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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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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08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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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123화

DUMMY

에보니 가문에서 파견된 검은 제복의 사람들이 콩쿠르 무대를 준비하는 동안에, 콩쿠르에 참가하는 연주자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긴장을 풀기 위해 조용히 심호흡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피아노 연습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피아노 연습을 하는 사람의 근처에는 다른 연주자들과 그들의 보호자가 모여들었는데, 그들은 모두 웃는 얼굴과 조용한 미소를 겉으로 드러내며 속으로는 방금 연주의 점수가 몇 점이라고 매기고 있을게 뻔했다. 개중에는 이것도 사교의 장이랍시고 수다스럽게 떠드는 사람도 몇 명인가 있었다.



단델리온은 피아노 연습을 하는 쪽에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가볍게 풀더니 우아한 손놀림으로 연주를 시작했다. 여전히 그녀의 연주는 가벼우면서도 당당한 힘이 느껴졌다.



“전보다 더 잘 치는걸.”



펠릭스는 그의 동료들과 함께 단델리온을 울타리처럼 둘러싸며 중얼거렸다.



“연습일 뿐인데 뭐.”



“게일. 이미 콩쿠르는 시작됐어. 정확히 말하자면, 어젯 밤부터 말이야.”



게일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설마 여기서 공작질을 벌이지는 않을걸.”



“그건 그래. 아무리 에보니라도 너무 노골적으로 수작을 부리지는 않겠지. 그나저나, 단델리온에게 무슨 피아노 잘 치는 약이라도 먹였어? 아주 건반 위를 훨훨 날아다니는데.”



게일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더니 펠릭스를 향해 씩 웃기만 했다.



“그럼 뭘 먹인거야?”



“해독약.”



게일은 짧게 대답하고 다시 단델리온에게 눈을 돌렸다.



“흠. 해독약이라. 무슨 독을 썼는지는 알아냈어 게일? 네 정보망에 잡힌게 없나?”



“전혀. 에보니 가문은 내가 가진 정보망으로는 찔러봤자야. 하지만, 범용성이 좋은 해독약이라면 괜찮겠지. 부작용도 없을테고. 그리고 아무리 노리스라고 해도, 이 자리에서 노골적으로 위험한 독을 타진 않을거야. 안 그래? 범용 해독제만으로도 충분할 거라고.”



“하긴. 노리스는 뒷처리가 어설프니까. 아무리 에보니가 그의 뒤를 봐준다 하더라도, 에보니 가문도 쓸데없이 풍파를 일으키고 싶진 않겠지. 하지만······.”



펠릭스는 약간 의아한 얼굴로 게일을 힐끗 쳐다보았다.



“게일. 부작용이 없는 약따윈 없어. 평범한 감기약도 잘못 쓰면 사람을 죽인다고. 뭘 먹인거야?”



“부작용이 거의 없는 약은 있잖아?”



게일은 펠릭스의 동의를 구하려는듯 그에게 얼굴을 돌렸지만, 펠릭스는 여전히 미묘한 표정을 지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뭐. 펠릭스. 그래서, 노리스가 무슨 독을 썼을지 넌 짐작이 가?”



“별로. 그런데, 게일. 넌 방금은 노리스가 독을 안 탔을거라면서, 이번에는 갑자기 무슨 독을 썼을것 같냐고 묻냐.”



게일은 머쓱하게 웃었다.



“그냥. 좀 걱정돼서 그래. 넌 노리스랑 비슷한데가 많잖아 펠릭스. 그러니까, 만약 너라면, 이런 곳에서 무슨 약을 썼을 것 같아?”



펠릭스는 잠시 생각하는듯 싶더니 금세 히죽 웃었다.



“나랑 노리스는 달라. 그 근본이 다르다고. 내게 물어봤자······.”



“꺄악!”



어디선가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 두 사람의 대화는 그대로 멈춰버렸다. 소리의 근원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공포가 가득 차올라 떨리는 눈으로 자기의 두 손가락을 보고있는 단델리온의 모습이 보였다.



“게일, 게일! 제 손가락, 손가락이······.”



게일은 당장 단델리온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덥썩 쥐었다.



“왜그래, 단델리온?”



“안 움직여요!”



“뭐?”







단델리온의 단말마를 시작으로, 연주회 대기실에 모여있던 연주자들이 하나둘씩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곧바로 몸을 바르르 떨다가 가벼운 발작과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그들의 보호자는 당황하여 허둥거리면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했지만, 다른 보호자도 마찬가지인 상황이라 누굴 도울 여유따윈 없어보였다.



