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실 - [3]
갑자기 튀어나온 불사왕의 보증 덕분일까. 아수가 청년을 대하는 태도는 한결 나긋나긋해졌다. 여전히 의심하는 기색이기는 했지만.
아수는 시커먼 시약을 검은 잔에 담아 흑색 탁자 위에 내놓았다. 청년은 그 불쾌한 액체를 한 모금만 마시고 컵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다음 일정은?”
“능력의 실험입니다. 마법처럼 심상에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은 없으니까요.”
잠시 후 둘은 아무도 없는데 쓸데없이 넓어 휑한 복도를 뚜벅뚜벅 걸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암실(暗室)입니다.”
다크 챔버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워록 사가의 작명은 아무 사물 앞에나 섀도, 다크, 블랙 등 시커먼 단어를 갖다 붙이기만 하면 완료된다. 그래서 다 비슷비슷한 이름 때문에 분간이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흑실과 암실은 분명히 다른 곳이다. 흑실은 침실일 뿐이지만 암실은 마법적인 수련의 장이다. 그 장소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마법적 조치가 가득하다.
시커멓고 거대한 문 앞에 다다르자 아수는 말했다.
“열려라.”
일종의 마법 시동이었다. 문이 삐거걱 열리자 둘은 그 안에 들어섰다.
“허.”
대충 어떤 곳일지 알고는 있었어도, 실제로 보니 감흥이 또 다르다.
암실은 도저히 방 안이라 부를 수 없는, 아니 아예 건물 안이라 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넓은 장소였다. 벽이 아니라 지평선이 보인다. 삼차원적 마법의 결과물인 것 같다.
둘은 암실 안쪽으로 이동했다. 입구에서 꽤나 멀어졌다는 확신이 들자 아수가 제안했다.
“우선은 모든 마법의 기초... 염동력을 시험해보지요. 그 감각이 남아계십니까?”
“아닌 것 같군.”
“남아계신 게 무엇이 있지요?”
“모르겠다.”
이 자신감 없는 대답에 아수는 툴툴거리고 싶어 환장하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얼굴이 너무 불만에 가득차보였기에, 청년은 고개를 숙이고 사죄해야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와 동시에 속은 시커멓게 굳어져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스킬 단축키를 눌러 마법을 사용하던 주제에 뭘 할 수 있겠는가.
답답함을 못 이긴 청년은 바닥에 떨어진 돌을 노려보았다. 어째서인지 안면근육이 움직여지지 않아 겉으로 봐서는 알 수 없었지만, 반응이 있었다.
“허.”
돌이 허공에 떠올랐다.
돌을 들어올린 것은 시커멓고 끈적끈적한 연기였다. 게임 캐릭터 샤 특유의 검은 염동력이 발휘된 것이다. 청년은 눈만 깜박였다. 그는 무언가 주문을 외우지도 않았고 복잡한 명상법을 구현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대뜸 초능력이 발현될 줄이야.
“잘 되시는군요.”
아수가 만족스럽게 말했다. 그로서는 이게 당연한 것이라는 반응이었다. 반면 청년은 자신이 한 일을 믿지 못해, 볼을 꼬집어볼까 생각하다가 집어치웠다. 아수가 말했다.
“그럼 계속해볼까요?”
다음에는 발화를 시험해보라고 했다. 청년은 종잇장을 바라보며 눈에 힘을 주었다. 이번에도 그는 확신을 가지지 않았지만 종이는 화르르 타올랐다.
청년으로서는 자신이 벌이고 있는 초능력들의 원리조차 알 수 없었다. 신체로 치면 인간에겐 없는 꼬리를 움직이는 셈이다. 그러나 꼬리뼈가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있어 스스로를 움직이듯, 초능력은 청년의 단순한 의지에 복종했다.
그 후 아수가 ‘화염의 원’ 주문을 시전 해보라 했을 때도 청년은 그러고 싶다고만 생각했고, 믿을 수 없게도 마법 주문은 단번에 발동되었다.
그 가슴 주변에서 불씨가 타오르더니 위로 떠올라, 이글이글 주변 공기를 잡아먹고 커져 지평선을 향해 쏘아졌다. 저 멀리서 불꽃이 시뻘겋게 빛나며 굉음이 울려 퍼졌다.
