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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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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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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132화

DUMMY

기다란 바늘처럼 곧고 뻣뻣하게 자라난 나무의 머리 위로 달걀 노른자처럼 작고 노르스름한 태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태양빛이 비스듬히 대지를 향해 내리쬐자, 지난밤 공터에 고여있던 어둠은 태양의 따뜻한 빛에 놀라 긴 그림자를 남기며 허둥지둥 달아났다.



거기서 태양이 조금 더 높이 떠오르자, 숲 속 곳곳에 숨어있던 조그만 새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소리높여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하자, 연금술사들이 각자 하나씩 둥지를 틀고 잠들어있던 텐트에서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펠릭스는 가장 먼저 눈을 뜨고 텐트 바깥으로 걸어나왔다. 바닥에 쌓인 낙엽에 서릿발이 올라, 낙엽이 하얗게 질린 것을 구경하며 펠릭스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가 날숨을 내뱉자 하얀 연기가 그의 입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다가, 불어오는 차가운 북풍에 금새 흩어져 사라졌다.



펠릭스가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올리버와 카야도 텐트에서 슬금슬금 빠져나와 공터에서 정체불명의 체조를 하고 있는 펠릭스를 발견했다.



“뭐해?”



올리버가 먼저 펠릭스에게 물었다.



“그냥. 몸 좀 풀고 있죠.”



“뭣하러?”



“오늘은 몸을 좀 써야하니까요.”



“그래? 그럼 나도 몸 좀 풀어둘까.”



올리버는 펠릭스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가까이 다가가, 그 역시 체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체조를 끝마치자 줄곧 하품을 하며 멍하니 구경하던 카야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저쪽 어딘가로 가버렸다.






다른 텐트 여기저기에서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릴 즈음 펠릭스와 올리버는 우물가로 걸어갔다. 나란히 놓여 있는 네 개의 우물 중 가장 왼쪽 우물가에 카야가 있었다. 그녀는 양동이로 물을 퍼담아 가볍게 세수를 하고 있었는데, 날씨가 어찌나 추운지 그녀의 얼굴은 새빨갛게 얼어있었다.



“야, 카야. 그러다 얼굴이 꽁꽁 얼걸?”



“뭐야, 펠릭스? 그렇게 걱정되면 불이라도 피워주든가, 아님 약이라도 달여주든가.”



카야는 헝겊으로 얼굴을 쓱 닦은 다음 바닥에 대고 헝겊의 물기를 두 손으로 꼭 짰다.



“네 몸 간수는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숲으로 사냥 다니는 사냥꾼이잖아?”



“난 이정도 추위쯤은 괜찮거든.”



카야는 물기를 짜낸 헝겊을 팡팡 털고는 도로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은 뒤에야 이쪽을 돌아보았다.



“아, 올리버.”



카야는 올리버와 눈이 마주치더니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네왔다.



“오늘도 숲으로 사냥 가나요? 같이 가지 않을래요?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사슴은 물론이고 멧돼지나, 어쩌면 곰도 잡을 수도 있을 걸요.”



“글쎄. 일단 내 고용주한테 물어보고.”



올리버는 싱긋 웃으며 펠릭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바빠서 안된답니다.”



“그렇다는데.”



“바쁘기는."



카야는 펠릭스의 말에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너 어차피 우리들이 약 다 만들 때까지는 손가락빨고 놀고 있을 거면서. 올리버를 하루정도는 빌려줘도 괜찮잖아?”



“올해는, 아니야. 아침먹는대로 바로 작업 시작할거야. 올리버랑 노닥거리고 싶으면 내일로 미뤄. 올리버? 우리도 세수만 대충 하고 슬슬 가자고요.”



“어, 어? 그래? 알았어 펠릭스. 올해는 예년이랑 다르네.”



올리버는 자기도 예상 못했다는듯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펠릭스에게 대꾸하며 두레박을 내리기 시작했다.