“노리스. 막나가는군 아주. 에보니를 등에 업었다고 눈에 뵈는게 없나본데?”



펠릭스는 조용히 이를 갈며 혼잣말을 내뱉더니, 게일을 옆으로 밀치며 단델리온의 손을 잡아보았다.



“단델리온! 느껴져요? 아파요?”



“저, 저······아무것도 안 느껴져요. 손끝이 차가워지는가 싶더니, 이제는······.”



“실비아! 바늘 좀 줘 봐요!”



펠릭스는 실비아에게서 바늘을 받아 단델리온의 손가락끝을 살짝 찔러보았다. 새빨간 핏방울이 열매처럼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 끄트머리에 맺혔지만, 단델리온은 여전히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펠릭스. 독이야. 마비 독이라고. 두꺼비나 전갈, 거미나······.”



“게일, 진정좀 해! 보호자인 네가 당황하면 어떡해?”



게일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잔. 아까 음료 먹고 남은 잔 어디있지? 잔 어딨냐고!”



펠릭스가 소리를 버럭 지르자 누군가가 떨리는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 펠릭스는 당장 그쪽으로 달려가려다가 멈칫하며, 뒤를 돌아 외쳤다.



“올리버! 실비아 잘 챙겨요! 털끝 하나 다치지 않도록! 그리고, 게일. 내가 무슨 독을 썼는지 알아내기 전까지는, 절대로 해독제 함부로 만들지 마!”



“아니, 왜? 펠릭스. 이래뵈도 나도······.”



“하지 말라면, 하지 마!”



그리고 펠릭스는 문을 열고 잽싸게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가 빠져나가자 대기실에서는 피아노의 선율 대신 가벼운 비명과 통곡, 신음소리가 울려퍼져 펠릭스의 빈 자리를 대신 채우기 시작했다.







펠릭스는 복도로 뛰쳐나와 닥치는대로 문을 열어젖히고 다녔다. 그는 오래지 않아 간이 부엌을 발견하여 거칠게 문을 열어젖혔다. 그 안에는 아까 노리스가 돌렸던 잔들을 씻고있는 에보니 가문의 하인들이 있었다.



펠릭스는 막무가내로 부엌에 쳐들어가 하인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리고 에보니 가문의 경호원이 펠릭스에게 소리없이 다가오자, 펠릭스는 돌돌말린 서류를 품에서 꺼내 그들의 면전에 거칠게 들이밀고 다시 잔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러자 에보니 가문의 경호원은 서류를 슬쩍 보더니 소리없이 뒷걸음질쳐 사라졌다.



잔을 살펴보던 펠릭스는 코를 들이밀어 냄새를 맡고, 혀끝으로 맛을 보며 다시 눈을 들이밀고 잔을 뚫어져라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주머니에서 몇 가지 약병을 꺼내 순서대로 잔에 한 방울씩 똑 똑 떨어뜨렸다.



첫 번째 약이 닿아도 잔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두 번째 약이 닿자 잔 안에 자줏빛 얼룩이 조금 졌다. 펠릭스는 그걸 보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새로운 지시약을 꺼내 잔 안에 한 방울 똑 떨어뜨렸다. 그러자 잔은 순식간에 시커멓게 물들어버렸다.



“빌어먹을, 노리스! 내가 책임 못 질 일은 하지 말랬는데!”



펠릭스는 거칠게 잔을 집어 던지려다가, 웃는 얼굴로 하인에게 잔을 돌려주고는 다시 성난 얼굴로 부엌에서 뛰쳐나갔다.







연주회 대기실 안에서 소란이 일자, 곧 콩쿠르 진행요원들이 검은 제복의 경호원들을 대동하여 대기실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그들은 연주자들의 상황을 살피더니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말문을 떼었다.



“여러분. 누군가가 연주자들에게 몹쓸 장난을 친 것 같습니다.”



“그 연금술사의 짓이에요!”



보호자들중 누군가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하지만 대기실을 장악하고 있는 에보니 가문의 검은 제복들을 보더니 보호자는 입을 다물고 움츠러들었다.



“······흠. 제가 상황을 살펴 보았습니다만. 연주회를 연기할 사유는 되지 못하는듯 보입니다.”



“말도 안 돼!”



