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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P

욕망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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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굴P
작품등록일 :
2022.05.11 10:32
최근연재일 :
2023.05.0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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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0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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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 아래 전쟁(6) - 경고, 그리고 선택

DUMMY

#1


루저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는 단번에 공기를 일그러뜨리며 헤이카 미켈런을 향한 노골적인 경계심을 드러냈다.


눈에 보일 정도의 파장. 경직된 공기.

감응자들이 능력을 사용함에 있어 발생하는 현상을 수두룩하게 보아왔던 헤이카는 지금 자신이 완벽하게 루저의 영역에 들어와 있음을 깨달았다.


"어머. 얼굴 보자마자 위협이에요? 에이전트는 다 이런가?"

"당신 같은 돈 많고 높으신 분들에 비하면 우린 밑바닥 구정물에서 구르는 에이전트라서요. 게다가 저흰 지금 회장님 뒤를 캐고 있었죠.”

“그래서요?”

“이런 먼 외국에서 갑자기 우리가 실종돼도 회장님이 연루된 게 알려지면 코렌 정부는 얌전히 입을 다물 겁니다.”

“제가 여러분을 은밀하게 처리하려고 이 밤중에 찾아왔다는 얘기예요?”

“그런 게 아니면 굳이 이 시간에 여길 찾아오신 이유를 모르겠군요. 회장님.”


루저의 비아냥에 헤이카는 빙긋 웃었다.


“코드네임 루저. 능력은 분해(分解). 그 손에 닿는 모든 걸 분해할 수 있죠. 제대로 사용만 한다면 원자 단위로 쪼개는 것도 가능한 무서운 능력이에요.”

“...그걸 아는 사람이 이렇게 태연하십니까?”


루저의 날카로운 눈이 헤이카의 어깨너머를 살폈다.

호텔 복도가 보였지만, 루저는 그 복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공업의 특수팀인 고스트가 모습을 숨기고 있다면 언제 총알이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 손가락 하나만 닿아도 전 죽겠죠.”

“예, 뭐. 그렇습니다.”

“그럼 당신 귀여운 후배도 죽을 거야.”


눈을 부릅뜬 루저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방 안에선 검은 옷차림의 건장한 남자가 윈터를 향해 총을 겨눴고, 윈터는 얼어붙은 채 두 손을 들고 있었다.


‘언제 들어왔지?’


입구엔 헤이카 미켈런 뿐, 창문도 닫혀 있었다.

하물며 이곳은 10층이다. 결코 뛰어내리거나 뛰어오를 만한 높이도 아니었다.


“...선배..”

“..겨울아. 움직이지 마라.”


루저는 총을 겨누고 있는 남자를 감응자라고 확신하며 말했다.

그의 주변 공기도 루저와 똑같이 경직되어 있었다. 더불어 이 말도 안 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선 감응자라는 변명이 가장 간단했다.


그렇게 다시 몸을 돌려 방문을 보았을 때, 헤이카는 이미 가까이 다가와 루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루저는 그런 헤이카와 눈을 마주치며 힘이 바짝 들어갔던 손을 축 늘어뜨렸다. 루저를 휘감고 있던 경직된 공기가 녹아내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시 베테랑 에이전트다운 판단이네요. 조금 전 능력 사용은 없던 걸로 해줄게요."

“.....”

“앉아서 얘기할까요?”


싱긋 웃으며 묻는 헤이카였지만 애초부터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루저를 지나쳐 먼저 안쪽 소파에 풀썩 앉은 헤이카가 루저를 향해 와서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쯧.”


하는 수 없이 루저도 소파에 앉았다. 그는 미처 여행 케이스에 다 들어가지 못해 너저분하게 늘어진 자료를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헤이카는 거리낌 없이 자료를 집어 훑어봤다. 여행 케이스 안에 있는 내용까지 전부 그녀의 손을 거치고 나서야 헤이카는 총을 겨눈 남자를 향해 말했다.


“나이트. 그만 됐어.”


‘나이트’ 라 불린 남자가 총구를 치웠다. 여전히 얼어 있던 윈터는 조심스럽게 헤이카와 루저의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손을 내렸다.


“지난번 공조 수사 때는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풀렸어요. 고마워요.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이제서야 기회가 됐네요.”

“...별 말씀을.”

