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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에 노비가 왜구의 골통을 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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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도
작품등록일 :
2024.05.08 10:46
최근연재일 :
2024.05.16 13:08
연재수 :
10 회
조회수 :
1,633
추천수 :
85
글자수 :
54,237

작성
24.05.10 10:34
조회
198
추천
8
글자
13쪽

죽음의기운(死氣)

DUMMY

이른 아침, 오돌이 밤새워 휘갈긴 무경칠서의 두툼한 필사본은 상전 나으리의 침소 앞에 놓여 있었다. 잠도 한숨 못 잔 오돌은 눈이 붉게 충혈된 채 하품하며 마당을 쓸었다.


착 가라앉은 새벽공기를 닭 우는 소리가 깨부쉈고, 덩달아 상전 나으리도 일어났다.


“나으리, 기침하셨습니까?”


상전 나으리 임형태는 오돌의 아침 인사를 닭 울음소리마냥 흘려듣곤 제 침소 앞에 놓인 무경칠서 필사본을 살폈다. 그는 아직 제대로 마르지도 않은 먹 냄새를 기분 좋게 맡으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두영이가 밤을 새웠더냐?”

“예. 닭이 울고 나서야 몸을 뉘었습니다.”

“음. 서체가 많이 좋아졌구나.”


사실 오돌이 쏟아지는 졸음을 참으며 대충 휘갈겨 쓴 것이었다. 그 칭찬은 두영을 향했지만, 실제론 오돌을 향한 찬사였다. 그러나 오돌은 내색하지 않았고 공치사를 도련님에게 돌렸다.


“예. 도련님께서 무예 수련뿐만 아니라 글공부도 열심히 하십니다. 깨울까요?”


그래도 자신이 칭찬 들은 듯 기분은 좋았다. 임두영의 방에선 코 고는 소리가 요란했다. 임형태는 그 소리마저 귀엽다는 듯 눈에 호선을 그리며 답했다.


“되었다. 밤새 이걸 필사했으니 피곤할 테지. 두어라. 그런데 삼양댁은 아직 안 왔느냐?”


삼양댁은 삼양마을에서 두동골로 시집 온 아낙이었는데, 몇 해 전 마님이 돌아가신 이후부터 상전 댁 여종처럼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를 도맡았다. 하지만 그녀는 삯을 받고 일했고, 신분 또한 양인인지라 임형태가 그녀를 오돌이 대하듯 천시하는 일은 없었다.


“곧 올 겁니다.”



***



저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좁은 보폭의 경쾌하고도 빠른 걸음걸이,

그리고 아주 작은 아기 옹알이 소리도 함께였다.


‘삼양댁.’


아니나 다를까, 담장 위로 삼양댁이 깡충거리며 얼굴을 내비쳤다. 그녀의 등에는 아주 자그마한 아기가 새벽잠도 없는지 경박한 어미의 등에서 꺄륵거렸다.


오돌은 마당 쓸던 빗자루를 내려놓고 대문을 열었다.


“아이고, 나으리 제가 좀 늦었지요? 요 앞에 괜찮은 쑥이 있어서 좀 캐오느라. 국 끓이면 딱이에요. 어머? 토끼고기? 근데 두영 도령은 아직 자나 봐요?”


갑자기 빼액 울기 시작한 아기를 달래느라 제자리에서 통통거리던 그녀는 나리께 격의 없이 인사말을 던졌다. 그리고 나으리도 기분 좋게 맞받아쳤다.


“두영이가 조금 전까지 글공부하다 이제 잠들었소. 삼양댁 이것 좀 보시게! 이게 다 내 아들 두영이가 쓴 것이오. 하하 날 닮아서 아주 명필이지 않소?”


임형태는 오돌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어투로 제 아들 두영이를 자랑했고, 삼양댁의 귀여운 아들의 볼을 톡톡 건드리기까지 했다.


“어머 어머! 이걸 두영 도련님께서?”


임태형의 아들 자랑에 과장되게 장단을 맞춰 주던 삼양댁의 눈이 오돌이와 마주쳤다. 오돌은 황급히 그 시선을 피해 마당 쓸던 빗자루를 다시 찾아 들었다.


“정말 대단하네요!”


진심은 담겨 있지 않았다.


“그렇지? 허허허, 흘려 썼지만, 글자에 힘이 실려 있어.”