온기가 모조리 식어버린 직사각형 모양의 나무 테이블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 차가운 테이블 위에 올리버와 펠릭스는 여행용 건조 식량 한 묶음씩을 꺼내올려 종이 포장을 벗기고 차디찬, 그리고 메마른 음식을 먹고 있었다.



“물 정도는 끓였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말라비틀어진 육포를 힘겹게 물어뜯으며 올리버가 투덜거렸다.



“언제부터 그렇게 미식가가 됐다고 그래요? 예전에 저랑 여행다닐 때는 잘만 먹었으면서.”



“실비아랑 같이 다니면서부터겠지. 실비아는 턱이 작고 약해서, 항상 물을 끓여줘야 했으니까.”



“나약해졌군요, 올리버.”



“나약하다니.”



올리버는 조금 부루퉁해져서 대꾸했다.



“불을 쓰는건 좋은 일이잖아. 불은 문명의 상징이라고.”



“그럼 지금이라도 피우든지요.”



펠릭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돌덩이같은 비스켓을 와그작 씹었다.



“됐어. 네 말마따나, 나도 원래는 거칠게 살던 사람인데. 한번쯤 옛 기억을 되새겨줄 때도 됐지. 언제까지고, 실비아 보모 노릇을 하며 살 수도 없으니까.”



올리버는 어딘가 서운한 얼굴로 비스켓을 덥썩 베어물었다.



“보모 노릇이 마음에 들었으면, 실비아한테 가서 고용해달라고 하든가요.”



“됐어. 내가 널 버리고 떠나려고?”



“하긴.”



두 사람은 동시에 비스켓을 와그작 베어물고 조용히 입 안에서 우적거렸다.







펠릭스와 올리버가 남들보다 한 발 앞서 이른 아침을 만끽한 뒤에야, 다른 연금술사들이 하나들 텐트에서 슬금슬금 빠져나와 아침을 맞이했다.



그리고 숲으로 사냥을 나갔던 카야가 손에 토실토실 살이 오른 산토끼 한 마리를 잡아들고 돌아와 솜씨좋게 슥슥 손질하며 식당에서 떠들어댔다.



“야, 펠릭스가 올해는 지금 바로 약 만들겠다던데?”



그러자 잠이 덜 깬 얼굴로 식당의 기다란 테이블에 앉아있던 연금술사들은, 순식간에 잠이 싹 달아난 얼굴로 카야를 쳐다보았다.



“진짜로?”



가장 먼저 반응한것은 듀프였다. 그는 대체 왜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맨몸에 조끼 하나만 달랑 걸치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아니면 방금전까지 장작이라도 패다와서 그런건지, 그의 드러난 살 위로 꼭 달군 돌처럼 하얀 김이 술술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렇다는데? 벌써 아침도 먼저 먹고 가 버렸어.”



“하긴. 아무리 그 펠릭스라고 하더라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으니 달리 방법이 없었겠지.”



린이 차가운 바람결같은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을 꺼냈다. 그러자 듀프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위아래로 크게 끄덕였다.



“그래. 그놈이 아무리 잘났어도, 인간인 이상 한계는 있을거야.”



“글쎄. 내 생각은 조금 다른데.”



트로이의 발음이 또박또박한 목소리가 들리자 린과 듀프는 그를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펠릭스는 보통이 아니야. 상식을 벗어났어. 무슨 꿍꿍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만만한 이유 때문만은 아닐거야.”



“트로이. 네가 펠릭스를 과대평가 하는 건지도 몰라.”



버크가 안경을 고쳐쓰며 말을 꺼냈다. 역시, 버크의 목소리는 어딘가 어설픈 면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사람들을 조용하게 만드는 알 수 없는 힘이 있어서 연금술사들은 일제히 버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펠릭스가 못 하는 일도 있어. 그는 어마어마한 실력을 가졌지만, 붉은 가루 병이 돌았을 때는 아무런 약을 만들지 못했으니까.”



