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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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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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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143화

DUMMY

“웨일 가문이라고요?”



펠릭스의 생각만큼 실비아는 극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평소보다 조금 더 커진 정도에서 그쳤다. 그녀의 목소리도 비슷했다. 깜짝 놀라 새된 소리를 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충격을 받아 입만 떡벌린채 굳어버린 것도 아니었다. 평소보다 조금 긴장해 떨리는게 고작이었다.



“네.”



“그 웨일 가문이라고요? 수전노에, 사람 목숨을 벌레보듯 하는 데다가······.”



“당신 아버지 사업을 훔쳐간 장본인이요.”



실비아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에요.”



“말 안해 주던가요? 실바누스 준남작이?”



“일 이야기는 거의 안 하셨거든요.”



실비아는 살짝 시선을 아래로 피했다가 다시 펠릭스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당신이라고요? 당신 가문이 우리 아빠한테······.”



“어허, 진정. 진정해요. 내가 여기 없을 때의 일이니까.”



“당신 가족 일이잖아요! 어떻게 당신 책임이 없다고 뻔뻔스레 말 할 수가 있어요?”



펠릭스는 아무런 감흥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족이 했을 뿐이잖아요? 같은 집에서 같은 밥 먹는 식구가 저지른 일이에요. 나랑은 무관하다고요.”



“펠릭스! 어떻게, 그런식으로 말을 할 수가······.”



실비아는 너무 황당하여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리고 입을 다물자, 그녀는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그 비인간적인 웨일 가문의 후손이라는 것을 다시 떠올렸다. 그에게 무슨 말을 더 하든간에, 펠릭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이쯤 하죠. 여긴 찬 바람이 쌩쌩 부는 곳이니까. 나머지는 안에 들어가서 하자고요.”



펠릭스는 활짝 열린 웨일 저택의 현관문으로 곧장 들어가려다가 문가에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안 와요? 여기서는 저랑 붙어있는 편이 좋을 텐데.”



“무슨 뜻이에요?”



“그렇잖아요?”



펠릭스는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여기 아는 사람도 한 명 없잖아요. 저랑 떨어지면 엄청 어색할텐데.”



“내가 애도 아니고, 그정도야 알아서 해요.”



“공작가인데?”



달리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실비아는 복잡미묘한 심정으로 느릿하게 펠릭스를 뒤따라갔다.



“진작 그럴 것이지!”



펠릭스는 평소처럼 히죽 웃으며 저택 안으로 다시 몸을 돌렸지만, 그의 무시무시한 뒷배경을 알게된 실비아의 눈에, 펠릭스의 웃음은 더는 예전처럼 보이지만은 않았다.







웨일 저택 내부는 생각보다 살풍경하지도 않았다. 한참 청소하던 중이었는지, 장식된 조각품들을 여기저기에 하인들이 달라붙어 조심스레 헝겊으로 먼지를 터는 와중이었다. 그것만 보면, 대청소를 마음먹은 어느 허름한 집 구석의 풍경과 하등 다를 것도 없었다.



“바쁜 시간에 찾아왔나봐요.”



“신경 꺼요. 저 사람들도 우릴 신경쓰지 않으니, 우리도 하인들 눈치 볼 필요 없으니까.”



펠릭스는 자기가 말 한 대로, 하인들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융단이 깔린 바닥 위를 저벅저벅 걸어갔다. 이곳의 하인들은 아주 신기한 구석이 있어서, 펠릭스가 다가오자 유령처럼 자연스레 길을 터주어 펠릭스는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



“꼭 유령같아요. 요정이나.”



실비아는 눈에 보이면서 제대로 쳐다볼 수 없고, 앞을 가로막으면서 전혀 방해되지 않는, 무질서한듯 하며 절도있는 하인들의 모습을 보고 짧게 소감을 말했다.



“뭐라 부르든 편한대로 불러요. 어차피 우리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일 뿐이니까.”



“정말 많은걸요.”



