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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스릴러! 서스펜스! 망가! 그리고 고양이!

요셉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강철신검
작품등록일 :
2023.04.11 23:59
최근연재일 :
2024.04.16 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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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8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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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6쪽

요셉 -15화-

DUMMY

강원도 마약검거작전과 관련된 강지찬의 징계위원회 얘기는 슬그머니 사라졌다. 미성년자 성매매 적발이란 광풍이 휘몰아친 정·관계는 쑥대밭이 됐고 집권여당 출신 교육부 장관(부총리)은 을사오적 수준의 매국노로 추락했다.

여기서 괜히 담당 검사를 건드렸다간 폭발한 민심이란 죽창에 꿰여 만고역적으로 기록될 수도 있다. 일개 평검사, 그것도 부임 1년도 안 된 새파란 신입이 검찰총장은커녕 대통령도 어쩌지 못하는 권력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물론 일시적인 현상이 맞다.

민심은 빨리 끓어오르는 만큼 빨리 식으니까.

하지만, 연일 새로 발표되는 피의자 목록 갱신에 언론은 나발을 불어대며 광풍에 부채질했다. 엘리트입네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던 국회의원과 고위공직자 등은 서슬 시퍼런 칼날이 어디로 향할지 몰라도 두려움에 떨었다.

검찰 지휘부는 발 빠르게 노선을 정했다.

‘성역은 없다!’

청와대와 국회는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검찰총장으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만약 누군 빼주고 누군 담그면 그 비밀이 지켜질까? 어림도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불타는 여론을 등에 업고 망나니 칼춤을 추는 것이 최선이다.

어차피 임기 말년, 국민에게 제대로 눈도장 찍으면 국회 입성도 꿈은 아니다. 당연히 담당 검사가 강지찬이 아니라면 시도하지 않았을 도박이다.


‘차후 대성의 지원을 받는다!’


강규현 검찰총장은 계산이 섰다.

총장이 직접 본부를 꾸리고 부장급 검사들이 실무에 합류하자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검찰이 과연 이 미성년자 성매매조직에 대한 정보를 하나도 몰랐을까? 아니다.

다양한 분야의 첩보는 항상 수집되고 있다. 단지 시간과 인력을 투입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건 검찰 지휘부의 몫이다. 성매매를 담보로 한 인신매매의 특성상 주모자를 색출하는 것이 쉽지 않을뿐더러 피해자인 여성이 고발과 증언을 꺼렸으니 재판만 가면 항상 골치 아파진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그냥 성매매도 아닌 미성년자를 성적으로 착취한 정황이 드러났으니 이는 엄청난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일반인도 아니고 고위공직자와 국회의원, 엘리트 기업인 등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들의 추악하고 위선적인 행위에 국민감정은 혁명 직전으로 들끓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혁명’을 반기진 않았다.


“일개 평검사에게 끌려가는 게... 이게 맞아?”

“강지찬? 걘 얼굴마담이야. 그 뒤엔 강 총장의 시커먼 속내가 있다고.”

“공천을 달라고 알랑방귀 낄 땐 언제고 이렇게 뒤통수를 치다니...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몹쓸 친구구먼.”

“난 의심스러운데... 강 총장에게 그럴 담력이 있을까? 여당 실세를 그렇게 보내버리면 반드시 보복이 있으리란 사실을 모를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야당에서 뭔가 제안 받은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지. 아무리 국회가 총성 없는 전쟁터라도 선이 있는 거야. 선이. 만약 강 총장이 주모자라면 그는 평생 의원 배지는 달 일이 없어.”

“정말 강 총장이 설계했을까? 내 생각은 달라. 어쩌면 대성일지도 몰라.”

“강 회장이?”

“강 총장 역시 강 회장의 먼 친척으로 알고 있어.”

“흠. 하지만, 그래서 대성이 얻는 게 뭔데?”

“대성은 원래 우리랑은 사이가 안 좋잖나? 둘째를 띄우려는 수작질일지도.”

“글쎄. 나랑은 딱히 나쁘진 않네만.”

“흥! 대성은 성조가 흔들리는 지금 기회를 엿본 거라고!”

“억측이야. 대성 역시 범성조에 속해.”


각계각층에서 상황을 예의 주시할 때 성조그룹 오채령 회장 역시 심해진 두통 때문에 엄지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우리 조카놈이 사고 한번 제대로 쳤어.”

“문중에서 말이 나옵니까?”

“회합을 갖자고 그러네. 근데 말이 회합이지 서열이 큰 폭으로 상승한 대성의 성장세를 위협으로 봐.”

“...거기서 강 회장을 다구리 칠 생각이군요.”

“어림없는 소리지.”


오채령은 코웃음을 쳤다.

강대성이 어디 보통 사내던가? 그는 대성가家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면 고故 오천명 명예회장이 입양을 고려했을 만큼 성조에도 큰 영향력을 가졌다. 수양자로 불러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번 사건과 재계가 무슨 상관이냐 싶겠지만 적발된 피의자 중에 준재벌급 기업인도 상당수 포함됐다. 자본가를 증오하는 노동계는 이때다 싶어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지난 몇 년 동안 혼자만 쑥쑥 성정한 대성그룹을 향한 질시는 더욱 심해졌다.

심지어 성조 내부에서도 대성을 견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다.


“동생을 질투하는 형이라니...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다 모가지였을 거야. 대성 오빠를 볼 면목이 없어.”

“오성그룹 충격이 범성조의 결속을 흔들었습니다.”

“그래도 감히 대성을 견제하자니... 말 나온 김에 묻자 오성은 어때?”