어디선가 탄식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진행요원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참가 신청서를 작성할 때, 대부분의 연주자들이 대리 연주자를 지정한 것으로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니,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 대리자들을 데려오도록 하시지요.”



“터무니없어요! 그건 그냥 의례적인 절차잖아요? 우리 대리인은 지금 바다 위를 떠돌고 있단 말이에요!”



“맞아! 갑자기 이러는 법이 어딨어? 콩쿠르를 연기해야돼!”



한두 명의 보호자가 불만을 터트리자 그것을 신호탄삼아 대기실 여기저기에서 일제히 불만들이 터져나왔다.



“어흠!”



하지만 진행 요원이 큰 소리로 헛기침을 하자 그 불만들은 일제히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대리인을 불러오십시오. 연주회가 시작되기까지 아직 시간이 꽤 남았으니. 만약 데려오지 못한다면, 실격 처리 하겠습니다.”



“말도 안 돼······.”



다시 여기저기서 탄식 소리가 들려오자 진행요원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바로 미리 문 밖에서 대기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심부름꾼 하나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대기실 안으로 쪼르르 걸어들어왔다. 그는 일부러 보란듯이 에보니 가문의 문장이 찍힌 편지를 진행요원에게 내밀었고, 진행요원은 그것을 뜯어 펼쳐 보았다.



“음! 에보니 가문에서 방금 막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방금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하며, 비록 무례한 부탁인줄 아는 바이나, 특별히 이번 콩쿠르에서 만큼은 사전에 대리 연주자를 지정하지 못한 가문이 지금이라도 대리 연주자를 지정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군요. 덧붙여, 모종의 사유로 대리 연주자를 제때 데려올 수 없는 가문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성난 벌떼처럼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갑자기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깜빡거리며 소리없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자!”



그리고 진행요원이 휘파람을 불자, 마찬가지로 문 밖에서 미리 대기라도 하고 있었는듯, 에보니 가문의 하인들이 두 손 가득 서류더미를 들고 기다렸다는 듯이 대기실 안으로 곧장 걸어들어왔다.



“서류를 작성할 시간은 십 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특혜는, 에보니 가문의 이름을 보아 이번에만 특별히 제공 되는 것입니다. 다들 감사한 마음으로 임하시길.”



“그냥 해독약을 만들어 주면 안 되나요?”



누군가, 눈치가 없는 사람이 대기실 안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진행요원에게 쏠렸다.



“맞아요. 해독약을 주면 되잖아요? 그러면 이렇게 번거롭게 일을 처리할 필요도 없고.”



“맞아요 맞아! 해독약을 줘요! 에보니 가문이 진정으로 이번 사태에 유감을 표한다면······.”



“다들 조용히 하십시오! 해독약이라니, 대체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입니까?”



진행요원은 조금 당황한듯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질러대었다.



“제가 보기에는, 지금 이 연주자들은 무대에 오른다는 긴장과 불안 때문에 히스테리를 일으키고 있을 뿐입니다. 해독약따윈 필요 없어요!”



“그럴리가! 우리 딸이 얼마나 강심장인데!”



“맞아! 아까 그 음료가 수상했어. 에보니 가문의 전속 연금술사라더니, 그를 당장 불러와!”



“콩쿠르는 무효야, 무효! 아무리 에보니가 위세높은 공작가라도 그렇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일을 처리하는 법이 어디있어? 귀족으로서의 최소한의 위엄은 지켜야 하는 것 아니야?”



다시 사람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진행요원도 조금 예상 밖의 일이 벌어진 것처럼 쩔쩔 매기 시작했다.



“다들, 조용히 하십시오! 자꾸 헛소리를 한다면, 제 권한으로 콩쿠르 참가 권한을 박탈하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푸대접을 받을 수는 없어! 우리도 귀족이란 말이야!”



“조용!”



진행요원과 경호원들, 그리고 콩쿠르 연주자의 보호자들은 금방이라도 그 자리에서 한판 붙을 것처럼 위협적으로 서로에게 고함을 질러 댔다. 그러다가 갑자기 쾅 소리를 내며 대기실 문이 부서질듯 거칠게 열리자, 그들은 동시에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시끄럽네요.”



펠릭스는 여유롭게 웃으며 대기실 안으로 걸어들어와 주위를 죽 둘러보았다.



“원체 시끄러워서 복도에서까지 다 들릴 지경입니다. 귀족 분들, 조금 더 분별을 가지시는게 어떨런지?”



“넌 뭐야?”