펠릭스가 문 하나를 활짝 열자, 그 너머에서도 수많은 하인들이 한창 분주히 일을 하고 있었다.



“집도 넓고요. 저 많은 사람들에게 급료를 주는 것만 해도, 돈이 꽤 나가겠어요.”



“하하! 급료는 무슨. 왜 우리가 줘야하죠?”



펠릭스는 바로 근처에서 하인들이 무리가 듣고 있는데도 전혀 아랑곳 하지 않았다.



“펠릭스! 다 들리겠어요!”



“들어도 상관없어요. 실비아. 뭔가 착각하고 있나본데, 웨일 저택에서 일하는 건 보통 명예가 아니라고요. 돈을 내고서라도 여기서 일하려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닐걸요? 왕국 안에서 손에 꼽히는 요리사가, 왕국 안에서 손에 꼽히는 재료들로 만든 요리를 하인들도 같이 먹어요. 침대는 오죽 편하게요? 휴식 시간도 철저히 보장해주고, 가끔 저택에 찾아온 귀족이 팁도 얹어주죠. 다른 곳에 가서 자랑스레 떠벌릴수도 있어요. ‘내가 웨일 저택에서 일을 하는데 말이야······.’ 하는 식으로. 은행에 가서 그 한 마디만 하면 담보없이 은화 백 닢이라도 빌려줄걸요. 여기서 일한다는 그 사실 자체가, 일종의 신용 보증서나 다름없죠.”



“그래도, 급료는 줘야죠. 그게 법이잖아요······.”



실비아는 공작가의 위세에 짓눌리는 느낌을 받아 가슴께가 조금 답답해졌다. 숨 쉬는것조차 어딘가 거북했다.



“급료도 줘요. 많이 주진 않지만.”



펠릭스는 또 하나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곳은 식당인듯 했는데, 거미줄처럼 하얗고 투명한 식탁보가 드리운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의 테이블이 아주 길게 늘어선 곳이었다.



“식당이에요?”



실비아는 어색하게 두리번거리며 웨일 저택의 식당을 살펴보았다. 벽난로. 그림. 화분. 여느 저택의 식당과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이곳 식당에는 초상화가 걸려있지 않았다. 가문의 조상들의 얼굴이 그려진 초상화가 걸려있을 법한 자리에는, 대신 어느 땅덩어리, 논밭, 폭포나 절벽 따위가 그려진 그림이 걸려있었다.



“응접실엔 손님이 있는것 같아서.”



실비아는 펠릭스의 눈치를 보며 폭포를 그린 그림 아래에 조그맣게 붙어있는 명패를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웨일 가문이 이 땅을 언제 얼마에 구입했는지가 짧게 적혀 있었다.



“좋죠?”



펠릭스의 목소리를 듣고 실비아는 화들짝 놀라며 어색하게 얼버무리듯 웃었다.



“아, 네. 잘 그렸네요.”



“제가 그렸거든요.”



“네? 당신, 그림도 그릴 줄 알아요?”



실비아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는 것을 보더니 펠릭스는 피식 웃었다.



“아니오. 농담이에요. 그건 형이 그렸어요.”



펠릭스는 식탁으로 걸어가 마음에 드는 의자를 하나 쭉 빼내 그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형님이 있어요?”



실비아도 조심조심 펠릭스의 맞은편의 의자를 빼내 앉았다.



“못 미더운 형이 하나 있죠. 성격 꼬인 사람이니까 알아서 잘 피해다녀요. 괜히 얽히면 귀찮아 질 게 뻔하니까.”



실비아에게 펠릭스가 하는 말은 별로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나쁜 사람인가요?”



“멍청하고 불쌍한 사람이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나쁜 사람보다 훨씬 더 나쁜 짓을 저지르기도 해요. 제이콥처럼.”



“아, 당신 스승님······.”



실비아는 잠깐동안 자기가 말실수를 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도, 장례식장에서 무의식중에 고인의 험담을 한 것 같은, 아주 무례한 말실수를. 정작 말을 한 것은 펠릭스였는데도.