“그건 자연 재해였어.”



트로이가 재차 반박했다.



“스승님은 물론, 대스승님조차 그 병 앞에서는 손 쓸 도리가 없었지.”



“글쎄. 과연 그랬을까.”



“뭐야, 버크. 다 지나간 옛 이야기를 갑자기 끌어와서. 하고싶은 말이 뭐지?”



“내 말은, 그러니까. 펠릭스도 못 하는 일이 있다는 거야. 아홉 솥으로 아홉 약을 동시에 끓이는 거라면 모르지만, 솥 하나로 동시에 서로다른 9개의 약을 만드는건 달리는 동시에 헤엄치고 하늘을 나는 것과 비슷한 일이라고.”



“펠릭스는 보나마나 해 낼거야.”



트로이는 재차 강조했다.



“그렇겠지. 트로이 너는 펠릭스와 친하니까.”



“버크! 내게 시비를 거는거야? 너야말로, 대체 무슨 꿍꿍이야?”



버크는 한 박자 늦게 놀랐다가, 뒤늦게 다시 안경을 고쳐쓰며 고개를 돌려 트로이의 시선을 피했다.



“내 말은, 나도 펠릭스가 성공했으면 좋겠어. 하지만······.”



버크는 다시 슬금슬금 트로이와 눈을 마주쳤다.



“또 실패할지도 몰라. 그 당당하고 완벽한 펠릭스가 말이야. 난 그 모습을 보게 될까봐······.”



린이 피식 웃자, 버크는 하던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버크. 겁쟁이. 펠릭스가 실패하든말든, 우리랑은 아무런 상관없어.”



“펠릭스는 대스승님에게 붉은 가루 병의 진실을 묻겠다고 했어. 그리고 그에 따르면, 대스승님은 이번 교류회에서 펠릭스가 최고의 연금술사가 된다면 대답해 주겠다고 말했댔지. 그러면 펠릭스가 최고의 연금술사가 되는 편이······.”



“과거의 그림자에서 그만 벗어나, 버크.”



듀프가 조용히 말했다.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크고 호탕한 목소리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고 적당한 목소리로. 그러자 버크는 잠시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시선을 내리깔았다.



“자, 아침 다 됐어. 아니, 뭐야 다들?”



그리고 줄곧 혼자 솥 앞에서 물을 보글보글 끓이며 요리를 하던 카야는 어색하게 얼어버린 테이블 분위기를 보고 잠시 머뭇거렸다.



“뭐야. 너희들 싸웠어?”



“우리가 애도 아니고. 싸웠겠어, 카야?”



“에이. 린. 싸울 수도 있지 뭐. 나이먹는다고 안 싸우나. 아무튼, 싸웠으면 그만 화해해. 음식 다 됐으니까.”



카야는 솥으로 돌아가, 두손 가득 수프 그릇을 들고 돌아와 한 사람 앞에다가 그릇을 하나씩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기 자리에도 그릇을 내려놓고 카야는 멋모르고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잘 먹겠습니다. 어휴! 따뜻하고 좋다.”







메를린과 실비아는 식사중간에 조용히 테이블로 찾아왔다. 그러자 카야는 그릇을 내려놓고 웃으며 일어나 그들에게 수프를 한 그릇씩 덜어줬다.



“늦잠꾸러기들 같으니라고. 일찍일찍 다녀야지.”



“미안해, 카야. 어젯밤은 달빛이 깨끗하고 아름다워서.”



“또 밤산책 다녀왔구나? 하여튼. 메를린. 너 그러다 감기걸려도 난 몰라.”



메를린은 웃으며 살짝 고개를 까딱하고 자리로 가 앉았다. 그리고 메를린의 뒤에 서 있던 실비아는 여전히 잠이 덜 깬 얼굴로 눈을 부비다가, 카야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모른척했다.