“별다른 움직임 없이 아직은 내부 수습 중입니다.”

“수습이 끝나면 어디로 찔러올까?”

“자금 흐름을 어느 정도 묶을 수 있는 물산과 건설, 엔터 쪽을 노릴 겁니다.”

“그냥 오성에 넘길까?”

“그쪽에 딸린 식구가 많습니다. 쉽게 포기하면 그만큼 우호세력을 잃을 겁니다.”


언론은 현 성조그룹을 병든 공룡에 비유했다.

성조는 여전히 대한민국 1등이지만 예전만큼 압도적이진 않았다. 성조 금융계열 일부(최소 4할)가 독립해 세운 오성그룹은 오장군 사후 회장 체제에서 벗어나 의장단을 중심으로 각 이사회끼리 협력경영에 나섰다.


“이럴 때일수록 대성과 더 친하게 지내야 해.”

“옳은 말씀입니다.”

“인사도 잘 안 오는 조카놈이 괘씸하지만... 밀어줄 땐 확실히 밀어줘야지. 팀 하나 만들어봐.”

“알겠습니다.”


성조를 비롯한 많은 기업이 대성을 놓고 이리저리 잴 때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재벌도 있었다.

GK 안광우 회장도 그중 한 명이다.


“강지찬... 난놈은 난놈이네.”

“아빠, 그냥 난놈이 아니라니까? 쟤 저거 다 계산하고 움직이는 거예요.”

“그게... 말이 되니?”


안유빈의 말에 안광우는 설마 그렇기야 하겠냐는 표정이다.


“답답하다! 답답해!”


신중한 것도 좋지만 굼벵이처럼 느린 부친의 결정력이 오늘따라 더욱 답답한 큰딸이다.

안유빈은 손톱을 깨물었다.


‘아 씨! 메이저로 올라설 기회였는데!’


예능이나 드라마야 원래 GK미디어의 강세였지만 시사와 교양은 그렇지 못했다. 강지찬의 다큐멘터리를 일정대로 촬영하고 방영했으면 시청률은 덤이고 엄청난 시너지를 냈으리라.


‘개새끼들!’


미성년자 성매매 게이트가 터지자 검찰은 촬영팀을 즉각 내쫓았다. 계약서를 들먹이기엔 상대는 대大검찰이다. 검사장 출신 고문변호사도 난색을 표했고 무엇보다 경쟁 언론사들이 독점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강지찬을 독점할 수 있으면 좋지만 결코 그렇게 놔둘 리 없다. GK가 성조였으면 모를까.


“아빠, 내 사람 보는 안목 인정하죠?”

“흠. 그래.”


안광우는 큰딸이 남자 보는 눈은 없어도 인재 보는 눈은 괜찮다고 인정하는 편. 못 미더웠으면 사장에 앉히지도 않았다.


“강지찬은 보통이 아니에요.”

“보통이 아니겠지. 봐봐. 저 고집스런 입매와 눈을, 외압 좀 받았다고 상대방의 실명을 까버리는 패기는 누가 뭐래도 강대성 회장 핏줄이 맞아.”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요. 아빠.”

“음?”

“그 사람은 강 회장님이랑은 달라요.”


안유빈은 부친이 자길 어떻게 평가하는지 알고 있다.


‘내가 남자 보는 눈이 없다고? 천만에.’


남자 보는 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높았다. 이제껏 만난 남자는 그저 킬링타임용 남친이다. 사진 찍히기 좋은 예쁘장하고 말 잘 듣는 트로피에 불과했다. 남자만 여자를 액세서리 취급할 자격은 없다. 순정을 바칠 만한 훌륭한 남자가 있다면 얼마든지 요조숙녀가 될 마음이 있다.

훌륭한 남자의 조건은?


‘무조건 강한 남자지.’


돈과 권력이 강함의 척도일까? 아니다. 돈과 권력 따윈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옵션이다. 진짜 강함이란 본능과 야성이고 그 존재만으로 암컷을 발정하도록 강제하는 강한 수컷 냄새를 풀풀 풍겼다.

강지찬은 난생 처음 본 강한 남자였다. 속된 말로 아랫도리가 젖을 만큼 강렬한 수컷의 향기를 맡았다. 강지찬이 인터뷰를 촬영했던 그날 집으로 돌아와 자위를 세 번이나 했다.

도저히 버틸 수 없을 만큼 몸이 뜨거웠다.


“엉뚱한 생각하는 거 아니지? 너.”

“뭘요?”

“...아니다.”

“어쨌든 우린 강지찬코인에 탑승해야 해요.”

“지금도 노골적으로 편드는데 더하라고?”


GKBC는 노골적으로 검찰과 강지찬을 빨았다.

그것도 보도국에서 볼멘소리가 나올 정도로 아주 심하게 빨았다. 저널리즘의 객관성은 차치하고 최소한의 언론중립도 개나 줘버린 강지찬 용비어천가를 불러댔다.

한쪽에서 이렇게 나발을 부니 반대쪽은 어떤가.

남 잘되는 꼴은 죽어도 못 보는 냉소로 무장한 반골 지식인은 강지찬의 태생을 물고 늘어졌다. 만약 지난 24년의 고달픈 과거가 없었다면 영웅이 되기는커녕 반서민적 독재꿈나무이자 폭력주의 엘리트로 개 까였을 것이다.


“저! 저! 저 씹새가 지금 머라카노? 짐 머라카는 기고?”