“에구구, 토끼는 누가 잡았대? 그런데 쌀은 아직 있지요?”


말 돌린 삼양댁의 질문에 대한 답은 오돌의 몫이었다.


“네. 충분합니다.”


명색이 양반가인지라, 곳간이 빌 리는 없었다. 상전 나으리께서 무반 말석이긴 하셨어도 권관에겐 무려 10결의 토지가 주어졌으니 괜히 양반이 아닌 것이다. 엔간해선 굶어 죽진 않으리라.


“토끼탕 끓이면 딱이네, 나으리 그럼 저는 밥 하러 가유.”

“수고하시게.”


임형태는 제 아들인 두영을 제외한 상민들에겐 아주 너그러운 양반이었다. 삼양댁은 장작 몇 개를 집어다 부뚜막에 던졌고, 나으리는 새벽 공기를 쐬러 대문 밖으로 나섰다.


뒷짐 진 그의 손엔 무경칠서 필사본이 들려 있었다. 필시 오늘 그를 마주치는 마을 사람은 그가 제 아들을 자랑하는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다.


“여름인데 장작을 많이도 해 놨다. 그런데 오돌이 너, 저거 네가 쓴 거지?”


삼양댁을 도와 부뚜막에 후후 바람 불며 불씨를 살리고 있었는데, 그녀가 갑자기 정곡을 찔렀다. 필사된 무경칠서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사실은 아무도 알아서 안 될 비밀인데....


“그럴 리가요.”

“내가 두영이 저걸 몰라? 저 개차반 돼지 놈이 글을 읽고 쓴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데 저걸 썼다고? 내가 까막눈이라 뭐라 쓴 건진 몰라도 두영이 저 화상이 쓴 게 아니란 건 확실히 알겠다.”


임두영의 코 고는 소리가 이곳까지 들렸다.

아침 해가 떠올라도 그에겐 한밤중인 것이다.


“아니에요. 도련님이 쓴 거에요.”


둘러댔지만 그녀는 믿지 않았다.


“에휴, 종놈 팔자 참 더럽다 더러워. 양반은 바라지도 않아. 그냥 상민(양반이 아닌 양인)으로 태어나기만 했어도 문무겸비 장군감인데.”

“쉿! 반상의 법도가 지엄한데 그런 얘기 누가 들으면 큰일 나요!”

“여기 누가 듣는다고? 그런데 오늘 장에 나간다 했지?”

“네. 장작도 내다 팔고. 곳간도 채우고. 할 게 많아요.”

“부지런도 해라. 네 상전은 참 복도 많다.”


삼양댁은 천민인 날 편견 없이 대해주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응애 응애!”


삼양댁이 밥을 올리고 국거리 토끼고기와 나물을 손질하던 중 아기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무덤덤하게 저고리 대충 걷어 젖혀 아기에게 젖을 물렸다. 아기 때문에 제대로 잠을 못 자기라도 한 것인지 자세히 보니 그녀도 나만큼이나 고되 보였다.


“에휴... 서방이라고 있는건 허구헌날 노름질에 술에... 내 팔자야.... 안 때리는 게 어딘가 싶지만 이러고 보면 차라리 밥걱정 없는 노비가 나은 것 같기도 하고.”


그녀의 신세 한탄도 이해가 가지만 그건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듯, 빌어먹고 살아도 양인이 나은 법이다.

하지만 노비 중에도 부자가 된 노비가 있듯, 양인 중에도 입에 풀칠하고 살기 힘든 이들이 많았다. 삼양댁이 딱 그런 경우였다. 그녀는 놈팽이 서방을 만나 삯바느질에 남의 집 종살이를 개의치 않는 삶을 살았다.


삼양댁처럼 신분은 양인이나 천역에 임하는 이들은 신량역천(身良役賤)이라 불리며 차별 받긴 해도, 그게 어딘가? 나 같은 사노비는 가축이나 다름없이 사고파는 재산으로 취급되는데.


“아, 참. 오돌아 오늘 장에 나가는 김에 우리 집 달걀 몇 개 있는 거 좀 내다 팔아줄래? 응?”


