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토끼정의 고로케

용사를 동경하는 마왕이 되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토끼정
작품등록일 :
2023.04.15 13:36
최근연재일 :
2024.04.08 18:25
연재수 :
48 회
조회수 :
1,469
추천수 :
63
글자수 :
260,684

작성
23.07.08 10:08
조회
19
추천
1
글자
11쪽

D-27

DUMMY

“뭐, 그럴 줄 알았어. 넌 항상 그런 녀석이었으니까.”


그리고, 코다 레이는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할 것이다.


“자기 하고 싶은대로 멋대로 행동하고. 주변에 민폐만 끼치고 다니고 말야. 엉?”


어쩌면 장난삼아 하이드의 부채감을 자극하려 들지도 모르고.


“싫다는 사람도 억지로 데리고 나와서 몇 년 동안 이리 밀고 저리 끌고 다니면서, 감사 인사 한 번을 안 한다니까? 성의가 없어요, 성의가.”


손가락을 동전 모양으로 모으고 관자놀이 옆에 댄 채 장난스럽게 까딱거린다거나··· 그런 행동을 코다가 정말로 할지 안 할지는, 솔직히 확신할 수 없다.

원작 소설의 묘사도, 그 소설을 읽는 나의 마음도 언제나 하이드만을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었기에.

하이드의 내면 심리나 그 심리가 표출되며 발생하는 언동들은 나름 높은 확률로 옳게 예측할 수 있을 거라 자신하지만, 하이드 한 명을 제외하면 다른 인물들은 내게 있어 면식만 겨우 있는 정도인 타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이드는 분명, 그들까지 포함한 완벽한 해피 엔딩을 바라겠지.’


언제나 마음가는대로, 하고 싶은대로 행동한다.

하지만 한 번 벌인 일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진다.

그것이 그를 움직이는 가장 큰 행동원리라는 것만은, 소설을 수백 번 되읽으며 하이드라는 인간을 분석한 나이기에 확신할 수 있다.


그에 비하면 나의 마음은, 늦가을의 북풍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늘 불안하다.

제 마음조차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한심한 인간이 타인을 위한, 그것도 동경하는 영웅을 위한 해피 엔딩을 운운할 자격이 되는 걸까?


‘하지만··· 그래, 이건 일종의 은혜갚기니까.’


내가 지금껏 떨어지지 않고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을 수 있도록 힘이 되어준 하이드에 대한 보답을 하는 거니까, 포커스를 나에게 두는 것이 아니라 하이드에게 둬야만 한다.


‘자격 따위를 따질 때가 아니다. 지금껏 홀로 영겁의 고통을 받아온 하이드를 위해서라면··· 이번 회차에 완벽한 해피 엔딩을 만들어내야만 해.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결론은 이전의 결심과 달라진 것이 없음에도, 꿈속의 심장은 불안한 고동을 계속한다.

간절함은 초조함을 부르고, 초조함은 불안을 불러, 결국 나는 또다시 불안에 집어삼켜진다.


그 순간 투명한 꿈의 유리창은 깨어지고, 나는 봇물처럼 밀려드는 감정의 화마에 휩쓸려-


“나리, 대답해주십시오. 쇤네를···”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남자가, 나를 향해 울면서 묻는다.

그의 두 눈구멍에서 쏟아지는 것은 피요, 가슴의 구멍에서 쏟아지는 것은 짙은 어둠이니.


“나를, 왜 죽여야만 했던 겁니까?”


나는 이번에도, 악몽의 밑바닥까지 추락하고 만다.




***




“...벌써 나흘째라니. 이건 저번보다 더 골치가 아픈데.”


캐비저는 뿔을 벅벅 긁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리부터 거꾸로 붙잡고 흔들어봐도, 바닥에 이리저리 패대기쳐봐도, 고탑 지붕 위에 밧줄로 묶어 하루종일 찬바람을 쐬게 해봐도.

그 외에도 그의 완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전부 시도해봤음에도, 마왕은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뭐 다른 방법이라도 없나?”


뭔가 새로운 방법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그렇게 중얼거려보았지만, 그와 함께 머리를 모아줄 만한 사람들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더··· 더는 못해에···”


세로테는 잠도 안 자고 이틀 내내 마왕의 꿈에 뛰어들었다가 완전히 녹초가 되어, 끙끙 앓으며 온몸에서 땀을 뻘뻘 흘리는 중이었고.


“네. 없습니다. 네. 없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캐비저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던 라 베치도, 이제는 영혼이 없는 인형처럼 맥없이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캐비저는 영 탐탁지 않은 얼굴로 혀를 찼다.


