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연(3)
‘차가 있다고?’
돌아보자 주차장에 세워져있던 외제차들 옆에, 두 사람이 차량이동에 대해 대화하는 모습이 보였다.
랜드로버의 suv차량.
아우디의 소형 세단인 a3.
보아하니 아우디 차량이 혜지의 소유인 모양인데, 면허도 없던 여자가 운전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헛웃음이 나온다.
일도 안하던 사람이 어디서 돈을 벌어 차를 샀을 리는 없고, 남자 쪽에서 선물이라도 해준 건가 싶다.
‘그 급한 성격에 어떻게 면허는 합격했나보지.’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저들에게 당장 쓰지 않는 멀쩡한 차량이 한 대 남는다는 것.
그의 입장에선 놓쳐선 안 될 기회였다.
‘차만 있으면 기존의 계획은 포기하고, 경로를 다시 짜서 움직일 수 있어. 여기저기 막힌 곳들은 있겠지만 모든 도로가 마비된 것은 아닐 테니, 멀리 빙 돌아간다고 해도 이삼십 분 정도면 집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특히 아예 뛰지 못할 부상은 아니지만 발목을 다친 상진을 생각하면, 차량이동은 구할 방법만 있다면 최고의 선택지일 것이다.
도움을 요청해야하는 게 하필이면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전처라는 게 문제일 뿐.
그래도 어쩌겠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어떻게든 차를 받아내야 했다.
“잠깐, 멈춰요!”
막 출발하려던 suv차량 앞을 현준이 막아서자, 운전석에 앉은 남성이 브레이크를 밟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무슨 짓이야 당신!”
“...혜지랑 짧게 얘기 좀 하겠습니다.”
“흐응? 당신이 나랑 할 말이 뭐가 있어?”
조수석으로 다가오는 현준을 보며 창문을 살짝 내린 혜지가,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비웃음을 보였다.
“설마 차에 태워달라고? 남한테 신세지긴 싫다고 미련한 짓은 혼자 다하고 살더니, 그래도 자존심보단 목숨이 중요한가보네?”
“따라 가겠다는 건 아니야. 남는 차만 좀 빌려줘.”
“뭐? 아하! 새 여자가 생겼으니 둘이 재미 좀 보겠다고? 웃기지 마. 내가 미쳤니?”
아까 전의 일로 심기가 뒤틀렸는지, 뒤에 떨어져있는 상진을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혜지.
“주제에 안 맞는 짓거리 하지 말고, 그냥 도와달라고 빌어 보던가. 뭐 우릴 위해 종 노릇이라도 하겠다고 하면, 당신 하나 정도는 안전한 장소로 데려가줄 수도 있어. 그치 오빠?”
“어? 아니... 자리가 없는 것도 아니니까, 두 사람 정도 데려가는 거야 뭐...”
“몸뚱이 말곤 쓸 데도 없을 년을 뭐 하러 데려가? 설마 지금 딴 생각 품는 건 아니지?”
“무, 뭔 소리야? 내가 우리 혜지를 두고 딴 여자한테 눈을 돌리겠어?”
날이 선 목소리에 찔끔한 남성이, 은근한 시선으로 상진을 살피다말고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어쩔 거야?”
“...다시 말하지만 차만 필요해. 다른 이야기는 관심 없어.”
안전한 장소라는 게 어딜 뜻하는 것인지 제법 궁금하긴 하지만, 저들과 같이 다니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다.
자신의 의견은 무시하고 제멋대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모습을 보니, 참 여전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아무튼 더는 엮이고 싶지 않지만 차량은 꼭 필요하기에, 일단은 딸을 생각하며 진솔한 마음을 담아 도움을 청했다.
“빨리 집에 가야 해. 세연이가 거기 있어.”
딸의 이름을 말하자, 의기양양하던 혜지의 표정이 일순 무너졌다.
“차가 있어야 돼. 혹시 망가뜨려도 나중에 어떻게든 갚을 테니까-”
“돈도 없는 당신이 무슨 재주로?”
싸늘한 목소리가 현준의 말을 잘랐다.
“괜히 시간 낭비했네. 가자 오빠.”
“남는 차만 빌려주면 돼! 우리 관계가 어떻던, 세연이는 살려야 할 거 아니야.”
“내가 왜?”
다급히 조수석 가까이로 몸을 붙이던 현준이, 차갑게 내뱉어지는 그녀의 말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당신 딸이잖아. 양육권, 친권, 다 줬잖아. 법적으로 다 처리했는데, 내가 왜 뭐를 더 해줘야 해?”
“무슨, 그런 말을.”
마주한 눈동자에서, 거짓은 느껴지지 않는다.
저 여자의 말은 진심이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 혜지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악! 가자고!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아, 알았어. 오빠한테 승질은... 이보쇼, 거 말 끝났으면 비켜요.”
핸들을 꺾으며 악셀을 밟으려는 남성의 모습에, 돌처럼 굳어 멍하니 있던 현준의 손이 천천히 허리춤으로 향했다.
차가 필요하다고 하잖아.
