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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의 서재

유언 그리고 운명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ClueL
작품등록일 :
2019.11.24 01:08
최근연재일 :
2020.02.03 16:18
연재수 :
1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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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1
추천수 :
68
글자수 :
118,297

작성
19.12.03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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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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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18쪽

1.불청객(3)

DUMMY

사무실은 단출했다.

탁자와 마주 앉은 소파 두 개, 컴퓨터가 놓여있는 책상과 빈 책장이 전부였다. 사무실 구석에는 화장실로 이어지는 문이 있었고, 출입문 맞은편 벽엔 거대한 창문이 있었다.

현은 방안에 들어서서 둘러보았다. 사무실은 넓다고 보기 힘들었다. 비좁지는 않았으나 필수적인 가구만을 채워서 그럴 뿐, 무언가를 조금만 들여도 금세 비좁게 느껴질 것 같았다. 철저하게 손님 응대 및 개인 작업만을 위한 사무실이었고, 살벌하다고 느껴질 만한 공간 활용이었다.

현은 창문을 열었다. 거대한 창문을 열자 좁게 느껴졌던 사무실이 뻥 뚫린 듯했다. 비록 별 볼 일 없는 D구역의 거리였기에 바깥의 풍경은 낡은 건물과 칙칙한 도로가 전부였지만 현은 오히려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벽을 짚어보고, 발을 굴러 바닥을 살피고, 전선과 화장실의 배수까지 확인한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데요?”

“당연히 좋아야지. 그나마 남은 것 중 고르고 고른 건데 마음에 안 들었어 봐. 아, 위층 403호는 네 숙소야. 방 하나, 부엌, 화장실이 전부지만 그럭저럭 쓸만할 거야.”

란은 소파에 앉으며 현에게 맞은편을 가리켰다. 현은 소파에 앉자 란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너도 해방, 그니까 단독 작전 수행 기간부터 반쪽짜리지만 정식 사냥꾼이 되는 걸 알고 있을 거야.”

“네, 알고 있어요.”

“이제부터 네가 해방 기간에 뭘 해야 할지 간단히 설명할 거야. 자세한 건 본청 망에서 네가 따로 찾아봐. 귀찮다고 안 했다간 나중에 실적 부족해서 졸업 못 할 수도 있으니까 잊지 말고 꼭.”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란은 설명을 시작했다.

“사냥꾼은 세 단계로 육성돼. 1단계가 졸업식을 포함한 3년 교육 기간, 2단계가 고난, 3단계가 해방. 졸업식은 우리에게 어디까지 할 수 있냐고 묻는 거야. 사냥꾼은 연방의 사냥개고, 이 더러운 도시에서 더러운 일을 맡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졸업식을 마친 인원은 고난기간에 임무를 수행하면서 했던 일을 반복하게 돼. 힘들고 괴로운 일을 임무라는 명목하에 반복하면서 익숙해지게 만드는 거야.”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임무를 받을 때 어떤 느낌이었던가, 그리고 지금은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사람은 모든 것에 익숙해지고, 그것은 살인 또한 마찬가지다. 처음 임무를 받으면서 괴로워하던 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무감해지고 있었다.

“다만 그 과정은 자의가 아니야. 임무, 명령이라는 껍질을 뒤집어쓴 타의지. 마지막 해방 기간은 이제 그 타의를 자의로 바꾸는 과정이야. 스스로 일을 찾고 해결하면서 여태껏 타의로 해왔던 일을 자의로 하는 거야. 물론 쉽지 않아. 사람의 정신은 약해. 자신이 직접 쏜 것임에도 누군가가 시켜서 한 것이라는 생각이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만들어.

해방 기간은 여태껏 외면했던 책임을 직시하고 감당하게 만드는 과정이야. 모르는 녀석들에겐 규칙과 임무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책임을 자신에게 얽는 구속 과정이야.”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냥 자유롭기만 한 과정이라면 해방이 정식 사냥꾼이 되기 위한 과정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보이는 것과 다른 목적이 있다는 걸 의미했고, 지금에서야 현은 그것을 직접 듣게 되었다. 어렴풋이 짐작하던 것을 확인받으니 마음 한켠이 무거워지는 듯했다.

“어려울 거야. 항상 하라던 걸 하면 되는 일상에서 이제 네가 무언가를 찾아서 해야만 하는 거니까. 그리고 힘들 거야. 네가 외면해왔던 것들, 알면서도 무시했던 것들을 직시해야 할 거야.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고, 할 수 있어야만 해. 내 이전 사람들도 그랬고, 나도 그랬어. 이젠 네 차례일 뿐이야.”

현은 조용히 두 손을 펼쳤다. 해야만 한다. 그는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았다. 3년 전, 살기 위해 사냥꾼에 지원했을 때도 그랬고, 6개월 전 어린 소녀를 쐈을 때도 그랬다. 그랬기에 그는 두 손을 움켜쥐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좋아, 잘 해낼 거라고 믿을게.”