“저기, 펠릭스. 당신 스승님은······.”



식당 문이 벌컥 열리며 하인들이 운반대 위에 둥근 뚜껑을 씌운 은접시들을 가지런히 담아 와르르 몰려들어왔다. 하인들의 손이 바쁘게 움직이더니 테이블 위에는 순식간에 뚜껑씌운 은접시들에 의해 점령당했고, 몰려들어온 하인들은 들어왔을때처럼 재빨리 도로 나가버렸다.



“아, 그레고리를 좀 불러줘.”



어느 운이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없는 하인은 그 와중에 펠릭스에게 붙잡혀 심부름 하나를 떠맡았다.



“자.”



그 하인까지 식당을 빠져나가 문이 닫히자, 펠릭스는 두 손을 쓱쓱 비비며 여유롭게 웃었다.



“칙칙한 이야기는 잠시 미뤄두고, 일단 식사부터 할까요. 웨일 가문이 대접하는 것이니, 맘편히 먹어요 실비아. 구두쇠처럼 요금을 청구하지 않을 테니까.”



실비아는 자신의 말을 자르고 하인들이 난입한것이 다분히 의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테이블 아래에서 누가 듣고있다가 실비아는 눈치채지 못할 신호를 보낸 것처럼 하인들은 순식간에 난입하여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재빨리 일을 마치고 도로 나가버렸다.



“안 먹어요?”



그렇다고 실비아가 무슨 말을 더 할수 있었을까. 오히려, 한 편으로 그녀는 하인들 덕분에 불편한 이야기가 자연스레 끝나버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조금 들었다.



“그냥 먹으면 돼요?”



“식사 매너까지 내가 알려줘야 하나요?”



펠릭스는 잠시 손을 멈추고 실비아를 뚱하니 쳐다보았다.



“저도 그정도는 알거든요.”



펠릭스는 실비아가 은접시의 뚜껑을 열고 잠시 감탄하는 모습을 본 뒤에야 묵묵히 식사를 이어갔다.







웨일 가문이 대접하는 음식은 생각외로 평범했다. 어느 식당에서든지 볼 수 있을것 같은 홀홀한 야채 수프, 소스에 졸인 비둘기 고기, 레몬 조각을 곁들인 생선 구이, 기포가 보글거리는 화이트 와인은 얼음을 채운 양동이에 담겨 있었으며, 투명하고 선명한 루비 빛의 와인은 벌써 펠릭스가 자기 잔에 반쯤 찰랑이듯 부은 뒤였다.



“어때요?”



“하나같이 생각보다 평범해 보여요 하지만······.”



실비아은 맑고 홀홀한 야채 수프가 그런 맛을 낼 수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고형물은 전혀 없었고, 수프 자체도 물처럼 묽었는데, 실비아는 수프를 한 술 뜰 때마다 아주 농후한 빵 조각을 씹어 삼키는 느낌이 들었다.



“엄청난걸요.”



“빈약한 표현이네요. 실비아, 당신은 책을 더 읽는 편이 좋겠어요. 가급적이면 낭만 소설 말고 다른 것도.”



실비아는 펠릭스의 훈수를 못들은체 하며 수프를 마저 먹고 비둘기 고기에 손을 대었다. 이 고기는 수프와는 정 반대로, 분명한 덩어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입 안에서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다.



“이것도 엄청난걸요?”



실비아는 비둘기의 고기가 조금 뜯겨나간 흔적이 없었더라면, 방금 자신이 이 고기를 먹었다는 사실조차 믿을 수 없었으리라 마음 속으로 확신했다. 그 정도로 고기는 부드럽고 달콤했으며 조금의 뒷맛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깔끔했다.



“야단은.”



실비아가 식사를 이어갈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가져온 상식이 도전당하는 기분을 받았다. 액체인 수프는 고체인 고기보다 묵직했는데, 정작 비둘기 고기는 연기처럼 부드러웠다. 생선에서는 비릿한 바다 내음 대신 봄날의 들판처럼 생기넘치는 새콤한 향기가 피어났다. 웨일 가문의 음식들은 하나같이 평범해 보였지만, 그 내부는 비범하기 그지 없었다.



