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토끼정의 고로케

용사를 동경하는 마왕이 되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토끼정
작품등록일 :
2023.04.15 13:36
최근연재일 :
2024.04.08 18:25
연재수 :
48 회
조회수 :
1,501
추천수 :
66
글자수 :
260,684

작성
23.06.18 13:41
조회
22
추천
1
글자
11쪽

D-38

DUMMY

"잠깐, 꼭 이렇게까지 해야돼?"

"왜. 천하의 마왕놈이 이제 와서 후달리기라도 하나?"


캐비저는 내게 대놓고 도발적인 언사를 던졌지만, 지난 12년간 사람들로부터 온갖 모욕과 도발을 당해온 나다. 고작 이 정도로 흔들리지는 않지.


"그럴 리가. 어차피 정면 대결이든 기습이든 승산은 내게 있다. 용사 한 명에게 당해서 뿔을 수그리고 도망쳐온 주제에, 무슨 자신감으로 도전을 하겠다는 거지?"

"하, 내가 용사놈에게 졌다고 네놈에게도 질 거라고 정해진 건 아니지! 잔말 말고 싸울 준비나 해라."

"...도대체."


맛있는 식사와 후끈한 목욕에 이은 라 베치의 전신마사지, 세로테의 스타일링까지 받고 나서 완벽히 뽀송뽀송해진 나를 보더니, 캐비저는 뜬금없이 내게 도전장을 던져왔다.


'이 자식... 혼자 싱글벙글한 거 보니까 괜히 열받네. 야, 마왕! 한판 붙자! 밖으로 따라 나와!'

'무슨 동네 애들 싸움도 아니고... 그리고 싱글벙글한 적 없다.'

'나오라면 나와! 도전을 거절하지 않는 것이 우리 전사들의 규율 아니냐!'


그렇게 해서, 아무도 없는 새벽시간에 단 둘이 바람이 몰아치는 연병장에서 대치하게 된 것인데...


"흐흥, 이 좋은 구경거리를 그냥 놓칠 수는 없지. 마왕님~ 세로테가 이렇게 보고 있는데 당연히 이겨주실 거죠?"

".......수인왕 전하! 히. 힘내십시오!"

"에... 후엣취! 하이고... 확실히 겨울밤은 뼈가 시리는구만..."


세로테나 라 베치가 따라나올 건 예상했지만, 어디 소문을 낸 것도 아닌데 설마 장로 플로시우스까지 눈치를 채고 구경을 나올 줄은 몰랐다.

설마 저 음침한 노인네... 늘상 마왕성 전체를 감시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헤~ 뭐야, 벳치. 맨날 마왕님 마왕님 딸랑딸랑거리더니 본심은 역시 캐비저한테 가 있었던 거야?"

"엑... 오, 오해입니다 주군! 그, 그게...."


세로테의 짓궂은 말에 라 베치는 귀끝까지 빨개진 채 나를 향해 손사래를 쳤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에게는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후웅! 후웅!


"적을 앞에 두고...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 거냐, 이 한심한 놈!"


캐비저가 시작 신호도 없이 냅다 도끼를 휘두르며 나를 향해 달려 들었기 때문이었다.


"꺄~ 마왕님, 조심하세요~!"


긴장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세로테의 외침은, 캐비저의 도끼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소설 속에서도 충분히 묘사가 되었던 내용이기는 하지만, 눈앞에서 직접 보니 만전 상태의 캐비저와 대면한다는 것은 전에 없던 압박감을 선사하는 일임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라면... 가히 신인류의 완력에도 버금간다고 할 수 있겠어. 하이드가 괜히 섬광탄 작전을 짰던 게 아니군.'


그의 거대한 도끼가 공기를 가를 때마다 일어나는 풍압은 언젠가, 신인류 중 한 명이 나에게 그딴 연구는 당장 그만 두라며 위협적으로 눈앞에 주먹을 휘둘러보였을 때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소설에 묘사된 내용만을 완벽한 진실이요, 진리라고만 생각하고 그를 과소평가했던 것 같다. 손끝에서 뻗어나간 마법마저도 무식하게 도끼로 때려부숴버리는 캐비저의 모습을 보며, 나는 그에 대해 지금껏 가지고 있던 선입견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아까 전까지의 자신감은 어디 가고 피하기에 급급하신가? 내가 알던 마왕놈하고는 다른데?"

