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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정의 고로케

용사를 동경하는 마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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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정
작품등록일 :
2023.04.15 13:36
최근연재일 :
2024.04.08 18:25
연재수 :
48 회
조회수 :
1,470
추천수 :
63
글자수 :
260,684

작성
23.06.15 18:34
조회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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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11쪽

D-40

DUMMY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저 멀리, 노을이 저무는 지평선의 끝에서 터벅터벅 걷고 있는 성왕의 군대를 보며 코다가 투덜거렸다.


“저 자식들은 대체 언제까지 쫓아올 거래? 곧 있으면 신성 왕국 국경인데, 우리가 남부 왕국으로 넘어가도 따라올 건가봐?”

“와아, 그렇게 되면 침략이 아닐까요?”


환하게 웃으면서 무서운 말을 입에 담는 루드밀라는, 더 이상 이전까지의 초라한 약초꾼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이드와 코다가 개고생을 하던 며칠 동안 성왕의 귀빈으로 그와 함께 지내며 신앙심을 온몸에 담뿍 채운 그녀는, 성왕에 의해 즉석에서 신성 왕국의 여사제로 임명되어 이제는 황금색과 흰색이 섞인 고귀한 사제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야, 하이드. 뭐라고 좀 해봐.”


말없이 저만치 앞서가는 하이드를 부유 마법으로 단숨에 따라잡은 뒤, 코다는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속삭였다.


“뭘.”

“말 좀 해보라고. 저 새끼들, 저러다가 진짜 국경까지 넘게 생겼는데.”

“알아서 하겠지. 넘고 싶으면 넘으라 그래. 남부 왕국에도 국경 수비대가 있으니 알아서 대처할 거고.”

“그러다 귀찮게 우리 앞길까지 막히면 어쩌게?! 가뜩이나 심란해 죽겠는데 걱정거리가 될 만한 일은 진작에 없애버리면 안 되냐?”

“...”


하이드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답지 않게 미적미적 발을 질질 끌며 앞으로 나아갔다. 일행의 맨 앞에는 어린아이처럼 기운 넘치는 작은 천사 하나가 이리저리 부산스럽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루르.”

“응? 불렀느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길가에 핀 민들레 한 송이를 관찰하던 성왕 루르에리트가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이드에게로 향했다. 그 얼굴을 보자 다시 한 번 한숨이 새어나오려는 것을, 하이드는 목구멍이 힘을 꽉 주고 참았다.


“네 친구들. 언제까지 따라오게 할 셈이지? 이제 곧 국경인데.”

“아하하, 쟤네들? 괜찮아~ 쟤네들도 눈치코치 다 있지. 그냥 나 떠나는 게 아쉬워서 배웅해주려고 따라오는 거니까, 그대는 걱정 안 해도 될지어다~”


반말과 고상한 말을 섞어가며 빙긋빙긋 웃어대는 루르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하이드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불과 10시간 전. 오늘 아침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흐아암~ 이 꼭두새벽부터 대체 누구-”

“와아, 성왕님! 보고 싶었어요!”


새벽닭이 울기도 전에 여관에 도착한 루드밀라가, 아직 잠이 덜 깨 비틀거리는 성왕을 향해 두 팔을 벌리며 덩치 큰 새가 절벽 끝에서 날아오르려는 것처럼 있는 힘껏 뛰어들었다.


“하하! 밀라, 어딜 갔다가 이제 온 게냐?”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던 게 언제였냐는 듯, 벌새처럼 날렵하게 공중을 날아 그 습격을 피한 성왕이 여유롭게 웃으며 루드밀라에게 물었다.


“에구! 아파라··· 헤헤, 동료 분들이 도와주셔서 안전한 곳에 있다가 왔지요~!”


바닥에 턱을 꽝 찧고도, 루드밀라는 헤헤 웃으며 벌떡 일어섰다. 이제껏 본 적 없는 화려한 사제복을 입은 그녀였지만, 그 옷을 입고도 수풀을 헤치고 다니기라도 한 것인지 그녀가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작은 잡초 조각들이 아래로 우수수 쏟아졌다.