뉴스 채널을 돌려보던 한동배는 혈압이 오른 듯 삿대질했다. 손자를 찬양하는 뉴스에선 흐뭇한 미소를, 작은 의혹을 사실처럼 왜곡하는 뉴스에선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어르신, 갑자기 화내시면 건강에 해롭습니다.”

“저거! 저 새끼 주둥이 못 막나?”

“알아보겠습니다.”

“거! 간만에 나라에 큰 인물이 나왔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초를 쳐? 에잉! 방송쟁이놈들이 글면 그르치!”


한동배는 팔걸이를 두드리며 혀를 차며 구시렁거렸다. 그러다 화면 가득 손자의 얼굴이 보이면 다시 빙그레 웃었다.


“저거 보이나? 저거! 저게 호랭이야. 호랭이 눈이라고.”

“네. 아주 단단한 눈빛입니다.”

“그치? 사람 잡아먹는 호랭이 눈이야. 근데 하찮은 나부랭이들이 호랭이를 이길 수 있겠어? 어림없다. 암! 으림없다.”


한동배는 이제 기분 좋다고 팔걸이를 두드렸다.


“이 한동배가 인생 잘못 살지 않았다카이. 내 죽을 때 아무것도 몬 남기고 갈 줄 알았는데 마, 이제 됐다. 호랭이를 남겼으니 마, 내 할 일 다 했다 아이가.”


처첩으로부터 많은 자손을 봤고 이제껏 장녀 한지숙이 그나마 봐줄 만한 인물이라고 한탄했다. 다 좋은데 왜 딸년이냐고.


‘가문은 사내새끼가 잇는 게 맞지.’


딸자식이 아무리 귀여워봐야 결국은 남이다. 강성찬에게 그렇게 목맨 이유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대성 따윈 아무래도 좋다.


“내 인생이 예술이면 저저! 저 손주놈이 내 걸작인기다. 내 핏줄이, 이 한가 동배가 세상에 살았다는 흔적이 우리 손주놈인기다. 내 인생걸작이야. 글작.”


나날이 쇠약해지는 한동배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 얘기만 나오면 활력이 샘솟았다. 집사는 그게 안타깝고 서글프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주인이 언제부터 이렇게 나약해졌을까.

고용인이 들어와 말을 전할 때까지 한동배는 쉴 새 없이 손자 자랑을 늘어놨다.


“누가 왔다꼬?”

“사위분들이 방문했습니다.”

“분은 무신 분이가! 무능한 빙시들이지.”


한동배의 기분은 급격히 다운됐다.


‘거러지 같은 것들!’


장녀를 제외하면 딸년은 하나같이 어디 허우대만 멀쩡한 병신을 사윗감이라고 데려왔다. 반반한 낯짝의 반만큼이나마 능력 있었으면 그런갑다 했을 텐데 역시 얼굴 뜯어먹고 사는 병신치고 제대로 된 사내놈은 한 놈도 없었다.

그래도 자식이라고 한밑천 떼어줬는데 어떻게 된 것이 죄다 말아먹었다. 딴 주머니 찼나? 그랬으면 진즉에 잡아다 물고를 냈을 것이다. 그냥 무능했다.


‘깜도 안 되는 것들이 무신 장사하고 경영한다고 깝치노.’


은행 이자 아니면 주식 배당이나 받아먹고 살 것이지.


“왜 왔나!”

“아버님.”

“낯짝도 두껍다. 쓱 끄지라!”

“진짜 너무 하세요! 아부지!”


사위놈들 뒤에 숨었던 딸년들이 씩씩거리며 튀어나오자 한동배의 가슴은 울분으로 타올랐다.


“직일년들이! 니 필요할 때만 찾는 부모가 부모가?”

“섭섭하게 말씀하시네. 아부지. 명절 때 매번 오잖아요!”

“하하! 니 말 잘했다. 나 좋으라고 찾나? 아니제? 내가 은제 뒤질지 염탐하러 오는 거 아이가? 맞제?”

“아버지 그게 아니라.”

“다물라!”


한동배는 휠체어 옆에 걸어둔 지팡이를 들고 휘둘렀다.


“느그 새끼들 살만치 다 나나줬는데 뭘 더 달라꼬? 어? 내 돈 읎다. 가라.”

“아니, 아버지 우리 그이가 이번에 미국에서.”

“됐다마! 머하노? 즈긋들 싹 다 밖으로 버리라.”

“아버님!”

“아빠!”


질질 끌려 나가는 자식을 보는 한동배 마음도 썩 개운치 않았다.


“쯧쯧! 저것들 내 죽으면 백 프로 즈그끼리 싸운다카이.”

“얘기는 들어보시는 게...”

“얘기는 무슨! 또 어디서 헛바람이나 들가꼬 설레발치는 기지. 제대로 된 정보는 저것들한테까지 안 가. 빼먹을 놈은 벌써 다 빼먹고 튀었지. 쯧쯧! 빙시같은 것들.”


한동배는 집사를 지그시 바라봤다.


“내 모릴 줄 아나? 니가 몇 번 도와줬제?”

“죄송합니다. 어르신.”

“그기 어찌 니 탓이노. 다 즈 빙시같은 것들 때문이자.”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쯧! 중간에서 니가 고생이 많타.”


오늘이야 쫓아버렸지만 다시 찾아와 징징거릴 것이 뻔했다. 고용인이 다가오자 한동배는 버럭 성질부터 냈다.


“또 누고?”

“...안나 양이 왔습니다.”

“우, 우리 아가가 왔어? 머하노! 문 열어라.”


고약한 늙은이는 사라지고 푸근한 미소를 머금었다.


“할아버지이이!”

“아이고! 아이고! 조심하라카이.”


