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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스릴러! 서스펜스! 망가! 그리고 고양이!

지오 디 오리진

웹소설 > 작가연재 > 퓨전

강철신검
작품등록일 :
2020.12.18 21:47
최근연재일 :
2023.04.25 21:13
연재수 :
8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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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4,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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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839,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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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3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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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글자
22쪽

지오 디 오리진 -22화-

DUMMY

“김지민은 확인했습니다. 스타일리스트 쪽에서도 안 좋은 얘기가 나오더군요.”

“확실해?”

“전문가에게 확인을.”

“전문가는 무슨!”


연예정보지 3강 중 하나인 주간 먼데이는 근래 소스 하나를 물었다. 수많은 연예계 관계자가 허세를 담아 떠드는 술자리 무용담을 하나씩 걸러내다 운 좋으면 소스 한두 개를 얻을 수 있다.

주간 먼데이가 얻은 소스는 하나다.

『박재우는 살인자다.』

대통령 유고로 단시간에 묻혀버린 박재우 사망 이슈.

그러나 정신병자에게 살해당한 톱스타를 향한 관심이 완전히 사그들진 않았다. 조각조각 찢겨 수면 아래를 헤매는 루머인지 정보인지 알 수 없는 파편을 하나둘 모으다 어떤 가정에 이르렀다. 문제는 그 가정이 과대포장과 말장난으로 먹고사는 그들조차 헛웃음 나오게 했단 사실이다.


‘박재우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많긴 했어.’


톱스타 대부분이 그렇듯 방송에서 보이는 이미지와 실제 성격이 달랐다. 뭐 똑같은 연예인도 있겠지만 편집장이 아는 톱스타 가운데 초심을 유지하는 이는 한 손에 꼽을 정도다.

적반하장, 안하무인은 예삿일이고 세상이 자길 중심으로 돌다 못해 신이라고 믿는 미친 인간이 수두룩했다. 팬으로 둔갑한 추종자들, 톱스타와 사이비 교주는 통하는 부분이 많다.

인간적인 매력은 차치하고 성공한 연예인은 화술에 능했다. 어눌하고 내성적인 신비주의 예술가를 콘셉트로 내미는 스타도 적지 않지만 대중과 카메라 앞에 서는 일과 부끄러움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박재우를 살해하고 자수한 범인은 미국 국적잡니다. 나이도 적지 않은 중년 사내가 떠나온 고국으로 돌아와 살인한다?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정신이상자의 소행치고는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한 정황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발적이 아닌 철저한 계획범죄라는 방증이죠. 분명 내막이 있어요. 박재우를 죽여야만 했던 이유가...”

“경찰은 뭐래?”

“빨리 검찰로 송치하라는 압력을 받았답니다.”

“미국인이니 경찰이 단독으로 수사하기는 어려웠겠지.”

“아니요. 청와대와 검찰, 외교부를 통한 미국의 외압은 없었답니다.”

“그럼 왜?”

“경찰 윗선에서 알아서 기었는지도 모르죠. 그보다 성조그룹의 대응이 더 이상합니다.”

“그러고 보니 박재우가 성조 장학생이었군.”

“박재우는 성조의 얼굴이었습니다. 브랜드 대표 대우를 받았죠. 한 해 지급하는 광고 출연료만 100억이 넘을 겁니다.”

“성조의 차기 얼굴은 누군데?”

“내부적으로 윤소희와 김세라 둘 중 하나를 저울질 중인 것으로 압니다.”

“윤소희와 김세라라... 윤소희랑 성조 장손이랑 소문이 있지 않아?”

“확인하진 못했습니다.”

“확인하지 마.”

“일짱! 하지만!”

“하지만이고 저지만이고, 재벌은 안 돼. 보통 재벌도 아니고 성조라니? 휘유! 난 벽에 똥칠할 때까지 오래오래 살고 싶다.”


편집장은 고개를 저었다.


“주요일간지와 방송국이 왜 입 다물고 있을까? 너보다 정보력이 후달려서? 아니야.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거라고. 왜? 재벌 건드려서 좋은 꼴 본 기자를 못 봤거든.”

