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길 - [1]
졸지에 마왕이 성기사들과 일행이 되었다. 흡혈귀까지 데리고서.
그래도 샤는 이 상황이 완전히 최악이 아님은 인정해야 했다. 성기사들은 마왕을 척살하려는 게 아니었고, 흡혈귀들을 죽이지도 않겠다고 한다. 이 정도면 그들로서도 꽤 융통성을 발휘한 셈이 아닌가.
샤는 그에 위안을 삼으며, 두 성기사, 너버스 왕자 그리고 탈론백작 유불도와 함께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아까 여기는 성왕국이 아니라면서 상황을 중재해주었던 성기사의 이름이 유불도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북대륙 출신인 그는 현재 탈론시의 영주라고 했다.
"어째 이 상황이 나 때문에 비롯된 것 같아 미안합니다. 하지만 탈론시가 내 영지인 것은 수조권상의 이야기고, 아직 거기 직접 가본 적도 없어서 그곳의 치안은 제가 책임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너무 비난하지는 않았으면 해요. 그리고 이왕 같이 여행하게 된 거, 친하게 지냅시다."
탈론시는 중립도시이지만, 그 소유권은 성왕국의 고위성직자에게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성직자가 유불도의 기사 서임식날 도시 전체를 선물로 줘버렸다는 것이다. 덧붙인 말로는 성왕국 성기사가 중립지대의 영주로서 행세하면 암흑마도성이 뭔 해코지를 할지 몰라, 아예 손을 떼고 있었다고도 했다.
한편 너버스 왕자의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가 말했다.
"아까 못 끼어들어서 죄송해요. 하지만 제가 그다지 권력자가 아니라서..."
왕자가 권력자가 아니면 누가 권력자인가. 하지만 샤는 그냥 닥쳤다. 그 얼굴이 너무 무표정해서 너버스는 우물쭈물했다.
이 어색한 분위기에서였다.
"꺄아아악!"
건물 밖에서 봐라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샤는 벌떡 일어서서 건물을 뛰쳐나갔다. 유불도와 너버스도 깜짝 놀라 뒤따랐다.
그들이 비명소리의 근원지에 가서 본 장면은, 광검에서 시퍼런 불꽃을 피워내고 있는 아솔 장로와 그 곁의 성기사들, 그리고 잿더미 세 구와 벌벌 떨고 있는 봐라네였다. 봐라네는 어찌나 겁에 질렸는지 아래윗니가 연신 맞부딪치고 있었다. 그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흡혈귀 특유의 뾰족한 송곳니가 맞부딪치며 제 입천장을 찌르고 있는 것이었다.
이 무슨 상황인가.
뭔 상황이든 절대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샤는 허리춤에 찬 칼에 손을 가져갔다. 그때 샤가 묻고 싶은 것을 너버스가 대신 물어주었다.
"잠깐, 나머지 흡혈귀 셋은요?"
아솔 장로는 무심히 대답했다.
"구원했지요."
"구원?"
아솔 장로는 잿더미 세 구를 가리켰다. 너버스는 눈을 크게 떴다.
"이거... 설마... 흡혈귀 시체입니까?"
"우회적인 표현을 쓰자면 그 잔해입니다만."
흡혈귀는 죽으면 재가 된다. 기본적인 상식이다.
샤는 심상세계에서 골룡을 꺼내들 준비를 하며, 곧장 봐라네에게로 달려갔다. 이미 허리춤에 찼던 두 자루의 칼은 뽑아든 상태였다. 그대로 그는 봐라네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아솔 장로는 이미 공격자세를 취한 샤를 무심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 애는 아직 안 손댄 게 아닐세. 일부러 손대지 않고 남겨둔 게지. 물어보니까 그 애는 자네랑 오래 다녔다더라고. 구출한 지 얼마 안 됐다는 녀석들만 데드라의 곁으로 보낸 거야."
오만상을 찌푸리며 유불도가 물었다.
"흡혈귀들에게 관여 않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솔은 쉬이 대답했다.
