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르하치 - [5]
샤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그는 리치가 총을 들었다는 데 주목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총알보다 강력한 마법을 쓰지 못하는 마법사....
'보잘 것 없는 놈. 리치로서 경외해주기도 민망한 놈.'
앞서 협곡에서 일행을 습격해왔던, 갑옷을 입고서 활이나 쏴대던 그 흑마법사들과 동급에 불과한 놈이었다. 그들과 저 리치의 차이는 그저 리치가 리치 특유의 외모 때문에 더욱 공포스럽게 보인다는 것뿐.
샤는 용병대를 고용한 게 어느 리치였다는 소식을 떠올렸다. 아마도 그동안의 습격을 저놈이 지시했을 것이다. 그 꼴 같잖은 습격을 주도한 흑마법사들의 지도자가 저 병신 같은 리치인 것이다.
그 하찮은 마법능력은 차치하고, 그 외적인 능력마저 쓰레기인 게 탄로난다. 웬만한 산적두목만도 못한 놈이었던 것이다. 맹세코 그런 멍청한 습격은 다시 겪기 힘들 것이라고 샤는 생각했다.
'그런 놈에게 도시 전체가 마비되고, 여자는 죽어서 시체능욕을 당했지. 저놈이 흑마법사들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리치이기에, 두렵게 생겨서일 것이다. 그밖에 다른 이유는 없을 얼간이. 그런 주제에 마치 지옥대장군이라도 되는 양 거들먹거리는군.'
그 능력이나 하는 짓거리로 보나 동네 건달을 보는 듯했다. 갑옷으로 중무장한 주제에 뇌를 보호할 투구를 안 쓴 것은, 자기가 리치임을 과시하기 위해서이리라. 투구에 두개골이 가려지면 리치임이 숨겨질 테니까. 그게 싫어서 가장 중요한 투구를 안 쓴 모양이었다.
샤는 심상세계에서 창 한 자루를 꺼냈다. 언데드 로드의 신화적인 룬창, 게 불그를.
허공에서 창 한 자루가 생겨나는 장면을 본 리치는 겁에 질린 채로 바라보았다. 공간마법, 즉 삼차원법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당신은 탈론백작 유불도가 아닌가? 그렇다면 내게 손대서는 안 되오. 성왕국과 암흑마도성의 협정에 따르면...>
말투마저 변한 채로 리치는 달아날 준비를 했다. 성기사, 그것도 삼차원법의 고위마법사를 상대로 싸울 수는 없으니까.
그 사이 샤는 마탁차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마탁차는 리치의 주변을 빙빙 돌고 있었다. 큰 원을 그리며, 리치의 퇴로를 막겠다는 듯이.
<말씀이라도 좀 해보시오. 마땅히 할 말이 없다면, 난 이만 물러나도 되리라 믿소마는...>
그러나 리치는 아무런 답변도 듣지 못했다. 샤는 여전히 리치의 주변을 소름끼치는 속도로 돌기 바빴고, 검은 연기만 자욱하게 깔렸다. 리치는 뇌 이외 아무런 생체기관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석유 냄새에 전신이 저릿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빌어먹을! 나와는 말도 섞기 싫다는 건가!>
자포자기한 리치가 총을 들어올렸다. 샤는 흑마염동을 온 몸에 두를까 했다. 그러면 총알 따위는 간단하게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숨어든 건물의 창문들이 조금씩 열려있었다. 둘의 대결을 숨죽인 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었다.
'내가 조사해본 바로는 흑마염동, 불의 비, 평온의 눈 등의 몇몇 샤의 고유마법들이 그가 마왕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한다고 했더랬지. 그렇다면 흑마염동은 보류....'
이상과 같은 판단이 리치와의 싸움 한복판에서도 가능했다. 샤는 일개 폐인 돼지에 불과했던 자기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몰랐다. 어쩌면 수십 년의 감금생활이 그를 모든 일에 무감동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찌 됐건 샤는 마법을 준비했다. 사람들이 보아도 큰 문제가 없는 마법을.
샤는 마법의 주문을 속으로 읊조렸다.
'데드라 가라사대 내 그대들을 모든 곳에서 보고 있더랬다...'
성왕국 경전의 글귀였다. 지금 사용하는 마법은 성왕국의 신통력 중 하나인 '천리안'이었고 말이다.
샤의 머리 위로 회색 눈 표식이 떠올랐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오며 샤의 눈이 충혈되었다.