“그보다 이 짧은 시간에 꽤 많이 조사했네요? 캔들이랑 몬스터 리바이어, 그리고 저와 레베스타 통합 의회의 거래까지.”

“유일한 특기니까요.”

“그럼 그 연락도 받으셨죠? 이 일에서 손 떼라는 위쪽 지시.”


헤이카가 천장을 향해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작은 한숨을 쉰 루저가 끄덕였다.


“마침 잘 됐네요. 저희 기차를 특석으로 드릴게요. 어디 보자.. 새벽에도 운영하니까.. 두 시간 뒤면 출발이에요. 대충 정리하고, 슬슬 나가면 되겠어요.”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합니까?”

“하면 좋고요. 하지만 본심은 이미 말 안 해도 알죠?”

“예. 압니다. 당장 레베스타에서 꺼지라는 뜻이겠죠. 회장님.”


루저의 직설적인 말투에 윈터는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당황한 모습에 헤이카가 배시시 웃으며 윈터를 바라보았다.


“그쪽이 루저의 파트너죠? 코드네임은 윈터. 그런데 능력이 뭐예요? 어째 에이전트 본부를 쑤셔도 안 나오던데.”

“...저, 저도 잘.. 몰라요..”

“아. 가끔 있었지. 자기 능력이 뭔지 잘 모르는 감응자들. 그래도 시험은 통과해서 에이전트 부서에 잘 배치된 모양이네요. 축하해요.”

“네..”


잔뜩 얼굴을 찌푸린 루저가 헤이카를 노려보았다.


코렌의 에이전트들은 부서에 배치되기 전에 ‘ASL’ 이라는 이클립스 공업의 감응자 양성 기관에서 훈련을 거치고 시험까지 치른다.


즉, 윈터가 에이전트로 배치될 수 있었던 건 전부 이클립스의 덕분이라는 얘기다.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헤이카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얘기하고 있었다. 그런 헤이카의 뻔뻔한 얼굴이 루저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로 정리해서 떠나겠습니다.”

"시시하게 벌써 포기했어요?"

"처음부터 남아서 버틸 생각도 없었습니다."

“이상하네. 제가 아는 ‘루저’ 라는 에이전트는 이런 불의를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정의로운 사람일 텐데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제가 레베스타의 캔들과 몬스터 리바이어. 두 프로젝트를 지원한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죠?”


루저가 끄덕였다. 빙긋 웃은 헤이카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신들은 그 두 프로젝트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고요.”


루저는 애써 헤이카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이젠 다 모르는 일입니다. 손 떼기로 했으면 그런 정보도 쓸모가 없으니까요.”

“절 설득해볼 생각도 없어요? 가령 그 프로젝트를 중간에 가로채서 레베스타가 완성하지 못하게 파기시키라던지.”

“그래 달라고 부탁하면 해주실 겁니까?”


피식 웃으며 루저가 물었다. 헤이카도 그를 향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근데 그냥 파기하기엔 좀 아까운 프로젝트긴 하죠.”


루저는 이를 악물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다지 없었다. 이렇게 슬쩍 불쾌감을 드러내는 정도.

헤이카는 그런 루저를 재밌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렇게 잠시 답답한 침묵이 깔렸다.


“...그만두시면.. 안 될까요..?”

“!”


루저가 고개를 들었다. 침묵을 깨고 저런 실없는 소리를 한 것은 다름 아닌 윈터였다.

헤이카도 꽤 놀란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놀람은 곧 흥미로 바뀌었다.


낭패였다. 루저는 이를 악물었다.

어떤 이유로든 헤이카 미켈런의 관심을 받는다는 건 여러모로 좋지 않았기에.


“다시 한번 말해볼래요?”

“그, 그만두시면 안 될까요..? 그게 위험한 프로젝트라는 건 회장님도 아시..”

“겨울아. 입 닫아.”


보다못한 루저가 말했다. 윈터는 말을 멈췄지만 상황은 이미 한참이나 늦은 뒤였다.

헤이카의 시선은 이제 윈터에게 꽂힌 채 떨어지질 않았다.


“계속 말해봐요. 내가 허락할 테니까.”

“....”

“싫어요? 아쉽네. 들어줄 수도 있었는데.”

“.......그 프로젝트는... 큰 전쟁을 일으킬지도 몰라요....”


