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라쿤아재 의 서재방

이혼하고 아포칼립스

웹소설 > 작가연재 > 현대판타지, 퓨전

완결

라쿤아재
작품등록일 :
2022.10.26 14:32
최근연재일 :
2022.12.06 20:20
연재수 :
35 회
조회수 :
116,602
추천수 :
3,773
글자수 :
162,928

작성
22.11.30 20:20
조회
1,895
추천
54
글자
9쪽

파주(5)

DUMMY

좀비 무리 대부분을 끌고 시야 저편으로 멀어져가는 상진을 보며, 현준은 반사적으로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었다가 멈춰 서서 난해한 고민에 빠졌다.

감정은 그녀를 저대로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지만, 이성은 그가 지금 뛰어간다고 해서 상진을 살릴 확률은 매우 낮다고 판단했다.


열 마리쯤 되는 좀비무리?

잡으려면 잡을 수는 있다.

다만 체력이 완전히 바닥나 뛰는 것조차 불가능 해질 테고, 최악의 경우 그대로 기절해버릴지도 모른다.

컨테이너에서 튀어나온 놈들 외에도 소란에 이끌려 계속 좀비들이 모여들고 있으니, 자신이 전투불능에 빠지면 남은 두 사람이 그 상황을 타개할 가능성은 현저히 떨어질 터.


두뇌가 맹렬히 가동하며 안쪽이 타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머리가 뜨거워졌지만, 고민의 시간 자체는 그리 길지 않았다.

아마도 2초 남짓이나 되었을까.


“...넘어가세요.”

“어, 아, 으음.”


뛰어가는 상진과 그 뒤를 쫓는 좀비들에게서 눈을 돌리고 자세를 잡자, 동길이 복잡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미안함, 안타까움, 약간의 안도.

상진이 일행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리는 걸 목격하며, 고마우면서 죄스러운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


그녀의 희생으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게 되었으나, 두 사람은 참담한 자괴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감상에 빠져있을 시간조차 부족했기에.

이내 깍지 낀 현준의 손바닥에 발을 올린 동길이, 단단히 고정된 발판을 차며 위로 뛰어올랐다.


쩔그럭.

“잡으십쇼!”


펜스를 붙잡고 꼭대기에 몸을 걸쳐 엎드린 그가, 아래 있는 현준을 향해 손을 뻗었다.

현준이 가볍게 발을 굴러 뛰며 내려온 손을 붙잡자, 동길은 이를 악물고 힘을 쓰며 그를 위로 끌어올렸다.


쿵! 철그렁.

캬아악!

한발 늦게 달려들어 가림벽에 몸을 부딪친 좀비가, 두 사람을 올려다보며 철판을 긁어댔다.

이윽고 두 번째 세 번째 좀비들이 뒤따라와, 앞에 놈과 동일한 행동을 취한다.

다급히 반대편으로 뛰어내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다행히 벽 너머에는 돌아다니는 좀비가 없었다.

쿵쿵거리며 벽을 치는 소리만 시끄럽게 울릴 뿐이었다.


“어서 가죠. 저것들에게 출구를 찾아서 돌아 나올 지능은 없어 보이지만, 벽을 넘었다고 마냥 안전한 것은 아닐 테니.”

“예에... 그렇지요...”


대답을 하고 걸으면서도 동길은 찜찜한 표정으로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무엇 때문인지는 물을 필요도 없기에, 현준은 그저 어두운 얼굴을 한 채 모른 척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어느새 부터 좀비들을 유인하느라 악을 지르던 그녀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덕분에 안 좋은 상상들이 더욱 선명히 떠올라, 불편한 분위기는 점점 깊어져갔다.


“무사했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하.”


한탄하듯 내뱉어진 동길의 말에, 현준은 살짝 짜증이 치미는 것을 느끼며 그를 쏘아보았다.

그 상황에서 상진이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을 리가 없다.

지금쯤이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는 게 맞을 것이다.

괜히 살아서 다시 만나길 비니 어쩌니 말하는 것은, 그냥 스스로의 부채감을 덜어내기 위한 간사한 마음밖에 되지 않으리라.


물론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어 동길을 민망하게 만들진 않았다.

상진의 희생을 그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굳이 날이 선 반응을 보일 것은 없잖은가.

현준 역시도 정말 만의 하나를 뚫고 어떠한 기적이 펼쳐져, 그녀가 무사히 살아나왔으면 좋겠다고 바라긴 한다.