날듯이 달려오는 안나를 본 그는 혹여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까 안절부절못했다. 그녀는 양손 무겁게 다가왔다.


“뭘 그리 바리바리 싸왔나?”

“이건 할아버지 드실 곰탕이랑 밑반찬 그리고 이건 제가 직접 달인 한약이요!”

“약을 직접 달여?”

“네! 한의사한테 코칭 받으면서 제가 직접 달였어요!”


한동배는 쓰디쓴 한약 냄새가 어째선지 달게 느껴진다.


“아이고! 뭐한다고 그 고생을 했나.”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셔야죠.”


안나는 휠체어 뒤로 가 자연스럽게 밀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날도 찬데 왜 나와 계셨어요?”

“우리 손주며느리가 올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제.”

“진짜요?”

“하모! 진짜제. 니 할아부지는 그진말 몬한다.”


서재에 휠체어를 세운 안나는 한동배의 어깨를 주물렀다.


“말도 잘하시고! 울 할아버지 젊을 때 여자들이 억수로 좋아했겠어요!”

“하모하모! 내 인기 많았제. 지찬이 보면 모르겠나? 그게 다 내가 물려준기다.”

“잠깐만요. 할아버지.”


안나는 폰을 꺼내 누구와 대화하다 한동배 옆에 무릎 굽혀 앉았다.


“지찬 씨에요.”

“지찬이가?”

“네.”


한동배는 사냥하는 매처럼 폰을 낚아챘다.


“지찬이가? 할애비는 괘안타. 늙으면 어디가 다 망가지고 그르지. 하모. 닌 으때? 건강하지? 니도 한약 묵나? 내? 내도 묵지. 그래. 더 필요 없다. 늙은이가 무봐야 머하나. 큰일 할 우리 손주가 좋은 거 많이 무야지. 어? 오늘 올 끼라고? 시간이 되나? 바쁜데 올 거 읎다. 온다꼬? 내야 좋지. 하모. 그래. 마, 니 좋아하는 거 잘 묵는 거 준비해둘게. 그냥 빈손으로 와라카이. 니 바쁜데 고만 끊자. 아가 바꿔주꾸마.”

“응! 응! 자기. 이따 봐.”


폰은 다시 안나에게 넘어왔고 곧 통화는 끝났다.

한동배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바쁜데 머하러 올라카노.”

“할아버지랑 어머니, 아버지 모시고 식사하려고요.”

“우리 지찬이 억쑤로 바쁠 텐데 진짜 괘안나?”

“에이! 가족이랑 밥 먹을 시간은 있어요.”

“거 대중없는 쌍것들은 사소한 거 갖고 지랄한다 아이가. 조심해야제.”

“지찬 씨한테 지랄하면 아마 싸대기를 날릴 걸요?”

“하하. 맞다. 지랄하면 싸대기도 날리고 그래야지. 사내새끼가 무슨 일을 하든 얕보이면 안 돼.”

“앗!”

“와그라노?”

“갈비찜 재운 걸 깜빡하고 안 가져왔어요. 죄송해요.”

“아따, 마! 큰일 난 줄 알았네.”

“빨리 다녀올게요.”

“뛰지 말고, 조심해라.”


안나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한동배의 표정은 조금씩 굳어졌다.


“김 집사야.”

“네. 어르신.”

“내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난다카.”

“...”

“방송쟁이놈들이 와 내 손주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고? 우리 지찬이가 머 피해준 거 있나?”

“있을 리가 없죠. 어르신.”

“그르치? 근데 와 지랄이고. 강지찬이가 이 한동배, 내 손주인 걸 모르는 놈이 있나?”

“...알 겁니다.”

“내가 요새 조용하긴 했제?”

“...”

“내 수첩 가져오그라.”


휠체어를 밀어 고풍스런 책상 앞에 멈추고 돋보기안경을 꺼내 낡은 수첩을 들여다봤다.


“이거 이놈! 이놈들. 이거 방송쟁이놈들이제?”

“네. 어르신. 맞습니다.”

“싹 다 전화 돌리라. 거 있잖아. 그거... 여러 명이 받는 거.”

“전화회의 말씀입니까?”

“그래. 그걸로 하자.”

“준비하겠습니다.”


오래지 않아 한동배 앞에 유선전화기가 놓였다.


“다 모였습니다. 어르신.”

“하믄 되나?”

“네.”


한동배는 수화기를 들었다.


“밥 무읏나?”

“그럼요. 어르신도 진지 맛있게 드셨습니까.”

“무야지. 인제.”

“맛있게 드십시오. 어르신.”


수화기 너머에서 각자의 대답이 흘러넘쳤다.


“근데 뜨신 밥 묵고 와그라노? 응? 말 좀 해봐라.”

“네?”

“내 손주한테 와그라노?”

“...”

“강지찬이가, 테레비에 나오는 그 강지찬이가 이 한동배 생때같은 새끼인 거 모르는 놈 있나? 읎제? 근데 와그라노? 와 아를 못살게 구노. 느그들... 느그들 아부지랑 할아버지 다 내가 먹여 살렸다. 여기 내 돈 안 먹은 놈 있나? 읎제? 하나도 읎제? 느그들 민주화 운동한다고 잡혀갔을 때 옥바라지 한 거 누고? 느그들 가족 쫄쫄 굶는 거 쌀이며 김치며 보낸 사람이 누고?”

“...”

“내다. 내. 내가 느그 자식 공부시키고 효도하라고 매번 챙겨줬자. 다 잊어뿟나? 가족들 내팽개치고 무신 운동한다꼬 그 지랄, 지랄을 내가 다 받아줬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쳐? 으응? 느그들이 사람새끼가? 사람새끼냐고!”


