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미스터리! 스릴러! 서스펜스! 망가! 그리고 고양이!

지오 디 오리진

웹소설 > 작가연재 > 퓨전

강철신검
작품등록일 :
2020.12.18 21:47
최근연재일 :
2023.04.25 21:13
연재수 :
86 회
조회수 :
563,338
추천수 :
18,148
글자수 :
839,717

작성
20.12.18 21:57
조회
18,717
추천
355
글자
36쪽

지오 디 오리진 -3화-

DUMMY

-Stop!


세상이 멈췄다.


-이거 이야기가 너무 진부하지 않아?

-그런 감이 있습니다. J.

-캐릭터 배경을 장황하게 늘어놔서 그런가? 매치엔진은?

-적합률 27.9%, 변곡률 11.4%

-운명변곡선이 10퍼센트대라고? 완전 똥망이네. 선형 캐릭터를 추가하면?

-변수만 늘어날 뿐 메인프레임에는 변화가 없을 겁니다. J.

-네 제안은 뭔데? G.

-리셋입니다.

-하, 툴 사용료를 내면 이번 달 월세도 간당간당한데... 어떻게 안 될까?

-지금도 리소스 사용료가 실시간 정산되고 있습니다만?

-젠장! 일단 저장해. 시뮬레이션 오프!


피슝! 하는 소리와 함께 세상이 일그러지고 익숙한 인터페이스 화면으로 넘어왔다.


“이대로 등록하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G.”

“예상 수익 계산 중... 890 제국 마르큽니다.”

“겨우 그거밖에 안 돼?”

“창의성 점수는 최하등급이고 시뮬레이션 테스트를 완결 짓지 못했습니다. 공모전이 아니라서 페널티는 없지만 오픈마켓 수수료는 따로 내야 합니다.”

“쯧! 알았어. 임시폴더로 옮겨줘.”

“클라우드 공간이 부족합니다.”

“결제해.”

“저장됐습니다.”


시뮬레이션이 종료되자 캡슐 인터페이스가 떴다.

오전 6시 22분, 출근하려면 아직 시간 여유가 있다. 캡슐의 수면모드가 이럴 땐 많은 도움이 된다. 능률이 떨어지긴 해도 시간이 곧 돈인 사람에겐 24시간 작업이 가능했다.


“미스터 잭슨으로부터 연락이 있었습니다.”

“급한 거?”

“추가 연결이 없으니 급한 것은 아니라고 추측합니다.”


인공지능 개인비서는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요소다.

구세계는 극소기기단말PDA 대신 스마트폰을 썼다는데 현재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었다. 뭐 복고를 좋아하는 노인네들은 그 패션만큼이나 고루한 과거를 그리워했지만 당장 옛날로 돌아가라면 누구도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커피를 내리며 물었다.


“내용은?”

“전과 다름없이 이직을 권하는 내용입니다. 달라진 점은 주급을 5% 인상했습니다.”

“좋은 건가?”

“헤나톤 서비스는 현재 사업을 확대하는 중이고 더 많은 시민권자를 고용함으로써 지역 정계와 관료의 지지를 얻으려는 속셈으로 추측됩니다.”

“거절해.”

“알겠습니다.”


커피를 들고 창문으로 향했다. 저 멀리 고층빌딩의 숲 사이로 오벨리스크가 위엄 넘치는 자태를 드러냈다. 단순노동에서 해방된 이후 인류는 행복해졌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자유는 참으로 복잡하고 다난한 것이다.

자유를 갈망하지만 막상 손에 쥔 자유를 가지고 뭘 해야 할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미래를 확신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딩동-

고전적인 초인종 소리와 동시에 현관 카메라를 확인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른 아침부터 웬일입니까?”


문을 열어주자 인사하며 들어온 이는 시나리오 라이터 에이전시 담당자였다.

인류의 유흥은 극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GEO System&Fantasy Chronicle Episode Systems


시뮬레이션 툴만 있으면 카메라를 들고 영상을 촬영할 필요가 없었다. 머릿속의 상상을 끄집어낼 수 있는데 굳이 배역을 캐스팅할 필요도 촬영장소를 물색할 필요도 날씨에 연연할 필요도 배우와 스탶, 투자자와 감정 싸움할 필요도 없었다.

예술가에게 꿈꾸던 이상이 거기에 있으니 엔터의 모든 개념이 재정립되었다. 시간과 의지만 있다면 혼자서 영화와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 물론 흥행은 장담할 수 없지만.

상업영화든 예술영화든 심지어 포르노도 허가만 있으면 혼자 만들어낼 수 있었다. 누가 이 극적으로 변화된 제작환경에 빨리 적응하느냐의 싸움이다.


“새로 쓰시는 시나리오는 얼마나 진행됐는지 확인해보란 편집장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스토리는 다 썼어요. 문제는 연출이랑 구도죠. 편집장은 영화보단 드라마를 원하지 않나요?”

“맞습니다. 오래가는 게 서로 좋으니까요.”


지오시스템의 오픈마켓에 공개되는 시나리오는 하루에 수억 편이 넘었다. 명성을 얻기 전까지 공짜로 공개하는 작가도 있고 처음부터 유료로 제공하는 사람도 있다.

두 시간에서 세 시간짜리 영화는 연출에 자신 없으면 혹독한 평가를 받지만 장편 드라마는 임팩트도 임팩트지만 스토리에 힘이 있어야 했다. 캐릭터가 매력적인 건 당연했고 서사에 자신 있으면 10시즌이고 20시즌이고 끌고 가면 된다.

아무리 1인 제작이 가능하다지만 한 손보다 열 손이 낫듯이 거대제작사나 에이전시는 망하지 않았다. 배우도 마찬가지다. 도리어 불러주는 곳이 더 많아졌다.