괜히 죄책감을 벗어던지기 위한 자기합리화처럼 느껴져, 말로 꺼내지 않고 있을 뿐이다.


“현준 씨? 괜찮습니까?”

“...잠시 쉬었다 가는 게 좋겠습니다.”

“아. 하긴 제일 격하게 싸우셨는데, 계속 쉬지 않고 움직였지 말입니다. 어디...”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는 동길을 두고, 현준은 들끓는 속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이대로 움직이면 괜히 예민한 마음에 동길에게 화풀이를 하게 될 것 같고, 어차피 체력도 회복해야 하니 휴식이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저기 벤치에서 좀 쉬다 가시겠습니까?”

“...그러죠.”


주변이 훤히 뚫려있는 자리라서 안전해 보이진 않았지만, 반대하지 않고 걸어가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가도로 아래로 흐르는 하천 바로 옆의 길가.

붉은 자전거 도로가 깔려있는 게 긴 산책코스로 꾸며진 길 같은데, 근처에 딱히 건물이랄 것도 없어 유동인구가 없을만한 장소다.

좀비 역시 보이지 않았기에, 탁 트인 위치라고 해서 위험할 일은 없을 듯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늘어진 채, 매번 그랬듯이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렸다.

집까지의 거리도 이제는 약 2km 남짓.

아무런 방해도 없다는 가정 하에, 도보로 설렁설렁 걸어도 3, 40분 정도면 들어갈 수 있는 거리다.


만약 쉬지 않고 뛰어간다면 10분이면 도착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렇게 쉽게 풀릴 일은 아니었지만.


‘이 근처라면... 개발이 안 된 빈 땅이거나 전답들이 대부분이지 아마.’


덕이동의 빌라단지 인근과 비슷한 구역이다.

저 옆으로 상지석리가 있어 오래된 단독주택과 빌라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고, 위로 올라가는 길은 창고건물 몇 개를 빼면 죄다 논밭만 있다고 보면 된다.

좀비의 수도 적을 테니 이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터.


문제는 금촌동 바로 앞에 흐르는 공릉천에서부터다.

너비가 꽤 넓은 하천이라, 보통은 맨몸으로 건널 생각을 하진 않는 곳이다.

그렇다고 사람이 아주 못 건널 정도는 아니니, 온몸이 흠뻑 젖기는 하겠지만 넘어가는 것 자체는 불가능하지 않다.

건너가고 나서부터 아마 상당한 고역이 시작되겠지만 말이다.


‘공릉천을 건너면 주변에 몸을 숨길 곳도 없이 휑한 공간에, 바로 아파트 단지가 나오니까...’


바로 그 아파트 단지에 현준의 집이 있으니 목적지가 가까워서 좋기는 한데, 뭉쳐있는 좀비 무리를 만날 가능성이 있다.

옷이 물로 흠뻑 젖은 채 움직이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지는, 경험해본 사람은 다 알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좀비가 떼로 몰려온다면, 이제는 좀비와의 전투에 이골이 난 현준으로서도 쉽지 않은 싸움이 될 수 있다.


‘고가도로 쪽으로 걸어가는 편이 나을까?’


사실 굳이 헤엄쳐서 물길을 건널 필요는 없긴 하다.

하천을 가로지르는 도로위로 걸어가면 되는 일이기에.

다만 이쪽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교통이 집중된 큰길이다 보니 통행량이 많고, 그쪽 길을 따라 공릉천을 건너면 바로 앞에 금릉역이 나온다.

유동인구가 많을 수밖에 없는 조건.

좀비 무리를 만나는 것은 필연적이고, 재수가 없으면 다리 위에서부터 집으로 향하는 내내 쭉 전투를 이어가며 이동해야할지도 모른다.


‘길이 아닌 곳으로 건너면 전투가 발생할 시 페널티를 지고 싸워야 하는 거고, 다리 쪽으로 가면 큰 싸움은 무조건 벌어진다고 봐야하는 건가. 어렵군.’


어느 쪽이 옳은 방법인지는 잘 모르겠다.

일단은 동길과도 상의해서 선택지를 정해야 할 것이다.


“음. 현준 씨. 그런데 이대로 가도 괜찮겠습니까?”


그런 생각들을 떠올리고 있자니, 곁에 멍하니 앉아 있던 동길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게, 슬슬 어두워지고 있잖습니까?”