한동배는 쾅!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내사마 느그들한테 뭘 달라칸 적 있나? 읎제? 돈 줄 때 내 머라캤나? 나중에 이자 쳐서 갚으라캤나? 아니제.”

“...”

“의리, 의리만 지키라고 했제? 근데 이게 의리를 지키는 기가? 지금.”

“죄송합니다. 어르신. 저희가.”

“시끄랍다! 다물라.”

“...”

“내 아직 안 주긋다. 이 한동배 아직 안 죽었어. 그러니 내 말 똑똑히 들으라.”


한동배는 무슨 대단한 기업을 일군 경영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대한민국 근현대를 살아오며 돈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은 타고난 승부사였고 단순히 돈놀이로만 재산을 불렸다면 그저 그런 졸부로 남았을 것이다.

한동배는 사람에게 투자할 줄 알았다.

어떻게 보면 독재자와 민주투사, 둘 사이를 교묘히 오간 박쥐로 폄훼할 수도 있지만 기성세대 권력집단 누구도 그를 함부로 무시하지 못했다.


“내 살날 을마 안 남았다. 알아. 니도 알고 내도 알아. 근데 느그들 자꾸 이런 식으로 뻗대면 내 절대 혼자 안 간다. 청묵이랑 로타리, 어... 거 뭐꼬? 쌔 무신 재단인가 있잖아?”

“신아메리카재단입니다. 어르신.”

“그래. 쌔미주, 쌔미주재단 늙다리들한테 내 말 똑똑히 전해라카이. 내 새끼, 이 한동배 생때같은 손주 함부로 건들면 내 죽을 때 니들이랑 나랑 다 같이 가는 기다. 내 뒤질 때 느그도 다 뒤지는 기라. 와? 몬할 거 같나? 그람 함 나불대봐라.”

“어르신 저희가 잘못.”

“마! 더 들을 말 읎다. 끊으라.”


한동배는 약사발에 가득 담긴 한약을 단숨에 들이키곤 사탕 한 알을 입에 물었다.


“크으, 둘 다 달구마.”


손자며느리의 정성이 담긴 한약이라 그런지 진짜 달게 느껴졌다.


“제가 올릴 땐 싫어하시더니...”

“나이가 몇 갠데 삐지고 그라노. 알았다. 앞으로 잘 무을게.”

“약속하셨습니다.”

“참, 인주댁한테 말했나? 손주 온다꼬?”

“네. 준비 중입니다.”

“젊은 놈 등치가 있으니까 넉넉히 준비하라고 해.”

“인주댁 손 큰 거 아시지 않습니까. 어르신.”

“글치? 여편네가 손이 참 커. 아, 그 자산운용팀인가 연락해서 내 가진 주식 좀 보기 좋게 정리해 올리라.”

“채찍을 휘두르시려고요?”

“사람 말을 몬 알아들으면 몽둥이를 들어야지 안카나.”

“준비하겠습니다.”


서재를 나가려던 집사에게 다가와 속삭이는 고용인이 있다.


“지찬 군이 지금 도착했답니다.”

“왔구먼! 그럼 일나야지! 빨리 내려가자카이!”


한동배는 생일선물 받은 아이처럼 좋아했다.

******




한동배 효과는 금방 드러났다.

검찰과 강지찬에 비판적이던 반골 성향의 언론과 기회를 보며 물타기만 하던 일부 인터넷 기고문 기조가 몽땅 바뀌었다. 천지개벽할 수준의 태세변환이다.


-그 양반이 이 정도로 힘 있었나?

-한동배가 묻어둔 각 신문사와 방송국 주식만 7조 원이 넘어. 빼앗거나 망하겐 못해도 팔다리 하나쯤은 끊어버릴 수 있거든.

-놀랍네.


한지숙과 한동배, 애증어린 부녀는 극적으로 화해했다. 안나의 중재와 강지찬이 처한 현재 상황이 결정적이었다.

‘마! 니들은 부모가 돼서 왜 자식새끼 하나 못 지키노!’

장인에게 힐책을 들은 강대성은 그날 밤잠을 설쳤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밥상머리에서 선전포고했다.


“지금부터 우리 둘째의 적은 우리 가족의 적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다 조져버려.”


대성이 본격적으로 여론을 움직이기 시작할 때 강지찬은 법무부 장관과 독대했다.

한중겸

한때는 대통령선거 후보로 거론됐던 국회의원.


-이 사람은... 세이브 포인트가 있어.

-세이브? 필수인원은 정리됐잖아?

-비필수긴 한데... 애매하네.


전前시나리오부터 한중겸의 포지션은 애매해졌다. 대통령이 됐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자 마치 흑화?한 것처럼 음모를 꾸몄다. 히로인 후보에서 탈락한 한채원도 마찬가지.


-재활용할 생각이야?

-복수자의 추진력은 굉장하니까.


한중겸은 현 대통령을 엿 먹이고 싶었다.


-한채원은... 목표를 잃었잖아?


성조 부회장은 3년 전 죽었고 검사가 된 그녀의 목표는 한순간 사라졌다.


-정의병 말기환자에겐 다른 목표를 주면 돼.


그러고 보니 법무부 장관과 완벽한 독대는 아니었다.


“반갑네. 강지찬 검사. 이쪽은 한채원 검사... 내 딸이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면 굳이 부연은 않겠네. 자, 오늘 자넬 부른 이유는.”


오! 바로 본론인가.