“정말 이상하고 맛있는 음식들이에요.”



순식간에 식사를 마친 실비아는 길쭉한 잔에 화이트 와인을 담가 한 모금 마셨다. 와인의 기포는 따끔거리지 않고 부드럽게 그녀의 목을 감싸주었다.



“요리사가 좀 괴짜라.”



펠릭스는 둥그레한 와인 잔을 살짝 흔들어 마시지는 않고 냄새만 조용히 맡았다.



“그래서 말인데요. 펠릭스. 웨일 저택에는 왜 온 거예요?”



“우리집에 내가 가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해요?”



펠릭스는 여전히 와인을 마시지는 않고 향만 맡고 있었다.



“그건 아니지만······.”



“왜요, 당신 약에 쓸 재료 구하러 안 가냐고 이제와서 따질 셈인가요? 수도에선 그렇게 즐겼으면서.”



실비아는 조금 얼굴을 붉혔다.



“뿔도마뱀 눈알은 어렵게 구할 필요가 없는 재료에요. 집에 와서 부탁해 두면 최상품으로 구해줄걸요. 시장바닥을 전전하는 것보다 그게 훨씬 싸게 먹혀요.”



펠릭스가 약 이야기를 꺼내자, 그제서야 실비아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웨일 가문의 차남 펠릭스 웨일이 아니라, 그녀가 익히 알던 행복의 연금술가게 주인 펠릭스가 다시 눈앞에 보이는듯 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별로 납득 못 한 얼굴인데.”



실비아가 정곡을 찔렸다는듯 움찔하자 펠릭스는 천천히 와인을 한 모금 들이마셨다.



“제이콥을 찾으려고요.”



와인을 삼킨 펠릭스가 입을 열자 한여름의 포도밭의 단내가 잠깐 나는듯했다.



“꽁꽁 숨어버려서 대스승님조차 그가 어딨는지 모를 정도니까. 어쩔 수 없이 웨일의 힘을 빌려야죠. 그나저나 이제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뭐가요?”



실비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식당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하인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와 순식간에 테이블을 정리하고 썰물처럼 빠져나가버렸다. 그 와중에 펠릭스는 또 재주좋게 한 명의 하인을 붙잡아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신다고? 직접?”



하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식당 밖으로 나가버렸다.



“누가 와요?”



“아, 우리 엄마.”



“네? 당신 어머니라면······.”



다시 문이 활짝 열렸다. 하인들이 뛰쳐들어왔던 부엌쪽 문이 아니라, 펠릭스와 실비아가 들어왔던 식당 문이. 실비아는 화들짝 놀라 매무새를 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펠릭스는 오히려 여유롭게 두 손을 깍지껴 뒤통수를 받치면서 의자를 뒤로 까닥까닥 젖히기까지 했다.



문이 도로 닫히고 펠릭스의 어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웨일 가문의 안주인은 유령같은 발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골격이 드러나 보이는 메마른 얼굴. 장례식에 어울릴법한 검은 화장. 수의와 비슷하게 생긴 드레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촛불조차도 금방이라도 꺼져버릴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 말 그대로, 죽음의 약을 만드는 펠릭스의 어머니에 걸맞는 모습이었다.



“안녕, 엄마.”



귀부인은 실비아는 쳐다도 보지 않고 그의 아들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 펠릭스는 조금의 존경도 내비치지 않고 넉살좋게, 아주 무례하게 어머니에게 인사를 건넸다.



“펠릭스.”



중년의 노부인의 목소리는 그 외양과 달리 어딘가 온화한 느낌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실비아는 목소리 언저리에, 말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차가운 금속성의 무언가를 발견했다. 말하자면, 펠릭스의 어머니의 목소리는 보드라운 천으로 감싼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



“왜 왔니?”