예를 들면 이랬다.

시뮬레이션 툴로 만든 캐릭터는 지오시스템과 연동된 AI의 보조로 진짜 살아있는 것처럼 연기했고 설정과 지도로 연기를 바꿀 수도 있다. 작품이 요구하는 연기를 충실히 해내는 배우가 있다면 몸값 비싸고 성질머리 더러운 현실 배우를 캐스팅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AI의 백업으로도 배우의 설정을 만들고 연기를 지도하는 건 쉽지 않았다. 차라리 살아있는 배우의 Identity Licence를 사는 것이 낫다.

과거 유명했던 배우는 이제 더는 영화를 안 찍는 대신 IL을 팔아 돈방석에 앉았다. 지오시스템과 시뮬레이션 속에서 그들은 영원히 늙지 않는 배우로 살아갈 것이다.

연출에 약한 감독은 이야기를 만드는 일에 전념했고 연출만 좋은 이는 남이 쓴 시나리오를 샀다. 심미審美와 상상에 능한 기술자는 대중에게 먹히는 얼굴과 몸매를 툴로 찍어내 특허로 등록하고 이용료를 받았다.


“이달 내로 DB에 등록할게요.”

“천천히 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편집장이 독촉해서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왜요? 작가들 많잖아요?”

“요새 지역노조를 만든다고 난리잖습니까. 이참에 단가를 올려주든가 아니면 파업하겠다고 뻗대는 작가가 많습니다. 저도 죽겠습니다.”


지오시스템의 오픈마켓에는 하루에도 수억 편의 시나리오가 등록됐고 대부분 눈 뜨고 보기 처참한 수준의 졸작이었다. 진짜 시나리오 라이터로 불릴 수 있는 사람은 천에 한둘도 많았다. 그러나 수익을 추구하는 투자자와 에이전시는 예술작품을 찾는 것이 아니었다.

작가든 글쟁이든 나발이든 대중이 좋아할 자극적인 시나리오라면 프로든 아마추어든 상관없었다. 원 히트 원더로 한 작품만 성공하고 후속작은 말아먹든 말든 관심도 의지도 없으니 대우가 열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가 부속품처럼 소모되는 걸 좋아하겠나?

시나리오 라이터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지속적으로 성공하기는 어려웠다. 뭐 어느 분야든 성공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고 사람생각은 다 거기서 거기다. 어딘가에서 본 듯한 상상들, 빈번한 표절시비로 멱살잡이가 일상이다.


“멀리 안 나갑니다.”


담당자를 보내고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가상세계가 나올 만큼 발전한 기술에도 불구하고 영업사원은 사라지지 않았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교류는 막아서도 안 되고 막을 수도 없다. 인공지능 도우미의 등장으로 많은 직업이 사라질 것 같았지만 의외로 많은 직업이 살아남았다.

직업을 향한 인간의 애착은 단순히 돈을 더 벌기 위함은 아니었다. 많은 이가 판검사를 우선할 것 같지만 법조계의 직업만족도는 최하위였다.

일을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뭘 해도 행복한 사람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캔들.”

“출근하나?”

“네. 낮 근무라서요.”

“교대하면 스쿨존 순찰 좀 돌게. 학생들이 요즘 대낮에 맥주파티를 벌여서 공원이고 숲이고 난장판이야.”

“그래요? 알겠습니다.”

“행정청에 얘기했는데도 안 고치더군. 부잣집 도련님이 많아서 그런지 씨알도 안 먹혀.”


이곳이 월세가 비싼 이유는 신축이기도 했지만 나름 부촌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분수에 맞지 않은 환경이다. 그러나 이곳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었다.


‘흥미로워.’


이를테면 새 캐릭터 구축을 위한 관찰환경으로 최상이었다.

오래전에는 도심의 고급아파트가 부의 상징이었다면 지금은 한적한 교외의 단독주택단지가 좀 산다 싶은 이들의 자부심이 되었다. 진짜 부자는 매매로 들어오겠지만 월세로라도 부자의 삶을 체험하고픈 나 같은 사람이 없지도 않다.

물론 내 목적은 허세가 아니다.

출근 장소는 부촌 입구에 있는 빌딩이었다. 제국경찰법령에 의거한 민간경찰의 장長은 각 지역치안본부장이 임명했다. 베릴랜드 경찰서장도 일단은 국가의 녹을 먹는 공무원이었다.


“주야 교대를 시작하지.”


뭐 20명도 채 되지 않는 경찰서의 서장도 서장은 서장이다. 경찰용 워머신 DX-488과 인간이 짝을 이루어 순찰과 경찰업무를 보니 어지간히 간 큰 범죄자가 아니고선 베릴랜드를 침범하긴 어렵다.

경비용 순찰드론이 하루 24시간 감시 중이라 빠져나가기 힘들었다. 맞다. 시나리오 라이터의 부업은 다름 아닌 민간경찰이었다.


“교대를 확인했습니다. 담당관 A8921F90, 임무를 재개합니다.”

“오늘도 잘해보자고. 파트너.”

“좋은 아침입니다. J.”

“정비는 받았어?”

“네. 구동부, 무기, 소프트웨어 모두 정상입니다.”


사람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경찰용 워머신과 함께하려면 개조된 순찰차가 필요했다. 이게 자가용인지 장갑차인지 헷갈리는 묵직한 순찰차에 올라타 자동주행모드로 바꿨다.

어차피 순찰경로는 이미 정해져 있다.

짐칸에 오른 DX-48은 3단계 자율AI를 적용해 상당한 수준의 윤리적 판단이 가능했다.