“성조에서 박재우를 정리했을까요?”

“무슨 뜻이야? 하, 설마 청부살인 같은 얘길 하려는 건 아니지?”

“박재우는 행실이 영 별로였습니다. 하지만, 스타성이 있었죠. 성조는 어쩌면 정리할 때를 기다렸을지도 모릅니다. 살인은 계획에 없을지라도 이후 대응은 분명 꼬리 자르기입니다.”

“그게 뭐? 기업에 죽은 놈과 의리를 지키라고 강요할 순 없잖아? 성조가 박재우를 죽였다는 증거가 없는 이상 네 주장은 헛소리야. 솔직히 말해줄까? 우리는 연예계 가십을 다루는 주간지일 뿐 사회정의 따윈 관심도 없다고. 그럴 거면 정치부든 사회부든 일간지로 가지 왜 주간지 연예부로 왔어?”


편집장은 후배를 살살 달랬다.


“재벌 루머는 잃을 게 없는 삼류 인터넷 언론도 안 다뤄. 스모킹 건이 있어도 묻어버릴 판인데 소문만으로 재벌 뒤를 캔다?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김일훈은 옥상으로 올라와 담배를 꺼내 물었다. 건물관리인은 옥상을 드나드는 것을 싫어했는데 남 눈치 안 보고 흡연할 수 있는 곳은 옥상밖에 없었다.


“후우.”


그래! 바로 이 맛이지! 전자담배로 바꾸라는 마누라의 성화에도 꿋꿋이 버텼다.


“왜요? 또 깨졌어요? 김 선배.”

“어디 하루 이틀이냐.”


후배 장진운은 김일훈을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일짱 성격 알면서 왜 계속 들이대요. 일짱이 아무리 선배를 귀여워해도 밥그릇 걷어차려고 덤비면 얄짤 없습니다.”

“나 놀려?”

“워워! 진정하시고. 그래서 또 뭡니까?”

“박재우.”

“아.”

“넌 어떻게 생각해?”

“제 생각이 중요할까요.”

“말해봐.”

“요즘 다찌 하는 애들이 거의 안 보여요.”

“하나도?”

“명동 최치수도 잠수 탔다는 소문이 있어요.”

“이태원은?”

“그쪽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야, 진짜 몰라?”

“모른다니까요.”

“진짜?”


김일훈의 거듭되는 추궁에 장진운은 주변을 둘러보다 속삭였다.


“음. 비밀인데... 요즘 모찌랑 다찌 전부 누군가를 찾고 있다는 얘기가 있어요.”

“전국에 흥신소가 몇 갠데 전부는 과장된 거 아니야?”

“최치수 그 양반이 어떤 양반인데요. 서슬 시퍼런 5공 때도 명동에서 떵떵거리던 양반이 잠수를 탄 겁니다.”

“누굴 찾는데?”

“펀드매니저라는데 정확히는 몰라요.”

“펀드매니저?”

“네. 국부펀드 출신이라는데 확인된 정보는 아니고, 경일금융 아래 있는 정산보합이란 일본계 펀드를 굴리던 매니저라네요.”

“겨우 한 사람을 찾는데 전국의 흥신소가 들썩거린다고?”


장진운은 다시 속삭였다.


“현상금이 50억이랍니다.”

“휘유! 나도 기자 때려치우고 모찌나 뛸까.”


정보원, 조사원, 파파라치, 현상금 사냥꾼 등등 뭐로 불리던 밑바닥 인생들은 일확천금을 꿈꿨다.


“잠시만요.”


장진운은 폰을 들고 한 걸음 물러났다.


“응, 응. 어? 어. 정말? 진짜 확실한 거야? 어. 음. 상품권으로 준비해둘 테니까 찾아가. 어. 땡큐.”


통화를 끝낸 장진운은 다시 김일훈에게 속삭였다.


“선배.”

“왜?”

“우리 특종 한번 잡아볼까요?”

******




“안식년을 갖기로 했어.”

“안식년?”

“응, 당분간 스튜디오 경영과 작업 일선에서 물러날 생각이야.”

“농담이 아니었구나.”