“귀족 아가씨. 잠이 그렇게 많아서야 되겠어요?”



“바깥이 너무 추워서요. 그리고 지난 밤에 늦잠을 자다보니.”



“어머, 너도 밤산책이라도 다녀왔나봐?”



카야는 뜨끈한 수프를 그릇에 덜며 말했다.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무슨 약을 만들어야 좋을지 생각하다보니까······.”



“아. 하긴. 펠릭스를 꺾겠다고 호언장담했지. 그래서, 뭐 좋은 생각 났어?”



“글쎄요. 아직, 잘 모르겠네요.”



실비아는 멋쩍게 웃으며 따끈따끈한 수프 그릇을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그래? 네 스승님은 오늘 바로 약 만들겠다던데.”



“네? 벌써요? 항상 마지막에 만든다면서······.”



“뭐, 몰라. 올해는 다른가봐. 아무튼, 이따가 같이 보러 갈래? 사실, 우리들도 궁금하거든. 대체 어떻게 펠릭스가 솥 하나로 아홉 약을 동시에 만들어 낼지. 그리고 그게 가능키나 한 일인지.”



“좋아요.”



실비아는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지금은 제 적이니까요. 적에 대해 잘 아는게 싸움의 기본이죠!”



카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자 실비아는 싱긋 웃고는 테이블의 빈 자리에 가 앉았다.



“요즘 귀족은 그런것도 배우나?”



그리고 카야는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역시 자기 자리로 가서 반쯤 남은 수프 그릇을 들어올렸다.







아침 식사가 끝이 나자 일곱 명의 연금술사는 뒷정리를 끝내고 한 방향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리고 그 끝에는 큼지막한 솥 옆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펠릭스가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지.”



그 당황스러운 인삿말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연금술사들이 가볍게 웅성거리자, 가장먼저 트로이가 피식 웃으며 앞으로 걸어나왔다.



“펠릭스. 연극이라도 하려고? 내가 잠시 맞장구라도 쳐 줄까?”



“됐어. 각본가 게일이 없잖아. 배우 제인도 없고.”



펠릭스는 솥에서 떨어져 나와 성냥을 칙 긋고는 솥 아래에 잔뜩 쌓인 장작으로 휙 집어던졌다. 그러자 불길이 한순간 확 일었다.



“장작에 기름이라도 뿌려뒀어?”



“비슷한거. 난 오래 기다리긴 싫거든. 그래서, 다들 내 구경하러 온 거야? 자기들 일도 잠시 팽개쳐두고서?”



연금술사들은 괜히 서로를 향해 시선을 이리저리 주고받다가 다들 비슷한 시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아무데서나 못 볼 광경이긴 하지. 그런데, 내 제자는 어디있지?”



“여기있어요!”



실비아는 듀프와 트로이의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가 빈 자리를 찾아 우왕좌왕했다. 그러다가 카야와 메를린이 살짝 옆으로 움직여 자리를 만들어주자, 그제서야 실비아도 다른 연금술사들과 나란히 섰다.



“허 참. 키크는 약이라도 만들어 줄까요?”



“됐거든요!”



실비아는 새침하게 대답해주었다.



“그리고, 제가 그 약을 먹어도 듀프보다 커지기는 힘들 거예요.”



“내가 좀 크긴 하지.”



듀프는 만족스럽게 씩 웃었다.



“그래서, 펠릭스. 올해는 어쩐 일로 이렇게 일찌감치 시작하는거야?”



그리고 듀프 덕분에 잠시 대화가 단절되자, 린이 빈틈을 파고들어 펠릭스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더 기다릴 이유가 없으니까.”



“뭐?”



“그렇잖아? 너희들. 각자 무슨 약을 만들지 다 나한테 말 해 줬잖아. 더 볼 것도 없어. 다 알았으니, 이제 만들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펠릭스.”



