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도시 - [1]
거세게 타오른 불꽃이야말로 장작이 사라진 순간 더 쉬이 사그라든다. 그리고 분노는 그 성질상 불꽃을 닮았다. 어느 위대하고 강력하시어 온 인류의 공포이신 마왕의 분노도 그러했다. 성기사들 사이에서의 입지와 공로를 전부 내팽개칠 정도로 분출되었던 분노는, 이내 그 대상을 잃어버렸다.
누가, 무엇이 잘못이었나.
아마 성기사들이 잘못했을 것이다. 전자오락까지 나온 세련된 시대의 기준에서는. 하지만 이 시대에는 그들 윤리관이 옳을 것이다. 또한 자기네 윤리대로 행동한 데다 장례를 베풀어주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내내 분노를 터뜨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샤는 사실 장례에 집착할 인종은 아니었으므로. 사실 화장을 하든 매장을 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시체 능욕만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을.
결국 그 자리에서는 홧김에 그랬을 뿐이었다. 무언가 목적도 없이 말이다. 샤는 그것을 이해했고, 이제 무언가 더 할 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최소한 흡혈귀 소녀의 원수를 갚겠노라고 성왕국에 뛰어들어 운석이라도 날리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흥분이 가라앉자 모든 의욕이 식었다. 말 그대로 모든 의욕이.
샤는 그저 골룡을 타고 여기저기를 쏘다니다가, 어느 숲이 울창한 산에 들어갔다. 성기사들과 동행하면서 이제는 샤도 제법 솜씨가 좋아졌다. 흑마염동을 사출해 토끼를 잡아서는 그 털가죽을 벗겨다가 구워먹었다.
'맛없군.'
토끼 다리 뼈를 집어던지면서 다시 중얼거렸다.
'정말 맛없어.'
맛없다, 맛없다를 속으로 읊조리며 먹은 탓일까. 잠시 후에는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샤는 물가로 가서 볼일을 본 뒤 흐르는 물로 뒤를 닦았다. 말끔한 뒤처리였으나 그 뱃속마저 닦여나가지는 않은 듯했다. 갈색 물질을 잔뜩 쏟아낸 후에도 복통은 계속되었다. 심지어 머리마저 아파오기 시작하자 샤는 강물에 코 처박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배는 차가웠고 이마는 뜨거웠다.
이불 속에 처박혀있으면 좀 편안하겠다 싶어 샤는 네크로팰리스에서 침대를 꺼냈다. 난데없이 산 속 숲에 시커먼 침대 하나가 자리잡았고, 샤는 그 위에 누웠다.
'이대로면 눈에 띄겠지.'
그 정도야 예상할 수 있었지만 기어이 샤는 침대를 치우지 않았다.
'그런들 들키든 말든 죽기밖에 더 하겠나.'
결국 샤는 다음 날 해가 중천에 떠서야 침대에서 벗어났다.
복통은 그쳤지만 몸은 여전히 무거웠다. 이대로 침대에서 한 발자국도 나서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몇 시간 후, 오줌이 마려워서 견딜 수 없을 때까지 샤는 이불 속에 처박혔다.
시냇물에 오줌을 흘려보내고 얼굴도 닦아냈다. 차가운 물기가 얼굴 위에 흘러내린 뒤에도 여전히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그 생각도 실천한 결과, 샤는 시냇물 앞에 쪼그려앉은 채 낮을 보냈다. 허송세월이노라 한탄할 맘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할 일도 없었으니까.
앞으로는 어찌 해야할까.
흡혈귀 소녀는 죽었다. 마왕 샤를 마부 아수로 잡아놓던 모든 의무와 속박이 사라진 것이다. 이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게 자유가 아니라는 것을 샤는 알았다.
'숲속에 던져진 애새끼가 된 기분이군. 그리고 실제로 그래.'
그렇게 다음 날이 되었다. 어제 굶은 탓인지 몸이 제법 가벼웠다. 또한 몹시 배가 고팠다. 허기가 배를 아프게 찔러왔다. 마침 앞에 시냇물이 있었다. 샤는 그 물줄기를 따라 걸었다. 시냇물을 따라가다보면 계곡이 나타날 것이고, 계곡에는 식사거리로 쓸 만한 가재며 물고기가 있으리라 생각하고서. 그리 한 시간을 내리 걸었다.
물줄기는 어느 바위 틈에서 끊겼다.
허무함에 앞서 당황조차 일지 않았다. 샤는 주변을 몇 번 둘러보고는 그대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다가 멈춰섰다. 되돌아가서 뭘 어쩌자는 것인가. 그곳도 그저 숲속 한 구석이었을 뿐인데.
결국 사는 아무 곳으로나 걷기 시작했다. 숲속이었고 방향은 알지 못했다. 어쨌든 계속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네크로팰리스에 돌아가고 싶다.
어느 순간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샤는 무의식적으로 입가에 달라붙은 풀을 씹어 삼켰다. 맛부터가 썼고, 잎사귀가 식도로 넘어가면서 목을 찌르는 듯했다.
네크로팰리스가 좋았는데.