헤이카가 눈을 빛냈다. 루저는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이유를 말해볼래요?”

“캐, 캔들은 감응자의 수를 폭발적으로.. 늘릴 수 있어요. 그렇게 늘어나면 감응자가 무기로 쓰이기 시작할지도 몰라요.. 더욱 강력한 능력자들을 모아서 부대를 만들고..”

“그럼 몬스터 리바이어는요?”

“..위험한 병기잖아요..? 비인도적이고.. 만약 그런 게 완성됐다가 전쟁이 더 끔찍하게 변하면..”


입술을 매만지며 헤이카가 끄덕였다. 윈터는 기대 반, 걱정 반으로 헤이카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는 루저는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의 눈에서 초조함이 넘쳐흘렀다.


“한 가지 질문. 캔들을 먹고 감응자가 된 인간이 어떤 능력을 가질 것 같아요?”

“네? 어... 잘 모르겠어요..”

“그건 약에 포함된 성분에 따라 달라요. 즉, 능력을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다는 거죠. 걸어 다니는 핵폭탄 같은 무시무시한 능력자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얘기예요.”


윈터가 침을 꿀꺽 삼켰다.

헤이카의 말대로라면 캔들의 위험성은 지금까지 그녀가 상상하던 것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몬스터 리바이어는 사실 아주 옛날에 완성된 프로젝트예요. 그걸 다시 부활시킨 거죠.”

“네..?”

“문제는 그 당시 프로젝트가 실패했다는 거예요. 몬스터 리바이어가 인간의 명령을 무시하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어요. 그들은 독자적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생산 라인을 늘려 자기네 전력을 불렸고, 자기들끼리 사회를 구축해 하나의 종족이 되었어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윈터는 생각했다.

그런 큰일이 있었다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그러나 루저의 얼굴을 본 순간 윈터는 충격에 휩싸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 된 루저가 흐트러진 모습으로 눈을 번들거리고 있었다.


“결국, 몬스터 리바이어는 폭주했고 인류는 대재앙에 휩싸였죠. 그 몬스터 리바이어가 완전히 정리되기까진 엄청난 시간과 노력, 희생이 필요했어요.”

“...회장님. 그만..”

“전 겪어본 적 없지만 정말 끔찍한 암흑기였을 거예요. 인류가 기계한테 지배 당하는 세상은 상상도 하기 싫죠. 당시 사람들은..”

“그만 - !”


결국, 루저가 고함을 지르며 몸을 일으키고 나서야 헤이카는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 그녀는 얼굴을 미소로 바꾸었다.


"미안해요. 화나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루저는 숨을 고르며 다시 앉았다. 윈터의 떨리는 시선을 받고 있었지만 루저는 애써 그런 후배의 눈을 외면했다.


"여러분이 모르는 걸 더 얘기해줄까요?"

"..필요 없습니다. 저희는 손을 떼라는 지시를 받았고, 여기서 손을 뗄 겁니다."

"그래도 들어요. 내가 말하고 싶으니까."


루저는 탄식했지만 별다른 수도 없었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제가 오늘 밤 여기 오기 전에 어딜 들렀는지 아세요? 통합 의회에서 저한테 건방지게 손가락질하던 의원분들 집에 들렀어요. 혀랑 손가락을 잘라버렸죠. 귀찮게 치근덕대던 사람은 물건을 잘라버렸고요. 울면서 애원하는 게 어찌나 웃기던지."

"...."


윈터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곤 슬그머니 최대한 루저가 있는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다음으론 파스트라스 용병들을 만나러 갔어요."

"....."

"우리 직원 하나를 계속 노리더라고요? 산이라고 알죠? 지난번 공조 수사 때 그쪽이랑 같이 뛴 우리 귀여운 신입 팀장."

"...예.."


헤이카는 빙긋 웃었다. 그 눈에 담긴 위험한 분위기를 읽은 루저가 소리 없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캔들 찾아오라고 머스칼까지 붙여서 연방으로 보내놨는데, 파스트라스가 연방까지 뒤따라갈 기세더라구요. 뒤끝도 참 길지. 화가 나서 부숴버렸어요."


루저는 슬그머니 옛 친구인 퍼렌도를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그 남자라면 쉽사리 당하진 않았겠지만, 지금의 경우엔 상대가 너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세 번째 들른 곳이 여기예요."