비슷한 말을 지나가면서 한 적이 있었다. 분위기에 취한 말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보다. 강선아는 당분간 스튜디오 경영과 작업에서 손 떼기로 경영진과 합의했다.


“미안.”

“뭐가?”

“미리 상의하지 않아서.”


지오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이 뭘 하든 응원해. 그래서 앞으로 뭘 하려고?”

“전원생활을 좀 즐길까?”

“적응할 수 있겠어?”

“요리 빼고 다 잘해.”

“하하.”


강선아는 요리를 못 하는 것이 아니라 한식을 못 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에서 아메리카노는 빼고 남은 얼음을 빨대로 휘적거리던 그녀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다음 주 토요일 괜찮아?”

“어머님?”

“응.”

“난 좋아. 준비됐어.”


강선아의 모친을 만나려고 꽤 많은 준비를 했다.

피부과에 치과에 안현진의 소개로 찾아간 샵에서 화장과 헤어, 코디를 비롯해 연예인식 스타일링을 조언받았다. 물론 비용은 PnC에서 치렀는데 안현진 나름의 은혜 갚음이었다.

누구든 꾸미면 볼만하다.


“엄마 집에서 보기로 했어.”

“어디 사시는데?”

“성남 판교 쪽이야.”


알면서 묻는 것도 고역이다.


“엄마 질문이 좀 짓궂을 수도 있어. 사귀는 사람을 소개하는 건 처음이거든.”


마지막 말에 강선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거침없는 카리스마를 내뿜던 그녀는 의외로 약한 부분이 많았다. 상여자의 쿨한 연애를 할 것 같은데 까고 보니 맹순이다.

약속의 날이 왔다.

지오는 오늘을 위해 자차를 뽑았다. 보통은 출고 날짜를 기다려야 하는데 이택기의 도움을 받았다. 자가는 없어도 자차는 있어야 면이 선다는 연애선배들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마이너스 1억 3천만 원입니다. J.

-차 사면 세금 덜 낸다며?

-맞습니다만...

-카푸어만 안 되면 돼.


내 여자를 쪽팔리게 만들지 않으려면 포르쉐 정도는 굴려줘야지 않겠나. 아르마니 정장과 넥타이핀, 구두, 시계에도 한 3천만 원은 박은 것 같다.


-마이너스 총액은 대략 1억 6천만 원입니다. 한 달 사이에 쓴 금액입니다. 분수에 맞게 살아야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인데... 쉽지 않아.


그렇다고 강선아가 허영에 가득한 여자는 아니었다. 시대가 원하는 성공한 남자의 모습이 그렇단 말이다. 청바지에 흰 티만 입고 나왔어도 별말 안 했겠지만 그녀의 미소를 보건대 지오의 선택이 옳았다.


“차 뽑았어?”

“어제 받았어.”

“포르쉐 비싸잖아?”

“그 정도 능력은 있어요. 아가씨. 얼른 타세요.”


능숙한 운전에 눈이 더 초롱초롱해졌다.

꽃집에 들러 장미를 한아름 샀다. 오늘 준비한 선물은 빈티지 와인 한 병과 장미꽃 한아름이다. 강선아가 내비로 찍어준 곳은 판교는 판교인데 아파트단지가 아닌 단독주택단지였다.

야산을 낀 단독주택단지는 어째선지 모두 똑같이 생기진 않았다. 이걸 브랜드 단독주택이라 해야 하나? 정원이 있는 집, 서울은 아니어도 충분히 비싼 땅값을 자랑하는 부촌이다.


“어머! 어서 와요.”

“안녕하세요. 어머니.”


장미 꽃다발을 한아름 안기자 강선아의 모친 장미소 여사는 빙그레 웃었다. 강선아의 눈매가 누굴 닮았나 했더니 제 모친과 똑같다.


“들어와요.”

“실례하겠습니다.”


당연히 이 큰집에 여자 혼자 살지는 않았다. 집안일을 봐주는 아줌마 둘에 비서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 각 1명씩 총 4명이 있었다.

장미소는 딸이 데려온 남자를 빤히 쳐다봤다.

일단 외모는 마음에 들었다.