“특검을 도입할 걸세.”

“성매매 게이트 말씀입니까?”

“아니, 그건 총장이 지휘하는 수사본부가 처리할 일이지. 우린 다른 특검이네. 아, 어쩌면 연관 있을 수도 있겠지.”


한중겸이 내민 파일을 펼치다 속으로 흠칫했다.


-이게... 이렇게 되나?

-언젠가는 부딪칠 수밖에 없긴 했어.


이상택, 악당을 자처한 비틀린 애국자.

그는 암흑가를 통제해야만 조국이 안전해진다고 믿었다. 범죄세계로 흘러드는 쓰레기를 최소한으로 분리수거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이 찾아오리라 망상했다.


“우린 그를 잡을 거야.”

“무슨 혐의로 말입니까?”


이상택은 직접 손쓴 적이 없었다.


“범죄의사가 증명되지 않으면 범죄단체조직죄론 처벌 못 합니다. 혹시 내부자나 증인이 있습니까?”

“아직은 없어.”

“설마... 제가 내부자가 되라는 겁니까?”

“친분이 있잖나.”


친분? 당연히 있다. 애초에 먼저 접근한 쪽은 이상택이었으니까. 이후 그의 아들 이종천과 작은 인연을 이어갔다.


“왜 이상택 회장이죠? 경호회사를 가장한 깡패를 굴리는 건 다른 재벌도 똑같은데.”

“맞아. 대성에도 있지?”

“있죠.”


강지찬은 쿨하게 인정했다.

대성 올드가드는 솔직히 사설용병이나 다름없다. 활빈당 호텔테러 이후 재벌은 사병을 절실히 원했고 깡패전성시대가 찾아왔다. 길거리든 케이지든 주먹 좀 쓰는 놈들은 재벌에서 싹 쓸어갔다.


“우린 활빈당 테러 배후에 이상택이 있다고 믿네.”

“잠깐만요. 근데... 이 특검이 근거가 있는 겁니까?”

“있지.”


대한민국 특별검사제도는 국회의 제청이 필요했다.

국회가 대체 왜?


-맞불작전이야.

-맞불?

-강규현 검찰총장이 망나니 칼춤을 추려고 하니 국회도 가만히 앉아 당하진 않겠다는 의지지.

-근데 그 맞불이 왜 이상택을 겨냥하는데?

-테러방지법 때문이거든.


이상택이 밀고 있는 테러방지법 4차 개정안의 골자는 통신비밀보호에 대한 새 해석과 주석이다.

‘국가위기상황에 통신비밀보호는 느슨히 적용될 수 있다!’

한마디로 도·감청을 적극 활용하자는 것이고 수사기관에 면죄부를 주겠단 뜻이다. 수사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고위공직자나 국회의원에겐 간담이 서늘해질 일이다.


-한중겸이 가담한 이유는?

-활빈당 테러는 아직도 수사 중이거든. 만약 배후를 밝힌다면 법무부 장관의 커다란 치적이 되겠지.

-대권의 꿈을 접지 않았구나?

-맞아.

-한채원의 동기는?

-이상택은 성조와 밀접한 연관이 있으니까.

-죽은 사람을 여전히 뒤쫓는 건가.

-미련이자 집착이지.


어쩌면 상대를 미워한 만큼 사랑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난 뭔데?

-당신은 협상 대가야.

-협상?

-이 특검은 비밀리에 진행될 거야. 아마 총장과 장관, 국회와 청와대 그리고 당신 부모가 참여한 협상이지.


각자 욕망하는 것은 다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모두 당신을 욕망해.


누구는 고기방패, 누구는 출세 도구, 누구는 얼굴마담, 누구는 내가 무탈하기 바랐다. 다들 원하는 것은 다르지만 결국은 내가 필요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당신은 수사본부의 마스코트야. 그리고 누구도 마스코트가 열심히 일하길 바라진 않아. 그냥 열심인 척 보여주길 원하는 거지.


검찰총장이 지휘하는 수사본부의 실무는 부장검사급 이상이 다루었다. 강지찬은 그저 카메라 앞에 내세울 광대다. 처음엔 어땠을지 몰라도 현재 그는 피의자를 신문하지도 새 용의자를 찾는데 손을 보태지도 않았다.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이다.

‘널 띄워주겠지만 그걸로 만족해라.’

누가 말은 안 해도 딱 이런 분위기다.


-노인네가 질러놔서 국회와 언론은 더는 당신을 까지 않아. 완전히 안 까는 건 아니지만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줄어들었지. 청와대는... 그냥 시간이 지나가길 바라는 중이고.


정부는 항상 평지풍파 없는 조용한 정국을 원했다.


-우리가 취할 스탠스는 하나야. 주고받아야지.

-뭘 줘야 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사진도 찍고 인터뷰 좀 하고 밀정 짓도 하고, 많아.

-받아야 하는 건?

-자유.

-자유?

-자질구레한 업무에서 해방되는 거야.


다시 말하지만 검사는 볕을 보는 직업이 아니다. 종일 서류에 파묻혀 조서를 읽고 또 읽고 계속 읽는다. 연차가 좀 쌓여야 드라마 속 검사처럼 뇌물 받고 모략할 여유가 생기지 평검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볼 시간도 없다.


“하죠. 단! 조건이 있습니다.”

“뭔가?”

“아무것도 시키지 마십시오.”

“응?”

“보고 들은 걸 알려는 드리겠지만 제게 뭘 지시하진 마십시오.”

“...”

“강 검!”


조용히 있던 한채원이 발끈했다.