“레일 스트리트에서 민원이 발생했습니다.”

“내용은?”

“전남편의 접근금지명령입니다.”

“심각해?”

“접근금지거리를 어긴 건 아닙니다만 언제라도 우발적인 사고로 발전할 확률이 높습니다.”


베릴랜드의 주민은 정확히 8921명이다.

지역을 오가는 외부인 유동인구는 일일 평균 약 3000명 정도니 대략 12000명을 경찰관 20명이 주야로 관리했다. AI의 보조와 방범시스템의 도움이 없었다면 무법지대였을 것이다.

베릴랜드 전역을 감시하는 시스템이 범죄를 인지하는 순간 바로 자율 AI판사의 영장심사에 들어간다. 판사AI는 순찰드론으로 하여금 1차 ‘권고’를 하고 추가조치를 취할 수 있다.

우리가 접수한 민원은 자율 AI판사의 윤리적 법리적 판단에 기초한 추가조치였다. 100년 전 인류가 본다면 스카이넷에 지배당한다고 한탄하겠지만 사회 전반에 걸쳐 AI의 분석과 판단은 크나큰 신뢰를 받았다.

왜냐면 중앙정부의 메인프레임은 단 한 번도 해킹당한 전례가 없으니까.


“도착했습니다.”

“너는 대기해. D.”

“스탠바이.”


안 그래도 눈에 띄는 순찰차인데 위압적인 워머신을 내보일 필요는 없었다. 길 건너에 있는 집을 노려보던 사내는 제복을 입은 경찰관의 등장에 움찔하다 양 손바닥을 보였다.


“전 법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경관님.”

“알고 있습니다. 써?”

“브리튼, 앤서니 브리튼입니다.”

“미스터 브리튼, 잠시 앉을까요?”


근처 벤치를 가리키자 순순히 앉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배회하던 순찰드론이 멀어졌다.


“애들 때문입니까?”

“못 만나게 하네요.”


극소기기단말PDA로 확인한 앤서니 브리튼의 개인정보는 간단했다. 음주난동 2건, 폭행시비 3건, 교통위반 7건, 딱히 중범죄는 없다.


“양육권이... 전 부인에게 있네요. 왜 포기한 겁니까?”

“포기한 게 아니라 뺏긴 겁니다. 장인이 좀 잘나거든요.”


하긴 부촌에 집이 있으니 경제적으로 모자람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친부의 접견을 거부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개인정보에는 자식에게 접근을 금지하는 내용은 없었다.

앤서니 브리튼을 벤치에 앉히고는 길 건너로 넘어와 초인종을 눌렀다. 아까부터 밖으로 내다보던 여자가 금방 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부인.”

“저 사람이 뭐라고 해요?”

“애들을 보고 싶답니다. 허락하시겠습니까?”

“절대 안 돼요!”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외도로 이혼했으면서 뻔뻔하잖아요. 그리고 애들도 그를 좋아하지 않아요. 경관님은 이게 옳다고 보나요?”

“음. 제가 판단할 문제는 아닌 것 같군요.”


길 건너를 두어 번 왕복하며 양측의 의견을 전달했다. 가능하면 대화로 풀고 싶었지만 둘 다 완강했다. 할 수 없이 자율 AI판사의 중재를 요청했다. 바디캠으로 처음부터 중계 중이었으니 중재안은 금방 나왔다.


-삑! 담당관 A8921F90, 요청에 의한 중재심의 시작. 자율 AI사법중재위원회는 7대5로 앤서니 브리튼의 퇴거를 결정.


결국은 이렇게 되나.

가정불화나 분쟁의 경우 대부분 남편이 불리했다.

남녀분쟁의 법리해석에서 여자는 여전히 남자보다 약하다는 인식이 강했다. 가정폭력은 남편이 아내를 대상으로 저지른다는 고정관념이 강한 것이다.

강제퇴거는 엄밀히 따지면 중재가 아니지만 따를 수밖에 없다. 사법위원회의 결정을 앤서니 브리튼의 부인에게 통보하자 그녀는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팔짱을 꼈다.


“미스터 브리튼. 사법위원회는 당신의 퇴거를 결정했습니다. 이는 통보 즉시 효력이 발생하며 불복하겠다면 절차를 안내해드리죠.”

“아닙니다. 경관님. 따르겠습니다.”


씁쓸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자택까지 함께 가시죠.”

“알겠습니다.”


앤서니 브리튼은 순찰차 뒷좌석에 순순히 탔다.


“법원을 통해 정식으로 절차를 밟으세요. 감정만으로 대응하면 결과가 별로 안 좋을 겁니다. 진짜 범죄자가 되는 건 피해야지 않겠습니까.”

“소송을 걸면 장인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장인이 누구라고요?”

“게일 맥칼리스터, 웨스트우드 코퍼레이션 회장입니다.”

“음. 거물이네요. 그래도 AI판사를 매수하는 건 불가하죠.”


법을 만드는 건 인간이지만 일선에서 법을 집행하는 실무자 대다수는 AI로 대체된 지 오래였다. 그래도 인간인 경찰이 필요했다. 왜냐면 위화감을 줄이기 위해서다.

우린 자질구레하고 시시콜콜한 얘길 나눴다.

40살의 앤서니 브리튼은 특별한 삶의 경험이 있진 않았다. 태어나고 자라고 공부하고 연애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으며 끝내 이혼하는 아주 평범한 인생을 살았다. 행복과 불행이 교차하는 여느 인간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심하세요. 미스터 브리튼.”

“감사합니다. 경관님.”


앤서니 브리픈이 자택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민원처리와 중재안 이행을 완료했다고 보고했다.