‘성조그룹에 다닌다고 했지.’


이혼을 경험한 장미소는 능력보단 인성을 중시했다. 돈이야 충분하니 학벌은 상관없다. 사위 삼는다면 내 딸을 얼마큼 사랑하는지만 중요했다. 더구나 다양한 외국어를 섭렵했다는 건 머리가 좋다는 방증이다.


‘고아라서 학업에만 집중할 수 없었을지도.’


불우한 환경에도 번듯하게 자랐다니 칭찬받아 마땅했다.

장미소는 지오와 대화하면 할수록 그의 뛰어난 식견에 감탄했다. 물론 G의 코칭을 받았다는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결혼을 전제로 사귄다는 말에 강선아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고는 속으로 혀를 찼다.


‘내숭쟁이 같으니.’


이제껏 단 한 번도 애인을 데려온 적 없는 딸이다.

지오를 본인에게 소개했다는 건 결혼할 마음이 있다는 뜻이다. 부친의 바람기를 보며 남자를 혐오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했는데 짚신도 제짝이 있듯 결국은 시간문제였나보다.


“안식년 동안 뭘 하려고?”

“지오 씨랑 여행 다니려고.”

“직장이 있는데 그래도 돼?”

“제 업무가 좀 특이합니다. 어머니. 꼭 출근할 필요는 없거든요. 아,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지오는 자연스레 화장실로 빠졌다. 둘만 남게 된 모녀는 참고 참은 진심이 오갔다.


“아주 영계를 잡아먹었네. 좋아?”

“남자든 여자든 젊은 게 최곤가 봐.”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하려고?”

“아직은... 연애를 더 하고 싶어.”

“내년이면 너도 서른여섯이니까 잡을 거면 빨리 잡아. 다 늙어서 애 낳으려면 힘들어. 노산은 산모도 아이도 위험해.”

“아 쫌!”

“잔말 말고 엄마 말 들어.”


의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노산은 위험했다.


“엄마는... 어때?”

“허우대도 멀쩡하니 괜찮네. 고졸로 성조에 들어간 건 인상적이고. 근데 성조 장손이랑은 어떻게 알아?”

“지오 씨한테 일을 맡기나 봐.”

“성조 장손이? 그러고 보니까 이름이 같구나?”

“응. 신기하지?”

“왕자와 거지인가...”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엄마.”

“그런 뜻이 아니잖니. 흠. 내 밑에서 일하라면 할까?”

“왜?”

“어차피 네가 물려받을 건데 사위라면 일을 배워야지.”

“절대 안 돼. 갑자기 왜 그러는데?”

“엄마도 이제 일 관두고 여행이나 다니려고.”

“그럼 병곤 아저씨한테 맡겨.”

“병곤이도 야, 손자 볼 나이다. 연후 장가가는 건 아냐?”


김연후는 김병곤의 장남이었다.


“어? 몰랐어.”

“쯧쯧! 니 애비나 너나 무정한 건 똑같아.”

“아 쫌!”


부친을 싫어하는 강선아에게 아버지 닮았다는 소리는 욕이나 똑같다. 지오가 돌아오자 언제 싸웠냐는 듯 사이좋은 모녀로 돌아갔다.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어머니.”

“자주 전화해요. 맛있는 거 사줄게요.”


식사와 다과를 대접받은 그는 예비 장모에게 배웅받으며 판교를 떠났다. 차를 몰아 서울로 올라가는 길, 강선아는 지오의 눈치를 봤다.


“어땠어? 우리 엄마.”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아름다우시네. 당신 미모가 누구에게서 왔는지 잘 알겠어.”


빈말이 아니라 장미소는 아주 곱게 늙었다. 돈 많고 아름다운 미망인? 홀아비들이 환장할 스펙이다. 젊은 제비가 꼬여도 이상하지 않은데 장미소에게는 애인이 없었다.


“인수인계하는데 사나흘쯤 걸릴 거야.”

“정말 손 떼려고?”

“응. 내 시간, 아니 우리 시간을 갖고 싶어.”

“나도 정리를 좀 해야겠네.”

“괜찮겠어?”