"...!"


이런, 너무 잡생각에 오래 빠져 있었던 걸까.

지금까지 잘 숨겨와놓고는 고작 이런 걸로 정체가 들통나서는 안 되지. 특히나 저 속을 알 수 없는 장로도 이 대결을 지켜보고 있으니... 여기서는 최대한 소설 속의 마왕처럼 행동해야겠다.


"흥, 이런 무식한 공격 따위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주제를 모르고 기어오르려고 한다면..."


이곳은, 다양한 마법을 조합해 무궁무진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세계.

간단하게는 불꽃 마법과 증폭 마법을 이용해서 거대한 불덩이를 만들어내는 것만으로도 위력적인 공격을 할 수 있지만, 여기에 아주 살짝 변주를 주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곤경에 빠뜨릴 수 있다. 가령-


"이런 치사한 자식! 사람을 쪄죽일 셈이냐!"


거대한 반구의 형태로 불의 벽을 만들어낸 뒤, 불길이 캐비저의 공격에 닿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계속 유지하며 가둬놓는 것만으로도 손 하나 대지 않고 상대를 지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우와~ 캐비저. 맛있게 구워지겠네? 너무 슬퍼하지마, 고기는 마왕성 모든 식구랑 다 같이 나눠먹을 테니까!"

"이... 조잘조잘 시끄럽다, 서큐버스!"


수인왕의 지위를 공으로 차지한 게 아니라는 듯, 캐비저는 금세 돌파구를 찾아냈다. 불길이야 어떻든 신경쓰지 않고,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무작정 돌진을 시도한 것이었다.


"이런 무식한-?!"

"어, 아...?"


세로테가 자신을 덮쳐오는 불길을 피해 다급하게 공중으로 날아올랐지만, 불길에 갇힌 캐비저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던 라 베치의 반응은 늦었다. 앞에 있는 것은 모조리 들이받을 기세로 돌진하는 캐비저를 피해 달아나던 불길이, 미처 달아나지 못한 라 베치를 덮치려는 순간-


"...!"


치익.

내가 황급히 불길을 꺼뜨린 것과, 캐비저의 돌진이 멈춘 것은 거의 동시였다.


"흠, 흐음..."


어느새 뒤로 멀찌감치 물러나 있던 장로 플로시우스가 작게 감탄사를 내뱉는 것이 들렸다. 눈치채고 만 것일까-라는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쳤지만, 그런 생각을 할 때는 아니었다.


"........."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눈을 한껏 부릅뜬 라 베치가, 그저 망연한 시선으로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을 올려다보고 있었기에.


"한심한 놈... 물러빠졌구나! 싸울 때는 모든 것을 이용해야 한다고 나를 향해 훈계를 늘어놓던 건, 바로 네놈이 아니었나. 고작 이런 얕은 수에 당황해서는-"


짝.


그것은 작은 소리였다. 캐비저의 목소리에 비해서도, 방금까지 라 베치의 온몸을 덮칠 것처럼 타오르던 불길에 비해서도. 너무나도 작아서, 귀에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소리.


"..."


그러나, 캐비저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게 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말없이, 한껏 위로 올라갔던 팔을 다시 아래로 떨군 채, 라 베치는 연병장을 떠났다. 달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새어나오는 울음도 목구멍 안으로 숨기고, 몇 방울 눈물만을 바닥에 흩뿌린 채.


"와."


그 말 많던 세로테도 감탄사 한 마디 이외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무거워진 밤공기. 그 무게를 이겨내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불길이 그의 몸을 너무 뜨겁게 만들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한 줄기 땀이 캐비저의 이마를 타고 내려와 턱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마왕님. 세로테는 갑자기 졸려서. 이만 자러 갈게요."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세로테는 꿈의 공간 너머로 모습을 감췄다. 장로 플로시우스도 뒤따라 말 한 마디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결국 바람이 멎은 연병장에 남은 것은 나, 캐비저, 그리고 차갑게 우리를 비추는 달빛 뿐이었다.

이내 그 달빛마저도 구름에 가려져 모습을 감추자, 나는 비로소 한 남자의 벌거벗은 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생전 처음 느끼는 이상한 감정에 당황한 나머지, 붉으락푸르락 상기된 얼굴.

