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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정의 고로케

용사를 동경하는 마왕이 되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토끼정
작품등록일 :
2023.04.15 13:36
최근연재일 :
2024.04.08 18:25
연재수 :
48 회
조회수 :
1,464
추천수 :
63
글자수 :
260,684

작성
23.06.24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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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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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D-35

DUMMY

살아있는 생명을 제 손으로, 제 의지로 끊은 것은 3살 때가 처음이었다.


“하이드, 잊지 말거라. 끊을 때는 끊어야만 한다는 것을.”


아직 숨통이 끊어지지 않아 다리를 버르적거리는 토끼를 들고 가자, 아버지는 차가운 눈으로 그를 향해 그런 말을 했었다.

그는 하이드가 결국 자기 손으로 토끼의 경동맥에 <자비>를 찔러넣기 전까지, 아무 말도 없이 계속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왜 생명을 빼앗는 것이 자비인가.

생명은 이다지도 죽음을 두려워하며, 그 어떤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죽음의 위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데.


“언젠가는 알게 될 거다. 때로는 이 질기기 그지 없는 생명줄을 대신 끊어주는 것이야말로, 누군가에게는 자비가 될 수 있다는 걸.”


사슴을 사냥하면 알 수 있을까? 여우는? 늑대는 어떨까?

아니면 곰이나 호랑이 같은 무시무시한 맹수는 어떨까?


열 살 무렵, 그는 숲에 있던 모든 짐승들을 사냥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질문에 대한 해답은, 그 어떤 짐승의 피에서도 얻을 수 없었다.

피는 늘 그의 손을 감도는 체온보다 뜨겁게 꿈틀거렸고, 한때 하나의 산을 통째로 호령하던 맹수의 죽음은 토끼의 죽음만큼이나 덧없고도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머지 않아··· 알게 될 거다.”


하이드가 처음으로 아버지의 목검을 튕겨내는데 성공했을 때, 그는 몹시도 음울한 어조로 그렇게 중얼거렸었다.

해가 갈수록 아버지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짙어졌다.

하이드가 성장해나갈수록 훈련은 더욱 매섭고 거칠어졌고, 언제부턴가 아버지는 훈련에도 날카롭게 갈아낸 진검을 사용하게 되었다.


챙!


“...이제는, 때가 되었다.”


진심을 담은 일격이 막힌 순간, 루크람은 검을 바닥에 집어던지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는 별안간 두 팔을 옆으로 활짝 벌리며 아들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자, 하이드. 지금 네 눈앞에 무엇이 보이느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커멓게 일렁이는 어둠이 눈앞을 가득 메워, 하이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없었음에도, 그는 어둠의 정체를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악. 이 세상의 모든 어둠을 한데 모아 빚어 만든, 순수한 악.”

“잘··· 대답했다. 그렇다면··· 악에게는, 무엇을, 해야··· 하지?”


아버지의 숨이 점점 거칠어져가고 있었다.

하이드는 눈앞에 있는 것이, 이제는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는 형체가 정말 자신의 아버지인가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세상을 악의 손아귀로부터 구하고 정의를 가져올 용사에게 의심 따위는 필요 없고, 대답은 처음부터 하나로 정해져 있었으니.


“징벌.”


악한 자에게는 징벌을, 선한 자에게는 자비를.

하이드는 아버지가 떨어뜨린 검을 집어들었다.

검자루를 손에 쥔 순간, 뜨겁고도 강렬한 적의가 손을 타고 그의 어깨로, 폐로, 심장으로 스며들어 온몸의 혈관으로 퍼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카가각!


눈앞의 어둠이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러 공격하자, 그는 징벌을 휘둘러 맞받아쳤다.

징벌의 칼날이 닿을 때마다 어둠은 마치 뜨거운 불꽃에 휘감긴 것처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그대로 검을 연속해서 휘두르기만 해도, 어둠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산산이 흩어질 터였다.


“...왜, 망설이느냐.”


하이드는 검을 든 손을 멈췄다.

당혹감, 의구심, 이유를 알 수 없는 가슴 안쪽의 통증.

그런 것들이 한데 엉겨붙어, 그의 팔을 무겁게 하고 있었기에.


“끊을 때는··· 끊어야만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더냐.”

“어째서 그렇게 된 거야? 나도 언젠가는 당신처럼 되어버리는 건가?”


온몸에서 어둠을 피처럼 쏟아내며 헐떡거리는 아버지를 향해, 그는 조용히 물었다.

신의 뜻을 대리하여 세상에 정의를 가져오는 용사가, 어째서 어둠에 사로잡혀 저토록 괴로워해야 하는가.

만약 자신의 미래도 그와 같다면, 이 길을 가야만 하는가.


“...도망쳐도 된다, 하이드. 두렵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내가 준 모든 걸 버리고, 내가 가르친 모든 것도 잊고 도망쳐서 자유롭게 살거라.”

“자유···롭게? 자···유···?”


아버지의 입에서 한 번도 나온 적 없는 단어의 뜻을 알아내기 위해, 그는 잠시 그 단어를 곱씹었다.

그의 모든 것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었으므로, 아버지가 알려주지 않은 것을 알아낼 도리는 그에게 없었다.


“자유란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난 도망칠 수 없어. 당신이 내게 도망치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미안하구나.”

“괜찮아. 나는 당신처럼 되지 않을 거니까. 당신도 그러길 바래서 나를 이렇게 훈련시킨 거잖아?”

“...”


루크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할 말을 찾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말 한 마디 꺼내기 어려울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아진 걸까.

하이드는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며 물었다.


“아버지, <자비>가 필요해?”