“그럼 괜찮지. 애초에 프리랜서로 계약했거든.”

“그래도...”

“걱정하지 마. 난 뭐 높이 올라가고픈 욕심은 없으니까.”

“야망이 없어?”

“어. 설마 야망 없는 남자는 싫어?”

“아니, 아니!”


강선아는 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가 만난 남자들은 하나같이 꿈을 이야기했었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연예인이나 연예계 종사자가 대부분인데 한 명도 다름없이 성공을 꿈꿨다. 사회적 명성을 얻고자 하는 이들 혹은 탐욕스럽게 돈을 탐하는 자들, 뒤처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하드 워커가 대다수.

그 남자들은 강선아에게 바라는 것이 많았다.

어떤 남자는 돈을 또 어떤 남자는 인맥을 바랐고 개중에 가장 최악은 그녀와 작업한 연예인의 약점을 원했다. 그 적나라하고 추악한 욕망에 질렸다.

그래서 지오의 느긋함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야망이 없다고 능력이 없는 건 아니니까.

서울로 올라와 데이트를 즐겼다.

멋지게 차려입은 남녀가 돌아다니면 자연히 시선이 몰릴 수밖에 없다. 아무리 남에게 관심 없는 세상이라도 예쁘고 잘난 사람은 눈에 띈다. 풀세팅이 된 지오는 여느 톱스타 못지않은 어그로를 끌었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저녁을 먹고 한강공원을 거닐었다.

어떻게 보면 정형화된 데이트코스인데 익숙한 것이 꼭 지루한 것은 아니었다. 항상 새롭고 자극적일 순 없었다. 강선아는 대화를 참 좋아했다. 별것 아닌 얘기를 끊임없이 쏟았지만 지겹거나 지루하단 느낌은 없다.


“소희가 요즘 힘든가 봐.”

“왜?”

“재벌이랑 꼭 만나야 할까 하는 의구심이 든대.”

“돈 때문에 만난다고 오해할까 무서워하는 거 아니야?”


가뜩이나 루머에 시달리는데 재벌을 만난다는 걸 대중이 알면 주인공보다 윤소희에게 타격이 컸다. 과연 온갖 음해와 방해를 이겨내고 사랑에 골인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자기는 상관없는데 소정이가 다칠까 걱정하는 거야.”

“과보호가 심하네.”


윤소정은 약하지 않았다. 언니의 석연찮은 죽음을 물고 늘어질 만큼 독할 뿐만 아니라 연예인으로서 누구보다 밝게 빛나는 별이 됐다.


“소정이란 애랑 친해?”

“스튜디오에 제 언니를 따라 자주 놀러 왔어. 소희를 닮아서 미인이거든. 그래서 모델을 권했는데 단호하게 거절하더라.”

“다부지네.”

“어린 게 늙은이처럼 굴어.”

“부모 울타리를 벗어나면 누구나 일찍 철이 들어. 말을 아끼고 신중해지지. 근데 그게 마냥 좋은 건 아니야.”


일찍 철든 만큼 잃어버리는 것도 있다.

10대는 10대처럼 보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이 옳다. 그 나이대에 어울리는 감성은 세월이 흐르면 흐려지고 사라진다.


“당신은 어떻게 하고 싶은데?”

“말리고 싶지. 그렇잖아? 아무리 뜨거운 사랑이라도 장애물이 너무 많아.”

“다 고려하고 만나는 거 아니었어?”

“소희가 똑똑하긴 하지만 남자 보는 눈은 없어.”


주인공이 들었으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심히 궁금했다.


“그 작자는 나쁜 남자가 아니라 위험한 남자라고.”

“인정.”

“만남을 계속하면 오키나와보다 위험한 일이 벌어질 거야.”

“그것도 인정.”

“그러니까 자기가 좀 말려 봐.”

“내가?”

“응.”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쳐다보면 거절하기 어렵다.


“알았어.”

“고마, 꺅!”


지오는 강선아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공짜는 안 돼.”

“그럼?”

“몸으로 갚아.”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며칠 후 지오는 윤소희를 찾았다.

