키음모론자에게 가장 많이 공격받는 기관이 바로 연준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기축통화라고 함은 곧 달러다. 그 달러발행을 좌지우지하는 연준의 파워는 상상을 초월했다.


“후임자는 이미 대통령과 합의된 인물이 있지 않습니까?”

“제니퍼도 사망했어. 노스다고타 연방청사가 폭발할 때 주지사와 함께 있었다는군.”

“맙소사.”

“추천할 만한 인사가 있나?”


오태양은 다시 멤버들을 둘러봤다. 쉽게 결정할 사안은 아니지만 재무장관과 함께 연준의장 자리에 우호적인 인사를 박아두지 않으면 앞으로의 재건사업에 제동이 걸릴 확률이 높았다.


‘버겁군.’


죽은 아들이 하던 일을 늙은 아버지가 하려니 온몸이 삐거덕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복수에 눈 돌아갔던 아내가 돌아오긴 했지만 웬텔의 이름값도 예전만 못했다.


“알렉산더는 어떤가?”

“알렉산더? 찰리 알렉산더 캐봇?”

“Yes.”

“머천트가 언제부터 얼라이언스에 속하게 됐지?”

“비상시국이지 않나?”


오태양은 발언자를 노려봤다.

재커리 리빙스턴

오지오 사후 사사건건 웬텔을 발목은 잡는 포르사 홀딩스의 대주주이자 대표이사.


“머천트는 안 돼.”

“카르텔 때문에?”

“돈에 아무리 선악이 없다 해도 정도가 있는 거야.”

“성인군자도 아니고 다들 검은돈을 굴리지 않나? 웬텔만 해도 레드마피아와 연관 있을 텐데?”

“잭.”

“쏘리.”


오태양이 으르렁거리자 리빙스턴은 실실거리며 사과했다.


“어쨌든 머천트는 안 돼.”

“그럼 네이선을 추천하지.”

“...켈리 네이선.”


하버드 대학교 경제학 종신교수이자 제도권 대형은행을 극렬히 혐오하는 시민운동가 켈리 네이선의 이름이 나오자 여기저기서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개수작이지?’


오랫동안 학계와 업계에서 활동한 네이선 교수의 명성과 자격은 차고 넘칠지 몰라도 임명은 절대 통과되지 않을 것이다. 리빙스턴이 그걸 모를까?


‘그럴 리가.’


절대 통과되지 않는다? 혹시 이 전제가 틀렸다면?


“네이선 교수는 우리에게 우호적이지 않아. 리빙스턴.”

“알지. 잘 알지.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이 드물 걸?”


포르사 홀딩스는 켈리 네이선의 책과 강의에서 악의 축으로 자주 묘사됐다.


“안다면서 왜?”

“하지만, 생각해보게. 썬. 앞으로 우리는 막대한 구제금융을 받아야 하고 테러로 불타는 정국이 가라앉으면 여론의 강력한 저항을 받을 거야.”

“흠.”


틀린 말은 아니다.

잿더미가 된 뉴욕과 맨해튼을 재건하려면 한두 푼으론 어림없다. 뉴욕만 그럴까? 테러의 상흔이 남은 50개주 전부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려고 발악할 것이다.


“표결로 가면 뉴욕만으론 이길 수 없어.”

“이길 수 없으면 판을 뒤집자는 거군.”

“Yes!”


리빙스턴은 여 보란 듯이 손뼉 쳤다.


“자기들 발등에 불이 떨어졌으니 뉴욕만 응원하진 않겠지.”


남의 집 앞마당이 불타는 것과 내 집 앞마당이 불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이제 더는 손 놓고 구경만 할 순 없었다. 그러나 얼라이언스의 중추는 여전히 뉴욕이고 맨해튼을 벗어나지 못했다.

미국을 좌지우지하는 기업연합이지만 미국을 진짜 지배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데스 사이드와도 어영부영 휴전하지 않았으리라.


“연준이 우리 손을 떠날 수도 있어.”

“남은 이사들을 잘 구슬려봐야지.”

“...”