펠릭스는 진행요원의 얼굴을 무례하게 빤히 쳐다보다가 히죽 웃었다.



“지금은 당신 편이요.”



그리고 그는 진행요원을 가볍게 제치며 앞으로 나와 목을 가다듬었다.



“아, 아. 여러분? 우선 소개하죠. 저는 연금술사이며, 버널 가문 연주자의 친구로서 이 자리에 참여했습니다. 전문가로서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이건 아주 교활하고 잔인하게 배합된 독입니다. 지금은 가벼운 증상을 일으킬 뿐이지만, 해독제와 만나면 아주 극적인 반응을 일으켜 사람을 죽도록 만드는 독이요.”



“난 못믿어! 너도 에보니의 끄나풀이지?”



어느 보호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그러자 펠릭스는 얼음으로 벼려낸 칼날같은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그는 금새 헛기침을 하며 도로 자리에 앉아버렸다.



“정 못믿겠으면, 해독약이든 뭐든 먹여 보시든지요. 그걸로 사람이 죽어도 책임질 자신 있다면 말입니다.”



다시 한 차례 불길한 웅성거림이 일었다가 이내 사람들은 조용해졌다.



“자, 됐죠? 원. 돼지우리처럼 시끄러워서야. 그러니 쓸데없는짓 하지 말고 물이나 많이 마시도록 해 주시죠. 팔다리도 가끔 주물러 주고요. 그렇게 내버려두면 몇 시간쯤 지나서 저절로 해독 될 테니까. 그럼 다들 서류 작성 열심히 하시길.”



그리고 펠릭스가 자신의 일행에게 다가가자 다시 진행 요원이 헛기침을 했다.



“서류가 필요한 사람은 앞으로 나오십시오!”







반신반의하던 보호자들은 일제히 줄을 서서 서류를 받아들고 돌아갔다. 줄 선두에 서 있는 것은 아까 해독약 운운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실수로 사람이 죽었을 때 책임질 수 있냐는 펠릭스의 물음이, 아마 그에게 가장 무겁게 느껴졌을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리고 펠릭스는 남들이 뭘 하든 말든, 별 관심 없다는 태도로 게일에게 돌아왔다.



“펠릭스. 방금 네가 한 말, 사실이야?”



펠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시약을 써 봤어. 노리스도 제법 솜씨가 좋아졌더군. 하기야, 이제 사람까지 잡아 대는데 그 솜씨가 늘어날 때도 됐지. 그래서, 게일. 단델리온은 어쩔거야?”



게일과 단델리온은 불안한 눈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단델리온은 이 무대를 굉장히 기대하고 있었어.”



“마비된 손가락으로 피아노 쳐 그럼.”



“펠릭스!”



게일은 벌떡 일어나 펠릭스에게 화를 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네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지만, 할 말 못 할 말이 따로있지.”



“아니면 어쩌게? 내가 방금 말 했잖아. 해독제 잘못 쓰면 죽어.”



“펠릭스. 노리스를 찾아서, 무슨 독인지 알아내 해독제를 만들어 줘.”



“안 그래도 노리스를 찾을 생각이긴 했어. 하지만, 절대 제때 못 해. 그러니까 게일. 너도 빨리 결정 내리는게 좋을거야. 포기할지, 마비된 손으로 연주할지.”



게일과 단델리온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게일. 저, 무대에 오를게요. 이건 저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니까요. 손가락이 잘 안 움직이긴 하지만, 금새 나아질 거예요. 얼마나 힘들게 얻어낸 자리인데, 버널 가문을 실망시킬 수는 없어요."



단델리온이 서글픈 얼굴로 조용조용 말하자, 대뜸 게일은 손을 뻗어 단델리온을 멈춰세웠다.



“아니.”



게일은 단호하게 말하더니 실비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실비아. 무리한 부탁인줄 알지만, 우리 버널 가문의 대리 연주자가 되어줄 수 없나요?”



실비아와 펠릭스의 눈이 동시에 크게 휘둥그레졌다.



“절대 안 돼! 실비아, 당장 거절해요!”



하지만 실비아에게 그건 역효과였다.



“좋아요. 벤투스 경. 제게도 영광이네요.”



“실비아. 안된다니까요?”



“왜요?!”