“하하! 그 옷을 만드는데 이몸이 직접 자아낸 금실이 얼마나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추기경들조차도 바닥에 쓸릴세라 옷자락을 조심스럽게 쥐고 다니거늘.”

“괜찮아요~ 해지면 꿰매서 입고 다니면 되잖아요? 성왕님께서 주신 옷이니까 오래오래 잘 고쳐서 입고 다닐게요~!”

“하하하하! 입은 옷이 달라져도 밀라는 밀라군. 늙은 추기경들을 대하는 식으로 화를 내도 아무 소용이 없다니!”


성왕은 여관 방이 떠나가라 웃어댔다. 그 높은 웃음소리에 옆방의 문이 열리고, 2시간 전까지 성왕을 감시하기 위해 불침번을 서고 있었던 코다가 다크서클이 코끝까지 내려앉은 얼굴로 나타났다.


“아이씨, 뭐야··· 사람 잠도 못 자게-”


비틀비틀 걸어나오던 코다는 먼저, 정면에서 부동자세로 우뚝 서 있는 하이드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살짝 아래로 내려가서, 곱슬거리는 금발머리를 가진 거대한 생명체를 발견하고, 그리고-


“?”


그 생명체가 꽉 끌어안고 있는, 웃고 있는 작은 천사를 발견했다.


“???”


슉. 슈슉.


아직 잠이 덜 깬 상태인데도 어지간히 충격이 큰지 두 눈과 입을 한껏 벌린 채, 코다는 하이드를 향해 두 팔 두 다리를 모두 사용한 괴상한 바디 랭귀지를 선보였다.


“...”


하이드는 그녀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전혀 이해할 수 없으니 가서 잠이나 자라는 뜻이었지만, 코다에게는 다른 뜻으로 전달되었는지 그녀의 이마에 순간 핏줄이 돋아오르는 게 보였다.


“이런 씹-”

“어? 코다 씨! 일어나셨네요!”


발끈한 코다의 입에서 자동적으로 욕이 튀어나오려는 순간, 금발 곱슬머리의 거대 생명체는 타깃을 바꿔 코다를 향해 곧장 몸을 날렸다.


“뭣- 우와악!”


쿠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여관 바닥에 먼지가 풀썩 피어올랐다.

먼지가 가라앉은 뒤 하이드의 눈에 보인 것은, 그야말로 대형견이 자기보다 덩치가 작은 주인을 껴안고 마구 핥아대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헤헤, 저는 성왕님도 좋지만, 코다 씨가 더 좋거든요!”

“시··· 끄러, 이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지조 없는 여자 같으니··· 이 무거운 덩어리나 좀 치워!”

“코다 씨는 몸이 항상 따뜻해서 좋아요~ 햇빛에 달궈진 돌멩이를 안는 느낌?”

“내가 네 애완 돌인줄 알아?!”

“어, 코다 씨 얼굴이 엄청 졸려보이네요! 이거 먹을래요?”


그 모습을 보던 하이드는 머리를 덮치는 강렬한 기시감에 눈썹을 찌푸렸다. 그와 반대로 성왕은 눈을 더욱 반짝이며 흥미로운듯 감탄사를 연발했다.


“오호라, 호오··· 그토록 두텁고 견고한 신앙을 품고 있으면서도, 짐보다도 동료들이 더 소중하다는 말이냐? 함께한 시간으로 따져도 그렇게 오랜 인연은 아닐진대.”


완강히 거부하는 코다의 입에 억지로 피로 회복에 좋은 약초를 쑤셔넣던 루드밀라가, 성왕의 말에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입술에 손가락을 얹은 채 고민하던 그녀는 이내 천천히 입을 열어, 그 물음에 답했다.