머리 위의 마법적인 회색 눈이 제3의 시야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본디 천리안은 원거리의 현장을 제 자리에서 볼 수 있게 하는 신통력이다. 하지만 신통력도 결국에는 마법의 일종, 그것은 마법사의 심상세계에 의해 그 개성을 얻고 변질된다. 샤의 마법적 경지는 사차원법. 따라서 천리안이 보는 것은 현재가 아닌 미래였다.
샤의 머릿속에 수 초 후의 장면들이 전해져왔다.
그와 동시에 샤는 리치의 주변을 빙빙 돌던 것을 그만두었다. 그는 마탁차의 방향을 전환하여, 리치에게로 돌진했다.
미래의 리치가 놀라서 총을 쏘았다. 미래의 총알이 날아와 샤의 어깨를 관통했다... 현실의 샤는 미래의 총알이 날아온 궤적으로 창을 휘두른다.
현실의 리치가 놀라서 총을 쏜다. 이미 그 궤적에 위치한 창에 현실의 총알은 튕겨져나간다.
'총을 창으로 튕겨내다니, 말도 안 돼, 제발 우연이기를.' 미래의 리치는 경악하며 총을 재차 쏘았다. 미래의 총알은 샤의 눈에 박혔다. 리치는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만세! 하고 외쳤다... 그 미래의 총알 궤적에 현실의 샤는 창을 갖다댄다.
'총을 창으로 튕겨내다니, 말도 안 돼, 제발 우연이기를.' 현실의 리치는 경악하며 총을 재차 쏜다. 현실의 총알은 앞서 갖다댄 샤의 창에 가로막힌다. 현실의 리치는 비통하게 외친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미래의 리치는 총을 장전하느라 바빴다... 현실의 샤는 여전히 리치를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하고 있다. 창은 옆구리에 단단히 끼운 채로.
현실의 리치는 마탁차의 돌진에 질려 총을 장전하지도 못한다. 놈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미래의 리치가 탄 흑마의 몸통에 샤의 창이 충돌했다. 배가 뼈째로 찢어지며 미래의 흑마는 쓰러졌고 리치도 함께 엎어졌다. 쓰러진 리치를 마탁차 바퀴가 짖이겼다.
현실의 리치가 탄 흑마의 몸통에 샤의 창이 충돌한다. 배가 뼈째로 찢어지며 현실의 흑마는 쓰러지고 리치도 함께 엎어진다. 쓰러진 리치를 마탁차 바퀴가 짖이긴다.
마탁차의 무게가 갑옷을 짓누르자 미래의 리치는 박살났다. 미래의 샤는 천리안을 해제하며 숨을 헐떡였다.
마탁차의 무게가 갑옷을 짓누르자 현실의 리치는 박살난다. 현실의 샤는 천리안을 해제하며 숨을 헐떡인다.
무게로 짓누르는 데에는 갑옷도 별 효력이 없었다. 리치의 갑옷 안 몸통뼈는 다 분해되었다. 갑옷 안에서 분홍빛 뿌연 액체가 흘러나왔다. 그 목뼈도 박살났다. 리치의 머리는 그 뇌를 떨군 채로 해골만 땅바닥을 굴렀다.
완벽한 승리였지만 샤는 승리를 기뻐하지 못했다. 미래를 엿본 뇌는 과부하에 걸려 금방이라도 구워질 것만 같았다. 잔뜩 충혈된 한쪽 눈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샤는 그 자리를 벗어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마탁차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정신이 혼미해서 쓰러질락말락했지만, 어떻게든 버텨보았다. 십 분이 지나자 그럭저럭 괜찮아졌다. 샤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리치가 파괴된 것을 눈치챈 사람들이 슬그머니 나오고들 있었다. 금세 샤를 중심으로 군중이 형성되어 만세합창이 시작되었다. 평소라면 우월감을 즐길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골이 깨질 것 같은 지금은 아니었다.
샤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마탁차를 몰아 여자의 시체가 있던 쪽으로 갔다. 시체는 방치되어 있었다. 따뜻할 때면 가을, 보통은 겨울, 추울 때면 극지방에 가까운 혹한지대인 북부답게 파리는 꼬여있지 않았다. 샤는 그 시신을 양팔로 안아들었다.
이제 뭘 어째야할지 샤는 몰랐다. 그는 그저 우두커니 서있었다. 뒤늦게 뒤따라온 사람들은 무슨 상황인지 몰라 말도 걸지 못하고서 멍하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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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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