버크가 앞으로 한 발짝 걸어나오며 말했다.



“왜? 버크.”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네게 알려준 건 약의 이름 뿐이야. 그리고 너도 알겠지만, 연금술 약 중에는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약들이······.”



“버크. 나도 알아. 하지만, 상관없어. 어차피 너희들은 뻔한 약만 만들 게 틀림없으니까. 이미 눈에 선해. 무슨 약들이 솥 안에서 튀어나올지.”



“뭐? 뻔한 약? 야, 펠릭스. 말 함부로 하지 말지? 내가 그동안 잠자리 눈알 모은다고 얼마나······.”



“카야. 진정 좀 해.”



카야가 앞으로 뛰쳐나가려 하자, 트로이는 점잖게 그녀의 앞을 슬쩍 막아섰다.



“펠릭스. 네가 뛰어난건 알지만, 이번에는 유난히도 잘난체 하는걸.”



카야가 씩씩거리는 동안에 다시 린이 주도권을 붙잡고 말을 꺼냈다.



“내가 좀 잘났어야 말이지.”



“난 한 순간의 심상을 바탕으로 약을 만들어. 나는 같은 약을 만드는 법이 없어. 그런데, 내가 무슨 약을 만들지도 알아냈다고?”



“다 뻔해.”



펠릭스가 히죽 웃자 린의 얼굴 표정이 조금 구겨졌다.



“그래. 말로 떠드는 것보다 한번 보면 알게 되겠지. 다들 거기서 멀뚱히 기다리든, 뭘 하든 알아서들 하라고. 결과를 보고나면 납득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펠릭스.”



메를린이 앞으로 살짝 걸어나오자, 신화 속에서 바다가 갈라지듯 일제히 연금술사들이 양 옆으로 조금씩 비켜섰다.



“왜? 메를린.”



“아무리 그래도,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펠릭스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난 대스승님이랑 맞먹기로 했어. 아니, 이겨먹을 작정이지. 그러니까 너희들한테 내 실력을 다시한번 제대로 보여줘야 해. 뭐, 걱정해 준 건 고맙지만, 솔직히 성가셔. 그러니까 구경할거면 이제 그만 조용히 입 좀 다물어줬으면 좋겠는데. 벌써 솥이 잔뜩 달아올랐고, 물도 끓을락말락 하거든. 아, 그리고 하나. 기왕 구경할 작정이면, 눈 크게 뜨고 잘 봐두는게 좋을 거야. 난 한번만에 해치울 거니까.”



그리고 솥 안에서 커다란 기포가 팍 터지자, 그것을 신호 삼아 마침내 펠릭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실비아는 펠릭스가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두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지켜보았다. 그는 물의 양에 비해 한없이 적은 양의 재료만을 솥 안에 넣었고, 국자로 젓는것도 잠깐 젓고 치워버렸다. 무언가, 그녀가 지금까지 보아온 약과는 너무나 달라서, 실비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기, 트로이.”



역시 조용히 지켜만보던 트로이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왜그러십니까?”



“펠릭스가 솥 하나로 여러 약을 만든다고 했잖아요. 그게 가능한 일이기는 한가요?”



“아, 뭐. 일단 가능은 합니다.”



“진짜요?”



실비아는 놀란 눈으로 트로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앗차 하며 다시 펠릭스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러니까,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둘 씩이나? 뭐예요?”



“음. 우선. 하나는, 이런 겁니다. 굉장히 비슷한 재료를 사용하고, 또 비슷한 과정으로 만들어지는 두 가지 약을 가정해 봅시다. 그래, 감기약과 배탈 약으로요. 다양한 레시피가 존재하는데, 그중 어떤 레시피를 이용하면 새싹 기름의 유무만으로 두 약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요?”