윈터는 이젠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건 경고였다.

루저와 윈터에게만 하는 게 아닌, 이곳 레베스타에서 헤이카 미켈런을 거스르던 모두에게 하는 경고.

루저는 퍼렌도를 생각하며 감았던 눈을 떴다.


“회장님 말씀 전부 이해했습니다.”

“다행이다. 여러분은 머리가 좋은 분들이니 이해해주실 거라 생각했어요. 역시 훈련된 에이전트는 다르네요.”


헤이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아까부터 가볍게 들고 온 손가방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열었다.

안에는 수북한 돈다발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대충 봐도 입이 떡 벌어지는 수준의 금액이었다.


“이건 제 얘기를 들어준 소소한 답례예요. 돌아가서 맛있는 거라도 사 드세요.”

“.....예..”

“여러분 기차 시간도 있으니 전 이만 가볼게요. 늦은 밤에 실례했어요.”


그렇게 돌아나가려던 헤이카가 잠시 발을 멈췄다. 그녀는 책상과 바닥에 너저분하게 늘어진 조사 자료들을 가리켰다.


“그 자료들은 그냥 두고 가세요. 제가 정리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회장님.”

“혹시라도 말하는 건데, 여기 남을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예요. 특실 서비스 놓치면 아깝잖아요?”


마지막으로 그런 말을 남긴 헤이카는 생글생글한 미소로 거리낌 없이 방을 나섰다.


문이 굳게 닫히고, 팽팽하게 긴장된 공기가 누그러들자 윈터는 무릎에 고개를 박았다. 그녀의 입술과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겨울아.”

“네.. 선배..”


루저의 지시를 무시했던 윈터였다. 그녀는 쓴소리를 들을 걸 각오하고 슬쩍 고개를 들었다.

평소라면 허물없이 대하는 파트너이자 친한 선후배 사이지만, 엄연히 두 사람의 상하 관계는 분명했다. 지시에 불복한 에이전트는 규정상 징계를 받는 게 원칙이다.


“괜찮냐?”

“....”


욕이라도 한 바가지 먹을 걸 예상했던 윈터는 전혀 의외의 질문에 잠시 멍해졌다. 심지어 윈터가 대답하지 않자 루저는 걱정 가득한 얼굴을 해 보였다.

어리둥절한 윈터가 눈만 끔뻑이고 있자 루저가 한숨을 쉬며 다시 물었다.


“괜찮냐고.”


결국, 윈터는 핑 도는 눈물에 황급히 눈가를 부비며 코를 훌쩍였다.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럼 됐다. 빠르게 짐 챙기자. 자료는 여기 두고.”


이제와선 헤이카 미켈런을 막는다느니, 그런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길다고 보긴 어려운 짧은 대면.

헤이카 미켈런 본인이 해온 직접적인 위협이라곤 ‘나이트’ 라 불렸던 남자가 총을 겨눈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섞인 경고는 뼛속까지 공포를 스며들게 했다.

헤이카 미켈런이 괴물이라 불리는 이유를 윈터는 눈물이 나도록 실감했다.


‘악당이야...’


평소에도 이클립스 공업을 꺼림칙하게 생각하던 그녀였기에 이렇게 직접 공업의 회장을 마주한 경험은 그녀의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었다.


‘진짜 악당..’


윈터는 생각했다.

이클립스 공업은 인류를 위해 공헌하는 착실한 기업이 아니라고.

그들은 뒷세계를 주무르며, 세계를 자기들 마음대로 뒤바꿀 힘을 가진 무시무시한 악당이라고.



...



준비가 끝나는 대로 루저는 곧바로 윈터를 데리고 호텔을 나왔다.

하지만 어째선지 루저는 역으로 가는 대신 호텔이 잘 보이는 근처 주차장에 자리를 잡고 담배를 태우기 시작했다.


잠시 숨을 돌리는 거라면 모를까, 그런 것치고는 루저의 행동은 너무나 느긋했다.

이러다 기차를 놓칠 거라 생각한 윈터가 담배 연기를 마실 걸 각오하곤 루저에게 먼저 다가갔다.


“선배. 저희 역으로..”

“넌 어쩌고 싶냐?”

“네?”

