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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쿤아재 의 서재방

이혼하고 아포칼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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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라쿤아재
작품등록일 :
2022.10.26 14:32
최근연재일 :
2022.12.06 20:20
연재수 :
35 회
조회수 :
116,605
추천수 :
3,773
글자수 :
162,928

작성
22.11.19 20:20
조회
2,569
추천
85
글자
10쪽

악연(2)

DUMMY

“...유혜지.”


가라앉은 목소리로 전처의 이름을 내뱉었다.

망해가는 세상에서 가장 보기 싫은 사람을 마주하다니.

물론 살던 지역이 가까워 가능성이 아주 낮다곤 할 수 없지만, 참 질긴 악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다시 볼 줄은 몰랐네. 잘 지냈어?”

“우리가 안부나 묻고 지낼 사이는 아니지.”

“까칠하게 나오네. 꼴에 어디서 다른 여자는 잡았다 그거야?”

“뭐?”

“흥. 속은 비었어도 껍데기는 봐줄만하다고, 어떻게 또 젊은 애로 잘 꼬셨나보네.”


그와 상진을 번갈아 바라보며 코웃음을 치는 모습에, 현준은 어처구니가 없어 말을 잇지 못했다.

형용하기 어려운 불쾌감이 발밑에서 머리꼭대기까지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당신...”

“이봐요. 둘이 무슨 대화를 하는 건데?”


전처를 노려보고 있자니, 골프채를 든 남성이 끼어들었다.


“오빠. 내가 전에 말했던 사람이야.”

“어? 아아, 이혼한 전남편? 허! 어떻게 이렇게 만나냐? 흐음.”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눈길에, 현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눈길이 마주치자 콧잔등을 씰룩거리던 남성이, 이윽고 입을 열어 다른 주제를 꺼내들었다.


“잡설은 치우고 중요한 얘기 좀 합시다.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요? 바깥에 좀비들 없습디까?”

“...딱히 이 주변에는 없는 것 같았습니다만.”


일단 질문에 대답해주자, 남성과 전처가 얼굴을 맞대고 속닥거린다.


“허어, 어떻게 된 거지?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한두 마리가 아니었는데...”

“자기야, 이유가 뭐가 중요해? 여길 빠져나갈 수 있으면 된 거지.”

“그, 그렇지. 드디어... 대체 며칠을 갇혀있었던 건지.”


말하는 내용을 들어보니, 사태가 발생하고 이곳 골프연습장에 갇혀 쭉 숨어있었던 모양이다.

그전까지 둘이 같이 데이트라도 하고 있었던 건가.

새삼 남성의 외형에 다시 눈이 갔다.


고가 브랜드로 보이는 옷차림에 값비싸 보이는 시계, 손가락 마디마디에 끼워진 굵직한 금반지들.

40대쯤 되어 보이는 배나온 아저씨와 팔짱을 끼고 착 달라붙어 있는 전처의 모습에, 현준은 조금 불편한 마음이 들어 눈길을 돌렸다.

전처의 나이가 자신보다 두 살 더 어렸으니, 저 남성과는 못해도 띠 동갑은 될 것 같은데.

그렇게 돈돈 따지더니, 갈라지고 나서는 돈 많은 남자를 만나기로 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이혼하기 전부터였을 지도 모르고.’


그녀가 누굴 만나든지 이제 알 바도 아니고 나이차 나는 연애를 딱히 안 좋게 보는 건 아니지만, 허구한 날 자신과 다툰 이유가 돈 때문이었다는 게 떠올라 괜히 입안이 씁쓸했다.


“그런데 그거 봉투, 먹을 거요?”

“...맞습니다.”


자신을 향한 질문에, 현준은 다시금 남성과 시선을 맞추고 대답했다.


“그거 나한테 파쇼.”


대뜸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5만원 지폐를 꺼내 내미는 남성.


“여기 있는 동안 뭘 제대로 먹지도 못했어. 양보 좀 해줍시다.”