“음··· 저는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요. 성왕님하고는 즐겁게 놀았던 기억밖에 없잖아요? 그런 건 시간이 지나다보면 아, 즐거웠다. 이 사람하고 같이 있을 때는 늘 좋은 분위기였네~ 하는 느낌만 어렴풋이 남지만, 하이드 씨랑 코다 씨하고는 몇 번이나 죽을 뻔한 위기를 이겨내면서 함께 살아남아온 기억이 있으니까요.”


스스로 생각해도 꽤나 자랑스러운 기억이었는지, 루드밀라는 벌떡 일어나서 허리에 손을 올리고 가슴을 당당하게 편 채 선언했다.


“그 기억들은, 제가 늙어서 손주가 30명이나 되는 꼬부랑 할머니가 되더라도 절대 잊지 못 할 걸요!”

“...그 정도인가?”

“그럼요!! 이글거리는 햇빛과 쏟아지는 장대비를 이겨낸 후에야 비로소 아름다운 꽃과 몸에 좋은 약초가 피어나는 거랍니다. 성왕님도 한 번만 겪어보면, 앞으로 천년을 더 살더라도 잊지 못하게 되실 거예요. 제가 장담해요!”

“...”


새벽과 한낮의 시간 차이 때문일까, 아니면 권능을 점점 잃어가는 만큼 성왕 자신의 인간적인 면모가 되돌아오고 있기 때문일까. 성왕의 얼굴은, 정원에서 하이드에게 세계의 멸망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보다도 더 어두워보였다.


“...정말 그렇다면.”


작게 한숨을 내쉬는 성왕의 목소리는, 잔뜩 겁에 질린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혹은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에 대한 기나긴 후회를, 질식하지 않도록 최대한 천천히 토해내는 것 같기도 했다.


“나도, 그대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어떤 기억들을 가지게 되었을지··· 참으로 궁금하구나.”

“지금이라도 괜찮아요! 같이 갈래요?”

“뭐?” “뭐?” “뭐···라고?”


세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성왕의 말만이, 혜성이 꼬리를 그리듯 좀 더 길게 이어졌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같이 가요, 성왕님! 아니, 같이 갈 거면 이제는 루르라고 불러야 할지도?”





···그런 연유로, 일행은 뜻밖의 동료를 새로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 —---, —, —----!!”


차마 종이 위에 옮겨 담을 수 없는 욕을 3분 간격으로 중얼거리는 코다 덕분에, 하이드 또한 신경이 곤두설대로 곤두서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코다가 지금 느끼고 있을 감정들을 고려해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지. 오히려 이해가 어려운 건 성왕의 저토록 이중적인 태도이다. 그런 말 몇 마디에 넘어올 정도로 정신이 흔들리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행동들을 태연자약하게 저지를 수 있는 건지··· 아니면 내가 너무 그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건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자유롭게 공중을 날아다니는 루르의 뒷모습을 보며, 하이드는 그간 자신의 행동과 태도를 천천히 되돌아보았다. 오랜 여행길에서 사고방식이 너무 굳어버린 것은 아닌지, 바꿀 수 없다고 지레짐작하고 포기해버린 것들이 너무 많지는 않은지.


“코다여··· 나의 동료여. 헌데 그대는 왜 이다지도 입이 거친가? 분명 명문가의 여식이라고 들었는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가정교육을 못 받기라도 한 것인지?”

“이런 —, —, –,---------- 같은 —가-”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스스로 굳은 결심을 한다면,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릴 수도 있겠지. 그러니 변화의 여부는 다른 사람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본인에게 달린 것이다.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 지금은 이 새로운 흐름에 몸을 맡기도록 할까.’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약간은 가벼워지는 듯했다. 그는 팔을 뻗어, 한손으로는 부들부들 떨리는 코다의 어깨를 붙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쉴새없이 욕이 튀어나오고 있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읍! 으읍! 으브브읍!”


자신의 차가운 손이, 그녀의 분노를 조금이라도 식힐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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