“그러니, 이런 겁니다. 솥에 약 두 회 분량의 물과 재료를 넣고 끓이다가, 우선 내용물의 반만 덜어내 감기약으로 걸러냅니다. 그리고 남은 내용물에다가 새싹 기름을 넣고 뭉근한 불에 반 시간 끓여서 새로 걸러내면, 그건 배탈 약이 되는 겁니다.”



“그렇군요.”



실비아는 펠릭스가 솥에다가 또 알 수 없는 가루를 한 꼬집 뿌려넣는 것을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걸로 아홉 가지 약을 동시에 만들 수도 있나요?”



“글쎄요. 무리입니다. 일단, 그 방법을 쓰게 되면 계량이 부정확해집니다. 그리고, 쓸 수 있는 레시피도 극도로 한정적인 데다가, 만들어지는 약의 품질도 최고급은 무리입니다. 아무리 손이 빠른 연금술사라 하더라도, 중간에 다른 약에 쓸 만큼을 덜어내는 동안 솥 바닥에 찌꺼기가 눌러붙을 수도 있으니까. 계속 휘저어 줘야 하는 약에는 써먹지도 못하는 방법입니다. 게다가······.”



“게다가?”



“우리 연금술사들이 만들겠다고 선언한 여덟 가지 약은, 다 재료와 제작 방법이 다릅니다. 그러니, 그 방법을 사용해서 아홉 약을 동시에 만드는건 무리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러면, 다른 방법은요?”



“훨씬 더 어렵지만, 할 수만 있다면 꽤나 강력한 방법입니다.”



트로이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특수한 용액을 사용하여, 솥 안의 물을 여러 층으로 나누는 방법입니다.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는 원리를 떠올리면 아마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층을 나누어 각 층에다가 필요한 재료를 집어넣고, 필요한 약을 끓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솥에 가로로 분리판을 집어넣는다고 생각하면 더 이해가 쉬울 겁니다.”



“그래요? 그런 일이 가능해요?”



“펠릭스는 이미 그 방법으로 제 앞에서 서로다른 두 개의 약을 만들어 보인 일이 있습니다.”



“세상에······.”



실비아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다시 눈에 힘을 주고 펠릭스를 노려보았다. 그가 하는 행동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듯이.



“하지만, 이번에는 아홉 가지인데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마 그 방법도 못 쓸 겁니다. 일단, 아홉 개의 층을 나눌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용액이 있는지도 알 수 없는 데다가, 층이 아홉 가지 씩이나 나뉘어 버리면 가장 위층과 가장 아래층은 온도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국자로 약을 젓는데도 문제가 큽니다. 그러니, 아마 그 방법도 이번에는 사용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면, 대체 무슨 수로 아홉 약을 동시에 만들어요?”



“그건, 저도······.”



트로이가 대답을 얼버무리자, 갑자기 못들은척 약만 만들던 펠릭스가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내 참. 트로이. 뭘 그렇게 진지하게 하나하나 설명해 주고 있어?”



“펠릭스. 다 듣고 있었어?”



“그래! 내 참. 웃음 참느라 죽는 줄 알았네. 야, 너희들. 내가 설마 그런 싸구려 방법으로 아홉 약을 동시에 만들 거라고 생각했어?”



연금술사들은 다시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아니야. 아니라고. 난 훨씬 더 대단한 방법을 쓸거야. 분명하게 말 해두지. 내가 이 솥으로 끓이는 약은 단 두개! 하지만, 그중 하나로 너희들의 여덟 약을 전부다 재현할 수 있어.”



“불가능해 펠릭스.”



버크가 당혹스런 목소리로 말을 더듬으며 끼어들었다.



“맞아. 불가능해.”



린도 버크에게 맞장구를 쳤다.



“가능한가?”



“불가능하지! 듀프. 생각을 좀 해 봐!”



듀프가 아리송한 얼굴을 짓자 린이 그에게 핀잔을 주었다.



“아무래도, 무리지? 그렇지?”



“글쎄. 솔직히, 그런 것이 가능할 거라고는 나도 생각한 적 없어 카야.”