"말로만 그런 게지. 왜? 온 영혼의 주인이신 데드라를 모시는 성직자가 흡혈귀를 못본 척하리라 생각했는가?"
"그래도 융통성을..."
"이미 발휘했네. 저 친구랑 오래 다닌 흡혈귀는 남겨놨다니까."
그말인즉 아솔은 봐라네를 살려뒀다. 왜냐하면 샤와 오래 다닌 그녀를 죽이면, 분노한 샤가 성기사들과 동행하는 걸 극구 거부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봐라네를 제외한 나머지 세 흡혈귀는 가차없이 죽였다. 오래 다니지 않았으니 별 정도 쌓이지 않았을 테니까. 죽인들 크게 분노하지는 않을 테니까.
벌벌 떨고 있던 봐라네는 성기사들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소아살해자들! 살인마 새끼들!"
아솔 장로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다만 한 마디 했을 뿐.
"구원이지."
이 상황에서 샤는 말없이 있었다. 벙어리 행세를 하기로 한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마땅히 느껴지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아솔은 계속 말했다.
"이것은 비단 종교적인 구원은 아니다, 작은 흡혈귀야. 속세의 관점에서도 구원이었단 말이야. 그냥 예쁘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어릴 때 흡혈귀에게 물려서, 흡혈귀가 되면, 대체 뭘 할 수 있나? 우리 데드라 교도들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흡혈귀를 배척해. 흡혈귀를 위한 세상은 없다."
유불도가 반문했다.
"하지만 그 애들은 자기가 원해서 흡혈귀가 된 게 아니잖습니까? 중립지대인 것도 감안해서, 그냥 예외로 쳐도 됐을 텐데요?"
아솔은 비웃었다.
"유불도, 이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이제는 영주이기까지 한 친구야. 자네는 그게 자비라고 생각하나? 조그만 흡혈귀들이 소아성애자들 노리개 아니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나? 그네들이 잡일이라도 할 수 있겠나? 기껏해야 피를 빨 가축 서리하며 연명하다가, 어느 날엔가 들켜 두들겨 맞아 죽을 뿐이란 말이야. 가축만도 못한 삶이지. 그런 삶을 사느니 하루빨리 데드라 곁으로 가서 새로운 삶을 얻는 게 낫네. 데드라께서는 자비로우시니 그 가엾은 어린애들을 위한 복된 삶을 준비해두실 게야."
"비침하게 사느니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 마치 마왕 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이 세상은 연옥이고 삶은 불행하니, 윤회의 고리를 끊고자 인류를 멸절하겠다던 그 광인 말입니다."
아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혀를 끌끌 차며 샤를 돌아보았을 뿐.
"어쨌건 자네, 이름이 아수라고 했지? 나랑 성씨도 같구만그래. 얼굴도 번듯하고 참 맘에 들어... 이렇듯 난 자네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네. 아무튼 내일 오전에 출발할 테니까 미리 여행준비를 해두게. 참고로 성왕국에서 이번 임무로 자네에게 지불할 금액은 임무 후에 지급할걸세. 묵돈이니까 기대해도 좋을걸."
도중에 샤가 달아날지 모른다는 걱정은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주변에는 성기사들이 있으니까. 한낱 마부가 흡혈귀까지 데리고 달아나기는 힘들 것이다. 그 마부에게 마탁차가 있다지만, 성기사들이야말로 마탁차들의 본래 주인 아닌가.
결국 샤는 봐라네를 안아들고 자기에게 주어진 방 안에 들어갔다. 봐라네는 계속 흐느꼈다. 샤는 녀석을 감싸안으며 눈을 감았다.
슬프지 않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애당초 그는 저 흡혈귀들이 죽으리라는 예상에 안도했었다. 그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흡혈귀 하나면 모를까, 넷을 키우려면 그 삶이 속박될 것이다. 흡혈귀 가족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애당초 인간관계를 쌓고 싶지 않던 샤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흡혈귀들은 늙어죽지도 않으니 그 속박은 끊어지지도 않을 터였다...
다만 샤는 봐라네에게 미안해졌다. 그래서 그는 평소에 거리를 두던 것도 잊은 채, 울고 있는 봐라네를 안은 채로 멍하니 있었다.