집사 아수가 보고 싶었다. 비현실적으로 충성스러운 늙은 집사, 그를 다시 만난다면 기꺼이 아버지라 부르며 섬길 용의가 있었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네크로팰리스에 다른 인물을 넣을 수도, 그 안의 물건을 빼올 수도 있지만 자신이 거기 직접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네크로팰리스는 샤의 심상이고 샤의 육체는 그 가상 세계와 이 현실 세계 간의 매개체다. 네크로팰리스에서 현실 세계로 차원문을 여는 게 불가능했던 것처럼, 그 반대의 경우도 불가능한 것이다.
혹시 대마법사 하지를 다시 만난다면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는 죽었다고 한다. 애석한 일이었다.
그리 쭉 걷자니 숲속을 벗어나고 말았다. 나뭇잎들의 그늘에서 벗어난 순간 햇살이 날카롭게 눈을 찔러왔다.
눈 감은 채 주저앉아 있다가 눈을 떴다. 쓸데없이 다채로운 색깔이 다시금 눈을 따갑게 했다. 네크로팰리스의 아늑한 검정이 그리웠다.
샤는 뒤돌아서서 다시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계속해서 앞으로 걸었다.
'네크로팰리스에 돌아갈 수 없다면, 최소한 햇살은 보지 않고 살고 싶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이 숲이 또 다른 네크로팰리스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숲속에서 지내다보면 사냥과 채집에 익숙해질 테니, 자급자족하면서 몇 년이고 살 수 있을지 모르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마왕의 존재조차 잊힐지도 모른다. 그때서야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가면 되지 않을까, 샤는 최대한 밝게 생각해보았다. 그 다음 한숨쉬었다.
역시 그리 잘될 것 같지 않았다.
*******
숲 속을 배회한 지 삼십 분째, 의외로 계곡은 쉬이 발견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팔뚝 만한 물고기가 헤엄치는 게 보였다. 샤가 입술을 달싹거리자 그 손끝에서 하얀 빛줄기가 뻗어나가 강을 직격했다. 전격 마법이었다. 곧이어 배를 드러낸 물고기 수십 마리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몇 마리 건져서 냄비에 넣고 삶았더니 예상대로 맛이 없었다. 흙냄새에 비린내가 섞여서 민물고기가 낼 수 있는 최악의 맛을 내고 있었다. 가뜩이나 샤는 성기사들을 따라다니면서 깔끔한 맛의 빵과 죽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고 마치 물처럼 마시던 우유에 비하면 거머리 똥이 섞여있는 강물은 염소 오줌에 불과했다....
샤는 자기가 지금껏 꽤 고급 음식만 입에 담아왔음을 깨달았다. 네크로팰리스 안에서는 아수가 만들어준 음식을 먹어왔고, 마부 노릇 하면서도 제법 돈이 있었으므로 여관 음식보다 못한 음식은 입에 대지 않았다. 성기사들과 같이 다닐 때는 말할 것도 없었다.
위대하신 마왕은 너무 고귀하시므로 자급자족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지금, 샤는 비로소 또 다른 사실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도 방구석 폐인이 필요하지 않지. 방구석 폐인도 자기 이외 다른 사람의 존재가 필요없다고 생각해. 이 세상에 자기만 있으면 더 나으리라 지레 짐작하는 인종이거든.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지. 식사 날라줄 부모도, 생필품 파는 편의점 주인도 있어야만 방구석 폐인이 생존할 수 있지. 당연하게도 그 역은 성립하지 않고.'
살짝 웃으려 시도했다. 실패했지만.
'그리고 나는 마왕이기 이전에 방구석 폐인이었지.'
어쨌건 당장 배를 채워야했으므로 삶은 물고기의 절반은 먹어치웠다. 먹는 내내 제법 맛있지 않나 스스로를 세뇌해보았지만, 더 먹을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손도 씻지 않은 채 파리떼 들끓는 주방에서 요리한, 중세 특유의 볼품없는 여관 요리마저 지금 이 순간 매우 간절했다.
도시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위대하신 마왕이 성기사들을 협박하고 때려눕히기까지 한 이상, 성왕국에서 가만 있지 않으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사람들 사이에 다시 섞여도 좋은 걸까. 머리까지 뒤덮는 법복을 입고 다닌다면, 아예 창피함을 무릅쓰고 가면까지 쓰고 다닌다면 어떨까. 매우 수상한 인물이 여기 있노라고 광고할 뿐일까? 아니면 조금이나마 그 정체가 숨겨질까. 알 수 없었다.
마탁차를 쓸 수 없을 테니, 마부 일은 다시 하지 못할 것이다. 도시로 돌아간들 마땅히 할 일은 없는 셈이다. 그런데 굳이 돌아가야 하는 건가? 겨우 여관 음식 하나 때문에?
샤는 스스로의 의문을 해결하기로 했다.
풀잎 위에 방치된 삶은 물고기를 다시금 베어물었다. 역시 역겨웠다. 샤는 망설이지 않고 우웨엑 토해낸 다음 숲속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뜨거운 햇살 속에서, 눈 따가운 색채들을 눈에 담으며 걸어나갔다.
도시를 향해서. 방구석 폐인을 원하지 않는 자들의 속에 다시금 섞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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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헤헤....
헤헤....
죄송합니다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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