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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정의 고로케

용사를 동경하는 마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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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정
작품등록일 :
2023.04.15 13:36
최근연재일 :
2024.04.08 18:25
연재수 :
4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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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0
추천수 :
66
글자수 :
260,684

작성
23.06.11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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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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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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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D-43

DUMMY

"이 세상의 중심은 어디일까?"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답할 것이다.


"당연히 신성 왕국이지. 대륙의 가운데에 딱 박혀 있잖아."


반면 누구보다 우주의 신비에 대한 탐구심이 강한 코다라면 이렇게 되물을 것이다.


"우선은, 그 중심이 이 땅 위에 있을 거라는 고정관념부터 버리고 생각해볼까?"


장로 플로시우스라면 분명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겠지.


"사람들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사옵니다아...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오늘 저녁에 무엇을 먹을까라는 문제이오니이... 폐하께서는 풍족한 오늘 저녁을 약속하여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으셔야 하옵니다아... 자고로 병법서에 이르기를... 아하하하!"


어디서 났는지 모를, 옥수수수염을 잔뜩 엮어 만든 가짜 수염을 입가에 달고는 플로시우스의 흉내를 내던 세로테가 제풀에 온몸을 뒤집으며 깔깔 웃어댔다.


"제, 제게 세상의 중심은 언제나 마왕님이었습니다!"

"캐비저가 아니고?"

"그...! 아, 아닙니다!! 저에게는 마왕님이 늘 1순위입니다!"


한편 라 베치의 경우에는 충성심이 지나쳐 거의 아첨으로 들릴 정도이지만... 저 정도는 호위 무사가 가질 올바른 마음가짐이라 치고 넘어가자.


"뭐, 이런 얘기를 하려고 부른 건 아니니까 편하게 있게. 오늘은 그대에게 약간의 조언을 구해보고자 부른 것뿐이니."

"제, 제가 마왕님께 감히 도움이 되는 조언을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분명 소설 속에서는, 아니 처음 빙의한 날까지만 해도 라 베치는 최대한 짧게 할 말만 하고, 부르지 않으면 몇 시간이고 그림자 속에서 말 한 마디 없이 숨어 있던 성격이었는데.

이걸 캐붕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인격적인 성장이라고 해야 할지.


"상상을 해봐. 만약 자네가 아주 강한 적과 싸우고 있는데, 적이 너무나 강해서 결국 숨겨뒀던 비장의 무기까지 전부 동원해야할 지경에 몰린 거야."

"어... 네. 제가 상상력이 부족하긴 하지만 열심히 상상해보겠습니다!"

"그런데, 비장의 무기를 꺼내려고 품속을 뒤지는 순간... 그 무기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은 거지!"

"흐어억?!!!"


진짜로 놀란 것처럼 숨을 토해내는 라 베치의 모습에, 나는 더욱 신이 나서 과장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적의 품 속에서도 똑같이 비장의 무기가 사라져버렸던 것이라네!"

"으...어어어?!?!"

"이런 상황에서, 자네는 어떻게 하겠나?"


라 베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혼란에 빠진 것 같았지만, 이건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적확한 비유일 뿐이다.


며칠 전, 루드밀라가 성왕의 오른팔에게 체포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직후.

나는 기억의 샘을 두레박으로 한 방울도 남김없이 전부 긁고 또 긁어낸 끝에 하나의 대목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었다.


125화, 신성 왕국 에피소드가 마무리되고 일행이 다시 여정을 시작한지 며칠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흐아암~ 어? 루드밀라, 꼭두새벽부터 뭐하고 있어? 또 근처 수풀에서 약초라도 캐온 거야?]

[아하하... 아니요, 코다 씨. 대신 기도를 드리고 있었답니다.]

[기도? 네가? 의외네. 무슨 기도를 했는데?]

[네! 신님께 우리 일행이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드렸어요.]

[에헤이, 그거만 기도하면 안 되지~! 기왕 기도할 거면 뭐, 애인이라든가 생기게 해달라고도 빌지 그래?]

[아이참, 그건 너무 개인적인 소원이잖아요...]


코다와 루드밀라가, 다 쓰러져가는 교회에서 나누었던 대화.

짧고 의미없이 지나가는 대화였지만, 루드밀라의 신앙심을 증명하기에는 충분했다.


"어... 음... 저라면, 글쎄요...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증거는 그 외에도 더 있다.

원작의 흐름대로라면 성왕의 왼팔인 프로윈이 왔어야 할 텐데, 그 대신 이름도 모르는 오른팔이 등장한 게 그 증거다.


[나의 오른팔은 충만한 축복의 빛을, 그리고 왼팔은 자비로운 심판의 빛을 내리노니.]


애초에 원작에서 프로윈이 장례식에 등장한 이유는, 신성 왕국에 위협으로 인식되는 용사를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만약 성왕이 정말로 루드밀라를 이단이라 여기고 체포할 생각이었다면,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왼팔을 보냈을 터.


'루드밀라를 미끼 삼아 용사를 움직이고, 마침 용사 일행과 접점이 있던 실렌 레이에게 신성 왕국의 성물과 관련된 정보를 흘린다. 그 정보에 맞춰 용사 일행이 움직이면, 미리 고용해둔 용병단을 이용해 용사를 위기에 몰아넣는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짠, 하고 나타나서 용사를 구해내는 게 계획이었겠지.