녹음기를 켰다.


“앤서니 브리튼, 40세, 이혼남, 본인은 알콜문제가 있음. 아이들을 사랑함. 부부생활 주도권은 남편이 아닌 엑스와이프에게 있었음. 경제적 종속관계. 장인은 재계 유명인사, 엑스와이프의 자신감이 이해됨.”


장인의 후광인지 몰라도 전남편 따위는 전혀 두렵다는 느낌이 없었다. 도리어 잘 걸렸다는 인상을 받았다. 전부인은 전남편이 사고를 치기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신체조건은 나쁘지 않음.”


190cm, 100kg 이하의 균형 잡힌 신체. 수염을 깎으면 외모도 나쁘지 않다. 지능은 모르겠지만 신체조건은 훌륭했다. 사람의 첫인상은 외모로 결정된다. 남자든 여자든 상대방의 얼굴과 몸매로 호감을 보이든 흥미를 잃든 빠르게 결정했다.

미모는 경쟁적이다.

재생의료기술의 발달로 젊은 신체를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현재 성형외과는 여전히 성행했다.


“뉴로칩 시술은 받지 않았음.”


뇌와 기계, 뇌와 뇌를 연결하는 뇌파통신장치 뉴로칩은 8세대 뉴로다인기술이 적용됐다. 사실 월세도 간당간당 내는 이유는 뉴로칩 시술 때문이다. 부자들도 꺼릴 만큼 막대한 비용을 지출했으니까. 시나리오 라이터 나부랭이가 경찰관으로 특채될 수 있었던 이유기도 했다.

시나리오 인세 대부분을 여기에 꼬라박았다.


“앤서니 브리튼이 범죄자가 될 확률은... 매우 높음.”


알콜문제가 있는 이혼남은 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높다.

이건 감이 아니라 통계다. 자율 AI판사도 그걸 알기에 경찰관을 요청한 것이다. 순찰일지에 앤서니 브리튼의 위협보고서를 추가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순찰은 계속됐다.

집 나간 고양이를 찾아달라는 노부인의 민원을 해결하고 가벼운 교통사고 세 건을 처리했다. 자율주행을 쓰지 않는 클래식한 운전자는 항상 사고위험을 내포했다.

점심은 단골가게를 찾았다.

식당 찰리스는 손님으로 붐볐다.


“여기.”


같은 제복을 입은 경찰관이 손을 흔드는 곳으로 향했다.


“캡틴.”

“앉아. 앤서니 브리튼 위협보고서는 봤어. 저지를 거 같아?”

“기회가 있다면요.”

“감시드론을 할당하고 싶지만 요즘 집중단속이라 일정이 빠듯해. 여유가 없어.”

“감청은요?”

“접근금지명령 정도론 허가 안 해줄 거야. 딱히 중범죄를 저지른 이력도 없고.”


경찰방범시스템은 1차로 경찰관 본인이고 2차로 순찰드론의 활용이며 3차로는 CCTV와 함께하는 집음기 즉 감청시스템으로 이뤄졌다. 총성, 고성, 비명 등 특정한 소리를 감지하면 순찰드론을 보내 영상으로 확인했다. 불과 1분 내외로 이뤄지는 이런 신속한 확인으로 완전범죄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도 범죄가 일어나는 걸 보면 완벽한 건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출산예정일이 언젭니까? 캡틴.”

“아직 두어 달 남았다.”

“이름은 아직도 못 정한 겁니까?”

“아들인지 딸인지 모르거든.”

“의사한테 그냥 알려달라고 하세요.”

“와이프가 싫대. 이런 건 까보는 재미가 있다더군.”

“애가 무슨 복권도 아니고 뭘 까봅니까. 부인도 참 특이하신 분입니다.”

“날 좋아하는 것부터 정상적인 취향은 아니지.”


아이세란 경위는 워털루와 인간의 혼혈이다. 제국이 점령한 워털루 행성자치령 출신으로 겉모습은 인간과 다를 것 없지만 굳이 차이를 찾자면 덩치가 장난 아니다. 사람보다 머리통 하나 더 큰 워머신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 덩치였다.

살아있는 워머신이랄까? 물론 피륙으로 강철기계를 이길 순 없었다. 하지만, 인간의 신체보다는 모든 면에서 우월했다. 강화인간쯤 돼야 팔씨름 경쟁이 가능할 지경이 말 다 한 셈.


“기동대에서 이직을 권유했다고 들었는데?”

“안 갑니다.”

“왜? 네 소망대로 다양한 인간을 경험하려면 거기만큼 좋은 곳도 없잖아?”

“대신 일거리가 늘어나겠죠. 그러면 집필하는 시간이 모자랍니다. 지금도 모자라거든요.”


기동대는 민간경찰분야에서 매우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 헤나톤 서비스는 제국 28지구에서 제일 큰 민간경찰기업으로 주도主都 컬럼비아 시티의 경찰업무 50%를 소화했다.


“인세도 많이 받는데 경찰은 그만두지 그러냐?”

“종일 캡슐에 처박혀서 툴만 만지는 삶은 사양합니다.”


시뮬레이션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그게 일이 되면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다. 스토리를 쓰고 캐릭터를 만드는데 애착이 없었다면 진즉 때려치웠을 것이다.


삑삑-


막 수저를 뜨려니 호출음이 울렸다.


“치안본부에서 알림. RCR 코드 레드. 반복한다. RCR 코드 레드.”

“젠장!”


둘은 서둘러 각자의 순찰차로 돌아갔다.

운전석에 올라타자 곧바로 현장으로 자율주행을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D.”

“살인이 신고되었습니다.”

“장소는?”