“내가 내 집에 오는데, 달리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어?”



펠릭스는 넉살좋게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쓸데없는 인사치레는 그쯤 하고 사업 이야기로 들어가자. 왜 왔니?”



펠릭스는 여전히 어색하게 멀뚱멀뚱 서 있는 실비아에게 시선을 힐끔 돌렸다. 그러자 그제서야 펠릭스의 어머니도 실비아를 향해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실비아는 그녀의 두 눈동자 한 가운데에 검은 구멍이 뚫린 줄 알고 그만 비명을 지를뻔 했다.



“누구?”



“실비아 로즈베리. 내 손님. 약혼자 아니니까 쓸데없는 생각 말아.”



펠릭스가 말을 마치자 실비아는 재빨리 인사를 건네며 자기소개를 하려 했다.



“알아. 그게 아니라, 왜 여기 있냐는 거지. 여기까지 데려올 필요는 없었잖아?”



실비아는 그대로 말문이 막혀 어색하게 허리를 굽힌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편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버렸다.



“그냥. 왜, 안 돼? 너무 쩨쩨하게 굴지 말고 인사 정도는 받아줘. 당신 아들의 제자인데.”



“너랑 무슨 사이든 간에, 나랑은 무관한 일이잖니.”



“좋아. 그럼.”



펠릭스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옷매무새를 대충 가다듬고, 그녀의 어머니에게 허리를 숙였다.



“어머니. 제 손님입니다.”



한 톤 낮은 어색한 목소리.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펠릭스의 어머니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실비아를 쳐다보았다.



“누구?”



“저는 실비아 로즈베리······.”



“알아. 그러니, 용건을 말해.”



“네?”



실비아는 당황하여 눈을 깜빡였다.



“무슨 일로 찾아온 누구냐고.”



“아, 저는, 그냥 펠릭스를 따라왔을 뿐인데······.”



“제 손님입니다. 사업차 방문한게 아닙니다.”



펠릭스가 옆에서 다시 끼어들자 귀부인은 어딘가 못마땅한 얼굴로 실비아와 펠릭스를 번갈아 힐끔거렸다.



“천천히 쉬다 가요.”



그리고 귀부인은 실비아에게 그만 나가달라는듯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펠릭스도 점잖게 실비아에게 말했다.



“잠시,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잠깐 기다려 주겠어요?”



실비아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도망치듯 재빨리 식당 밖으로 쪼르르 나가버렸다.







실비아가 나가자 귀부인은 한숨을 푹 쉬었고, 펠릭스는 히죽 웃으며 다시 점잖지 못한 원래의 태도로 돌아갔다.



“아무나 집안에 들이지 말라니까.”



“뭐 어때. 내가 손님 불러온 적 얼마나 있다고. 아이작 이후로는 실비아가 처음이잖아?”



“네 형 때문에 그래.”



펠릭스는 이해한다는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물렀어?”



“왜 왔니?”



귀부인은 펠릭스의 물음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 대꾸조차 할 필요가 없는 질문이라는듯이.



“사업차 방문했지 뭐. 난 형처럼 쓰잘데 없는 이유로 집에 돌아오지 않거든.”



펠릭스는 넉살좋게 의자에 풀썩 앉았다.



“뿔도마뱀 눈알. 최상품으로. 필요해.”



“얼마나?”



“유리병으로 한 병 있으면 되긴 한데, 구하는 김에 한 상자쯤 사 줘.”



“알았다. 달리 필요한건?”



“사람을 찾아야해. 이쪽이 본론이야.”



귀부인은 실비아가 방금전까지 앉아있던, 펠릭스의 맞은편 자리로 가 앉았다.



“제이콥. 아이작의 제자고, 내 스승이야. 연금술사들의 숲에 있던 사람인데, 어느 날 잠적했어.”



“언제?”