“쯧, 장로 그 늙어빠진 노인네는 땅으로 솟은 건지 하늘로 꺼진 건지··· 평소에는 온갖 잘난 척을 다하면서 이럴 땐 도움이 안 되는구만.”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지는 것이겠지? 무식한 건 세월이 지나도 고쳐지지 않는구나.”

“!”


마법을 이용했는지 기척도 없이 지근거리에 나타난 플로시우스의 목소리에, 캐비저는 반사적으로 펄쩍 뛰어오르며 경계 자세를 취했다.

평소와 같이 뒷짐을 진 채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있는 장로를 향해, 그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장로! 이제껏 어디 가서 뭘 하고 있었나?”

“내가 자네의 부하도 아닌데 그런 걸 보고할 의무는 없지.”

“이런 긴급한 상황에 그딴 말이 나오나? 빨리 어떻게든 대책을 생각해보란 말이다.”

“오호, 대책이라···”


두꺼운 수염 아래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는 플로시우스의 얼굴을 보며, 캐비저는 영문 모를 불안감이 자신의 어깨를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자네는 지금 저 자의 모습을 보고도, 예전의 위세와 권위를 떠올릴 수 있는가?”

“...그게 무슨 소리냐?”


캐비저의 되물음에 플로시우스는 길다란 검지손가락을 옆으로 뻗어 잠들어 있는 마왕을 가리켰다.

평소에는 불경한 행위라며 마왕의 앞에서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던 그가 할 거라고는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신하가 그 주인된 자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무례한 행위.


“잘 보거라, 어리석은 만용에 눈이 가려진 자여.”


플로시우스의 등 뒤에서, 꿈의 세계에 숨어 있던 서큐버스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제각기 손에, 캐비저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떠한 세계의 기억을 받쳐든 채였다.


“이것이, 저 자가 지금까지 네게 숨겨온 진실이다.”


서큐버스들이 일제히 꿈의 구슬을 내려놓자, 캐비저의 눈앞에 누군가의 수많은 삶의 장면들이 동시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내 목표가 뭐냐고? 들으면 분명 비웃을 텐데. 얘기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냥··· 아니, 진짜 듣고 싶다고? 농담이··· 아니라고?>

<나같은 사람보다 대표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너희들의 판단 기준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네···>

<이, 이러는 이유가 대체 뭐냐! 나는 평범한 과학자일뿐··· 크헉!>


눈을 열심히 굴려 장면들을 연결해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제멋대로 펼쳐지는 기억들 사이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나는 하나의 공통적인 핵심 사고가 있었다.


한 남자가, 세계를 지배하는 압도적이고 공포스러운 힘에 저항하는 꿈을 꾼다.

그러나 허황된 꿈은 꿈일뿐, 그것을 현실로 옮겨놓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

있는 힘껏 꿈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남자는 자신이 결국에는 실패할 것이라 생각한다.

미끄러지거나 넘어질 때마다 실패에 대한 남자의 불안은 점점 확신으로 바뀌어가고, 결국 그 무엇도 바꿀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서-


“어우, 눈 아파. 이런 쓸데없는 건 뭣하러 보여주는 거냐?”


캐비저가 두꺼운 손을 휘둘러 기억을 치워버리며 투덜거리자, 플로시우스는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어리석기 그지없는 놈···보고도 모른단 말인가? 저 자는 마왕이 아니다. 마왕의 껍질을 뒤집어쓴 가짜란 말이다.”

“...언제부터 그랬던 거지?”

“아마 플레이크가 죽은 직후였을 거다. 그놈은 그 때부터 지금까지 한 달 동안, 거짓으로 마왕을 연기하며 너를 속여왔단 말이다.”

“...”


캐비저의 눈 아래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플로시우스가 신호를 보내자, 서큐버스들이 꿈의 구슬을 실타래처럼 풀어 캐비저의 주변을 감싸듯 둘러쌌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주변에서 받쳐주기에 어찌저찌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긴 하지만, 이건 나의 힘이 아니야.>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 동경하는 영웅처럼, 누군가에게 힘을 주는··· 용기가 필요할 땐 등을 밀어주고, 절망에 빠져 허우적댈 때엔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


“보아라, 이것이 그 안에 들어 있는 나약한 자의 정체다. 설령 마왕의 껍질을 쓰고 있다한들 대체 어떻게 이런 자에게 우리를 이끄는 왕의 지위를 맡길 수 있겠는가?”

“...확실히 그렇군. 나로서도 도저히, 이런 자를 믿고 따를 수는 없겠어.”