“리버사이드 어퍼이스틉니다.”

“유랑지구구나. 신고자는?”

“장호정, 43세, 리버럴 플랜의 보험영업원입니다.”

“수도 출신인가?”

“아닙니다. 13지구 출신입니다. 중범죄 기록은 없습니다.”


황실이 있는 수도는 제국의 발상지다.

제1지구 혹은 수도지구로 불리는 그곳 출신은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 베릴 강은 베릴랜드와 컬럼비아 시티 사이를 흐르며 자연스럽게 경계를 나누는 이정표가 되었다.

경찰이든 행정이든 관할권은 중요하고 민감한 문제다.

그 사이를 오가며 농락하는 무리가 있었는데 이른바 우주집시로 불리는 아리타인이 바로 그들이다. 제국우주군이 스물일곱 번째로 점령한 아리타 행성원주민은 지배를 받아들이는 대신 저항을 택했고 연이은 테러에 열 받은 정부는 아리타 원주민 전원을 고향 행성에서 강제이주했다. 무려 10억이 넘는 숫자가 제국의 깃발이 꽂힌 우주 전역으로 흩어졌다.

28지구가 받아들인 아리타 이주민은 대략 800만 명.

컬럼비아 시티와 베릴랜드 사이에 있는 정착촌에 자리 잡은 아리타인은 200만 명이 넘었다. 베릴랜드 주민이 대략 9000명임 고려하면 200배나 많은 무서운 외부인이 이웃한 셈이다. 차별을 선호하지 않는 제국에서 아리타인은 왠지 논외였다.

제국에서 태어나도 시민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인권의식이 드높은 지식인의 비판이 잇따랐지만 정부는커녕 의회조차 법을 고칠 마음이 없었다. 왜냐면 강제이주 전 아리타인의 테러목표에 황실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제국인은 한 명도 빠짐없이 분노했다.

황제를 신앙하는 제국 일신교도들은 입에 거품을 물었고 아리타인은 제국 어느 지구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어퍼이스트 자치구로 진입합니다.”


파트너의 경고와 컬럼비아 시티와 다른 의미로 거대한 정착촌으로 진입했다. 정착촌에도 자경단은 있었다. 애초에 자치령인 만큼 민간경찰이 들어설 자격은 충분했지만 치안본부는 정착촌에 시민권자를 밀어 넣는 걸 꺼렸다.

2000만 명의 사상자를 낸 1.4폭동 이후 아리타인은 준범죄자나 다를 바 없는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살인이 일어난 장소는 빌딩과 빌딩 사이의 공터였다.

쓰레기와 그래피티로 가득한 공터에 널브러진 시신은 한눈에 봐도 비싼 정장을 입고 있었다. 베릴랜드 경찰서의 주간교대자 10명 중 4명이나 현장에 출동했다.

컬럼비아 시티에서 나온 경찰은 그래도 두 자릿수는 넘었는데 인솔책임자가 아는 얼굴이다.


“잭슨 경감님.”

“여.”


헤나톤 서비스의 에드윈 잭슨 경감은 제국 72지구의 파르빌 성인星人 출신이다. 특징을 꼽자면 워털루와 비슷한 덩치에다 팔이 네 개였다. 제국에서 인간형의 기준은 두 다리로 직립보행을 하는가로 결정됐다. 그러므로 사족四足은 인간형으로 불리지 않는다.


“왜 거절했어?”

“시티는 체질에 안 맞습니다.”

“성공하려면 큰물에서 놀아야지.”

“베릴랜드도 넓습니다.”

“인구 만 명도 안 되는 곳에서 무슨 사건이 일어나겠어? 불륜?”

“사적인 얘기는 나중에 합시다. 잭슨.”


캡틴 아이세란이 끼어들었다.


“사망자는 권은성, 45세, 주소지는 베릴랜드 엔릴 스트리트고 스트로베리슈가의 최고재무책임잡니다.”

“스토리베리슈가면...”

“컬럼비아 시티 최고의 스트립클럽입니다.”


시뮬레이션은 단연코 최고의 유흥이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많았다. 가상과 현실을 동시에 즐기고픈 욕심 많은 이는 고전적인 유흥업소를 찾았다.


“권은성의 뉴로칩은 파괴되었습니다.”

“백업은?”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회사에는 감사를 위한 백업이 있을 거 아닙니까?”

“영장심사 중입니다.”

“발부가 가능했으면 벌써 나왔겠죠. 아닙니까? 잭슨 경감.”


자율 AI판사는 0.001초만 결정을 내릴 텐데 아직도 영장이 발부되지 않았다면 애초에 안 되는 것이다.


“감청영장도 안 나옵니까?”

“심사 중입니다.”

“답답하네.”


평소에는 잘 돌아가던 사법중재위원회가 제구실을 못 했다. 자율 AI판사에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면 거물 중의 거물이 관련됐다는 방증이다.


“우리 까 놓고 얘기합시다. 이거 해결할 수 있습니까?”

“민감한 사안이 많아서 영장이 늦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스트립클럽이 무슨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것도 아니고 민감할 게 뭐가 있어요? 혹시 높으신 분 중에 아랫도리를 잘못 놀린 겁니까?”

“기다려봅시다. 곧 떨어질 겁니다.”

“검열된 정보는 필요 없습니다. 원본이 필요하지.”


CCTV를 역추적하면 이동경로를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정착촌 자경단에는 최신방범시스템도 순찰드론도 없었다. 드문드문 설치된 폐쇄회로도 워낙 낡아빠져서 집음기의 성능을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우범지대에 경호원도 없이 돌아다니다니 대체 뭔 생각이었을까?


