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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이윤후

민간군사기업 블랙 레벨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퓨전

완결

이윤후
작품등록일 :
2013.04.16 12:56
최근연재일 :
2014.02.18 12:00
연재수 :
12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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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8,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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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02
글자수 :
790,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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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4.18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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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
글자
19쪽

1장 [블랙 레벨] -01-

DUMMY

어렸을 적에 눈앞에서 산이 폭발했다.





※※※





몇 안 되는 사람이 살고 있는 산골 마을. 두 명의 남자아이와 한 명의 여자아이가 마을에 딱 하나 있는 학교 운동장에서 놀고 있다. 다 낡은 그네를 타다가, 세 개 중 겨우 온전한 철봉 하나에 매달려 놀기도 하던 아이들은 결국 소꿉놀이를 한다.


여자아이의 기가 더 세서 남자아이들이 흙으로 밥도 만들고 장난감 그릇들을 설거지하던 중, 갑자기 하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세 아이는 하던 일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봤다. 작은 불덩어리가 하늘에서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아이들이 놀고 있던 학교 뒤쪽에 있던 산과 부딪혔다.


크고 작은 돌덩어리가 사방으로 튀고 산을 이루고 있던 나무들이 불에 타고 있을 때, 아이들은 울거나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고 눈앞으로 밀려오는 푸른 모래 같은 것을 쳐다봤다. 그 모래는 간신히 보일 정도로 투명했고, 공기에 섞여 넘실거릴 정도로 가벼웠다.







※※※





[1km 내 생체반응.]


머릿속에서 울리는 여성의 목소리에 정신이 든 남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숫자는?”

[최초 다섯에서 현재 일곱, 아홉. 점점 늘어나는 중입니다. 탐색 범위를 확대하시겠습니까?]

“2km.”

[생체반응 121 이상 감지. 탐색 범위를 확대하시겠습니까?]

“됐어. 엄청나게 몰려왔다는 거잖아. 지원까진 얼마나 남았지?”

[아무리 빨라도 5시간 이상은 걸립니다.]


남자는 다시 한 번 길고 긴 한숨을 토해냈다.


“결국에는 혼자 싸워야 하나.”

[혼자가 아닙니다. 제가 함께 있습니다. 당신의 기술과 제 정보와 판단이 합해진다면 당해낼 상대는 없습니다.]


남자는 그 말에 이를 보이며 웃었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대신 모래 속에 묻힌 손을 움직여 자신의 무기를 잡았다. 손을 타고 올라오는 익숙한 감촉이 지금의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격려해주고 있었다.


남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몸을 누르고 있던 묵직한 모래가 밑으로 흘러내렸다. 사방은 온통 짙고 어두운 갈색, 맨눈으로는 다섯 걸음 앞까지 밖에 보이지 않았다. 처음 모래폭풍에 휘말렸을 때와 비교하면 어느 정도 빛이 돌아온 상태라는 사실이 더욱 마음을 슬프게 했다. 세상을 집어삼킬 듯이 소용돌이치는 모래폭풍 안으로 남자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지금이라면 아직 적에게 노출되어 있지 않습니다. 공격의 기회입니다.]

“알았어. 리엔.”


남자는 보통 사람이라면 한 발자국도 내밀기도 버거운 거센 폭풍 속을 달려나갔다. 공기 중에 맹렬한 속도로 날아다니는 날카로운 모래들이 남자가 입고 있는 검은 옷에 상처를 냈다. 사람의 입안으로 들어가면 유리조각 같은 날카로움으로 몸 내부를 찢어버리는 모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의 눈에 모래폭풍 속을 걷고 있는 검은 그림자가 들어왔다. 남자는 폭풍의 모래와 소리를 이용해 자신을 숨기면서 그림자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림자가 남자를 눈치채고 총을 발사했다. 다행히 그 사격은 모래에 허구하게 구멍만 뚫을 뿐이었고, 병사는 그것을 안 순간 자신의 총과 함께 손목이 잘려나간 사실도 깨닫는다.


이미 가망이 없는 병사를 향해 사방에서 총알이 쏟아졌다. 남자는 방금 전 자신이 공격한 병사를 방패로 삼은 뒤 총격이 끝났을 때를 틈타 다시 모래폭풍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근처로 이동한 남자는 조용히 숨을 죽인 채 새롭게 나타난 병사들을 지켜봤다.