트로이와 카야도 영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메를린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펠릭스. 네 그 약으로, 내 황금의 약까지 재현할 수 있을까?”



“아참. 그게 있었지? 그럼 동시에 세 개 만들지 뭐. 네 황금의 약, 대스승님 엘릭서, 그리고 나머지 전부를 재현할 약. 세 개 쯤은 충분하니까.”



연금술사들이 다시 웅성거리지 시작하자, 펠릭스는 손뼉을 짝 하고 쳐서 이목을 집중했다.



“다들, 뭘 그렇게 소란이야? 하여튼. 상상력이 부족해서는. 그 옛날의 좋았던 낭만은 다 어디 팔아먹고, 그렇게 재미없는 염세주의자가 되어버린거야?”



“저기, 펠릭스!”



계속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실비아가 앞으로 한 발짝 걸어나왔다.



“왜요?”



“그런데, 당신. 제 약은 뭔지 듣지도 않았잖아요. 그런데, 제가 무슨 약을 만들지 알아요? 제가 만드는 것과 같은 약을 만든다고요? 저도 아직 제가 무슨 약을 만들지 모르는데?”



“하하! 뻔하죠! 가장 뻔한 약이에요. 네! 알아요. 바로 만들어 대령해 드리지요. 당신이 만들려는 거랑 똑같은, 그러나 훨씬, 훠얼씬 더 뛰어난 약을.”



“아니, 당신. 그런······.”



“뭐, 한번 애써봐요 실비아. 나를 능가하겠다고 했죠? 쉽지 않을 거예요. 원래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아마 올해는 더욱 쉽지 않을 겁니다. 내가 이정도로 최선을 다한 적은 거의 없으니까. 아, 아니면 지금이라도 잘못했다고 싹싹 빌면 아주 좋은 약의 레시피를 알려주죠. 그거면 저는 못 꺾어도, 다른 연금술사들 한 반절은 이겨먹을 수 있는······.”



“됐어요! 역시, 전 당신 이기고야 말겠어요. 아니, 설령 지더라도 당신 손은 못 빌려요!”



실비아는 펠릭스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참 고맙네요 펠릭스. 덕분에, 아주 개운해 졌어요. 무슨 약을 만들어야 할지 말이에요. 그럼, 수고해요!”



실비아는 그대로 휙 뒤를 돌아 성큼성큼 저쪽으로 가 버렸다.



“펠릭스. 네 제자, 삐쳤나본데.”



실비아가 더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카야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그러자 펠릭스는 괜찮다는듯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상관없어. 좀있으면 돌아올 거거든. 성격이 불같아도 바보는 아니니까. 뭐, 그런 의미에서. 펠릭스의 쇼는 잠시 막을 내릴게요 여러분들. 내 제자한테도 좀 보여줘야 하니까. 올리버, 장작에 불 꺼요.”



“뭐? 야, 너무 네맘대로 아냐?”



“그래. 그리고 약을 만들다 말고 불을 꺼버리면, 별로 좋은 일은 없을텐데······.”



펠릭스는 씩 웃으며 대꾸했다.



“카야, 내가 내 약을 내 맘대로 하는게 어때서? 그리고 버크. 아직 진짜 약은 시작도 안 했어. 뭐랄까, 요리에 비교해볼까? 난 이제 막 맹물에 간을 살짝 맞춘것 뿐이야. 글로 따지자면 머릿말의 한 반쯤 썼을까.”



“그래서, 펠릭스. 대체 무슨 약을 만들거야? 환각제라도 만들 생각이야?”



펠릭스는 린의 서늘한 눈동자를 향해, 그 텅 비고 감정이 담기지 않은 자신의 눈을 맞추었다.



“훨씬 좋은 약이지. 다들, 잔뜩 기대하고 있으라고. 내가 이 솥 안에다가 무슨 마법을 부리는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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