"으음... 저라면, 우선은 상황을 파악하는 게 급선무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투에서 퇴각해서 주변 상황을 빠르게 살피고, 만약 이러한 일이 광범위하게 일어난 것이라면... 그 원인을 찾아야겠지요. 제 힘으로 원인을 찾을 수 없다면... 그때는, 마왕님께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의지하는 건 좋은데, 그 마왕이 지금 나거든.


"아! 그, 그래도 그림자족의 비전 암살술은 56가지나 되니까 다른 비장의 무기를 준비하면 됩니다. 어, 그런데 그 비장의 무기도 사라지면... 다른 암살술에 필요한 비장의 무기를... 그리고 또 사라지면...?!"


결국 해법은 없다. 이렇게 속수무책인 상황에서는, 다들 자기가 믿고 있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지는 법이니까. 의지할 사람이 없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직접 해결을 봐야할 거고.


'성왕에게도 의지할 사람 같은 건... 없겠지.'


그러니 제딴에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서 그런 계획을 짰을 것이다. 신성 왕국에, 또는 성왕 자신에게 일어난 돌발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개인으로는 가장 강한 무력을 보유한 용사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그러다 그만 실렌 레이를 죽여버렸으니... 적잖이 당황했겠군.'


그냥 적당하게 용사를 왕궁으로 부르고, 성대하게 대접하며 협조를 요청해도 되는 위치인데도 굳이 유리한 위치에 서려고 이런 계획을 꾸몄다는 건, 성왕이 어지간히도 욕심이 많은 성격이라는 걸 의미한다.


'그 멋진 계획이 틀어졌으니 성왕도 순간적으로 판단력이 흐려졌겠지. 어차피 중요한 건 용사 한 명일테니, 코다 레이를 감옥에 가두고 그녀를 인질 삼아 하이드의 협조를 구할 생각이었겠군.'


퍼즐이 착착 맞춰지는 게 아주 기분이 상쾌하다. 아니, 사실은 매우 더럽다.


"잘도... 잘도 그런 추잡한 음모를 꾸몄단 말이지. 감히 나의..."

"예?! 마왕님, 제, 제가 뭔가 잘못 대답한 겁니까?!"

"아니야~ 그냥 마왕님 혼자 또 음침한 생각에 빠져서 그래. 신경 쓰지마 벳치~"

"베, 벳치요?!"


어떻게 보면 나도 의도치 않게 성왕의 음모 위에서 놀아난 셈이다.

내가 실렌 레이에 빙의해 용사 일행과 접촉했기 때문에 그가 성물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코다에게 이런 비극이 일어나고 말았으니.


'코다에게는 미안하게 되었군.'


결국 이렇게 된 이상 나도 상황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다.

병법서에(내가 플로시우스는 아니지만, 손자병법 정도는 언급해도 되겠지?)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하였으니...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해야만 한다.

정말로 성왕이 나처럼 뭔가를 잃어버린 것인지, 잃어버린 게 맞다면 마력의 샘에 대응하는 그의 손실은 무엇일지.

더 나아가면, 이 상황을 발생시킨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지.


이 음모의 한가운데에 놓인 하이드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


"세상의 중심이 어디냐니... 그런 질문은 갑자기 왜 하는 겁니까."

"나한텐 상당히 중요한 문제거든. 자네의 고견을 꼭 듣고 싶다네."


에상치 못한 질문에, 하이드는 잠시 답변을 유보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색색의 꽃이 잔뜩 피어 있는 화려한 정원. 한가롭게 날개를 팔랑이며 배회하는 나비들.

세상의 중심은 몰라도,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장소라면 이곳을 뽑아도 될 정도로 온화한 분위기로 가득 찬 곳.


그런 정원 한가운데에 놓인 정자에서, 그는 성왕과 함께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왜 어린아이의 모습인 걸까.'


성왕이 어린아이라는 얘기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 무엇보다, 연도 자체가 서왕력으로 230년이 넘지 않았는가. 200년이면 곱고 통통한 뺨 위에 혈색이 도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다 말라빠진 해골바가지가 '나 성왕이요'하면서 나오는 게 더 적절할 정도의 나이다.


"그래서, 대답은?"


엉뚱한 질문을 해놓고는 눈을 반짝반짝 대답을 채근하는 성왕의 모습에서, 하이드는 이유 모를 조급함을 엿보았다.


'알았지? 상대가 조급해하면 할수록, 나는 천천히 접근해야 해. 그래야 상대가 못 참고 먼저 중요한 비밀을 뱉게 되어 있거든.'


언젠가 코다가 가르쳐준 협상술의 비기를 떠올리며, 하이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흐음... 글쎄요. 갑자기 그렇게 말씀하셔도, 앞뒤 사정을 모르니 '중심'이라는 말 자체의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운데 말이죠..."

"하~! 자네도 늙은 추기경들하고 똑같은 말투를 쓰는구만. 젊은 사람이 어디서 그런 못된 걸 배워와서는..."


성왕은 황금빛 곱슬머리를 벅벅 긁어대며 울상을 짓더니, 이내 한숨을 포옥 내쉬고는 작은 어깨를 아래로 떨구었다.


"그럼 어쩔 수 없이, 자네한테만 말하는 거니까... 어디 가서 누구한테 말하면 절대 안 되네."

"...네."

"이 세상은 지금, 멸망해가고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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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D-21 23.08.17 16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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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D-41 23.06.14 25 1 10쪽
21 D-42 23.06.13 25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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