탄창 하나를 모두 비워버린 5명의 병사들은 이제는 목숨이 사라진 동료에게 천천히 접근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끝장을 낸 것이 적이 아니라 동료라는 것을 알자 탄식했다. 남자는 그 틈을 노리고 앞으로 튀어나가 한 병사의 목에 큰 상처를 냈다. 바로 옆에 있던 병사가 공격을 눈치채고 기겁하며 총을 난사했다. 하지만 그 총알은 또 다시 그의 동료에게 박힐 뿐이었다. 남자는 총을 쏜 병사가 자신을 미처 발견하기도 전에 가지고 있던 칼로 그의 가슴을 찌르고 다시 모래폭풍 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세 명의 병사는 한데 모여 서로 등을 맞댔다.


남자는 그들 중 가장 공포에 떨고 있는 병사에게 천천히 접근하여 순식간에 몸의 급소를 공격했다. 몸에 힘이 빠진 병사가 두 무릎을 꿇는 순간, 앞쪽에 있던 병사가 무슨 일이냐고 소리쳤다. 남자는 망설이지 않고 옆에 있던 병사까지 처치했다. 목이 베인 병사는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며 모래에 얼굴을 박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병사가 몸을 돌리는 것을 눈치챈 남자는 재빨리 뒤로 움직여 모래폭풍 속에 다시 몸을 숨겼다. 모래폭풍에 대비하고 왔다지만 평범한 고글을 썼을 뿐인 병사에게 들킬 이유는 없었다. 남자는 마지막으로 남은 병사가 주변을 둘러보고 당황하는 사이 나이프를 손에 꺼내 들고 정확히 조준을 한 다음 병사를 향해 던졌다. 모래 속을 빠르게 날아간 나이프는 그대로 병사의 목에 꽂혔다. 병사는 죽기 직전 마지막 힘을 다해 자신의 목에서 나이프를 빼냈다. 목에서 피가 사정없이 쏟아지며 그의 전투복을 적셨다. 병사는 자신의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서 있다 끝내 힘이 다해 쓰러졌다.


[생체반응 145 이상. 수가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여성의 목소리에 남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런 식으로 하자면 끝이 없겠군.”


남자는 고개를 돌려 모래 폭풍 너머로 몰려오는 적들을 응시했다. 무언가가 모래를 뚫고 빠르게 날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총알이 눈썹 한가운데 바로 앞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그 순간 남자의 눈에는 날아오고 있는 총알의 뚜렷한 모습과 함께 아무 생각 없이 살 수 있었던 시절의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




“웬일이냐? 산골소년이 이 시간에 전화를 다하고.”


친구 김현이 털털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태민은 입을 삐죽 내밀면서 목소리를 낮춰 고뇌에 빠진 사나이를 연출하며 말했다.


“건방진 도시촌놈아. 이 형님이 지금 기분이 많이 꿀꿀하시다. 역전으로 나오면 친히 고기를 먹게 해줄 테니 빨리 튀어나와라.”

“잘 됐네. 안 그래도 저녁 먹으려고 하던 참인데. 너 지금 역전이야?”

“아니. 집. 30분 내로 가니까 빨리 나와라.”

“그러지 뭐. 그나저나 무슨 일인데?”

“그건…. 먹으면서 설명해줄게.”


태민은 의자에서 일어나 외투를 몸에 걸쳤다.


몇 십분 뒤, 태민은 버스 정류장에서 김현과 만났다. 겨울 방학이 시작된 이후 김현과는 처음 갖는 만남이었다.


김현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보며 웃었다.


“이 녀석, 내가 불러낼 때는 그렇게 안 나오더니.”

“남자란 큰일이 닥치면 스스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법이지.”

“그래. 굴속에 짱 박혀 있으니까 뭔가 답이 나오던?”


태민은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글쎄. 답은 안 나왔는데. 그냥 회복되길 기다린 수준이다.”

“말하는 걸로 봐선 꽤 괜찮아진 것 같은 걸?”

“한 달도 넘게 웅크리고 있었는데 괜찮아져야지.”

“아무튼 아쉬웠다. 모의고사 성적대로만 나왔으면 너도 우리 학교에 붙을 수 있었을 텐데.”