“제가 말 했잖아요! 위험천만한 무대라니까? 노리스가 이따위로 막나간걸 봐요. 무대 뒤에서도 이정도인데, 무대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줄 알아요? 어디 객석에서 독침이 날아들지, 피아노에 독침이 숨어있을지, 페달 아래에 독사를 숨겨둔다든가, 건반에 독을 묻히기도 하죠. 어느 건반을 누르면 당신 가슴을 향해 화살 쏘는 장치가 내장된 피아노인지 아닌지 당신이 알아요?”



“하지만!”



돌연, 실비아는 울먹거리며 항의했다.



“저도, 저런 무대에서 피아노 쳐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펠릭스는 예상 밖으로 감정적인 실비아의 반응을 보고 주춤했다.



“투정 부릴게 따로 있지. 다음에 대회든뭐든 찾아서 참가 신청서 넣어 줄게요. 이번에는 좀 참아요.”



“그래도요! 그리고 단델리온을 봐요.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그녀에게도 꿈이 있었잖아요. 무대 위에 올라서 진짜 연주를 하는 꿈. 하지만, 그 꿈은 꽃을 피워보기도 전에 이렇게 잔인하게 짓밟혀버렸어요. 그녀의 친구로서, 제가 그녀 대신에 무대에 올라 원한을 풀어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아 진짜, 말 안 들어먹네. 실비아, 그러니까······아니, 잠깐!”



펠릭스가 말리고 할 새도 없이, 실비아는 막 근처를 지나가던 하인의 손에서 서류를 하나 빼앗아 서명을 갈겨버렸다.



“이제 어떡할 거예요? 이래도 절 막을 건가요, 펠릭스?”



펠릭스는 실비아가 손에 꼭 쥐고 있는 서류와, 조금 눈물이 맺힌 반항적인 그녀의 눈동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는 이내 한숨을 푹 쉬더니 실비아의 손에서 서류를 낚아챘다.



“앗!”



그러나 펠릭스는 서류를 갈갈이 찢는 대신, 거기에 무언가 재빨리 글씨를 써 넣고선 하인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그러자 하인은 화들짝 놀라며 허겁지겁 서류를 들고 그 대회 진행요원에게 달려갔다.



“뭘······했어요?”



“실비아. 좋아요. 알았어요. 하지만, 당신이 결정한 일인만큼, 당신이 책임져야 할 거예요. 무슨 결과가 뒤따르든지. 알겠어요?”



실비아는 입술을 앙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펠릭스는 주머니를 뒤져, 어딘가에 꽁꽁 숨겨두었던 약병을 하나 꺼내들었다. 화려한 장미꽃잎 모양의 장식이 겉에 붙어있는, 비취색의 약이 담긴 병이었다.



“무대 올라가기 전에 마시고요.”



“뭔데요?”



“대충 피아노 잘 치는 약. 이걸 먹으면, 아마 귀가 썩은 심사위원이라도 당신에게 일등 상을 줄 정도로. 그리고 올리버.”



올리버는 엄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해요.”



“최선을 다할게.”



“올리버. 항상 힘든 일만 맡겨서 미안해요.”



이제 펠릭스는 게일에게 고개를 돌렸다.



“야, 게일. 만약, 오늘 무대에서 무슨 일이든지 생긴다면, 너하고도 끝장이야.”



“알겠어, 펠릭스. 하지만, 진심으로 말하는데······.”



“고맙다고 하지마.”



펠릭스는 게일의 어깨를 한번 덥썩 붙잡아 주고는 게일의 대답을 마저 듣지도 않고 몸을 휙 돌렸다.



“펠릭스. 어디가?”



“올리버. 제가 어딜 가겠어요? 다들 자기 할 일이 생겼으니, 이제 나도 내 할일을 마저 끝내러 가야죠.”



펠릭스는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 대기실 문을 쾅 닫으며 나가버렸다.



대기실을 빠져나온 펠릭스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바로 연주회장 밖으로 뛰쳐나가 거리를 두리번거리다가, 때마침 다가오는 마차를 멈춰세웠다. 마부에게 웃돈을 쥐어주자 마차는 바람처럼 빠르게 거리를 내달리기 시작하여 금새 수도의 성벽을 벗어났다. 그리고 도로 위를 한동안 달리던 마차는 숲으로 접어드는 길 앞에 멈춰서서 손님을 내려주었다.







벌써 어둠이 내려앉은 오솔길을 노리스는 느긋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제대로 길도 나지 않은 숲 속인데도, 그는 제집 안방 드나들듯 긴장한 기색따윈 전혀 없었으며 오히려 일견 편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여튼. 귀족 놈들이랑 어울려 주기도 힘든걸. 에보니 가문이래서 이게 왠 떡이냐 했는데, 지루해빠진 일이나 시키고. 매독이라니, 내 알 바야?”