“좋네. 그러지.”

“아버지!”

“공적인 자리야. 한 검사. 호칭에 주의하게.”

“죄송합니다. 장관님. 하지만!”

“아아. 나중에 얘기하지.”


한중겸은 딸에게 손을 저으며 강지찬을 바라봤다.


“이 수사는 극비일세. 자네랑 나, 여기 한 검사만 알도록.”

“알겠습니다.”

“다른 질문은?”

“실무책임자는 한 선배일 테니 나중에 듣겠습니다.”

“좋아. 끝?”

“감사합니다.”


강지찬과 한중겸은 악수로 헤어졌다.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부녀는 서로를 향해 이상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이 아니에요. 보통이.”

“영상 못 봤어? 외압 좀 받았다고 기자들 앞에서 실명을 까발린 녀석이야. 머리도 비상하고 제 배경을 이용할 줄도 알아. 거기다 싸움도 잘해. 검사가 아니라 요원이 됐어도 좋았을 친구야.”

“평가가 후하시네요. 아버지.”


한중겸은 강지찬을 높게 평가했다.


“보고서는 너도 봤잖아? 딸아.”

“모스크바 세일.”


잃어버린 대성의 왕자가 돌아오자 많은 사람이 강지찬을 알고 싶어 했다. 특히 약혼자로 알려진 안나 강, 아니 안나 로스토바 킴의 이력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 붉은 대공이 강지찬을 인정한 이유가 있을 거야.”

“하지만, 그의 삶은 평범해요.”

“평범하다라...”


한중겸은 고개를 흔들었다.


“죽은 오 부회장도 여느 재벌의 평범한 후계자지. 겉으론 말이다.”

“...”

“누구에게나 감춰진 비밀이 있어.”

“강지찬을 그 괴물과 비교하는 건가요?”

“괴물? 글쎄. 그가 진짜 괴물이라면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진 않았겠지. 결국 그도 평범한 사람이었어. 우리 같은.”


한채원은 속으로 침음했다.


‘아버지는... 변했어.’


한중겸은 변했다.

부친이 한 짓을 들었을 땐 심한 배신감을 느꼈지만 그게 딸을 지키려는 최선이었단 진실을 알았을 땐 부끄러웠다.

나 혼자만 고결한가?

절대악으로 믿었던 그의 죽음 이후 한채원은 방황했다.


“이상택 회장은... 사적으론 훌륭한 인물이라고 평가해. 그는 자주국방과 상대적으로 낙후된 군인 처우 개선을 위해 한평생 헌신한 애국자가 맞아. 하지만.”

“군인의 사고방식으로 사회를 바라보죠.”

“사회는 군대가 아니야.”


하나의 목표를 위해 철저한 상명하복을 따르는 군대와 온갖 욕망이 소용돌이치는 사회는 같을 수가 없다.


“올지 안 올지 확실치 않은 미래를 대비한다고 선악의 완벽한 통제를 바라는 그의 신념은... 너무 위험한 발상이지.”


한중겸은 이상택의 인품을 높게 평가했다. 경영자로서 사회사업가로서 그는 많은 시민의 귀감이 되었으니까. 그러나 한편으론 이상을 꿈꾸는 이상은 혁명을 뛰어넘은 독재자의 발상이다.


“강지찬이 해낼 수 있을까요?”

“발각될 확률이 높아.”

“그럼 실패잖아요?”

“그래도 죽진 않겠지.”


한중겸의 달라진 점이 바로 이것이다.

한채원이 알던 부친은 순수한 선은 아니었을지라도 남의 목숨에 무감정한 악도 아니었다. 그런데 다시 만난 그는 어째선지 감정이 거세된 기계처럼 냉혹해졌다.

정적과 타협하고 그 바짓가랑이 사이를 기는 굴욕을 감내하는 모습조차 그녀에겐 낯설다.


“내가 변했다고 생각하니?”


아버지는 딸의 생각을 간파했다.


“그럴지도. 아니, 니가 그렇게 봤다면 그게 옳겠지.”

“...”

“각자의 정의가 부딪쳐도 치열한 경쟁과 토론을 통해 더 나은 합의로 나아가리라 생각했지. 정치란 그런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어. 하지만, 내 믿음은 순진했던 거야.”


한중겸은 메마른 미소를 지었다.


“널 지키기 위해 내 모든 걸 내던졌어. 더러운 합의를 했지. 근데 과연 그것이 널 위한 거였을까? 아니야. 그건 그냥 핑계에 불과했어.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 나 역시도 다른 더러운 정치인과 다를 바 없다는 걸.”


단지 인정하기 싫었던 것뿐이다.


“채원아. 난... 니가 이 아비를 닮지 않길 바랐어. 너만은 당당한 삶을 살길 바랐지. 그래서 네게 끊임없이 정의를 세뇌했던 거야. 스스로는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남발하며 가식을 떨었지.”


두껍게 감쌌던 위선의 겉옷이 발가벗겨졌을 때 꼭꼭 감췄던 추악한 진심이 드러났다. 딸은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매일 거울 앞에서 과거 훌륭한 정치가의 연설을 연습했어. 웅변을 따라하고 몸짓을 연기했지. 내 말 한마디와 손짓에 환호하는 대중의 모습에 섹스보다 더 큰 쾌락을 느꼈어.”


그리고 그 쾌락을 빼앗아간 적을 증오했다.


“지금도 이 아비는 널 이용하고 있단다. 그리고 강지찬... 미래가 창창한 젊은 친구를 이용하려고 하지. 왜? 복수하려고.”

“...”