“그 얘기는 제발 그만해 줘. 기껏 아물어진 상처가 다시 터질라.”

“크크크, 알았어 임마. 그나저나 어디로 갈래? 금요일이라 어딜 가도 사람이 많겠지만.”

“저 건물 2층에 있는 고기뷔페. 내가 미리 인터넷으로 알아봤지.”


김현의 말대로 뷔페는 사람들로 붐볐다. 태민은 가게에 들어오면서 창 밖이 보이는 자리를 계속 보고 있었지만 직원이 안내해 준 자리는 창과는 인연이 없는 안쪽 자리였다. 새로운 손님을 받기 위해 금세 자리를 떠난 직원은 태민의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표정을 보지 못했다.


김현이 먼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뭐해? 앉지 않고.”


태민은 할 수 없이 맞은편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난 창가 쪽 자리가 좋았는데.”

“뭐 어때. 덕분에 음식 가져오는 곳에서는 가깝잖아.”

“넌 정말 긍정적인 녀석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기를 가져오거라.”

“어차피 그러려고 했어.”


잠시 뒤 김현은 접시에 고기를 한 가득 가지고 와 굽기 시작했다. 태민은 김현의 이런 점이 좋았다. 나쁘게 말하면 대책 없는 낙천성이었지만 그 낙천성이 항상 자신의 기분을 풀어주었다. 또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의 성격 때문에 골머리를 썩히는 문제들을 쉽게 입밖에 낼 수 있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태민은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으면서 말했다.


“어머니가 나보고 일하라고 하신다.”


김현은 고기를 굽다 말고 태민을 바라보다가 눈을 두 번 껌벅이고 말했다.


“그건 안 좋은데. 혹시라도 네가 재수할 생각이 있다면 그냥 강요하는 거잖아.”

“아쉽게도 재수할 생각은 없어.”

“그럼 일해야지.”


더없이 산뜻한 대답이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젓가락을 손에 들고 김현이 구워놓은 고기를 한 움큼 집어 자기 접시로 가져왔다. 김현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더니 똑같이 웃으면서 고기를 불판에 올렸다.


고기를 쌈장에 찍어 입에 넣었다. 뷔페 고기가 항상 거기서 거기긴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맛있게 느껴졌다.


태민은 물을 한 컵 비우고 말했다.


“내일 회사 사람이 우리 집으로 와서 면접을 본대.”

“뭐? 무슨 회산데?”

“몰라. 어머니 말로는 무슨 연구소라고 하는 것 같던데. 그쪽에서 먼저 전화했대.”

“신기한 걸. 대체 연구소 같은 곳에서 네 무엇을 보고 연락한 거지? 게다가 면접자 집으로 찾아와 면접을 본다고? 금시초문인데.”

“난들 아냐.” 태민은 빈 접시를 보고 말했다. “고기 다른 걸로 가져올까? 보니까 양념 삼겹살이란 게 있던데.”

“그거 별로 맛없더라. 먹고 싶으면 하나만 가져와.”


김현과는 저녁을 먹고 바로 헤어졌다. 연구소 얘기는 생각보다 많이 하지 않았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길게 갈 것 같지만 짧게 만나 헤어지고, 뭔가 심각한 말을 하려다가도 그런 건 뒤로 넘겨버리면서 기분 전환이나 하는 거였다. 그러고 나면 신기하게도 다음에 있을 일에 대해 자신감이 생겼다. 그건 시험이든, 입학이든, 수능이든 그 어떤 종류더라도 변함이 없었다.




※※※




태민은 아침 일찍부터 눈을 떴다. 정확하게는 눈을 떴다기보다,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긴장 때문에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평소보다 일찍 아침밥을 먹으면서 준비할 것들을 생각했다.