타인의 기억에, 지나가버린 꿈에 둘러싸인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캐비저의 모습을 본 플로시우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흐흐흐··· 그래도 늦게나마 깨달았으니 다행이로구나. 그렇다면 자, 수인왕 캐비저여. 자네가 이제부터 할 일이 무엇인지도, 물론 잘 알겠지?”

“네 말대로다. 이런 상황이라면··· 내가 해야 하는 일 또한 명확하군.”


침대 쪽을 흘긋 돌아본 캐비저가, 말없이 등에서 도끼를 뽑아들었다.

매일 같이 손질을 게을리하지 않은 그의 거대한 도끼는, 방금 막 대장간에서 주조된 무기처럼 도끼날의 끝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


세로테는 여전히 쓰러진 채 신음하고 있었고, 방금까지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던 라 베치의 동공에는 이제야 희미한 빛살이 돌아오려는 참에-


부우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캐비저의 도끼가 날카로운 호를 그리며 휘둘러졌다.


“!!”


그리고 벌어진 상황에 장로 플로시우스는, 눈을 부릅뜬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네, 네이놈···!”


캐비저의 도끼날과 자루 사이에 있는 반달 모양의 틈에, 어느새 그 자신의 목이 끼워져 있었던 것이다.

두려움에 앞서 흥분과 분노가 머리 위로 치고 올라와, 장로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튀기며 소리치고 말았다.

“이 모든 걸 알려주었는데도 여전히 깨닫지 못한단 말이냐···! 저 자는 우리를 파멸로 몰아넣을 자다. 용사에 대항해서 왕국을 지켜낼 자가 아니라, 용사를 동경하고 멋대로 뒤따라가 우리를 배신할 자란 말이다···!”

“그래서?”

“뭣이···?!”


캐비저의 다른 한 손에는 재생되다만 꿈의 장면이 꽉 움켜쥐어져 있었다.

그가 손을 놓자, 구겨진 기억이 도로 펼쳐지더니 누군가의 조용한 독백을 재생하기 시작했다.


<나 자신에게 행복의 자격이 없다고 해도, 내 꿈이 현실로 이뤄질 가능성이 없다 해도, 적어도··· 적어도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준 이들의 행복만큼은 지켜내야 해.>


캐비저는 떠올렸다.

목숨을 걸고 용사의 검에 맞서던 라 베치의 뒷모습을.

마왕성으로 향하는 길에서, 둘이 나란히 드러누워 쬐었던 모닥불의 따뜻함을.

순간 목덜미가 서늘해질 정도로 날카롭게 파고들던 라 베치의 비수를.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간질거림이 가슴 한가운데에 싹튼 것을 깨달은 어느 순간의 당혹감을.

자신을 향해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 라 베치의 얼굴을.


“타인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그 행복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대체 어디가 잘못 되었단 말이냐.”


그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봐주었던 누군가의 시선을, 그는 떠올렸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용사를 동경하는 마왕이 되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8 D-15 24.04.08 1 0 13쪽
47 D-16 24.03.25 2 0 14쪽
46 D-17 24.03.03 4 0 13쪽
45 D-18 24.02.28 5 0 13쪽
44 D-19 24.02.17 7 0 13쪽
43 D-20 24.02.16 6 0 14쪽
42 D-21 23.08.17 16 0 13쪽
41 D-22 +2 23.08.06 19 1 12쪽
40 D-23 23.07.23 17 1 13쪽
39 D-24 23.07.14 14 1 12쪽
38 D-25 23.07.11 17 1 11쪽
37 D-26 23.07.09 15 1 11쪽
» D-27 23.07.08 20 1 11쪽
35 D-28 23.07.03 20 1 12쪽
34 D-29 23.07.02 20 1 12쪽
33 D-30 23.07.01 21 1 12쪽
32 D-31 23.07.01 25 1 12쪽
31 D-32 23.06.29 21 1 10쪽
30 D-33 23.06.28 22 1 11쪽
29 D-34 23.06.26 22 1 11쪽
28 D-35 23.06.24 25 1 10쪽
27 D-36 23.06.22 25 1 11쪽
26 D-37 23.06.18 31 1 13쪽
25 D-38 23.06.18 22 1 11쪽
24 D-39 23.06.17 27 1 11쪽
23 D-40 23.06.15 37 1 11쪽
22 D-41 23.06.14 24 1 10쪽
21 D-42 23.06.13 24 1 11쪽
20 D-43 +1 23.06.11 27 2 10쪽
19 D-44 23.06.11 38 2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