“따지고 보면 이상택과 난 다르지 않아. 둘 다 뭔가에 미쳐있어. 어쩌면 악을 통제하겠단 그의 신념이 우리네 평범한 이웃들에겐 정치인의 어떤 공약보다 더 좋을지도 몰라.”


훗날 역사는 도리어 한중겸을 악으로 볼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둬.”

“제가 아빠 말을 들어먹을 거 같아요?”

“그래. 넌 그런 아이지.”


자기만의 확고한 신념을 갖도록 키웠다.


‘조국과 딸을 사랑한다.’


한중겸은 여전히 대한민국과 한채원을 사랑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보다 더 우선순위가 있다.

그날의 그 지옥 같은 모욕을 잊을 수 없다. 상대가 밀면 밀리고 당기면 당겨지는, 바람 앞 풍선인형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던 그 굴욕을.


‘복수.’


복수가 날 살아가게 한다.

******




강규현 검찰총장과 한중겸 법무부 장관은 거래했다.

강지찬을 서로의 입맛대로 나눠 먹기로.

검사를 지휘하는 건 검찰총장의 권한이지만 그 총장을 오라 가라 할 수 있는 것이 법무부 장관의 힘이다. 총장과 장관, 누가 더 힘이 세냐는 결론은 주어진 상황과 때에 따라 다르다.

누가 총장이냐 누가 장관이냐에 따라 힘의 우위가 달라진다는 뜻이다.

강규현VS한중겸

몇 년 전에 성사됐다면 한중겸의 절대우세겠지만 지금은 강규현의 판정승이었다. 여야를 떠나 대승적인 차원에서 임명된 현 법무부 장관의 입지는 그리 크지 않았으니까.

대통령의 정적이었던 과거가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한중겸이 마냥 손 놓고 있진 않았다.

한동배와 강대성VS국회와 일부 언론

부딪칠 수밖에 없는 두 집단 사이를 중재함으로써 최소한의 목적은 달성했다. 이 물고 물리는 관계 속에서 강지찬이 얻은 건 뭘까?

자유!

총장 직속이자 장관 직속(아직 비밀이다)이란 희한한 타이틀을 얻음으로써 일반 업무에서 해방됐다. 검찰 지휘부는 강지찬이 더는 사고치지 않길 바랐기에 그의 업무배제를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그렇다고 소일거리를 막진 않았는데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는 사건만 아니면 된다.

강지찬은 오늘 외근을 핑계로 김종현들과 만났다.


“어때?”

“어수선합니다.”


종로에서 적발한 미성년자 성매매조직은 사실 정씨형제들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그들이 암흑가를 주름잡는 보스도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모든 범죄와 관계됐을 리 없으니까.


“조만간 미성년자 관련 직종들 실태조사가 시작될 거야.”

“대가리 깨질 기획사 많겠네요.”


미성년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직종이 바로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다.

운동선수와 아이돌.

재능과 노력이 모두 요구되는 세계에서 어린 나이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쟁력이다. 그만큼 기대도 높고 부정부패도 만연했다.


“바빌론 클럽 절반이 당분간 영업을 쉬기로 결정했답니다.”

“사리는구먼.”

“바빌론 엔터도 연습생 트레이드를 중지했습니다.”


정씨형제들의 대응은 제법 기민했다.

그들이 성매매를 종용하는 건 아니지만 조건만남 자체가 남이 보기엔 성매수와 다를 바 없었다. 그렇다고 수수료를 받지 않으니 당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잘생기고 예쁜 남녀를 소개시켜주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그 과정에 강제력은 없었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

벌떼처럼 일어난 죽창부대를 보곤 앗 뜨거! 급히 간판을 내린 판단은 나쁘지 않았다.


“중국은?”

“그쪽은 오히려 수요가 늘어난 듯 보입니다.”


글로벌시대다.

대한민국에서 장사하기 힘들면 가까운 이웃나라로 넘어가면 그만이다. 유흥이 무슨 제조업도 아니고 사람만 옮기면 그곳이 곧 새 장사판이다. 한국에서 만남이 힘들면 외국에서 만나면 된다.


-도쿄야.

-중국 땅이 아니라?

-중국에서 약 빨면 외국인도 사형이니까.


그래서 선택한 곳이 일본. 한국에서 벌어진 난리 때문에 늘어난 중국의 수요가 일본으로 가다니 한·중·일 3국 관계를 고려하면 지독한 아이러니다.


-언제 터트릴까?

-더 무르익어야 돼. 부총리 임팩트가 워낙 커 묻힐 수도 있거든.


매국노가 된 교육부 장관이자 부총리는 자살을 시도해 병원에 있다. 리스크를 짊어진 집권여당의 한 의원이 차라리 죽지 왜 살았냐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내뱉었다 여론의 뭇매를 맞고 징계를 먹었다.


-장작을 더 집어넣어야 해. 사리는 걸로 해결할 수 없을 만큼 궁지로 몰아야 해.

-방법은?

-그것들의 역린을 자극하면 돼.

-역린?

-성조.


정씨형제들의 움직임은 그녀의 예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부회장의 망령이 부활할 때야.


그날 증권가를 중심으로 이상한 루머가 돌기 시작했다. 들은 사람은 하나같이 헛소리로 치부했지만 어째선지 하루가 지나고 사흘이 지나고 일주일, 한 달이 지나도 루머는 잠잠해지기는커녕 더더욱 기승을 부렸다.

결국 메이저 언론도 언급하기에 이르렀다.

【성조그룹 오지오 부회장은 살아있다!】

예수는 3일, 부회장은 3년 만에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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