“...내가, 선한 자로, 보이느냐··· 아직도?”

“그런 건 몰라. 14년을 당신과 같이 살면서 이런 어둠을 품고 있었다는 것도 처음 봤는데, 어떻게 선하고 악한지 알 수 있겠어.”


알 수 있는 방법은 있다.

그저 손에 쥔 <징벌>을, 악인을 향해 휘두르기만 하면 된다.

만약 그가 악인이라면, 징벌은 세상 그 무엇보다 뜨거운 불로 악을 태워버릴 테니까.

방금 어둠을 쉽게 베어냈듯이, 어둠 속에 가려져 있는 인간의 살갗과 근육과 뼈 또한.


“하지만 난 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들이 좋았어. 당신이 말해준 세상 여러 장소들의 이야기들도 좋았고, 당신과 여러 단련을 했던 날들도 힘들었지만 좋았어. 난 지금도 아버지가 좋은데, 그러면 나도 악인인 걸까?”

“...훗, 그럴 리가.”


힘없이 웃는 아버지를, 점점 고동이 꺼져가는 그의 심장을, 하이드는 허리춤에서 뽑아든 <자비>로 있는 힘껏 찔렀다.


“...고맙구나. 이런 나를, 아버지라고 끝까지 불러줘서.”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지는 몸을, 하이드는 최대한 반듯하게 바닥 위에 눕혔다.

심장에서 피가 울컥울컥 흘러나와, 햇빛을 받을 때면 하얗게 반짝이던 아버지의 망토가 점점 붉게 물들어가는 모습을 하이드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생명이 꺼져버린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어둠이 자신의 팔을 타고 기어오르는 모습도, 그에 반응한 <징벌>이 자신의 온몸을 태워버릴 기세로 뜨겁게 달아오르는 모습도.


“당신이 가르쳐준 건, 전부 기억하고 있어.”


한참을 말없이 지켜본 뒤, 하이드는 완전히 검붉은색으로 물들어버린 망토를 등에 걸치며 중얼거렸다.


“당신이 남겨준 것도, 그 무엇 하나 버리지 않을 거고.”


징벌을 등에 메고, 자비를 다시 허리춤에 꽂아넣는다.

그 외에는 챙길 물건 하나 없이 텅 빈 오두막이었으나, 하이드는 어째선지 미련이 남은 눈으로 오두막을 몇 번 돌아보았다.

그런 그의 몸에서 어둠이 피어올라, 빨리 길을 떠나자고 재촉하는 듯이 망토 자락을 잡아당겼다.


“이 어둠까지도, 전부.”



***


왜 그 기억이 떠오르는 걸까.

사람의 죽음 같은 건 질리도록 겪은 일인데.

특히 그 죽음은, 이제 와서는 별 의미 없는 일인데도.


“그대는 정말, 인간이 맞긴 한 건가?”

“...”

“하하하! 고작 한 명의 인간에게 저렇게 많은 어둠이 있다니. 평범한 삶을 살다가는 평범한 인간이라면, 설령 오백 년을 산다 해도 그대 정도는 아닐 것이다.”


정체 모를 권능에 의해 실체화된 어둠은, 하이드의 온몸을 감싼 채 안개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내 잘못이야··· 내가 부족해서··· 내가 쓸데없이 자존심을 세워서···”

“으흐흑··· 슬퍼요··· 이 세상이··· 이 세상을··· 당신들은··· 모르겠죠···”


각자 자신의 어둠에 휘감긴 채 쓰러져 신음하는 두 사람과 달리 하이드는 약간 이마를 찌푸렸을 뿐,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굳건한 자세로 서 있었다.

정작 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은 이 통로를 가득 채우고도 흘러넘칠 만큼 많았는데도.


“그대는 보면 볼수록 재미있는 존재야. 아하하하, 따라나오길 정말 잘했어!”


그런 하이드를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며 웃어대던 루르의 시선이, 쓰러져 있는 두 사람에게 닿은 순간 차갑게 돌변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어··· 그대라면 굳이 이런 평범한 물건들을 짐짝처럼 데리고 다닐 필요가 없을진대.”


하이드는 구태여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조용히 돌아서서, 기다리기로 했다.


“...질 수 없어. 여기서··· 고작 이런 일 따위로···”


잠꼬대처럼 들려오는, 그러나 강인한 의지가 담긴 목소리에 하이드는 자기도 모르게 약간 미소짓고 말았다.


“나는, 절대로! 쓰러지지 않아!!!”


약간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일어나고야 마는 사람이 있다.

아주 잠깐 발을 멈추고 기다리기만 하면, 반드시 자기 발로 걸어와 옆에 나란히 서는 사람.

울 때는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큰소리로 엉엉 울어대다가도 금세 기운을 차리고, 우울할 때는 광산의 바닥까지라도 전부 뚫고 내려갈 것처럼 기분이 가라앉아 있다가도 밝은 햇살 한 줄기에 희망을 되찾는 사람.


“나 지금··· 무지 열 받았어!!”


쾅!

강한 폭발음과 함께 세 줄기의 마법이 뻗어나가며 지저 전체를 무너뜨릴 듯이 강하게 진동시킨다.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전혀.”


툭하면 흥분해서 소리를 빽빽 지르거나 걸핏하면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지만, 마음의 근간에 자리잡은 선함이 흔들리는 일은 절대로 없는 사람.

비참한 세상의 모습을 보고 눈물 흘리면서도, 아름다운 세상의 꿈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람.


“그냥 이렇게··· 믿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 사람을, 아주 오래전부터 줄곧 기다려왔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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