“벌써 몇 년쯤 전이니까. 뭐, 지금 어딨는지 나도 전혀 감이 안 잡혀. 하지만, 사람 찾는데는 웨일 따라올 데가 없잖아? 온 왕국 사방팔방 첩자를 심어뒀으니. 정보력으로는 따라올 데가 없지.”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값을 깎아줄 생각은 없단다.”



펠릭스는 조금 아깝다는듯 입맛을 다셨다.



“얼마면 될까? 아니지. 내가 뭘 해주면 될까?”



“은행에서 돈도 꽤나 썼더구나.”



“여기저기 쓸 데가 많다보니. 그래도 형보다는 훨씬 낫잖아?”



귀부인은 영 불편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빅터 보다야 네가 훨씬 낫지. 네가 맏이였다면 좋았을텐데.”



“아직까지도 그 생각 하고 있었어? 그만 좀 봐 줘. 형도 잘 구슬려서 가르치면 적당히 쓸만한 사람은 될 거야.”



“빅터는 제 아비를 너무 많이 닮았어.”



귀부인은 남편이라는 말을 쓰지도 않았다.



“아빠가 좀 그런 편이긴 했지.”



“그래서는 내가 일군 웨일 가문을 이어받지 못할게 틀림없어.”



“하긴. 엄마도 꽤 거친 방법으로 가문을 일으켜 세웠으니 말야. 그래서 말인데. 이제 사업 이야기로 돌아가지 그래?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나도 값을 깎아줄 생각은 요만큼도 없거든.”



귀부인은 서늘하고 텅 빈 눈으로 자신을 닮은 펠릭스의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네 형을 위해 약을 만들어줘.”



“어떤걸로?”



“정신머리를 뜯어고치는 약. 거친 방법도 상관없어. 네 형이 가진 쓸데없는 열정을 모조리 잘라내줘. 가문의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펠릭스는 어머니의 부탁을 듣고 씩 웃었다.



“어렵지 않지. 말 잘 듣는 꼭두각시로 만드는 것쯤이야. 하지만, 싫어.”



“왜?”



“그야. 내가 약을 만들어 주면 또 형 몰래 먹일 생각이잖아? 난 그거 싫거든. 내 손님은 자기가 무슨 약을 먹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알아야해. 모르고 먹는 약에는 효과가 없어.”



“여전히 쓸데없는 짓을 하는구나. 네 논리대로라면, 독살당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야 할텐데.”



“그건 단순해빠진 약이니까 그렇지. 복잡한 약에서 약효를 이끌어내는게 얼마나 힘들다고. 아무튼, 그게 내 계약 조건이야. 형한테 그런 약을 먹이고 싶으면 나 말고 형이나 잘 설득해봐. 형이 내게 직접 부탁하면, 까짓 약 한 상자도 만들어 줄 테니까.”



귀부인은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계산하는듯 하더니 소리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



“어디 가게?”



“보여줄게 있어.”



귀부인이 식당 문으로 걸어가자 펠릭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데?”



“보면 알아.”



펠릭스는 조금 의아한 얼굴로 어머니의 뒤를 따라 식당을 나섰다. 그리고 펠릭스가 시킨대로 문 밖에서 기다리던 불쌍한 실비아를 발견하더니, 그는 실비아를 향해 싱긋 웃어주고는 다시 무시무시한 얼굴로 어머니의 뒤를 따라갔다.







귀부인은 펠릭스를 저택 지하감옥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감옥의 어두컴컴한 창살 속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여긴 왜? 뭐, 새로 장난감이라도 하나 주웠어?”



“훨씬 좋은거야.”



귀부인은 등불을 밝히며 앞장서서 감옥 계단을 내려갔다.



“보초는 다 어디가고?”



“내가 잠시 치웠어. 그게 너한테 좋을것 같아서.”



마지막 계단을 내려와 펠릭스는 비어있는 감옥 몇 개를 지나쳐, 가장 안쪽 어두운 감옥으로 갔다.



“뭘 주워왔는데?”



귀부인은 펠릭스에게 등불을 넘겨주었다.



“직접 봐.”