세연이가 기다린다고.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그래도 엄마였는데.
수많은 말들이 목소리로는 나오지 못하고, 마음속에서 복잡하게 얽혀 응어리졌다.
‘내가 뭘 하는 거지? 차가 필요하면... 그냥 가져가면 되잖아.’
방해가 되는 것은, 치우면 그만이니까.
바르르 떨리던 손이 망치를 움켜쥐었다.
뜨거운 무언가가 몸속으로 퍼지는 느낌이 들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서부터 팔 전체로 올록볼록한 핏줄이 점점 솟아올랐다.
“현준 씨. 진정해요.”
누군가 팔뚝에 매달리며 그의 앞을 가렸다.
날아가려던 이성의 끈을 아슬아슬하게 붙잡은 현준이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부아앙-
이내 피어오르는 흙먼지와 매연을 남기며, suv차량이 저 앞으로 나아갔다.
멀어지는 차량을 보며 현준은 안도와 아쉬움을 동시에 느꼈다.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한 기분이었다.
“공격... 하실 생각이셨던 거죠?”
“...네, 아마도.”
방금 상진이 붙잡지 않았다면, 현준은 그대로 차문을 부수고 들어가 두 사람을 무참히 살해했을 터였다.
순화한 표현으로 그저 공격이라고 말했지만, 그런 낌새를 눈치 챈 상진이 이를 말리기 위해 다급히 매달렸던 것.
그녀가 아니었다면 현준은 그간 좀비를 처리했던 것처럼, 혹은 그보다 더 심하게 두 사람을 곤죽으로 만들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저었다.
화가 난다고 사람을 죽이는 게 정상은 아니지 않나.
전처의 행동에는 증오심이 피어오르지만, 같이 있던 남자는 딱히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니었는데.
세상이 망하며 법이니 뭐니 들먹이는 것도 우스운 꼴이지만, 이제 겨우 일주일쯤 되었을 뿐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선인으로만 남겠다는 다짐까진 아니지만, 벌써부터 기존의 인간성을 버리고 날뛰고 싶진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좋고 싫고를 떠나 올바른 사람이고자 노력해야할 것 같았다.
어쩌면 이미 자신의 육신은 점차 괴물로 변해가고 있는 걸지도 모르니, 그나마 정신이라도 인간으로 남고자 하는 마음이다.
“아주 어마어마한 썅년이네요.”
갑자기 들려온 욕설에, 깜짝 놀란 현준이 상진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친딸을 두고 저렇게... 잠깐 본 것만으로도 현준 씨가 그간 무슨 취급을 받아왔을지 알 것 같아요.”
“...상진 씨가 그런 욕을 하는 건 또 처음보네요.”
“앗, 으음. 혹시 기분 나쁘셨나요?”
“아닙니다. 그냥 조금 놀라서. 썅년이라... 맞네요, 아주 썅년입니다.”
부부관계가 망가진 것은, 무조건 어느 한쪽의 잘못이라고 볼 순 없을 것이다.
현준 자신도 스스로가 백점짜리 훌륭한 남편이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천 번 만 번을 양보해도 세연이에 대해 말할 때의 태도는, 부모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후우-”
다시 생각해도 화가 치밀어 올라, 현준은 전처에 대한 생각은 더 이상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차량에 대해선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적당히 위협해서 차만 빼앗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걸. 내가 더 냉정했어야 했는데.’
분노에 잡아먹히지 않고 적절한 힘만 썼다면 남아있는 아우디 차량의 키를 받았을 텐데, 상진이 붙잡기 전에 그러지 못했다는 점이 안타깝다.
그렇다고 무분별한 살인을 막아준 상진을 원망할 수도 없으니, 그저 속이 답답하기만 할뿐이었다.
“갑시다. 원래의 예정대로 움직여야지요.”
“네에... 기분 풀리게 저거라도 때려 부수고 갈까요?”
상진의 손짓에 주인이 두고 간 아우디를 바라본 잠시 현준이, 이내 고개를 저으며 거절의 표시를 했다.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은데, 방범음이 울릴 테니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시간이 아깝기도 하고요.”
“아, 그건 그러네요.”
여유가 있었다면 분풀이로 전처의 차를 완전히 박살냈겠으나, 그 소란에 좀비들이 이끌리면 곤란해지는 건 자신들이다.
결국 불쾌한 감정들을 뒤로 한 채, 두 사람은 조용히 골프연습장을 떠나 다시금 기존의 여로에 올랐다.
* * *
“어? 현준 씨.”
“예.”
“저기 좀... 이상하지 않나요?”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리며 나아가던 현준이, 상진의 말에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
저 멀리 일부러 피해가려 했던 주택단지가 보인다.
보이는 것이라곤 거기에 모여 있는 빌라들뿐인데, 대체 무엇이 이상하다는 건지 곧장 눈치 채지 못했다.
‘엇?’
그러나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기묘한 부분이 눈에 보였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여러모로 걸리는 점이 있어, 발길을 멈춘 현준의 눈가로 고민하는 감정이 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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