연예인이 많이 산다는 고급빌라의 대리석을 밟으며 역시 돈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은 얼마든지 찍어낼 수 있습니다. J.

-그럴 거면 애초에 이 고생은 안 하지.


은행을 해킹할 필요도 없다. 그냥 주가를 조작해 한탕 하면 수백억 원을 챙길 수 있으니까. 아니면 미국으로 넘어가 파워볼 복권을 조작해도 된다.


“안녕하세요. 소희 씨.”

“고맙다는 인사를 이제야 하네요.”

“괜찮습니다.”

“지오, 음.”

“보스랑 이름이 똑같죠? 저도 신기합니다.”


오지오VS오지오, 이름 말고는 비슷한 부분이 없었다.


“오늘은 업무가 아니라 친구로서 온 겁니다.”

“친구요?”

“선아가 당신을 많이 걱정하거든요.”

“언니가... 뭐래요?”

“이 만남을 반대하죠. 저도 동의합니다.”


마지막 말에 윤소희는 놀란 듯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성조에 적을 둔 건 맞지만 제 영혼은 자유롭습니다. 보스가 대단하고 멋진 남자긴 해도 착하고 따뜻한 남자는 아니죠. 계속 만난다면 소희 씨는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합니다.”

“어떤?”

“연예계 은퇴는 확실하고 혼자만의 시간도 없을 겁니다.”

“혼자만의 시간은 지금도 없어요.”

“지금보다 더할 겁니다.”


재벌이 많은 것을 누리고 살지만 그만큼 스트레스도 엄청났다.


“로열패밀리가 되면 당신에게 뭔가를 바라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지금보다 더?”

“비교할 수 없죠.”


지금도 온갖 잡상인이 윤소희 곁을 알짱거리는데 그보다 더한 미래가 기다렸다. 친구를 사귀는 건 사치고 아름다웠던 옛 인연도 하나 남김없이 끊어내야 한다.


“그건... 지옥이네요.”

“평범한 사람은 알 수 없는 또 다른 세상이 있습니다.”


성공의 계단을 올라 도착한 곳이 천국이 아니란 진실을 납득할까? 소시민적인 재벌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소시민과 재벌은 완전 반대말이니까.


“제 걱정은... 동생이에요. 저는 상관없지만 소정이는 견디지 못할 거예요.”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무슨 뜻이죠?”

“당신은 윤소정 씨의 엄마가 아니에요. 윤소희 씨.”


부모를 여읜 자매가 서로를 아끼는 건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윤소희는 윤소정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었다. 아무리 아껴도 동생의 인생은 동생의 것이다.


“동생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사실은 무서운 거죠.”


지오의 말에 윤소희의 표정이 굳었다.


“당신은 바보가 아니에요. 재벌 애인을 사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애초에 윤소희는 히로인 후보도 아니었다.

지오가 설정한 히로인 후보 캐릭터는 하나같이 격정적인 스토리가 있었다. 윤소정의 경우는 언니의 죽음이다. 그런데 윤소희는 주인공과 얽힐 감정의 격류는 없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주인공을 사랑할 동기가 없는 것이다.


“솔직해집시다. 정태석 때문에 성조의 그늘이 필요하다고 느꼈겠죠. 아닙니까?”

“그렇다면요?”

“말했잖아요. 솔직해지라고.”


윤소희가 주인공에게 호감 있는 건 맞다. 그러나 사랑만 찾기엔 동생이란 마음의 짐이 너무 컸다. 이를테면 6대4나 7대3 정도일까.


“동생을 지키고 싶으면 보스에게 솔직하게 말하세요.”


내 조언이 주제 넘는다고 화내든 받아들이든 윤소희의 선택이다.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이택기의 전화를 받았다.


“윤소희 씨한테 무슨 얘길 한 겁니까?”

“뭐래?”

“동생을 미국 유학 보내겠답니다. 제가 제안했을 땐 눈도 깜빡 안 하더니... 아, 보스의 이부동생들도 같이 보내기로 합의했습니다.”


이건 예상 밖이다.

이러면 대영학원을 배경으로 진행됐을 스토리는 나가리다.