음흉한 속내가 느껴지는 건 오태양의 착각일까? 하지만, 대안 없이 대놓고 거부할 순 없었다.


“표결로 가지. 켈리 네이선의 의장 임명에 찬성하는 자는 손을 들게.”


착착-

참석자 50명 가운데 손을 든 이는 대략 27명이었다.


‘이건?’


중도파 상당수가 리빙스턴에게 붙은 건가?

얼라이언스의 세력비는 이제껏 웬텔 4, 포르사 3, 중도 3이다. 그런데 과반이 넘는 표를 얻었다는 건 이미 두 세력의 교감이 있었다는 방증이다.


“...켈리 네이선의 연준의장 임명을 추진하게.”

“Good.”


리빙스턴은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오태양은 배알이 꼴렸지만 이건 상대가 준비를 잘한 것이다.


“다음 안건은.”

“아아.”


리빙스텅이 말허리를 잘랐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대리가 아니라 진짜 의장일세.”

“...”

“지금 당장 새 리더를 뽑아야 한다고 보네.”

“참석하지 못한 이사가 많아.”

“하지만, 정족수는 넘지.”


이 새끼 이거?


‘노렸구나!’


어쩐지 뉴욕도 아니고 뉴저지에서 회의를 열자고 강력히 요청하더니.


‘...넘어갔군.’


중도파의 눈빛을 보니 리빙스턴과 이미 말을 맞춘 것 같다. 심지어 웬텔 계파 몇몇과도 의미심장한 시선을 교환했다.

패배다.

완벽한 패배.


‘역시 내겐 버겁구나. 아들아.’


아들의 빈자리가 오늘따라 너무 크게 느껴진다.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추하게 발버둥 쳐볼까? 그러고 싶진 않다. 내 명예나 명성이 떨어지는 건 상관없지만 아들이 쌓은 위업에 생채기가 나는 걸 볼 자신이 없었다.


‘여기까진가...’


오태양은 등받이 깊숙이 몸을 뉘였다.

급격한 탈력감, 피곤에 나른해졌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 딸아이들을 보고 싶다. 하지만, 실망할 아내를 떠올리니 못내 마음이 무거웠다.


‘훗! 건방진 아시안!’


리빙스턴은 눈을 감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는 오태양을 곁눈질하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참으로 오래 걸렸다.’


얼라이언스의 주도권을 잡기까지.

벨리알의 죽음이 확정됐음에도 그 그림자는 짙게 남아 모두를 눈치 보게 만들었다. 욱일승천하던 웬텔의 기세가 꺾였지만 누구도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는 꺼렸으니까.

혹시 싶은 불안이 가시질 않았다.

벨리알이 서프라이즈! 하며 등장해 우리 목을 딸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극복하고 연합의 주도권을 잡으려면 도박이 필요했다. 그리고 마침내!


‘미국을 이끌어가는 건 우리 백인이다!’


누구처럼 극단적인 백인우월주의까진 아니라도 연합 내부도 선민사상이 팽배했다. 오랫동안 억눌렸던 향상심에 불이 붙었다.

리빙스턴은 승리를 선언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표결에 따라.”


쾅-

안으로부터 단단히 잠겼던 문이 날아갔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비밀장소, 모두 안심하고 모여 미래를 논하던 금지에 초대받지 않은 외부인이 잔뜩 몰려들었다.


“무슨!”


리빙스턴은 엉거주춤했다. 그는 싸움을 잘하는 전사를 돈으로 사는 고용주지 직접 총칼을 드는 쪽이 아니다. 아니, 여기 모인 대다수는 헌팅 라이플은 쏴봤을지언정 오토매틱 라이플은 눈으로 본 것이 전부다.


“경비!”

“Shut up.”


호기롭게 경비를 찾던 누군가는 해골마스크 괴한의 총구를 보자마자 주저앉았다.


‘무슨!’


오태양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다.


‘보안이 뚫렸다고?’


억만장자를 넘은 조만장자의 스케줄은 대외비와 다를 바 없고 거느린 비서와 경호원의 숫자는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백 명이 넘는다.

오늘 모인 멤버의 수행원을 합하면 수천 명이다.