동길의 말에 깜짝 놀라 하늘을 바라보니,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허, 벌써 시간이...”


하긴 여기까지 오면서 그리 많은 일이 있었는데, 거의 쉬지 않고 움직였다지만 어느덧 저녁이 다가올 만도 했다.


“하룻밤 머물 곳을 찾아야 할 것 같지 말입니다.”

“아... 그, 후우-”


어떻게든 오늘 안으로 집에 도착하고 싶었던 현준으로선, 그저 한숨만 나오는 상황이었다.

아마 충분히 체력을 회복하고 난 뒤에 움직이려면, 그때쯤엔 이미 앞을 보기 어려울 정도로 암흑이 내려앉게 될 것이다.


마음 같아선 완전히 어둠이 깔리기 전에 서둘러 여정을 강행하고 싶기는 하다.

하지만 그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크든 작든 분명 집 주변에서 좀비 무리를 마주칠 것이 뻔한데, 현재의 몸 상태로 아파트 단지에 뛰어드는 것은 너무 무모하다.


반대로 어두워지고 나서는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

해가 져도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닐 수 있던 생활과는 다르다.

전기를 잃고 현대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 도시의 밤이란, 아무런 불빛이 없어 몇 미터 앞도 보기 어려운 위험한 공간이 되는 것이다.


‘망할... 결국 하루를 더 넘겨야 하는 건가.’


조바심이 생기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숨을 쉬며 대답을 기다리는 동길에게 힘없이 말을 건넸다.


“머물 만한 장소를... 하아, 찾아봅시다.”

“역시 그래야겠지요?”


방침을 정한 두 사람은 벤치에서 일어나 다시 움직였다.

그렇게 나무와 풀밭밖에 보이지 않는 산책로를 따라 위로 향하고 있자니.

두 사람의 시야에 굉장히 커다란 건물 하나가 들어왔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이혼하고 아포칼립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시간을 20시20분으로 고정합니다. 22.11.09 2,870 0 -
35 종착점(3) +16 22.12.06 1,674 58 13쪽
34 종착점(2) +2 22.12.05 1,477 45 10쪽
33 종착점 +8 22.12.02 1,812 62 10쪽
» 파주(5) +4 22.11.30 1,896 54 9쪽
31 파주(4) +3 22.11.29 1,856 67 10쪽
30 파주(3) +4 22.11.28 2,000 62 10쪽
29 파주(2) +9 22.11.26 2,099 67 9쪽
28 파주 +6 22.11.25 2,104 68 10쪽
27 빌라연합(4) +11 22.11.24 2,095 75 9쪽
26 빌라연합(3) +15 22.11.23 2,147 71 11쪽
25 빌라연합(2) +14 22.11.22 2,254 69 10쪽
24 빌라연합 +15 22.11.21 2,445 83 9쪽
23 악연(3) +16 22.11.20 2,577 76 9쪽
22 악연(2) +7 22.11.19 2,569 85 10쪽
21 악연 +4 22.11.18 2,684 86 11쪽
20 캠핑샵(3) +8 22.11.17 2,772 95 10쪽
19 캠핑샵(2) +6 22.11.16 2,834 93 10쪽
18 캠핑샵 +4 22.11.15 3,068 109 10쪽
17 노부부(3) +7 22.11.14 3,123 104 11쪽
16 노부부(2) +1 22.11.13 3,234 113 10쪽
15 노부부 +1 22.11.12 3,346 111 10쪽
14 고양대로(4) +1 22.11.11 3,544 125 9쪽
13 고양대로(3) +2 22.11.10 3,691 120 10쪽
12 고양대로(2) +1 22.11.09 3,830 120 11쪽
11 고양대로 +5 22.11.08 4,068 141 10쪽
10 적대(2) +2 22.11.08 4,161 136 11쪽
9 적대 +5 22.11.07 4,275 147 10쪽
8 생존자들(4) +3 22.11.06 4,415 138 10쪽
7 생존자들(3) +1 22.11.05 4,492 138 11쪽
6 생존자들(2) +12 22.11.04 4,714 143 12쪽
5 생존자들 +5 22.11.03 4,935 147 12쪽
4 5일 후(4) +3 22.11.03 5,163 145 10쪽
3 5일 후(3) +3 22.11.02 5,481 177 10쪽
2 5일 후(2) +8 22.11.01 6,079 190 13쪽
1 5일 후 +27 22.11.01 7,670 253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