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길 - [3]
이후 성기사들이 지나가는 길에 암흑마도성의 수색꾼으로 보이는 수상한 놈들이 목격되었지만, 이제 일행이라기에는 거의 병력이 되어버린 그들은 보무당당하게 행진했다. 저번 습격이 너무 시시한 탓이기도 했다.
일주일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화창한 날씨, 산새들이 지저귀는 숲길을 지나던 날, 그들은 태평하게 전진했다. 슬슬 지원받았던 병력들을 되돌려보내는 게 옳지 않겠느냐는 논의가 오가던 그때였다.
숲속에서 시뻘건 화염덩어리가 날아와 무리의 정중앙에 명중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말을 타고 이동하고 있던 병사 열 명이 나가떨어졌다. 그 사지가 잘려나가 비산하는 순간 상황을 파악한 이들이 외쳤다.
"습격!"
그리고 숲속에서는 기습적인 공격이 이어졌다. 화염덩어리가 한 번 더 날아와 또 십수 명이 폭사했다.
대포나 다름없는 강철탄도 날아왔고, 평범한 중장갑은 뚫을 만한 굵기의 강철화살들도 날아와 중장갑기병을 죽여댔다.
무리의 정중앙에 있었기에 상황을 뒤늦게 파악한 성기사들은 광검을 뽑았다. 전군 질주 명령이 떨어지자 성왕국의 병력은 숲속에 매복했을 적들을 향해 돌진해나갔다. 그렇게 병력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졌을 때, 하늘 위에 짙은 그림자가 깔렸다. 그것은 시뻘겋게 빛났다.
"공... 습!"
외치면서 병사는 화염에 휩싸였다.
소름끼치는 불줄기가 하늘에서 지상에 내리꽂혔다.
불줄기에 닿은 병사들은 물론 숲 전체가 순식간에 재로 변했다. 불줄기는 큰 붓이 종이 위에 큰 선을 긋듯이 움직였다. 보통 온도의 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금세 거의 모든 나무가 숯덩이가 되거나 아니면 그 형체마저 보존하지 못하고 스러져버렸다. 연이어서 불줄기는 성왕국의 중심병력, 그러니까 성기사들과 마차들이 있는 쪽을 노리고서 방향을 전환했다.
"탈론백!"
아솔의 외침과 함께 유불도가 떨리는 몸을 추스리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염동력을 총동원한 비행이었다.
유불도는 비행하면서 연신 주문을 외워댔다.
마침내 불줄기가 성기사들에게 다가왔을 때, 유불도는 가까스로 주문을 완성했다.
"...는 나의 품이라!"
불줄기가 유불도에게 정면으로 내리꽂혔다. 그 시점에서 방금까지 모든 것을 일직선으로 불태워버리던 불줄기가 가로막혔다. 삼차원법 대마법사로 유명한 그의 공간왜곡장이 펼쳐진 것이었다.
그러나 성기사들은 안도하지 못했다. 불줄기를 내뿜고 있는 괴물의 정체를 파악했기 때문에.
"미친! 적룡(赤龍)?"
몸길이 이십 미터의 적룡이 하늘 위에 떠있었다. 이 불줄기는 적룡 특유의 화염숨결인 듯했다.
막 성체가 된 크기였지만, 그것은 전혀 다행스러울 일이 못 되었다. 용은 강력하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적룡은, 그 자체만으로 파괴적인 원소 불의 화신이다. 인류로서는 대항하기 가장 벅찬 존재다.
정신나간 일이었다. 과거 암흑마도성에 맞선 쿠랄타 제국의 적룡 피드라는 단신으로 암흑마도성의 군대를 전멸시키고 마왕 샤를 죽일 뻔한 전적이 있다. 뒤이어 도착한 어둠의 여왕이 놈을 죽이기는 했지만, 암흑마도성이 그 적룡에게 입은 피해를 복구하는 사이에 성왕국이 겨우겨우 그들에게 맞설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성왕국이라고 해서 더 잘날 것은 없다. 아니, 광검이 초고온의 빛을 통해 적을 태워죽이는 무기인 이상, 화염의 정령들이 가호하는 적룡에게는 그 어떤 피해도 주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적룡은 황룡이나 흑룡과는 달리 지상에 내려오지도 않고 공중에서 불꽃만 뿜어댈 테니, 어떻게 건드려볼 방법도 없다.
"후..."
막 후퇴를 외치려던 아솔이 입을 다물었다.
화룡이 숨결을 내뿜어 숲의 나무들은 전부 재가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휑해진 저 너머로, 대포병들이 성기사들을 에워싼 채 다가오고 있었다. 이미 포위된 것이다.
"암흑마도성이 포병을 운용해?"
이것도 정신나간 일. 모든 것이 더없이 최악이었다. 대포라면 능히 성기사들에게도 두려운 무기 아닌가. 정확히 말해서는 모든 기사들의 악몽이다. 전쟁 당시 암흑마도성의 무기는 흑요석 창이 고작이었지만, 세월이 흘렀고 그들은 변했다.
대포가 불을 뿜었다. 성기사들을 향해 무심한 대포알들이 날아왔다. 성기사들은 광검에 집중하여 그 빛을 일순 강하게 내뿜어 대포알 몇 개를 녹여내는 데 성공했지만, 그것은 운이 좋은 것이고, 운이 좋지 못한 셋은 그대로 대포에 당해 마탁차에서 낙하했다.
포격의 충격을 못 이겨 엎어진 성기사들에게 동료 성기사들이 치유주문을 걸어주었다. 가까스로 쓰러졌던 한 명이 도로 일어섰지만, 소용없었다.