“하...”


실소가 절로 흘러나왔다.

세상이 이 꼴이 났는데, 다른 생존자와 돈으로 식량을 거래하려 드는 사람이라니.

하긴 돈으로 많은 것들을 누려온 삶을 살아온 사람처럼 보이니, 상대에게는 자연스러운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왜, 부족해요? 알았어. 한 장 더 드릴게.”


현준이 아무런 반응 없이 응시하자, 어깨를 으쓱이며 지폐 한 장을 더 꺼내는 남성.

더는 어울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복도 방향을 고갯짓하며 대꾸했다.


“그냥 저쪽에 매점이 있으니, 가서 챙기시죠.”

“어? 아, 크흠! 그렇구만. 고맙수다.”


무안한 얼굴로 지갑을 넣은 남성이, 헛기침을 하며 복도로 향했다.

그 뒤를 따라 전처, 유혜지가 고개를 치켜들고 현준을 지나쳐간다.


“참.”


몇 걸음 걸어가던 혜지가 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거기 그쪽. 내가 이 남자를 좀 아는데, 허우대만 멀쩡하지 실속은 없어. 남자 보는 안목 좀 길러야겠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자신이 아닌 상진을 향한 말이었다.

기가 찼지만 나서서 별말을 하진 않았다.

어쩌다 우연히 마주치긴 했어도, 이대로 헤어지고나면 더는 볼일도 없는 남이다.

상대해서 심력을 낭비할 가치가 없었다.


그런 생각으로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자니.

불편한 다리를 살짝 절뚝거리며, 상진이 혜지의 앞에 마주섰다.


“저기요 아줌마.”

“무, 뭐? 누구더러 아줌마래!?”

“응? 그럴만한 나이시지 않나요?”

“나 아직 만으로 스물아홉이야!

“어머, 미안해요. 얼굴이... 당연히 현준 씨보다 연상인줄 알았는데.”

“이, 뭐 이런 게-”


눈썹을 치켜세우고 부르르 떠는 혜지를 보며, 상진이 차가운 표정으로 매섭게 쏘아붙였다.


“근데 충고는 못 들은 걸로 할게요. 안목 따지기엔 아줌마가 선택한 쪽도 영 변변찮아 보이던데? 하긴, 그쪽 수준에 고를 수 있는 매물이 많진 않으실 테니.”

“뭐, 뭐라고? 어디서 거지같은 게, 말을 그 따위로-”

“거지같아요? 글쎄... 싼 티 나는 게 과연 어느 쪽일지.”


가슴 밑으로 팔짱을 낀 상진이, 거의 몸이 닿을 듯이 혜지와 마주 붙었다.

자세 때문에 부각된 흉부가 자연스럽게 비교된다.


“윽...”


외모는 여전히 젊은 애들에게 꿀리지 않는다고 자부하지만, 혜지는 볼륨감이 부족한 자신의 가슴에 약간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편이었다.

키는 비슷하지만 앞세운 무기의 사이즈가 다르게 타고난 탓에.

부피와 질량, 그리고 기세에서 밀린 혜지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별, 어이가 없어서...”


분노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상진을 노려보던 혜지가, 이내 몸을 휙 돌리고 성난 걸음걸이로 둘에게서 멀어져갔다.

눈에 힘을 주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상진은 이윽고 혜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현준을 돌아보며 미안해하는 얼굴로 손을 꼼지락거렸다.


“발끈해서 나서버렸네요. 죄송해요,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려 하셨던 거 같은데...”

“아뇨. 나서줘서 감사합니다. 말이 길어져봐야 화만 날거라 상대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덕분에 조금이나마 기분이 풀리네요.”


이런 생각은 속물적이지만, 상진이 누가 봐도 미녀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라 다행이다.

전처도 외모로는 어딜 가나 대접받는 여자였지만, 상진과 나란히 서니 상대적으로 부족한 면들이 드러났다.