먼저 씻어야 했다. 3일만에 샤워를 하고 욕실 거울 앞에서 포즈를 취하면서 과도한 자신감에 휩싸였다가 옷장을 열어보고 절망에 빠졌다. 옷장 안에는 면접에 맞는 옷이 전혀 없었다. 아니, 딱 하나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고등학교 교복이었고, 한 달 뒤면 졸업할 시점에서 교복을 입고 면접을 보는 건 참 우스운 꼴이었다. 태민은 잠시 동안 고민하다가 최대한 깔끔해 보이는 티셔츠와 면바지를 입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시간이 느리게 지나갔다. 혹시라도 긴장이 풀릴까 봐 텔레비전도 켜지 못했다. 10분쯤 지났을 때는 산 만큼 큰 걱정이 전신을 압박했다. 생각해 보면 면접관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이는 몇인지, 심지어는 언제쯤 오는지까지. 상식적으로 시간 정도는 가르쳐줘야 하지 않느냐고 태민은 속으로 불평했다.


20분이 지났을 때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자기를 놀린 것 같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심장을 때렸다. 그래도 혹시 사실일 수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보자고 생각했다.


30분이 더 지났을 때, 태민은 평소에 즐겨 사용하던 레고를 방에서 꺼내 거실로 가져왔다. 점심 시간이 되었을 때는 거실 탁자 위에 레고로 만들어진 F1 레이싱카가 놓여있었고, 배가 고파 라면을 끓여 먹을 때는 정비소가 완성되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면접에 대한 기대는 어느 정도 남아있었다. 하지만 4시가 넘어 5시가 되자 완전히 포기 상태가 되었다. 태민은 레이싱 경기장을 모두 완성하고 고개를 들었다. 창 밖에서 석양이 지고 있어서 겨울의 낮이 여름보다 짧다는 것을 제대로 확인했다.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그때 인터폰이 울렸다.


오랜 기다림에 지쳐 헛것을 들은 게 아니었다. 태민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인터폰 앞으로 걸어갔다. 푸른빛이 도는 흑백 화면 너머로 정장을 입은 20대 여성이 짧은 머리를 가다듬고 있었다. 태민은 그녀의 외모를 보고 학습지 선생님과 비슷하단 생각을 했다. 수화기를 집어 들려다가 잊었던 긴장감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하고 수화기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김태민 학생 집이 맞나요?”


뭐라 하기도 전에 저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와 태민은 몸이 굳어버렸다. 아무 말 없이 시간이 붕 뜨자 여자가 이상하단 표정으로 쳐다봤고 그제서야 입이 열렸다.


“아, 맞습니다. 잠시만요.”

“네. 감사합니다!”


현관개폐 버튼을 누르자 여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왔다.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탁자 위에 만들어 놓은 레고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했다. 방으로 옮겨놓기에는 너무 거대했고, 그렇다고 분해를 하자니 시간이 모자랐다. 짧은 시간 동안 열심히 머리를 굴린 결과, 아직 조립되지 않은 블록만 치우고 만들어진 작품은 그냥 놔두기로 했다.


태민은 현관문에 귀를 갖다 대고 엘리베이터 소리에 집중했다. 이 정도로 청각에 온 신경을 집중한 때는 몇날며칠을 기다렸던 비디오 게임 [데빌 블레이드]가 택배로 배달됐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때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택배 기사에게 “이게 데빌 블레이드예요?”하고 물었을 정도였다.


태민이 철없던 옛날 기억에 얼굴을 붉히던 도중에 문 밖에서 엘리베이터 도착 소리가 들렸다. 현관문 렌즈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니 인터폰의 그 여자가 옷 매무새를 다듬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초인종이 울렸다. 태민은 제자리에서 다리를 움직이며 걷는 소리를 냈다. 지금 막 방에서 현관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처럼 발소리를 점점 키워나가는 섬세함도 잊지 않았다. 긴장을 목 뒤로 넘기고 현관문을 열자 키가 머리 하나 정도 더 큰 여자가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반갑습니다.” 여자가 악수를 청하자 태민은 어색하게 손을 내밀었다. “김태민 학생인가요?”

“네. 들어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어라. 저건 뭔가요?”


여자가 손가락으로 레고로 만든 레이싱 경기장을 가리켰다..


“아, 죄송해요. 오늘 안 오실 줄 알고…. 제가 심심풀이로 만든 거예요.”

“우와. 직접 만든 거예요?”

“예.” 별 것 아닌 것처럼 얘기했지만 자신이 만든 작품에 반응해주자 기분이 좋았다.


