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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정의 고로케

용사를 동경하는 마왕이 되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토끼정
작품등록일 :
2023.04.15 13:36
최근연재일 :
2024.04.08 18:25
연재수 :
48 회
조회수 :
1,514
추천수 :
66
글자수 :
260,684

작성
23.07.11 17:57
조회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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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D-25

DUMMY

문득,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시각장애 체험 교육을 위해, 빛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안대를 쓰고 암막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지나가야 했던 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완전한 어둠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단 한 걸음 발을 앞으로 내딛는 것만으로 어둠이 내 온몸을 강하게 짓누르는 것이 느껴졌고, 그 압박감에 나는 저항하지 못하고 몇번이고 멈춰선 채 고개를 푹 숙이고야 말았다.

두려움에 질려 바닥에 엎드린 채, 내려앉을 리 없는 천장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두 손으로 정수리 부근을 감싸고, 나는 볼썽사나운 자세로 엉금엉금 기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 때가, 자신이 어둠을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은 순간이었다.


“대답해주오. 그대는 어째서 나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빠뜨리고 만 것이오?”


한때는 어둠을 누구보다도 친한 나의 벗으로 여겼던 시기도 있었다.

어떤 꿈도 목표도 없이, 그냥 태어났기에 살아가야 했고 죽을 용기가 없기에 하루하루를 버텨내야 했던 시기.

그때에 삶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나는 어둠이야말로 내 삶의 본질이며 내게서 영원히 떼어놓을 수 없을 나의 일부, 나의 영혼, 나의 고향이라고 생각했었다.


“혼자 살아남으니까 좋아요? 선배.”


그 생각을 바꿔주었던 것이, 바로 너였는데.


“대답해 봐요, 선배. 우리들의 몸은 조각조각 찢어져 크리스마스 장식처럼 벽을 새빨갛게 칠하고 달라붙어 있는데, 선배 혼자 이렇게 살아남으니까 좋으시냐구요. 네?”


너는 어째서, 이토록 어두운 악몽 속에 나타나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대답해줘요. 네?“


너는 어둠에 속한 자가 아니다.

나처럼 두려워하고, 괴로워하며, 끝없는 수렁으로 스스로를 가라앉히는 자가 아니다.

그러니 내 앞에 있는 너는, 가짜임에 틀림없겠지.


“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가짜일 게 뻔한 네 목소리에도 나는 귀를 막을 수 없다.

꿈에서나마 네 목소리를 이렇게 듣는 게, 얼마나 오랜만의 일인지 몰라서.

늘 활기차게 웃으며 말하던 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어깨를 짓누르는 어둠을 뿌리치고 일어날 힘을 얻을 수 있어서.


“...”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악몽의 정경은 꿈틀거리며 변해간다.

눈을 감았다 떠보면, 눈앞에는 팔을 힘없이 침대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는 세로테의 모습이 보인다.

가느다란 팔의 끝, 힘없이 처진 손목 위에서는 굵은 핏줄기가 흘러나와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고 있다.

누가 그녀를 이렇게 한 것일까?


“당신이잖아. 나의 소중한 마왕님을 빼앗아간 당신 때문이잖아.”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변명할 자격이 없는 자에게 꿈은 목소리조차 주지 않는 것이다.

사죄하듯 고개를 숙인 채 피웅덩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안에서는 두 사람이 손을 맞잡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해피 엔딩이라니, 그게 대체 뭔데? 스스로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행복하게 할 수 있는데?”


시체처럼 창백한 두 사람이 눈을 감은 채 입만을 열어, 합창하듯 동시에 나를 향해 외친다.

여전히 내 목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아, 나는 그 어떤 변명도 입에 담지 못한다.


“너는 아무 것도 못해. 그러니까 그만 떨어져.”


절벽을 간신히 붙잡은 채 버티고 있던 나의 손을 어둠이 강하게 짓눌러, 나는 고통에 손을 놓치고 만다.