“어쩌고 싶냐고.”


담배를 입에 문 채 루저는 진지한 얼굴로 윈터와 눈을 마주쳤다.


“이대로 손 떼고, 다 잊고 코렌으로 돌아가면 평소처럼 지낼 수 있을 거다. 에이전트 일이 평범하진 않아도 이번처럼 위험한 일에 말려들진 않을 테고, 넌 따박따박 받은 월급이랑 헤이카가 준 돈으로 옷도 사고, 영화도 보고, 남자도 만나고. 좋은 건 다 누리고 살 수 있겠지.”

“....”

“하지만 여기 남아 끝까지 그 여자랑 맞붙기를 선택하면 앞으로 그런 생활은 끝장날 거다. 평생을 도망치며 살아야 될지도 몰라. 오히려 그건 양호한 편이지. 목이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면서 살 거야.”


고민의 여지도 없었다.

헤이카 미켈런은 이길 수 없다. 그저 불타오르는 정의심으로 어떻게 해볼 상대가 도저히 아니었다.


여태껏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간 공업의 적들처럼, 루저와 윈터도 조용히 처리될지도 모른다.

이름 없는 에이전트로..


“그냥 돌아가요.. 저희는..”


― !!!!


그 순간, 온몸을 강하게 때리는 커다란 폭음이 터졌다.

윈터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이 무서운 소음의 정체를 쫓았다. 찾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두 사람이 나온 호텔.

그 중 한 곳에서 시뻘건 불길과 검은 연기가 마구 피어오르고 있었다.


“......”


윈터는 그곳을 자세히 보았다. 그리고 소름 끼치는 기분을 느꼈다.


“10층...”


그곳은 조금 전까지 두 사람이 있던 객실이었다.


“저게 헤이카 미켈런이다. 무서울 정도로 철저하지.”

“저게 대체.. 무슨 짓을..?”

“성가신 폭탄마가 저쪽에 붙어 있거든. 아까 얘기하면서 그 폭탄마한테 받은 걸 테이블 밑에 붙여놨거나, 아니면 우리가 처음부터 저 객실을 쓸 줄 알고 훨씬 이전에 깔아놨거나. 둘 중 하나겠지.”


윈터는 겁에 질린 얼굴로 주저앉았다. 힘이 풀린 다리가 말을 듣질 않았다.


“...왜 저런 짓을 하는 거예요...?”

“자료 정리. 자기가 정리한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겸사겸사 우리가 만약 저 방에 남아 쓸데없이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면 함께 날려버릴 셈이었겠지.”

“사람이 어떻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요!? 저, 저희 에이전트잖아요! 코렌 정부의 공무원인데..!”

“겨울아. 넌 아직 사람이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는지 몰라.”


루저는 다 탄 담배를 휙 버리고 밟아 껐다.

긴 연기를 흘리며 불타오르는 호텔 객실을 노려보는 루저의 눈동자가 함께 불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추악함에 있어 헤이카 미켈런은 인류의 정점에 서도 나무랄 데 없는 여자다.”

“.....”

“다시 한 번 물어보마. 넌 어쩌고 싶냐? 어떤 선택을 해도 상관없어. 원망하는 사람도 없고, 뭐라 하는 사람도 없다. 이대로 역으로 가서 그 여자가 내준 특석에 앉아 편하게 코렌으로 돌아가도 돼.”


그렇게 말하며 루저는 장갑을 꺼내 손에 끼웠다.

그가 ‘일’ 을 할 때마다 끼는 장갑이었다.


“솔직히 난 네가 그냥 돌아갔으면 한다. 넌 아직 젊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을 나이니까. 연애도 한 번 못해봤잖아. 그건 아깝지.”

“....”

“선배나 파트너로서 말하는 게 아니라 그냥 널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진지하게 말하는 거다. 그렇다고 강제로 보낼 생각은 없어. 난 네 의견을 가장 우선시할 거다. 그게 파트너고, 선배니까.”


이번에도 고민의 여지는 없었다.

윈터는 후들거리는 무릎을 짚고 일어나 옷을 털었다.


“망할 년!”


그리고 소리를 지르며 헤이카가 건네줬던 손가방을 주차장 구석으로 힘껏 내던졌다.


가방이 부딪히며 안에 든 돈이 흩뿌려졌다.