사실 그 말의 본뜻은, 장작 팔아 벌게 될 포목으로 삼양댁의 달걀 몇 개만 사 달라. 그런 이야기다. 그녀는 쌀 한 톨이라도 더 벌어야 하는 입장이었다. 딸린 애가 벌써 셋이고 애들의 아비는 천하의 놈팽이 노름꾼이니. 그녀의 팔자도 기구했다.


“네.”


아기에게 젖을 다 먹인 삼양댁은 젖가슴을 추스르며 아기를 향해 미소지었고, 아기는 엄마를 보며 꺄륵거리며 화답했다.

삼양댁이 가마솥을 살짝 들추자 고소한 밥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저절로 입안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런데 그 얘기 들었어?”

“무슨 이야기요?”

“저어기 옥분이네 있잖여. 옥분이네 키우는 암소.”


갑자기 맥락도 없이 웬 소 이야긴가 싶었다.


“송아지 낳다 죽었디야.”

“네?”


소는 노비보다 귀한, 아주 귀한 재물인지라 옥분이네가 안타깝긴 하다만,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사람도 애 낳다 죽는 경우가 허다한데.


“근데 그렇게 태어난 송아지를 세동골에 빼앗길 것 같다던디?”


하지만 이건 다른 경우였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그 송아지 씨앗이 세동골 억춘이 알지? 억춘이 상전의 숫소라는겨.”


빤한 그림이 그려졌다.

세동골 억춘이의 상전이라면 그 또한 양반 나으리고, 세동골엔 암소가 없으니 두동골의 옥분이네 암소와 짝짓기를 시켜 송아지를 나눠 갖기로 했던 모양이다.


“암송아지가 태어나면 세동골이 갖고 수송아지가 태어나면 옥분이네가 갖기로 한 모양이여. 근데 제 어미 죽이고 태어난 송아지가 암송아진겨.”

“억울하겠네요. 옥분이네는.”

“억울하다 뿐이것어? 잘 키우던 암소가 새끼 낳다 죽었는데? 거기다 태어난 송아지까지 빼앗길 판인디. 쯧쯧쯧, 마을에 하나 있는 소를 눈 뜨고 빼앗기게 생겼어. 쯧쯧....”


두동골에는 소 한 마리, 말 한 필이 있었다. 말 한 필은 저어기, 마구간에서 투레질하는 녀석을 말하는 거다. 상전 나으리께서 소싯적에 타고 다니던 말이자, 저어기 드르렁거리는 돼지, 아니 도련님의 무과 복시 시험을 위한 수련용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 다 늙어 오래 달리지도 못하는 녀석이고 식욕도 없는지 갈비뼈도 앙상하게 드러나 도련님이 녀석의 등에 올라탄 것을 볼 때면 가엾기 그지없었다. 아무튼 지금은 말이 아니라 소가 문제다.


“옥분이네는 못 주겠다 했는디, 그게 통할 리가 없지. 억춘네 상전 알지? 오돌이 너도 본 적 있을 겨.”

“알죠.”


세동골 종8품 내관 출신 염소수염 양반 나으리. 본디 내관은 고자인지라 그 집 도령은 양자였다. 그 도령은 피둥피둥 살만 오른 저기 돼지 도령과 달리 아주 총명하고 명석하다 들었다.


그리고 이 작은 두 마을이 붙어있는 까닭에, 우리 상전 나으리와 미묘한 경쟁 구도를 보이는 집안이었다.


“그 고자 양반이 생긴 것처럼 아주 얍삽하기 그지없어.”


삼양댁이 누가 들으면 참으로 큰일 날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까닭에 오히려 오돌이가 불안할 지경이었다.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는데 말이다.


“암튼 무슨 일이 생기긴 할 것 같어. 이 댁 권관 나으리도 오늘 그 이야기를 들을 텐데 말여. 이 집 양반 평소엔 너그러워 보여도 마을 사람 다 알잖여, 얼마나 다혈질인 양반인지 말여.”


알다마다.

삼양댁은 연신 재잘거렸다.


“그나저나 세동골 고자 양반이나 이 집 양반이나 나랏님 녹 먹고 살던 양반들인데 고자 양반은 8품이었다지? 지금도 대놓고 더 잘 살잖여? 땅도 더 많고. 이 집 나으리도 분명 지기 싫어할 거란 말여.”


양반이란 문반과 무반을 합쳐 부르는 말 이었다. 따지고 보면 양반 또한 양인이나, 3대 내에 문무반에 속하는 관직을 지낸 이가 있으면 양반가라 인정 했다.