아수는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무영창?”
주문을 외우지 않고 마법을 발동시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그게 굉장히 놀라웠던지, 아수는 눈을 크게 뜬 채 물었다.
“주문을 작게 읊으신 겁니까, 아니면?”
“염동력을 하는 식으로, 염원했다.”
“그렇다면 무영창이 확실하군요.”
아수가 눈을 빛냈다.
“놀라운 일이기라도 한가?”
“물론이지요. 삼차원적으로 구성된 마법을 마치 초능력처럼 주문 없이 쓰실 수 있다니요.... 마법적 경지가 한층 높아진 것 아닙니까?"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청년은 침묵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제 생각에 신빙성 있는 가능성을 점쳤다. 그가 보기에는 마법적 경지와는 상관없이, 스킬 단축키를 꾹 누르면 사용되던 게임 속 현상이 구현된 게 아닐까 싶었다. 흑마법사 캐릭터로 마법을 쓰기 위해 마법공식을 익혀야했던 것은 아니니까. 그저 자판을 탁탁 치면 마법이 쾅쾅 나갔다. 청년이 보기에는 이게 가장 믿음직한 가능성이었으나, 확실하지는 않았다. 이 가정은 이 세계가 게임세계이고 지금 이 몸은 게임캐릭터라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그 전제 자체가 터무니없지 않은가.
청년의 추측이 어쨌든 아수는 눈을 번쩍였다. 아수는 다음 순간이 기대가 된다는 듯 경쾌한 목소리로 요청했다.
“불화살의 비는?”
게임 속에서도 있던 주문이다. 청년은 행운이 계속되길 바라며 나름대로 손을 뻗고 저 먼 쪽을 향해 생각했다.
알아서 써져라, 마법이여. 제발.
곧이어 아수가 소리쳤다.
“멋집니다!”
기원은 통했다. 하늘에서 빨간 불꽃, 그리고 화살들이 마구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공기를 찢어발긴다. 그리고 화살촉들이 지면에 충돌하곤 귀 막고 싶은 굉음을 마구 냈다. 콰앙, 쾅쾅, 타악 하고. 샤의 시야에 들어오는 전 범위에 그 불과 화살이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귀 아프고 눈 따가운 장면이었으나 아수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감격스레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아수가 입을 열곤 잠시 부르르 떨었다. 잠시 후에야 그는 말을 이었다.
“아니, 확실히. 주의 마법적 경지는 한 단계 상승한 게 틀림없습니다. 삼차원법의 경지셨으니 이제는 사차원법의 종사가 아니실까요.”
“모르겠다. 시야든 감각이든 달라진 게 없는데.”
“시야와는 별 관련이 없을 겁니다. 마법의 초능력화라면 그걸로밖에 설명할 수 없잖습니까. 기존에 마법으로서 복잡한 단계를 거쳐야 발현할 수 있는 마법들을 초능력처럼 아무 동작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명백한 마법적 경지 상승의 증거입니다...”
아수가 거의 흐느끼기 일보직전에 청년은 이 마법시험을 중단할 것을 주장했다. 아수는 그러기 싫어하면서도 받아들였다. 둘은 암실을 나섰다.
“열려라.”
암실을 나와 성의 복도에 들었지만, 눈에 담기는 장면은 전혀 색다르지 않았다. 그저 캄캄하기만 해서 모두 똑같다. 눈이 저절로 감기는 느낌이 든다. 더 이상 이딴 풍경만 보기는 싫었다.
청년은 옆에 선 아수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 성의 정원을 산보하고 싶다. 가능한가?”
말을 끝마치기가 무섭게 아수의 표정이 핼쑥해졌다. 청년은 자기가 못 할 말이라도 한 것인지 의아해졌다.
“무슨 문제가 있나?”
아수는 머뭇거리다가 굳은 눈을 하곤 입을 열었다.
“그마저도 잊으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다시라도 알아야겠지요. 두 배로 괴롭겠지만요.... 주께서는 이 성에서 나가실 수 없습니다.”
“어째서?”
“직접 보시면 아시겠지요.”