사방으로 팔락거리며 날아다니는 욕망의 종이 쪼가리들을 노려보는 윈터의 눈은 흥분으로 가득했다.


“여기 남으면 지옥을 보게 될 거다.”

“...괜찮아요. 선배.”

“돌이킬 수도 없어.”

“네. 그것도 괜찮아요.”

“같잖은 정의감이라면 진작에 버리는 게 좋을 거다.”

“정의의 사도가 되려는 건 아니에요.”


윈터는 짐 속에 있던 총이 든 권총집을 꺼내 허벅지에 휘감았다.


“그래도 저런 악당을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선배도 그래서 남으려는 거잖아요?”

“음. 그건 그렇지. 혹시 모를까 봐 말해주는 건데, 승률은 절망적이다.”

“알아요. 그래도 선배라면 어떻게든 해주겠죠?”

“후우.. 글쎄다.”


긴 한숨을 내쉬며 대답한 루저는 많은 감정이 요동치는 눈으로 한동안 윈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루저는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다.


“선배. 그 퍼렌도 벡이라는 사람.. 살아있을까요?”

“..아마도. 아무리 공업에서 쳐부쉈다 해도 그렇기 쉽게 고꾸라질 놈이 아니니까.”

“그 사람 연락처 알아요?”

“뭐 하려고?”

“전쟁을 하려면 용병이 있어야죠.”


루저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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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수면 아래 전쟁(3) - 검진 +1 22.07.01 347 13 16쪽
46 수면 아래 전쟁(2) - 정보 거래 +1 22.06.30 372 15 21쪽
45 수면 아래 전쟁(1) - 강철의 도시, 강철의 문명 +1 22.06.29 402 15 17쪽
44 숨겨진 역사 +1 22.06.28 413 14 14쪽
43 휴가 복귀 +1 22.06.27 423 15 20쪽
42 욕망의 입맞춤 +2 22.06.24 444 16 17쪽
41 뒷조사 +1 22.06.24 428 16 21쪽
40 알아야만 하는 것 +1 22.06.23 465 13 19쪽
39 식인 도시(10) - 매듭의 포성(砲聲) +1 22.06.22 410 16 12쪽
38 식인 도시(9) - 수면 위로 +1 22.06.21 413 17 17쪽
37 식인 도시(8) - 용 사냥 +1 22.06.20 428 17 21쪽
36 식인 도시(7) - 비밀의 대가 +1 22.06.17 406 15 13쪽
35 식인 도시(6) - 폭식(暴食)의 알산나 +1 22.06.16 399 15 17쪽
34 식인 도시(5) - 허를 찔리다. +1 22.06.15 399 17 14쪽
33 식인 도시(4) - 폭탄마 시카 +1 22.06.14 416 15 17쪽
32 식인 도시(3) - 비도덕성의 뒷면 +1 22.06.13 427 17 17쪽
31 식인 도시(2) - 사도(使徒) +2 22.06.10 459 19 20쪽
30 식인 도시(1) - 식인 도시 라얀 +2 22.06.09 469 16 17쪽
29 짧은 휴식, 적막의 밤 +1 22.06.08 475 19 12쪽
28 거래 +1 22.06.08 484 20 13쪽
27 성목(聖木)의 나즈카 +3 22.06.07 500 18 13쪽
26 자할 회담(8) - 위기탈출 +1 22.06.06 480 22 14쪽
25 자할 회담(7) - 사냥감의 계략 +2 22.06.06 480 24 15쪽
24 자할 회담(6) - 스마일 페이스 +1 22.06.03 493 22 15쪽
23 자할 회담(5) - 함정 +2 22.06.03 505 25 16쪽
22 자할 회담(4) - 위험한 회담 +1 22.06.02 513 21 14쪽
21 자할 회담(3) - 야차(夜叉) +5 22.06.01 533 23 15쪽
20 자할 회담(2) - 쟈토 노인 +2 22.05.31 538 24 13쪽
19 자할 회담(1) - 이웃 나라 +1 22.05.30 581 24 12쪽
18 수사 종결, 개인 보급 22.05.30 585 23 22쪽
17 공조 수사(6) - 발톱과 폭탄마 +3 22.05.27 581 22 18쪽
16 공조 수사(5) - 추격자들 +2 22.05.27 549 2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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