“이렇게 합시다. 계속 기다리지 말고 우리 쪽에서 한 명, 베릴랜드에서 한 명씩 합동수사를 하죠.”


아이세란 경위는 손 떼고 싶었지만 어쨌든 사망자는 베릴랜드 주민이니 배 째라고 강짜를 부리기도 어려웠다.


“좋습니다.”


가뜩이나 인력이 부족한 베릴랜드 경찰은 한시라도 빨리 정착촌을 떠나고 싶었다. 결국은 한 명씩 남았는데 베릴랜드 쪽에선 재수 없게도 내가 남았다. 순찰업무에서 제외된 걸 다행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쿠란입니다.”


에드윈 잭슨처럼 팔이 네 개인 시티 경찰 쿠란은 허연 이를 드러내며 악수를 청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요? J.”

“나를 압니까?”

“경감이 칭찬하는 경찰은 보기 드뭅니다.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이죠.”


감식반이 시신을 회수해 떠나기 전 현장 스캔데이터를 넘겼다.


“사인은 실혈이군요. 사망예상시각은... 열두 시간 전입니다. 소지품은... 거의 다 털렸네요.”


몸에 걸치고 있던 건 속옷 한 장 남기지 않고 털어갔다. 이렇게 보면 강도살인 같지만 자살이 목적이 아니라면 권은성이 정착촌을 찾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신고자는 사망자와 두 시간 전에 이곳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습니다. 만남의 목적은 정착촌 재개발사업입니다.”

“보험회사와 스트립클럽이 재개발과 관련될 일이 있나요?”


신고자 장호정은 평소 권은성과 공적이든 사적이든 친분이 있었다. 둘 다 13지구 출신으로 향우회 회원이란 공통점이 있고 스트립클럽과 맺은 보험계약 상당수를 리버럴 플랜에 몰아줬다.


“치명상은 등에 난 자상입니다. 심장을 단번에 찔렸군요. 뉴로칩을 파괴한 건 사후에 벌어진 일입니다.”

“뉴로칩을 파괴했다는 건 면식범일 확률이 높겠네요. 뉴로칩 시술을 받았다는 걸 아는 건 보통 친분으론 어렵죠. 장호정이 용의자일까요?”

“그럴 수도. 하지만, 그는 뉴로칩 기룩을 자진해서 공개했습니다.”


감청영장은 한 시간이나 지나서야 나왔다.

정착촌 자경단의 협조를 얻어 확인한 폐쇄회로 정보에서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 권은성에게 동행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긴 위험천만한 슬럼에서 값비싼 옷차림으로 혼자 돌아다니는 건 자살행위였다.

삑-

안면인식 결과가 나왔다.


“어?”


쿠란은 깜짝 놀란 얼굴이다.


“아는 사람입니까?”

“맥칼리.”

“맥칼리?”

“웨스트우드 코퍼레이션 회장 게일 맥칼리스텁니다.”

“어?”


이번엔 내가 놀랐다.

맥칼리스터란 성씨를 몇 시간 전에 열람한 기억이 났다.


‘앤서니 브리튼의 장인이 분명...’


발신목록에서 위협보고서를 찾아 다시 읽어봤다.

애니 브리튼, 아니 이혼했으니 이제는 애니 맥칼리스터였다. 전남편에게 접근금지명령을 내린 부인이 떠올랐다. 그녀의 부친이 게일 맥칼리스터다.

묘한 우연이다.


“보고하겠습니다.”


새 정보를 얻었으니 상부에 보고했다. 둘 다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고 헤어졌다. 베릴랜드 경찰서에 도착해보니 아이세란 경위의 황송한 마중을 받았다.


“수사를 중단해.”

“그러죠.”

“음. 궁금하진 않고?”


순순히 수긍하자 도리어 캡틴이 놀란 표정이다.


“게일 맥칼리스터, 우리 같은 말단이 손대기는 힘든 거물 아닙니까?”

“사법중재위원회가 아닌 치안판사가 직접 움직일 거야.”

“28지구 치안본부에서 직접 수사한다고요?”

“대기업이 연관됐으니까.”


웨스트우드 코퍼레이션은 대기업 즉 행성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메가코프 중 하나다. 게일 맥칼리스터는 그 메가코프를 움직이는 세 명의 회장 가운데 한 명이었다.


“맥칼리스터 회장이 범인일 것 같진 않네요.”

“맞아. 내 생각도 그래. 그가 범인이라면 이렇게 쉽게 꼬리를 잡진 못했을 거야.”


돈만 주면 뭐든 가능한 정착촌 슬럼에서 CCTV를 지워버리는 맥칼리스터 같은 부자에겐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기록은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경찰 손에 떨어졌다.


“오늘은 이대로 퇴근해.”

“알겠습니다.”


교대까지 세 시간이나 남았다. 그러나 이른 퇴근에 좋아할 새도 없었다. 왜냐면 집으로 가던 중 긴급호출을 받았으니까.


-삑! RCR 코드 레드. 반복한다. 코드 레드.


현장에 도착하고 느낀 감정은 당혹이다.


“J.”

“어떻게 된 겁니까?”

“보다시피 분노한 사위가 장인을 살해했지. 아닌가? 전 사위이구먼.”


바닥에 누워 싸늘한 시신으로 변한 게일 맥칼리스터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이는 수갑을 찬 앤서니 브리튼이다. 혼이 빠진 그의 눈동자는 초점이 흐렸다. 밀면 미는 대로 당기면 당기는 대로 끌려가는 앤서니 브리튼은 오래지 않아 순찰차로 이송되었다.

정착촌의 부실한 방법시스템과 달리 베릴랜드에서는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치기 어려웠다. 순찰드론과 CCTV로 포착된 범행장면은 결정적 증거로 활용될 것이다.