그 수천 명을 소리 소문 없이 제압하려면 얼마큼 많은 준비와 자원을 투입해야 할지 계산이 안 선다. 세계최강대국 미국을 지배한다고 자부하는 엘리트들을 완전히 바보로 만들었다.

하지만, 약간의 두려움은 느낄지언정 오늘 죽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오만일지도 모르지만 그들을 죽임으로써 상대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으니까.

몸값이라면 얼마든지 낼 의향이 있다.

그러나 그 기대는 날아간 문을 통해 들어선 한 남자로 말미암아 신음과 탄성으로 바뀌었다.


“으음.”

“큼.”


흰 머리카락과 흰 수염으로 가득한 거구의 사내.


“차르...”


블라디미르 비탈리예비치 로스토바

대공에서 황제로 등극한 러시아의 거물범죄자.

일흔이 넘는 이 노인은 유라시아 범죄계를 지배했다. 러시아에 있어야 할 그가 어떻게 미국에 있는 걸까? 그것도 테러로 말미암아 극도로 예민한 이 불안정한 시국에 말이다.


“미스터 로스토바, 나는.”

“Shut up.”


협상을 제의하려던 리빙스턴은 느물거리는 러시아식 영어발음에 막혔다.

누굴 기다리는 걸까?

백발노인은 미동도 없이 문을 쳐다봤다.

또각또각-

정적을 뚫고 대리석을 밟는 구둣발 소리가 들린다.

고급스러운 자줏빛 정장은 한눈에 봐도 디자이너가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명품이다. 반투명한 실크블라우스 뒤로 속옷이 보일락 말락 한다. 좆 달린 것들은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저 옷 속에 얼마나 무시무시한 몸매를 숨겼을까.

하지만, 당장 눈길을 사로잡은 건 아름다운 백금발이다.

노화로 말미암은 백발이나 염색으로 만든 머릿결이 아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홀릴 것 같은 매혹의 빛, 남자라면 혹할 수밖에 없는 미美의 화신이었다.


‘안나 강?’


오태양은 흠칫했다.

만난 적은 없지만 알고 있는 얼굴.


“Hello.”


그녀는 모두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미스 로스토바?”

“놉! 미시즈 강.”

“...”

“호칭에 주의해줘.”

“미시즈 강... 이게 무슨 짓이오?”

“Who?”


분노를 억누른 질문을 던진 이는 산드라 컴퍼니의 창립자이자 패션계의 거두 산드라 미첼이다. 그녀는 감히 날 몰라? 그런 표정을 지었다.


“산드라 미첼.”

“아. 푸티지.”


Footage, 영화나 영상의 미편집 원본을 말하지만 산드라 미첼의 별명은 이를테면 틀딱의 완곡한 표현이다. 하지만, 누구도 패션계 대모의 면전에다 틀딱이라고 말할 담력은 없었다.

산드라는 노한 눈빛을 백발노인에게 주었지만 블라디미르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사람들은 엄청난 위화감을 느꼈다. 로스토바 패밀리 당수이자 차르는 손녀의 버릇없는 행동에 아무런 액션도 취하지 않았다. 도리어 방관을 넘어 얌전히 따르는 모양새다.


‘뭔가...’


뭔가 이상했다.

안나의 걸음이 멈춘 곳은 리빙스턴 앞이다.


“아주 앙큼한 짓거리를 저질렀어. 리빙스턴.”

“...”

“이제 와서 발뺌하진 않겠지?”

“배상을 원하나?”

“배상? 그딴 걸 원했으면 넌 이미 죽었어.”


죽음을 언급하는 협박성 발언에 리빙스턴이 불쾌한 표정이자 안나는 검지를 들었고 그는 뒤통수 와 닿는 차가운 느낌에 흠칫했다.

총구?

웃긴 건 리빙스턴의 뒤통수를 겨냥한 총의 주인은 해골마스크가 아니라 이사회 멤버 중 한 명이다.

조나단 골드스타인

20년 넘게 알고 지낸 친구가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총을 겨눴다. 안나가 손을 내리자 골드스타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 총구를 거뒀다.