노리스는 그러더니 기분나쁘게 씩 웃으며 돈주머니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가 주머니를 슬쩍 흔들자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 그래도 이건 좋군그래. 어디보자. 에보니 밑에서 좀 일했으니, 다음에는 웨일을 다시 찾아가야 하나? 아니면 스미스한테 가 볼까? 하. 설마 또 매독 약을 만들어 달라고 하진 않겠지?”



“그렇지는 않을걸.”



노리스는 걸음을 멈추고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수풀이 들썩이더니 그 안에서 펠릭스가 서서히 걸어나와 노리스와 마주섰다.



“펠릭스.”



“스미스 가문은 기울어진 가세를 일으켜 세우느라 바쁘거든. 거기 후계자는 타성에 젖을 대로 푹 젖은 에보니 가문의 후계자랑은 달라. 술, 도박, 여자, 담배, 뭐 어디 나쁜 취미라곤 전혀 없는 샌님이지.”



“정보력이 빠른걸, 펠릭스. 너도 노리스처럼 어디 첩자라도 심어뒀어?”



마침 구름이 걷히며 달빛이 오솔길 안으로 비쳐들어와 노리스의 얼굴 위에 희번득한 미소를 드러내 보였다.



“스미스든 웨일이든 너를 받아주진 않을거야.”



“왜? 이제 나도 한 솜씨 하는데.”



“노리스.”



펠릭스는 그에게 위협적으로 한 발자국 다가왔다.



“넌 너무 설쳤어.”



“아하, 펠릭스. 못 본 새에 정의의 사도라도 된건가? 아직도 네 약을 먹고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던 사람들이 눈에 선한데. 이제와서 깨끗한척 하겠다고?”



“글쎄.”



펠릭스가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오자 숲 속에서 스산한 바람이 낙엽을 싣고 불어들어왔다.



“난 내가 해야할 일을 마무리 지으러 왔을 뿐이야.”



“그게 뭔데?”



펠릭스는 고개를 살짝 들어올려 달빛 아래로 걸어나왔다. 창백한 달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자, 악마의 것처럼 잔인하고 뒤틀린 기이한 미소가 그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두 손을 피범벅으로 물들이고 웃으며 사는것? 살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에게 죽음만이 유일한 구원이라고 귓가에 속삭이는것? 살아있는 사람에게 죽음을 팔아치우다니. 미치광이가 아니고서야, 어느쪽이든 제정신으로 할 일은 못 되지. 그래서, 그걸 하려고 날 찾아왔나? 내게, 죽음을 팔아치우려고?”



펠릭스와 노리스은 미소띈 얼굴로 말없이 서로의 두 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들은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지만,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이는 것처럼 동시에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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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연금술 가게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43 143화 21.12.18 28 1 24쪽
142 142화 21.12.17 30 1 23쪽
141 141화 21.12.17 24 1 22쪽
140 140화 21.12.16 26 1 23쪽
139 139화 21.12.16 23 1 29쪽
138 138화 21.12.15 26 1 24쪽
137 137화 21.12.15 23 1 23쪽
136 136화 21.12.14 28 1 25쪽
135 135화 21.12.14 24 1 22쪽
134 134화 21.12.13 28 1 23쪽
133 133화 21.12.13 23 1 21쪽
132 132화 21.12.12 27 1 24쪽
131 131화 21.12.12 21 1 21쪽
130 130화 21.12.11 28 1 22쪽
129 129화 21.12.11 20 1 24쪽
128 128화 21.12.10 24 1 21쪽
127 127화 21.12.10 25 1 22쪽
126 126화 21.12.09 28 1 24쪽
125 125화 21.12.09 25 1 23쪽
124 124화 21.12.08 25 1 25쪽
» 123화 21.12.08 23 1 22쪽
122 122화 21.12.07 30 1 24쪽
121 121화 21.12.07 25 1 24쪽
120 120화 21.12.06 28 1 21쪽
119 119화 21.12.06 22 1 21쪽
118 118화 21.12.05 22 1 23쪽
117 117화 21.12.05 18 1 21쪽
116 116화 21.12.04 22 1 23쪽
115 115화 21.12.04 26 1 24쪽
114 114화 21.12.03 25 1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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