란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현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더이상 현을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 무거운 얘기는 그만두고 실질적인 것들을 말해줄게. 어디 보자, 무엇부터 말해야 하냐······.”

란은 수첩을 꺼내 적힌 것들을 보았다.

“우선 이제부터 너는 본청의 지원을 못 받아. 물론 범죄자 검거 같은 일들에는 인원 지원이 나오지만, 보구 정비처럼 본청 소속 사냥꾼들을 위한 혜택을 못 받는다는 거야. 당연히 월급도 없어. 이제부턴 네가 알아서 벌어야 해.”

“보구 정비는 그럼 누구에게 받아야 하나요?”

“보구를 다루는 기업에 정비를 위탁해도 되고, 대장장이 자격증이 있는 사람을 찾아 개인적으로 맡겨도 돼. 대장장이는 보통 불법적인 일도 겸하기 때문에 뒷골목의 경계 쪽에서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현은 수첩을 꺼내 그녀의 말을 받아 적었다. 현이 다 적은 걸 본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해방 기간의 병아리들이 맡는 일은 보통 세 가지로 나뉘어. 첫 번째는 던전 토벌, 두 번째는 논리 공간 개척, 세 번째는 용병.”

“범죄자 소탕은 없어요?”

현은 고개를 기울였고, 란은 가볍게 대답했다.

“조합을 맞춘 4인 이상의 각성자 무리가 너를 기습했어. 살아남을 수 있겠어?”

“아뇨.”

현은 당당하게 고개를 저었다. 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짜져 있어. 섣불리 나대다간 칼침 맞기 딱 좋으니까. 연방 뒷골목에서 시체도 못 남기고 죽고 싶진 않잖아?”

연기를 내뿜은 그녀는 종이컵에 담뱃재를 털었다.

“괜히 정의감에 불타서 범죄자 소탕한다고 나대지 마. 본청에서 대청소 작전을 괜히 매번 하는 게 아니야. 연방은 폭력이 남아도는 곳이고, 어쭙잖은 정의감은 너에게 해가 될 뿐이야.”

“이해했어요. 근데 왜 용병이 세 번째죠?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용병 일 아닌가요?”

란은 재밌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왜 따로 말했을 거 같아?”

란은 질문했고, 현은 생각했다. 던전 토벌, 논리 공간 개척. 모두 외부에 고용되어 무력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똑같이 용병이라 불려야 마땅했다. 용병일을 나눈 거라면 세 번째 선택지가 용병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세 번째 선택으로 용병을 말했고, 그것은 용병이 다른 것을 의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냥꾼이 할 만한 일은 무엇인가?

그는 여태까지 누구를 위해 일을 했는가?

답은 간단했다.

“본청의 히트맨이군요.”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이야.”



마트에 갔던 현은 란에게 새로 산 담배를 건넸다. 란은 담배를 받아들자마자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 사이 현은 재떨이 대용으로 쓰던 종이컵을 버리고, 같이 산 재떨이를 탁자에 두었다.

란은 입을 열었다.

“너도 알지만, 서울을 중심으로 한 서울 연방은 봉건 사회야. 각 구역의 장은 연방 전 지역의 통치권을 쥔 서울에게서 권한을 이양받아 대리로 통치하는 거지. 받는 권한은 징수와 조례 제정 단둘, 따라서 구역의 장은 그들 영역 내에서는 왕이나 다름없어.”

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한 구역의 장이 된 자가 왕이라 불릴만한 권력을 쥐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마법사들이 연방에 환장하는 이유가 바로 이거지. 힘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으니까. 다른 나라에선 추격을 피해 숨어 사는 반면, 연방에서는 힘만 충분하면 떵떵거리며 살 수 있어. 걷은 세금으로 사람 데려다 쓰고, 돈도 벌게 조례도 좀 만지고, 권력으로 조직 좀 키우고, 적당히 헤쳐 먹으면 서울이 건드리지도 않으니, 얼마나 좋아?”

하지만 서울에게는 곤란한 일이었다.

안정은 고착을 의미하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성장을 부른다. 성장은 욕망을 따르나, 생물의 욕망은 무한하다. 거대한 욕망이 거대한 성장을 불렀을 때, 그리고 서울이 그 성장을 제어할 수 없게 될 때, 마법사들은 서울을 칠 것이다.

확신이 아니더라도 가능성만으로 위험한 일이었고, 군사(軍事)는 가능성 자체를 없애는 게 가장 효율적인 일이었다. 따라서 철권통치를 이어나가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캐스팅보트를 쥐어야 하는 서울은 위협적인 싹이 크기 전에 자를 필요가 있었다.