본인도 그걸 알기에 비교대상이 되고 싶지 않아, 그 성질머리에도 불구하고 더 싸우려들지 않고 도망치듯 가버린 것일 터.

결혼생활 동안 자신 앞에서 저런 식으로 꽁무니를 빼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솔직히 제법 통쾌한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세연이는 어쩌고 여기 있냐는 말 정돈 물어볼 줄 알았는데. 이제는 그냥 남일 뿐이다 그건가.’


한때는 정말 사랑했지만 이제 부정적인 감정 외에는 남지 않아, 타인보다 못한 관계인 사람.

우연히 만나서 한다는 소리가 저딴 말뿐이라는 점이, 참 여러모로 복잡한 기분이 들게 만든다.


“그런데, 뭘 가져오신 거예요?”

“아. 먹을 걸 조금 챙겨왔습니다.”


상진의 질문에 상념에서 빠져나온 현준이, 비닐봉투를 내밀어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하긴 가방에 아직 여유 공간이 있으니, 기회가 있을 때 채워 넣는 게 좋겠네요.”

“어, 배고프진 않으세요?”

“네? 아까 밥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배고프겠어요. 저 그렇게 많이 먹는 사람 아니에요.”

“그으- 렇죠. 네.”


사실은 먹으려고 가져온 것이지만.

백팩을 열고 물자를 챙기는 상진의 모습에 그냥 초코바 하나 정도만 까서 입에 물고, 나머지는 현준 역시 가방에 챙겨 넣었다.


‘약간 출출하긴 해도 나도 아직 배고플 정돈 아니니.’

“이건 뭐에요?”


물자를 정리하고 나니 식량이 아닌 물품이 몇 개 남아, 상진이 봉투바닥을 가리키며 의문을 표했다.

이에 내용물을 꺼내며 대답했다.


“이런,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네요. 거기 앉아서 다리 내밀어 보세요.”

“네? 아...”


치이익-

계단에 앉은 상진의 신발을 벗기고 쿨 스프레이를 뿌린 뒤, 압박 붕대로 발목을 감싸주었다.

1층을 둘러볼 때 스포츠용품점에서 챙긴 물건들.

발목 염좌에 냉찜질과 붕대를 이용한 압박은 제법 효과적인 조치다.


‘가능하면 아주 단단하게 고정하는 편이 좋겠지만...’


원래는 부상당한 부위 주변을 꽁꽁 싸매 움직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회복에 도움이 되겠으나.

그렇다고 보행에 방해가 되어선 곤란하니, 효과가 떨어지더라도 적당히 움직임에 지장이 없는 수준으로만 붕대를 감았다.


“가,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수줍어하는 상진의 인사를 받고 계단에 나란히 앉은 현준은, 잠시 뒤 이쯤하면 기력을 충분히 회복했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다시 이동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네. 전 괜찮아요.”


붕대를 감은 쪽의 발로 바닥을 툭툭 건드려본 상진이, 문제없다는 듯이 씩씩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한 부상은 아니어도 가능하면 악화되지 않도록 오래 쉬는 편이 좋겠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기에 이제는 떠나야 했다.

두 사람이 주위를 살피며 건물 밖으로 나가자니, 뒤쪽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좀비들이 다 없어졌나본데?”

“우리도 빨리 나가자. 또 고립되기 전에 안전한 장소를 찾아야지.”

“그래. 그렇지 않아도 오빠가 생각해둔 곳이 있어.”


혜지와 그녀의 연인으로 추측되는 남성이,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현준과 상진의 뒤를 따라 나왔다.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면상이기에,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이동하려 할 때였다.


“차는 어떻게 해?”

“내 차로 가야지. 따로 타는 건 좀 그렇잖아.”

“그렇긴 하지? 내가 아직 운전은 잘... 하아, 여기다 두고 가긴 찝찝한데.”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대화내용이 현준의 귀로 흘러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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