상전 나으리께서 싹수 노란 도련놈의 교육에 저토록 신경 쓰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자신이 살려 놓은 실낱같은 양반가의 명맥을 이어나가기 위함이었다.


아무튼 옥분이네 소 사건은 마을의 큰일이긴 했기에 삼양댁은 하루 종일 재잘댈 기세였지만, 오늘은 할 일이 많았기에 토끼탕 국물에 밥 말아 먹고 장작 가득한 지게를 들쳐멨다.


안채의 도련님 방에선 여전히 드르렁 코 고는 소리가 들렸지만 친구도 없는 도련놈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따라 나서기라도 할까 싶어 발걸음을 서둘렀다. 오돌은 마을 입구의 장승들이 보이고 나서야 안도했다.



***



갈 때 메고 간 지게엔 참나무 장작이 한가득하였지만, 돌아오는 길엔 잡곡 두 되와 도련님을 위한 지필묵이 대신했다. 덕분에 발걸음은 가벼웠고 아직 해가 지기엔 꽤 많은 시간이 남았기에 오돌은 마을 변두리 백정 장팔의 푸줏간으로 향했다.


장팔 아재는 똘똘하고 힘센 오돌을 좋게 봤고, 오돌이가 일을 조금 도와주면 같이 돼지의 곱창이나 간, 허파 따위를 구워 먹거나 몰래 빼놓은 고기를 나눠주기도 했다. 그렇게 얻은 고기를 들고 상전댁으로 돌아가면 다음 날 아침 삼양댁이 고깃국을 끓일 수 있었다.


움막이 선 푸줏간은 동물 사체에서 나온 오물을 수시로 버려야 했기에, 물이 잘 흐르는 개울을 끼고 있었다. 오돌이 그곳으로 가까워질수록 마을이나 장에서는 맡기 힘든 냄새가 진동했다.


혈향(血香).

아니, 피 냄새라고 단순하게 표현하긴 힘들었다.

오물로 인한 역한 냄새가 뒤섞였으니.

이건 죽음의 냄새였다.


“아재가 뭘 잡았나 본데.”


이런 냄새가 날 정도면 닭이나 꿩, 토끼 따위의 작은 짐승이 아닌 돼지 여러 마리나 소, 말 정도는 되어야 했다. 푸줏간에 들어서자 그 냄새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작업대 위에 놓인 암소의 머리.

눈이 휘둥그레진 오돌을 장팔이 발견하곤 인사치레했다.


“허, 대가리 깨져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있었구나. 이리 와서 이것 좀 붙들어라.”


장팔이 앵앵대는 파리를 휘휘 쫓으며 말했다. 그는 한창 새끼 낳다 죽어버린 옥분이네 암소를 분해 중이었다. 오돌은 죽은 소의 내장을 빼내는 장팔을 도와 암소의 몸통을 꽉 잡았다. 죽은 소의 정체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이거 옥분네 소에요?”

“너도 들었구나. 하긴, 너희 상전 나으리께서 정한 일이니.”

“네? 뭘요?”


금시초문이었던 오돌이 반문했다.


“세동골이랑 석전이 있을 거란다. 단오 지난 지 얼마나 됐다고. 아무튼 석전 전엔 낄낄 잔치가. 퉤! 이 빌어먹을 파리 새끼.”


말하다 파리가 입에 들어간 장팔이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하찮은 파리 사체에선 죽음의 냄새 따위 나지 않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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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일기당천(一騎當千)의 눈물 +2 24.05.16 76 5 13쪽
9 조호리산(調虎離山), 호랑이를 산에서 나오게 하라. 24.05.15 81 5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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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모공(謀攻), 작전을 모의하다 24.05.13 109 8 13쪽
6 모공(謀攻), 작전을 모의하다 +1 24.05.12 144 7 13쪽
5 선전포고(宣戰布告) 24.05.11 173 10 12쪽
» 죽음의기운(死氣) +1 24.05.10 199 8 13쪽
3 지랄맞은 팔자(奴) 24.05.09 217 12 12쪽
2 괴이한 꿈(怪夢) 24.05.08 264 10 13쪽
1 선조실록(宣祖實錄) 27년 5월 8일자 24.05.08 278 11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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