등불을 건네받은 펠릭스는 대뜸 창살 안으로 빛을 비추었고, 그 안에서 사람 형상이 깜짝 놀라 눈을 가렸다. 그것을 본 펠릭스의 두 눈썹이 크게 꿈틀하더니, 그의 입가에 일그러진 미소가 걸렸다.



“누구, 누구야?”



“첼시.”



“뭐, 뭐? 펠릭스, 너냐?”



익숙한 얼굴과 익숙한 목소리. 펠릭스는 감옥안에 갇혀있는 첼시에게서 불빛을 치웠다.



“야, 펠릭스!”



첼시는 믿을 수 없다는듯 펠릭스를 멀뚱멀뚱 보다가, 곧바로 창살에 달려들었다.



“펠릭스! 너 맞지? 맞잖아! 너, 여긴 왠 일이야?”



“우리집에 내가 가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해?”



펠릭스는 똑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야, 너희 집이라고? 너 뭐 대단한 귀족 출신이라더니, 그게 웨일이었냐?”



“응.”



“잘됐다. 펠릭스! 그럼 나좀 꺼내줘라! 응? 나 그렇게 잘못한 것도 없고······.”



펠릭스는 첼시에게서 시선을 돌려 그의 어머니를 휙 돌아보았다.



“펠릭스. 네가 약을 만들어 주면, 네 친구를 꺼내줄게.”



“난 얘랑 친구 아닌데.”



“야! 펠릭스! 이 잔인한놈아!”



감옥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펠릭스는 요만큼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 그러면, 오늘 밤 부로 바로 처형인을 데려오마.”



“그건 좀.”



“야! 방금 뭐랬어? 펠릭스! 나 좀 살려줘!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라고! 그냥 돈이나 좀 벌어볼까 했을 뿐인데. 너무하는거 아니냐?”



다시 첼시의 비명어린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여전히 펠릭스는 무시해치웠다.



“저 아이가 죽는걸 원치 않으면, 약을 만들어라 펠릭스.”



“뭐, 만드는거야 어렵지 않아. 형이 직접 내게 부탁한다면야.”



“안 만들면, 쟤는 죽어.”



귀부인은 서서히 손가락을 뻗어 첼시를 향해 죽음의 선고를 내렸다.



“형이 부탁하면 만들어 준다니까 그러네. 쓸데없는 억지 부리지 마. 난 분명히 계약 조건을 말했어.”



귀부인은 서늘한 눈으로 펠릭스를 힐끗 노려보았다.



“등불은 두고 가마. 꼴사납게 집 안에서 길을 잃지는 않겠지?”



“내가 형인줄 알아? 잔말 말고 가서 형이나 열심히 설득해 보라고.”



귀부인은 어둠 속으로 뒷걸음질치더니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야, 펠릭스. 대체 뭐야? 뭐였어? 저 사람, 골든포트에서 막 벗어나자마자 나를 찾아내서 날 여기 가뒀다고. 뭐하는 사람인데 대체?”



귀부인이 사라지자마자 첼시는 다시 창살에 착 달라붙었다.



“쓰러져가던 웨일 가문을 일으켜 세운 장본인. 남은 것이라고는 이름뿐인, 허울뿐인 공작가를 명실살부한 왕국 최고의 권력 집단으로 바꾼 사람. 쓸모 없는 것들을 모조리 도려내고, 남들은 더럽다며 치를 떠는 구정물 속에 두 손을 집어넣은 사람. 가지고 있는 첩보망만 백수십개 되는데다가 온갖 독살 사건과 암살 사건에 연루된 사람.”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고? 너랑 아는 눈치던데. 뭐, 웨일 하녀장쯤 되나? 아니면 가문의 협력자야? 너희 집에서 키우는 첩자야? 설마 네 보모는 아니지?”



“아니. 우리 엄마.”



첼시는 충격받아 그대로 굳어버렸다.



“뭐라고!”



그리고 감옥 안에서 단말마와 같은 비명이 공허하게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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