“이러면 게일 회장의 진술은 못 듣겠네요.”

“회장의 뉴로칩은 파괴되지 않았어. 가족 동의를 받으면 확인할 수 있지.”

“쉽게 동의하겠습니까?”

“구슬려봐야지. 회장의 딸이 전남편과 사이 나쁘다며?”


아이세란 경위의 계획은 시작도 못 하고 좌초됐다.

애니 맥칼리스터는 자택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왜?

불과 하루 사이에 3명이 목숨을 잃었다. 살인은커녕 절도도 잘 일어나지 않는 지역에서 하루 사이 두 사람이나 유명을 달리한 건 기네스북에 오를 일이다. 베릴랜드는 살인과 강도, 강간이 밥 먹듯 벌어지는 정착촌 슬럼이 아니었다.

언론이 호들갑을 떨자 치안본부도 걸음을 재촉했다.

15일 뒤 컬럼비아 시티에서 경찰청장이 수사결과를 직접 브리핑했다.


“정착촌 재개발사업권을 놓고 경쟁은 불가피했고 웨스트우드 코퍼레이션은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편법을 동원했습니다. 살해당한 스트로베리슈가 최고재무책임자 권은성은 게일 맥칼리스터의 사주로 어퍼이스트 자치구 재개발위원회의 평가위원들을 접대로 매수했고 그 매수과정 중에 접대부 일부가 학대와 폭력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스트로베리슈가는 고급매춘부를 제공하는 대가로 좋은 조건의 은행 대출을 받는데 웨스트우드 코퍼레이션의 도움을 받기로 협의를 마쳤다.


“하지만, 권은성은 웨스트우드 코퍼레이션의 경쟁자인 리버럴 플랜에도 접대부를 제공했고 심지어 접대 중에 도청을 시도했으며 그 정보를 웨스트우드가 아닌 리버럴 플랜에 넘겼습니다.”


메가코프가 왜 메가코프일까? 웨스트우드 코퍼레이션은 권은성의 박쥐 같은 짓을 오래지 않아 포착했다.


“게일 회장은 정착촌에서 권은성을 살해했습니다. 스토리베리슈가는 보복으로 게일 회장과 딸 애니 맥칼리스터를 살해했습니다.”


어라? 잘나가다 왜곡된 정보가 튀어나왔다.


“우리는 현재 스트로베리슈가의 남은 경영진과 그들이 사주한 암살자를 긴급수배 중입니다.”


앤서니 브리튼 소식은 한마디도 없었다.

컬럼비아 시티 경찰청장이 아니라 28지구 치안본부장이라도 자율 AI판사를 어쩔 순 없었다. 그런데 언론에 나와서 당당히 정보를 왜곡한다는 건 더 높은 곳에서 명령이 떨어졌다는 방증이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펑-

뉴로칩의 방어명령이 조금이라도 늦게 실행됐다면 머리통이 터졌을 것이다. 방탄유리를 관통한 철갑탄이 경찰브리핑을 방송하는 레이저TV와 벽을 박살 냈다.

엎드린 채 바닥을 기기 무섭게 벽이고 가구고 온 집안이 철갑탄에 터져나갔다.

퍽퍽-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경찰에 신고할까? 음모론을 신봉하진 않지만 그건 미친 짓이다.


“윽!”


눈먼 총알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살점과 피가 튄다. 뒤이어 팔과 허벅지에도 총알이 박혔다. 뉴로칩이 맹렬히 돌아가며 고통과 출혈을 억제하는 아드레날린을 뿜어내도록 뇌를 장악했다.

엉금엉금 기어 도착한 곳은 캡슐방이다.

황제의 기적은 오벨리스크만이 아니다. 상상과 현실을 연결하는 캡슐 역시 신의 이적이며 이것은 세상의 어떤 무기도 파괴할 수 없었다.

삑-

신원 확인이 끝나자 캡슐이 입을 벌렸다.

캡슐 안으로 들어가 잠금장치를 걸었다. 이제 지오시스템이 인증하지 않는 한 캡슐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하아하아.”


호흡이 가빴다. 피를 많이 흘려선지 눈앞이 흐릿했다. 온몸이 무겁다.

죽음은 정말 극적이고 아무 예고 없이 찾아왔다.

억울하다.

억울해 죽겠다.

억울해서 죽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이럴 줄 알았으면 이직할 걸 그랬다.


“염병할.”


눈이 감긴다.

******




감은 눈을 떴다.

벌떡 일어나 사방을 경계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아침햇살이 내부를 비춘다. 방이었다. 침대와 가구는 흔한 디자인이다. 내가 놀란 건 구세계에서 사용했다고 다큐멘터리로 보았던 퍼스널 컴퓨터PC의 존재다. 여긴 박물관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죽음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집을 둘러봤다. 함정을 의식해 극도로 주의했으나 부비트랩은 발견하지 못했다.

창밖을 조심히 내다봤다.

거리를 오가는 많은 사람이 보였다. 도시의 흔한 일상이지만 내게는 비일상이다. 왜냐면 이 역시도 다큐에서 봤던 구세계의 풍경과 똑같았다. 매연을 뿜는 내연기관 자동차, 검은 머리카락 일색인 인파는 괴리를 넘어 기괴했다.

TV를 켰다.

눈이 썩는 구린 화질이지만 식별에 문제는 없었다. TV에서 들리는 말은 수도지구에서 많이 쓰는 국어고 영상에 표시되는 글자는 한글과 알파벳의 혼용이다.

거울 앞에 섰다.