"원시태양 만세! 법왕 전하 만세!"
대포병들은 소리치며 죽어라 대포에 불을 붙여댔다.
막 주문을 다 외운 성기사들의 마법이 발동되었다. 대포병과 그들 사이로 성벽이 불쑥 솟아난 것이다. 거기 대포들이 쾅쾅 떨어졌고, 성벽은 박살났다.
하지만 포격은 또 이어질 것이다.
아솔이 샤의 마차를 향해 외쳤다.
"아수! 신호하면 곧장 따라와라! 죽을 힘을 다해 따라와!"
그와 함께 성기사들은 대포병들 한 가운데로 돌격했다. 아직까지도 공중에서 적룡의 숨결을 막아내던 유불도도 가까스레 자기 마탁차에 올라탔다.
샤는 서둘러 그들 뒤를 쫓으려다가, 무작정 달렸다가는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포화에서 그냥 달려나가 빠져나갈 수 있을 리가 있나.
이 상황에서 무사하려면 염동력을 써야하는데, 샤의 염동력은 흑마염동이라고 해서 마왕의 상징이나 다름없으니 여기서 쓸 수 없다.
마찬가지로 쓸 수 없는 마법이 여럿이다. 그리고 사실 뭔 마법이 성왕국에 알려졌는지 안 알려졌는지도 샤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샤가 무언가 마법을 써야하리라.
샤는 입을 달싹였다. 그러자 마차의 주변으로 시커먼 연기가 폭발하듯 뿜어져나와 벌판을 감쌌다. 연기의 규모는 불타버린 숲을 다 덮어버리고도 남을 정도로 넓었다.
성기사들은 마법사이기에 연기의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사방이 뿌옇게 변했음은 눈치챘다. 그리고 그들은 연기의 근원지가 마차였음을 알았다.
마부가 마법을 썼다. 주문도 외우지 않고. 기이했지만 따질 틈은 없었다. 모두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대로 달려나갔다.
한편 연기가 온 시야를 가려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된 포병들은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결국 성기사들은 순식간에 포위를 빠져나갔다.
'연막마법은 마왕의 마법이라 안 알려졌나.'
샤는 불안해하면서도 계속 마차를 달렸다. 이제는 꽤 능숙해졌기에 마차를 몰고 가면서도 병사들을 짓밟지 않을 수 있었다. 결국 모두가 연기 밖으로 빠져나왔을 때 그 수는 성기사 여섯, 그리고 마차로 총 여덟 명이 살아남아 있었다. 성기사 한 명과 성왕국 병사들이 죽어나간 듯했다.
물론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 병신들이! 다 태워! 그리고 추격해라, 파이드라!>
하늘 위에서 뇌파가 울려 퍼졌다.
그 뇌파의 내용대로 적룡 파이드라는 다시금 크게 불을 뿜어 벌판을 휩쓸었다. 연기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암흑마도성의 포병들이 순식간에 전멸했다. 뒤이어 파이드라는 도주 중인 성기사들 위로 덮쳐들었다.
적룡이 날아오면서 주둥이를 벌렸다. 그 목구멍 사이가 시뻘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또 숨결을!"
탈론백이 또 나서야했다. 그가 얼른 비행해서 용의 앞을 가로막았다. 용이 세게 숨을 내뱉자 폭염이 그를 덮쳤다. 공간이 왜곡되어 불길이 직접적으로 유불도에게 닿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열기가 갑옷을 데우고 있는 데다가 염동력을 무한정 구사할 수도 없다.
성기사들은 유불도가 가로막고 있는 사이 도망친다든가 하는 선택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늘에 뜬 용에게 무슨 수를 쓸 수도 없는 일이라 이를 악물며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때 아솔 장로가 적룡 위에 올라탄 리치를 발견했다. 쓰고 다니기에는 지나치게 무겁고 화려한 금관을 쓴 원시의 리치, 법왕 카샤드가 적룡 위에서 키득거리고 있었다.
"법왕! 이게 무슨? 휴전협정에는 당신이 직접 나서지 않았소이까?"
카샤드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내 사업장이 하나 박살났더군. 대기시켜 놓았던 흡혈귀들은 온데간데 없고 고이 모셔둔 님프는 도둑맞았어.>
"겨우 그거 때문에 군주가 직접 나선단 말이오?"
님프가 귀하다지만 암흑마도성의 이군주가 출두할 만큼 중하단 말인가. 하지만 카샤드는 그리 여기는 것 같지 않았다.
<겨우? 예로부터 도둑은 그 목을 자르고 그 시체를 가족들이 다 처먹게 하는 게 법도였다. 그런데 감히 왕의 물건을 훔친단 말인가. 그러고도 용서를 바라나. 이리 된 이상 내 법도를 엄히 세우리라. 도둑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겠다! 마타카가라 마루토루므 으 데!>
카샤드가 주문을 외우자 그 손에서 번개줄기가 솟아나와 하늘로 치솟아오르더니 두 줄기로 갈라졌다. 한 줄기의 번개는 적룡의 불을 막느라 분주하던 유불도에게, 다른 한 줄기는 나머지 성기사들에게로 내리꽂혔다.
성기사들은 가까스로 피했다. 하지만 유불도는 미처 피하지 못했고, 공간왜곡장이 그 위력을 중화시켰다지만 일단 그 몸에 새겨든 번개는 유불도를 마비시켰다. 유불도의 갑옷에서 전기가 튀면서 왜곡장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샤는 저 번개가 님프가 속한 이쪽에도 날아왔음에 경악했다. 이제 님프는 어찌 되든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또한 거리가 있어서인지, 법왕은 같은 군주이면서도 마왕을 알아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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