태민은 여자를 레고가 올려진 거실 탁자 앞으로 안내하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평소 집으로 어머니 친구분들이 놀러 왔을 때를 생각하며 손님 접대를 하려 했지만, 머리는 이미 하얀 백지가 되어 있었다. 냉장고에 무엇이 있는지, 손님용 컵은 어디에 있는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엔 평소 쓰는 컵에 냉수를 담아 가져갈 수밖에 없었다. 양손에 컵을 하나씩 들고 돌아가려니 여자가 손으로 자동차 정비소를 아무렇게나 만지고 있었다.


“저기, 그거 막 만지면 안 되는데요.”


그 말에 여자는 깜짝 놀라면서 황급히 손을 거뒀다.


“미안해요. 굉장히 잘 만들어서 나도 모르게 그만.”

“그렇게 사과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태민은 컵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면서 자책했다. 레고로는 어차피 항상 만들었다 분해했다를 반복하면서 놀았다. 다 큰 어른이 어린아이처럼 부수고 놀진 않았을 텐데 자신이 너무 과민반응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상대는 면접관이었다. 좋은 인상은커녕 오히려 불만을 표출한 게 너무 한심했다.

냉수를 한 모금 마신 여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거실이 좀 어둡지 않나요?”

“아! 죄송합니다.”


태민은 번쩍 일어나 거실 형광등을 켜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머리가 완전히 혼란복잡 상태였다. 괜히 목이 타서 눈앞에 있는 물 한 컵을 단번에 들이켰는데도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여자가 얼굴에 미안한 미소를 짓더니 물었다.


“부모님께서는 외출하셨나 봐요?”

“네. 유럽으로 여행가셨어요.”

“와, 유럽. 부럽네요.”


그 순간 태민은 어머니가 말했던 연구소란 곳이 규모가 꽤 큰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 회사란 조직에 대해 완벽히 알고 있지는 않았지만 규모가 크면 클수록 일을 계획하는 부서와 직접 실행하는 부서가 분리되어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즉, 부모님께 전화한 곳은 인사과고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전후 사정 모르고 인사과에서 방문 명령을 받은 다른 부서 사람이란 추측이었다.


여자는 다시 컵을 들어 물을 마시다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냈다.


“소개가 늦었네요. 블랙 레벨 코리아의 한예원이라고 합니다. 미리 들어서 알고 계시겠지만 오늘 김태민 학생에게 입사를 권유하기 위해 왔습니다.”


태민은 레고 경기장 위로 손을 뻗어 명함을 받았다. 레벨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는 귀를 의심했는데 자주 쓰는 레벨(Level)이 아닌 레벨(Rebel)이었다. 알파벳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무슨 단어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영어를 모른다는 인상을 주기 싫어서 겉으로는 이해한 척, 다른 질문을 했다.


“연구소라고 들었는데요. 정확하게 무엇을 연구하는 곳이죠?”

“예. 저희는 기본적으로 군수사업을 하고 있어요.”

“군수사업이요? 총이나 탱크 같은 걸 만드는?”

“네. 하지만 요즘은 무기보다는 방어 장비 쪽에 힘을 쏟고 있지요.”


태민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과 군수산업이 연관되는 키워드를 찾을 수 없었다. 군대 쪽으로는 관심도 없었고 별다른 지식도 없었다. 그나마 총과 관련된 행동은 인터넷으로 가끔씩 하는 총 싸움 게임이 전부였다.


“조금 이해가 안 되는데, 그런 곳에서 왜 저를 찾아온 거죠?”

“안 될 이유 있나요?”

“그런 건 없죠. 하지만 전 그쪽 방면에 문외한인데다가 학교 성적도 좋지 않은 걸요.”

“아하하, 걱정 마세요. 저도 공부는 못하니까요.” 한예원은 손을 흔들며 경박하게 웃다가 시선을 느끼고 헛기침을 했다. “저희가 태민 학생에게 온 이유는. 음…. 어떻게 설명해야 잘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걸 저한테 물어보시면 안 되죠.”


태민은 자기 안에서 눈앞의 면접관에 대한, 아니 이제는 환상이 무너져 면접관이 아니라 정수기 판매원으로 보이는 여자를 의심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그렇죠. 그러면 일단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하는 게 좋겠네요.” 한예원은 가방에서 얇은 서류를 꺼내 들더니 말했다. “태민 학생은 어렸을 때 경남의 시골에서 살았지요?”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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