아아아아아아-!

비명을 지르며, 소리가 없어 그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 비명을 지르며 나는 추락한다.

추락하는 꿈의 가장 싫은 점은, 가장 두려운 점은 중력이 나를 아래로 끌어내리는 동안 나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저 무력하게, 운명이 이끄는대로, 원래 정해져 있던대로 한없이 추락하는 것만이 내게 허락된 유일한 일.


“날개 없는 자는 떨어져야 한다. 그것이 세상의 정해진 법칙이다.”


하다 못해 부러진 날개라도 있다면, 퍼덕이는 시늉이라도 해 볼 텐데.

꿈에서조차 스스로 날개를 만들지 못하는 나는, 평생 누군가에게 날개를 빌려서야만 날아오를 수 있었던 나는.


“법칙을 거스르려는 자에게는, 끝없는 어둠 속에서 영원히 기어다니는 형벌이 주어질 뿐.”


어둠 속으로, 또다시 홀로, 영원한 추락을 반복한다.



***


밤이 지났어도 마왕성의 어둠은 여전히 깊다.

서큐버스들은 꿈속에서 격렬하게 춤을 추고, 소리높여 노래하며, 사랑을 갈구하고···

그 댓가로, 현실에서 말라비틀어져 죽어간다.


“...”


모두가 각자의 이유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마왕놈이 달라졌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영혼이 바뀌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캐비저의 경우, 전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서 오는 놀람이 아닌 다른 이유로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대체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 거지?’


예전의 그였다면 분명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지금에 와서는, 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망설임이 그를 얽매고 있었다.


‘약해진 건가, 나는.’


수인에게 약함은 곧 죽음의 위기를 뜻하므로, 모든 수인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약하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꺼린다.

그러나 품에 닿아 오는 온기가, 신기하게도 그에 대한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캐비저의 마음을 단단히 감싸주고 있었다.


‘이런 결정을 나 혼자 마음대로 할 수는 없어··· 그녀와 얘기해보고 싶은데. 그런데 생각이 다르면 그땐 어떡하나? 이것참···’


평생을 혀가 아닌 무기로 대화를 나누었던 남자가 서투른 고민을 하는 사이.


라 베치는 그의 품에 안긴 채, 줄곧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로테님···’


그믐날 밤, 세로테는 그녀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실은 지금 마왕님의 몸속에 다른 사람이 들어있다는 이야기.

그 사람은 아주 상냥하면서도 헌신적이라는 이야기.

그러나 보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이 불안해서, 하루종일이라도 손을 잡아주고 싶어지는 사람이라는 이야기.


‘하지만 세로테님은 마왕님을···’


이전의 마왕님은 어디로 가버린 건지.

세로테는 두 마왕님 중 누구를 좋아하는 건지.

그런 질문을 할 때마다 싱글싱글 웃는 낯으로 대답을 회피하며, 세로테는 역으로 라 베치를 곤란하게 할 만한 질문들을 던져댔다.


‘어느 마왕님이 더 나을지··· 나는 선택할 수 없어.’


두 연인이 말못할 고민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의식은 조용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서큐버스들은 꿈의 세계 속에서 격렬히 춤을 추며 죽어갔고, 정적 속에서 흘러나온 그들의 생명이 그들의 몸으로 이뤄진 마법진의 한가운데로, 경건하게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받쳐든 장로 플로시우스의 손바닥 위로 모여들고 있었다.

열에 들떠 멍해진 머리로 그 장면을 바라보며, 세로테는 생각했다.


‘세로테의 마왕님이··· 정말 돌아오시는 걸까.’


장로는 마왕성에서 가장 현명한 이이며, 서큐버스들을 키워낸 아버지 같은 자이기도 하다.

그런 존재의 뜻에 거스른다는 것은 서큐버스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선택지.