아수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빨리 해 앞장서서 걸어 나갔다. 청년은 그 뒤를 따르며 생각에 잠겼다. 성에서 나갈 수 없다는 게 무슨 뜻일까. 짐작도 가지 않았기에 그는 말없이 걸을 뿐이었다.
“십이 년 전에 말입니다.”
걷는 도중 아수가 말을 시작했다.
“주께서는 출정하셨습니다. 암흑마도성의 군대를 이끌고서, 항구도시 베로첸을 정벌키 위해 말입니다. 주께서는 거기서 대마법사 하지가 포함된 성기사들과 격전을 벌이셨고, 패배하시어....”
뭔가 얘기가 이상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군대를 이끌고 출정, 패배?
거기까지 말한 뒤 아수는 입을 다물고 묵묵히 걸었다. 출구 앞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계단을 몇 층 내려가니 마침내 그 끝이 나타났다. 건물의 구조상 정문이 있어야했다. 그러나 없었다. 샤의 눈에 들어온 것이라고는 그저 성의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검은 벽뿐이었다. 혹시 이 성에는 문이 없는 것일까.
부수면 되지 않을까싶어 샤는 강력한 에너지의 마법을 사용해보았다. 치명적인 푸른 덩어리가 샤의 손끝에서 생겨나 벽을 강타했다. 쾅, 터지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그러나 연기가 걷히고 드러난 벽의 상태는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그을음조차 없었다.
아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 그 간악한 마법사와 성기사들이 주를 이 성에 가두었지요. 무언가의 알 수 없는 마법으로요. 때문에 그 어떤 방법으로도 이 성을 나가지 못합니다.”
나갈 수가 없다고? 말도 안 돼. 그 터무니없는 소리에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청년은 벽을 두드려보았다. 퉁퉁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나는 삼차원법의 마법사일 텐데, 그 공간적 마법을 통해 이곳을 벗어나면 되지 않나?”
청년의 물음에 아수는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이미 여러 차례 시험해보셨지요.”
어떻게든 나갈 수 없다 이건가? 절로 마음이 불안해져 청년은 벽을 또 두드렸다.
옆에서 아수는 불안한 눈초리로 자기 주인을 쳐다보았다. 그걸 눈치챘으면서도 청년은 계속 벽을 두드렸다. 노인 옆에서 불안초조를 표출하는 것은 못난 짓이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못난 놈이 분명한 청년은, 어쩔 수 없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상황.
환생, 빙의. 여기까진 좋다. 진성 병신이 겉모습도 그럴듯한 잘나신 흑마법사가 되었으니 이건 행운으로 봐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갇힌 신세라고? 말도 안 된다. 게임에서는 그런 설정이나 엔딩이 없었다. 왜 게임에서도 없었던 일 따위가 하필 이런?
그제야 이 비현실적인 상황이 보다 선명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뒤통수를 후려치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청년은 추잡한 발광을 수십 분 동안 하다가, 아수의 안내를 받고 흑실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다음엔 생각에 잠겼다. 원래 자신은 어떤 놈이었나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는 의외로 이 상황에 적절히 움직였다. 수동적으로 행동했을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당황하느라 꿈쩍도 못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걸 보면 의외로 대담한 사람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게임 하다가 죽은 그 병신의 가족은 몇 명이었으며 친구는 있었나, 직업은 뭐였나 하는 것들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을 꽉 채운 것은 워록사가 플레이 장면뿐.
이 상황에 기대 이상으로 잘 움직였던 것은, 어쩌면 머릿속이 비워져서 본래 행동원리마저 사라져버린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머릿속이 온통 까맸다. 유아기, 청소년기 할 것 없이 전부 지워져있었다. 자신에 대한 기억은 그저 컴퓨터에 매달린 추한 모습만 남았다.
미약한 현기증을 느끼며 청년은 생각했다. 이제 난 어째야하나?
자아정체성의 상실에 슬퍼해야하나? 아니면 설령 기억난다손 쳐도 곧 떠올리기도 싫어질 그 추한 삶이 기억나지 않으니, 오히려 기뻐해야하나?
알 수가 없었다.
- 작가의말
웃을 늘여도 웃길 수 없는 경우는?
웃을 가로로 늘였을 경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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