“네 하찮은 목숨을 거두는 건 손가락질 한 번이면 충분해.”


리빙스턴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우린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지.”

“설마 당신들이?”


리빙스턴은 뒷말을 삼켰다.

최고위원회

전설처럼 떠도는 소문.

혹자는 그들이 로마시대에도 존재했다고 말한다. 미국을 주무르는 얼라이언스조차 소문의 진위를 가리지 못해 그냥 괴담쯤으로 여겼었다.


“너희가 그토록 두려워한 벨리알의 근원이 뭘까?”

“!!!”

“!!”


이것이 만화라면 모두의 머리 위로 느낌표가 찍혔으리라.


“우리 같은 이들에게 죽음은 별 의미가 없어. 특별한 것. 오래된 것. 너희는 상상할 수 없는 긴 세월을 살아가는 것. 우린 시간을 비껴간 존재거든.”


믿을 수 없는 얘기, 그러나 벨리알의 신비한 능력을 떠올린 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벨리알은?”

“그는 이상하게 인간사에 관심 많지. 일상과 삶을 동경했어. 너희에겐 악몽이겠지만.”


리빙스턴은 썩은 표정을 지었다. 고작 그거라고? 자신의 초라함에 견딜 수 없는 혐오와 분노를 느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공포에 사로잡혔다.


“우린... 그를 죽이지 않았소.”

“알아. 너희는 그럴 능력도 담력도 없어. 하지만, 감히 그의 명예를 끌어내리려고 온갖 협잡질을 벌였어. 양아치도 아니고 왜 고인의 안식을 방해하는 거야.”

“...”

“그런데 날 더 화나게 하는 건 내 남자를 건드렸다는 거야.”


내 남자

나의 유일한 사랑

우리는 시작과 끝을 함께할 영원한 동반자다.


“고작 그런 이유로.”

“고작? 고자아악?”


안나의 손에 도끼가 들렸다면 리빙스턴의 대가리는 금방 쪼개져 뇌수를 흩뿌렸을 것이다.


“멍청이들! 너흰 지금 누굴 건드렸는지 전혀 모르고 있어.”


이 바보들은 지금 착각하고 있다.


“난 너흴 벌주는 게 아니야. 도리어 보호한 거지.”

“?”

“지오는 너희에게 특별했겠지? 하지만, 내 남자는 그보다 더 특별해.”


그는 비할 바 없는 거인巨人이자 지고한 존재다.


“그가 내리는 심판은... 천둥벼락이자 폭풍과 태풍이야. 인간은 감히 그 재해로부터 도망치거나 숨을 수 없어.”


인간의 외형을 가졌지만 요셉의 진체는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유기체가 아니다. Type-Zero가 어째서 아포칼립스란 이명을 가졌는지 이해한다면 더더욱 두려울 수밖에 없다.


“거인의 걸음걸음에 나라는 무너지고 대륙은 가라앉고 별이 사라져.”


영식은 시작이자 끝이며 또 끝이자 시작이다.


“너흰 내게 감사해야 해. 날 존중해야 해. 왜냐면 그 거인이 내 품에서 고이 잠들어 쉬고 있거든.”


그가 기지개를 켜는 순간 세계는 멸망할 것이다.


“그러니 너흴 구원할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야.”


확신과 광기로 가득한 목소리에 좌중은 압도됐다.


“규칙? 규율? 규제? 집어치워. 오직 강자만이 살아남아 영광을 쟁취해. 그게 세상의 이치야.”


자유와 방종이 상징이자 장점인 미합중국에서 기업연합이라니? 얼토당토 않는 개소리다. 경쟁자를 잡아먹고 뜯어먹고 크는 것이 자본의 본질이지 않은가.

법도 없고 질서도 없는 야만.


“얼라이언스는... 이제 없어.”


인간의 역사는 결국 돌고 돌아 야만으로 회귀한다.


“구원을 바란다면 합당한 제물을 바쳐라.”


안나의 시선은 좌중을 둘러보다 리빙스턴에서 멈췄다.


“리빙스턴.”


모두의 시선이 그를 쫓았다.


“Run.”


자! 이제 서로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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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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