누구보다도 꿈의 세계에 깊숙히 들어갈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그 누구의 마음도 뜻대로 조종할 수 있는 서큐버스 퀸조차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마음이 괴로워··· 마왕님이라면 이 괴로움에 답을 주실 수 있을 텐데.’


한쪽에는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사모해 마지않았던, 외롭고 위대하며 슬퍼하는 마왕님.

다른 한쪽에는 어느날 갑자기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앉아버린, 외롭고 상냥하며 슬퍼하는 마왕님.

어느 쪽이든 닿을 수 없는 마음으로부터 태어난 슬픔을 그녀의 마음에 자아낸다는 점에서만은 똑같다고, 세로테는 생각했다.


‘이런 때마저도 나는 정말 아무 쓸모가 없구나.'


차라리 꿈속이었다면 그 누구의 꿈이라도, 그녀는 꿈의 주인보다 더욱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자신의 마왕님을 선택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꿈은 깨어지면 산산이 사라지는 유리조각과도 같아, 늘 모래먼지가 되어 그녀의 손끝에서 흩어지고 말았으니.

어둠에 맹세컨대, 그녀는 단 한 번도 꿈의 주민이기를 바란 적이 없었다.


‘너무 괴로워. 괴로워서 온몸이 부서져버릴 것 같아. 조각조각 나서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짓밟히고 걷어차여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면. 이런 세로테를 보고 두 마왕님이 함께 구하러 와준다면.'


그건 너무나 꿈 같은 일일 거라 생각하며, 세로테는 조소했다.


'뭔 말도 안되는 생각이람, 바보 같이.’


꿈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에 한 발씩을 걸친 몽롱한 상태에서, 그녀는 서큐버스들이 온몸에서 피를 뿜어내며 격렬한 춤을 추는 것을 보았다.

꿈속의 세계조차 그녀들에게는 너무 좁아, 대담한 도약과 머리가 핑핑도는 듯한 회전을 시도할 때마다 서로 부딪치는 그녀의 팔다리들이 박살나는 것이 보였다.

피가 튀고 뼈가 부러져도 꿈속에서는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기에, 무아지경으로 꿈의 세계를 선홍색으로 물들여가는 서큐버스들.

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니, 그녀들을 자매라 부를 수 있을까?


'하지만, 저렇게 덧없이 스러지는 모습을 봐도 전혀 슬프지 않은 걸.'


꿈의 세계에서 태어나 현실에 간신히 발끝을 걸치고 있을 뿐인,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거품 같은 삶.

그 어떤 고통이라도, 괴로움이라도, 혹은 슬픔이라도.

꿈에서 깨고나면 모두 덧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렇기에 서큐버스는 살아 있지도 죽지도 않은 존재.

결코 구할 수 없는 진정한 사랑이라는 허상을 갈구하다, 어느 순간 터져버리는 거품처럼 꿈속으로 흩어지고 마는···


'하다 못해, 하다 못해 마지막만큼이라도. 온몸이 데일 것 같은 열기가 아니라 행복한 온기 속에서 눈을 감을 수 있다면.'


자신도 모르게 몸이 앞으로 나아간다.

사라질 것처럼 가느다란 손가락을 앞으로 뻗어, 눈앞에서 사라져버릴 생명들을 움켜쥐고-


"무, 무슨 짓이냐 세로테! 감히 신성한 의식을···!"


있는 힘껏 온기를 전하겠다고 생각한 순간.


아.

세로테는 더 이상 목구멍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몸이 수백 개의 작은 조각들로 갈라져, 아무렇게나 바닥에 굴러다니는 것을 알았다.


"어리석은 계집이···!"


터져나오는 장로의 노호도, 이미 조각나 기능을 상실해버린 그녀의 귀에는 닿지 못한다.

곧 꺼져버릴 불꽃처럼 밝게 타오르는 생명의 빛을 끌어안은 채.


세로테의 조각들은, 한없는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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