현상금에 혈안이 된 브라이스는 내가 흘린 정보를 바탕으로 조만간 펀드매니저를 잡아낼 것이다. 그리고 성조는 공안위원회의 협상대로 경일의 일본 내 사업을 사이좋게 뜯어먹겠지.

G가 일으킨 여론전은 이미 시작됐다.

실체가 없는 인터넷 언론과 댓글을 시작으로 성조를 견제하는 경일의 음모론이 제기된 상태다. 박재우의 죽음도 사실 재벌경쟁으로 촉발된 부수적인 피해라는 루머가 돌았다.

정태곤의 섹스파티와 정태석의 엽색행각.

정씨형제가 이제껏 저지른 밝혀지지 않은 범죄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경일이 아무리 용을 써도 G가 벌인 공작을 저지할 순 없었다. 하나를 지우면 두 개가 생기고 두 개를 지우면 네 개, 네 개를 지우면 여덟 개씩 늘어났다.


“안녕.”

“안녕하세요.”


윤소정은 긴장도 경계도 없는 얼굴로 지오를 맞이했다.


“날 보자고 했다고?”

“의뢰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의뢰? 나한테?”

“네. 당신이 최고라고 했어요.”

“누가?”

“현진 언니가요.”


안현진! 이 오타쿠녀! 비밀을 지키기는커녕 줄줄 불고 다녔다.


“거절하면 한국에 남을 생각이구나?”

“언니를 지켜야 하니까.”

“들어볼까?”

“여기.”


윤소정이 건넨 건 손때 묻은 다이어리다.


“이게 뭔데?”

“언니 주변을 맴도는 사람들이에요.”


이름 수십 개와 약력이 빼곡하게 적혔다.


“이들 중에 살인자가 있어요.”


윤소정은 진지한 표정이었다.


“우리 부모님을 죽인 살인자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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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 디 오리진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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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지오 디 오리진 -26화- +5 21.02.27 6,178 187 18쪽
25 지오 디 오리진 -25화- +11 21.02.27 6,323 204 17쪽
24 지오 디 오리진 -24화- +11 21.02.27 6,536 201 21쪽
23 지오 디 오리진 -23화- +16 21.02.03 7,118 242 21쪽
» 지오 디 오리진 -22화- +5 21.02.03 6,834 208 22쪽
21 지오 디 오리진 -21화- +9 21.02.03 6,875 210 17쪽
20 지오 디 오리진 -20화- +27 21.01.20 8,199 230 30쪽
19 지오 디 오리진 -19화- +32 21.01.14 8,203 250 38쪽
18 지오 디 오리진 -18화- +16 21.01.07 8,070 232 17쪽
17 지오 디 오리진 -17화- +18 21.01.03 8,300 236 21쪽
16 지오 디 오리진 -16화- +19 21.01.01 8,122 231 19쪽
15 지오 디 오리진 -15화- +15 20.12.30 8,198 245 20쪽
14 지오 디 오리진 -14화- +13 20.12.29 8,275 253 12쪽
13 지오 디 오리진 -13화- +22 20.12.27 8,612 247 20쪽
12 지오 디 오리진 -12화- +20 20.12.25 8,555 260 13쪽
11 지오 디 오리진 -11화- +18 20.12.25 8,565 252 11쪽
10 지오 디 오리진 -10화- +23 20.12.24 8,966 246 13쪽
9 지오 디 오리진 -9화- +13 20.12.23 9,178 239 14쪽
8 지오 디 오리진 -8화- +16 20.12.22 10,009 264 20쪽
7 지오 디 오리진 -7화- +19 20.12.21 10,823 248 25쪽
6 지오 디 오리진 -6화- +17 20.12.20 10,944 268 12쪽
5 지오 디 오리진 -5화- +10 20.12.20 11,572 267 13쪽
4 지오 디 오리진 -4화- +17 20.12.19 13,474 316 12쪽
3 지오 디 오리진 -3화- +49 20.12.18 18,754 355 36쪽
2 지오 디 오리진 -2화- +19 20.12.18 20,564 362 18쪽
1 지오 디 오리진 -1화- +41 20.12.18 33,723 419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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