내 Identity Licence로 등록된 본모습이 거기 있었다. 시뮬레이션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죽었을 텐데?’


습격을 받고 죽었다.

하지만, 손끝 감촉은 너무나 생생했다. 시뮬레이션의 리얼리즘모드도 이토록 생생하긴 어렵다. 위화감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어?”


TV 속 광고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멋들어진 휴대폰 광고였는데 내 관심사는 제품 자체가 아니라 화면 하단을 그려진 브랜드였다.


SUNGJO


성조? 설마 그 성조라고?

비명을 지르려는 성대를 간신히 억눌렀다. 시뮬레이션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내 시나리오 속 가상기업이 튀어나오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PC를 부팅해 성조그룹을 검색했다.

성조그룹 명예회장 오천명

성조그룹 회장 오채령


‘내가 만든 캐릭터잖아!’


그런데 왜 시뮬레이션 툴 명령어가 안 될까? 운영자 긴급호출도 먹통이다. 침대맡에 앉아 곰곰이 생각했다.


‘나는 죽었다.’


이건 확실했다.


‘죽은 나는 시뮬레이션 속에서 되살아났다.’


이건 확실하지 않다. 다만 추측할 뿐이었다.


‘이곳은 정말 시뮬레이션 속일까?’


이것도 확신은 없었다.


‘나는... 환생했을까?’


모르겠다. 단지 이것만은 확실했다.


‘어떻게든 살아가야겠지.’


죽었든 살았든 시뮬레이션이든 아니든 지금은 중요하지 않았다. 팔다리가 움직이는 현재에 충실해야 했다.

지징-

진동이 울린다.

탁자에 둔 스마트폰(골동품)을 손에 쥐고 통화를 눌렀다.


“야! 이 새꺄! 왜 출근 안 해?”

“죄송합니다.”


성난 외침에 사과 먼저 했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어디야?”

“사고가 나서요. 빨리 가겠습니다.”

“뭐 교통사고야?”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가보다.


“네.”

“어... 병원에 가봐라.”

“괜찮습니다.”

“아니, 병원부터 가. 나중에 애먹이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래. 쯧. 몸조심해라. 몸조심. 우리 같은 사람은 몸이 재산이야.”

“네.”

“병원에 꼭 가고. 영수증 챙겨.”


통화를 끝내고 발신자를 확인하니 김윤석 대리님이라고 적혔다. 존칭을 적은 걸 보니 나는 일개 사원인가보다. 사원증을 찾아 이름을 확인했다.


오지오


어라? 뭐지? 무슨 운명의 복원력 같은 건가? 미완성 시나리오 속 주인공 풀네임은 새뮤얼 G. 오다. 한국이름은 오지오.


‘내 이름도 오지오.’


그러니까 생김새는 다른 오지오가 두 명이다.

애초에 완성된 시나리오가 아니니 모든 것이 가제에 불과했다. 본능적으로 귀 뒤를 만지다 흠칫했다. 지오시스템-시뮬레이션이면 절대 있을 수 없는 흔적이 손끝으로 만져졌다.


‘설마 진짜 환생한 걸까?’


뉴로칩, 정식명칭은 8세대 뉴로다이어 극소기기단말.

더구나 내가 받은 시술은 밀리터리급이다.


-응답하라! G.

-좋은 아침입니다. J.


역시 뉴로칩은 진짜다.


‘재미있네.’


환생트럭이 아니라 환생캡슐인가.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9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지오 디 오리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6 지오 디 오리진 -26화- +5 21.02.27 6,161 187 18쪽
25 지오 디 오리진 -25화- +11 21.02.27 6,302 204 17쪽
24 지오 디 오리진 -24화- +11 21.02.27 6,517 201 21쪽
23 지오 디 오리진 -23화- +16 21.02.03 7,097 242 21쪽
22 지오 디 오리진 -22화- +5 21.02.03 6,805 208 22쪽
21 지오 디 오리진 -21화- +9 21.02.03 6,853 210 17쪽
20 지오 디 오리진 -20화- +27 21.01.20 8,172 230 30쪽
19 지오 디 오리진 -19화- +32 21.01.14 8,175 250 38쪽
18 지오 디 오리진 -18화- +16 21.01.07 8,051 232 17쪽
17 지오 디 오리진 -17화- +18 21.01.03 8,279 236 21쪽
16 지오 디 오리진 -16화- +19 21.01.01 8,103 231 19쪽
15 지오 디 오리진 -15화- +15 20.12.30 8,178 245 20쪽
14 지오 디 오리진 -14화- +13 20.12.29 8,254 253 12쪽
13 지오 디 오리진 -13화- +22 20.12.27 8,591 247 20쪽
12 지오 디 오리진 -12화- +20 20.12.25 8,532 260 13쪽
11 지오 디 오리진 -11화- +18 20.12.25 8,537 252 11쪽
10 지오 디 오리진 -10화- +23 20.12.24 8,942 246 13쪽
9 지오 디 오리진 -9화- +13 20.12.23 9,155 239 14쪽
8 지오 디 오리진 -8화- +16 20.12.22 9,983 264 20쪽
7 지오 디 오리진 -7화- +19 20.12.21 10,799 248 25쪽
6 지오 디 오리진 -6화- +17 20.12.20 10,918 268 12쪽
5 지오 디 오리진 -5화- +10 20.12.20 11,545 267 13쪽
4 지오 디 오리진 -4화- +17 20.12.19 13,442 316 12쪽
» 지오 디 오리진 -3화- +49 20.12.18 18,718 355 36쪽
2 지오 디 오리진 -2화- +19 20.12.18 20,527 362 18쪽
1 지오 디 오리진 -1화- +41 20.12.18 33,681 419 2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