*******
다음 날 아침식사는 역장이 손수 가져왔다. 그는 샤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샤와 봐라네로서도 그 편이 편했다.
부은 눈을 겨우 뜨며 봐라네가 물었다.
"저 성기사들을 따라갈 거예요?"
샤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봐라네는 축 늘어졌다.
"하기야 다른 방법이 없겠죠... 알아요. 미안해요."
샤는 죄책감을 심하게 느꼈다. 탈출하려면 탈출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닐 테니까. 다만 성기사단과 척을 지기는 싫을 뿐이었다.
어쨌거나 성기사단과 마왕, 그리고 흡혈귀가 포함된 웃기는 일행은 오전 중으로 역에서 출발했다. 왜 차원문을 써서 목적지까지 곧장 이동하지 않는 것인지는 유불도가 말해주었다.
"차원문은 이동하려는 곳에도 차원문이 열려있어야만 서로 이동이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이번 일의 경우에는 불가능해요. 우리는 지금 암흑서리 산맥에 갈 것이니까요."
샤는 왜 녹룡사 본부가 아니라 암흑서리 산맥에 가는지를 글로 적어 물었다. 대답해준 것은 아솔 장로였다.
"녹룡사 본부에서도 판키드라를 만날 수 있기는 하겠지만... 그곳은 판키드라의 사업장이지, 본거지가 아니야. 그 영악한 용은 님프만 암흑서리 설원으로 호송시킨 뒤 우리는 돌려보낼 게 분명하지. 아예 본거지에 쳐들어가는 편이 수월해."
암흑서리 산맥까지 가야한다라.
샤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만약 녹룡사 본부로 가는 것이라면, 차원문을 통해 바로 이동할 수 있을 것인 데다가 그 위치도 가까워 걸어가기 힘들지도 않다. 하지만 암흑서리 산맥으로는 차원문을 쓸 수 없을 것이다. 차원문을 열기 위해서는 텅 빈 공간이 필요하다. 암흑서리 설원에는 하루종일 진눈깨비가 내린다.
"암흑서리 설원에 내리는 건 눈이 아니라 진눈깨비라서... 눈집도 지을 수 없지. 판키드라가 진작 언덕이나 건물 따위를 다 철거해버려서 진눈깨비를 피할 공간도 마련하기 힘들어. 설령 천막을 가져간들 판키드라가 자기 영지에 차원문이 열리는 걸 방관할지가 의문이네. 괜한 고생만 하고 악감만 사기 싫으니 그냥 걸어가는 편이 나아."
여러모로 성기사들이 판키드라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풍왕룡으로서 판키드라는 이 행성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중 하나였다. 암흑마도성의 숙원인 인류멸망도 판키드라에게는 손쉬운 일이다. 그저 비람풍에 명령해서 행성의 공기를 십 분 정도 소멸시키면 될 테니까. 그런 용이 아군이 된다면 암흑마도성의 진격을 방해할 수 있으리라.
결국 일행은 저 멀리 떨어져있는 암흑서리 설원까지 이동하게 되었다.
샤로서는 소름끼치게 반갑지 않은 사태였다. 졸지에 성기사들과 오래 여행하게 되었다. 심지어 암흑서리 설원은 샤가 심상세계에 갇혀지내던 그곳이잖은가.
덕분에 샤는 무표정하면서도 그 불쾌감이 표출될 정도로 우울해했다. 그 옆 봐라네도 당연 울상이었기에 여행은 시작하자마자 그 분위기가 최악이었다.
일행은 샤의 마차를 중심에 두고 성기사들 일곱 명이 호위한 진영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일행은 샤가 툭 불거져나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샤는 귀양가는 기분을 체감했다.
마호 공이 샤의 마차를 흘긋 보고서는 중얼거렸다.
"장례 마차인가?"
시커먼 무복을 입은 샤가, 회색 마탁차 위에 올라타서는 시커먼 마차를 끌고 있다. 그 시커먼 마차 안에는 흡혈귀가 타고 있음을 생각하면 불길함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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