이유를 알 수 없는 심장의 두근거림과는 별개로, 온몸을 두들겨부술 듯 강렬하게 몰려오는 후회의 파도.

마냥 서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으면서도,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우두커니 멈춰버린 두 다리.

마치 정체 모를 마법에 당하기라도 것처럼 팔에 힘이 쭈욱 빠져, 자기도 모르게 놓치고만 도끼.


뎅그렁.


침묵을 깨며 강렬히 외치는 듯한 소리. 너는 여기서 이러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지금 당장 가야할 곳이, 해야할 말이 있지 않느냐고 추궁하듯 날카롭게 고막을 울리는 소리.


내 귀에는, 도끼날이 바닥에 있는 힘껏 자신을 부딪치며 그렇게 외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이, 이봐. 나, 나는...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이런... 이런... 젠장."


방금까지의 험악한 기세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지 오래다.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것은 어쩔 줄을 모르고 그 두꺼운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당황하는 한 명의 남자일 뿐.

온몸에서 비오듯 땀을 흘리며 두꺼운 입술을 깨무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지나간 기억을 떠올렸다.


'선배, 저 진심이라니까요. 저 아무한테나 사랑고백 하는 여자 아니예요.'


제풀에 겁을 먹고 도망치기에 급급해, 의미 없이 놓쳐버린 시간을.


'에휴, 대학교 땐 친구들 연애 상담을 그렇게 많이 해줬었는데... 정작 내 연애사업은 아무도 진지하게 들어주질 않네요. 다들 이런 벽창호 같은 아저씨한테 매달리기에는 네가 아깝다는 소리나 해대고.'


그저 자신의 진심을 똑바로 바라보기만 했다면, 더욱 행복할 수 있었던 기회를.


'서, 성공... 인거죠? 이거, 정말인거죠? 우리가 드디어 성공한 게, 맞는... 거죠? 선배, 저 뺨 좀 꼬집어주세요...!'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기억마저도 언젠가 흐려져 잊혀지고 말, 기쁨으로 가득 찬 한 사람의 얼굴을.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 어리석음의 형태라면, 타인이 나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비겁함의 형태이다.


"지금 당장 쫓아가.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테니까."


홀린 듯이 도끼도 내팽개쳐둔 채 달려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잘 해결되면 좋겠네..."


설령 일이 잘못 되더라도 이제 내 책임은 없다. 나는 그 한 걸음을 떼지 못해서, 여기까지밖에 모르니까.


"부럽구만~ 젊다는 건 참 좋네."


플로시우스의 입에서나 나올 법한 소리를 중얼거리며, 나는 다시 구름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달빛을 벗삼아 연병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새벽밤의 공기는 퍽이나 차가워서, 닳아버린 마음을 식히기에는 딱 좋았으니까.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용사를 동경하는 마왕이 되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8 D-15 24.04.08 1 0 13쪽
47 D-16 24.03.25 2 0 14쪽
46 D-17 24.03.03 4 0 13쪽
45 D-18 24.02.28 5 0 13쪽
44 D-19 24.02.17 7 0 13쪽
43 D-20 24.02.16 6 0 14쪽
42 D-21 23.08.17 16 0 13쪽
41 D-22 +2 23.08.06 19 1 12쪽
40 D-23 23.07.23 17 1 13쪽
39 D-24 23.07.14 14 1 12쪽
38 D-25 23.07.11 17 1 11쪽
37 D-26 23.07.09 15 1 11쪽
36 D-27 23.07.08 20 1 11쪽
35 D-28 23.07.03 20 1 12쪽
34 D-29 23.07.02 20 1 12쪽
33 D-30 23.07.01 21 1 12쪽
32 D-31 23.07.01 25 1 12쪽
31 D-32 23.06.29 21 1 10쪽
30 D-33 23.06.28 22 1 11쪽
29 D-34 23.06.26 22 1 11쪽
28 D-35 23.06.24 26 1 10쪽
27 D-36 23.06.22 25 1 11쪽
26 D-37 23.06.18 32 1 13쪽
» D-38 23.06.18 23 1 11쪽
24 D-39 23.06.17 27 1 11쪽
23 D-40 23.06.15 38 1 11쪽
22 D-41 23.06.14 24 1 10쪽
21 D-42 23.06.13 24 1 11쪽
20 D-43 +1 23.06.11 27 2 10쪽
19 D-44 23.06.11 38 2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