“그때 필요한 게 프리랜서 사냥꾼, 통칭 사냥개야. 본청 소속은 아니지만, 지령을 받고 필요한 분란을 만드는 사람들. 길드, 토벌대, 탐사대, 구역장, 뒷골목 범죄자, 사기업 등.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연방 내 분란 유발자. 그게 바로 세 번째 길 용병이야.”

현은 침을 삼켰다. 그는 본청에서 잠재울 수 있는 혼란을 내버려 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의도적으로 일으킨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었다.

“이걸 이렇게 말해도 되는 거예요?”

“아직 사냥꾼으로 완성되지 못한 너희에게나 큰 비밀이지 우리는 이미 다 아는 내용이야. 그리고 새삼 놀랄 것도 없어. 당장 이번 붉은 늑대 토벌 시작을 알린 게 지금 말한 사냥개 중 한 명이니까.”

별거 아니라는 듯한 란의 태도에 현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전까지 네가 나 같은 본청에서 일하는 사냥꾼만 봐서 그럴 뿐이야. 사회 나가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테니 너무 충격받을 필요 없어.”

현은 머리를 긁으며 당혹스러운 감정을 나타냈다. 하지만 란은 더 설명할 게 없다는 듯 수첩을 품에 넣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마음을 진정시킨 현은 그녀에게 물었다.

“선배님은 제가 어떤 걸 하면 좋을 것 같나요?”

“너는 던전 토벌이 제일이지. 경험은 적지만 다양한 상황 대처가 가능하잖아. 무엇보다 죽음을 다루니까 상성에서 압도적이고. 실제로 처형인은 토벌단에서 콜이 꽤 많이 들어와.”

“논리 공간 개척은요?”

“그것도 괜찮긴 한데, 그건 네가 그쪽에 관심이 없으면 그다지 추천하진 않아. 대부분 보름 이상의 장기 계획이라 준비하는 데에도 시간이 꽤 걸리거든. 성공하면 연방 차원에 도움을 주는 거라 좋은 실적을 낼 수 있는데, 실패할 경우가 뼈아프지.”

“용병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질문에 란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냥개가 되려고?”

“아뇨, 그냥 궁금해서요.”

“내가 용병을 본청의 더럽고 비밀스러운 사냥개로 설명하긴 했는데, 항상 사냥개 일만 하는 건 아니야. 평소에는 사적인 일을 하다가 본청에서 일을 줬을 때만 사냥개가 되는 거지. 물론 받을지 안 받을지는 자유야. 대부분 어쩔 수 없이 일을 받긴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꼭 더러운 일만 하면서 사는 건 아니니까 걱정 마. 사람 간 다툼이 아니더라도 연방엔 무력이 필요한 곳이 많고, 사냥꾼은 정식 절차를 밟고 키워진 병사잖아. 일반 각성자보다는 신뢰도가 높아. 프리랜서로 살아갈 거면 용병 일을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라고 봐.”

던전 토벌, 논리 공간 개척, 그리고 용병. 논리 공간 탐사는 바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던전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만 용병은 지금 바로 시작할 수 있으며, 준비 또한 크지 않았다. 당장 몸 하나와 보구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저는 용병 일을 하는 게 낫겠네요.”

“본청에서 나와 프리랜서를 꿈꾸는 사람은 다들 그렇게 시작해. 일종의 흥신소처럼 개인 의뢰를 받고 해결하면서 실력과 이름값을 키우는 거야. 그러다 보면 점점 토벌단이나 탐사대처럼 이름있는 단체에서 연락이 오고, 그때부터 네가 원하는 일을 골라가며 하는 거지.”

“흥신소를 한다면 뭐가 필요한가요?”

“크게 필요 없어. 사무 보조 한 명이랑 너랑 같이 일 할 소규모 팀? 개인적으로 홍보하거나 비밀 의뢰를 받는 게 아니면 시스템을 통해서 대부분 해결되니까 딱히 필요한 건 없어. 아, 맞다. 내가 시스템 등록 아직 안 해줬지?”

“네.”

“피곤해서 그런가, 제일 중요한 걸 빼먹을 뻔했네.”

란은 넣었던 수첩을 다시 꺼냈다. 종이를 찢어 자신의 이름을 쓴 그녀는 현에게 펜을 건넸다.

“여기에 네 이름을 쓰면 돼. 시스템 등록은 그걸로 끝.”

“그렇게 간단해요?”

“연방 전역에 시스템이 깔려있으니까. 시스템 등록권이 있는 사람과 등록 희망자의 서명만 있으면 바로 돼.”

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에 이름을 적었다. 그가 이름을 적자 종이에 적힌 둘의 이름이 빛나더니 곧이어 종이가 불타올랐다.

“이로써 시스템 등록 끝. 한 번 실험해 봐.”

현은 자신의 유언을 꺼내 보았다. 정신을 집중하자 그의 시야에 푸른 창이 떠올랐다.

[보구 : 유언]

[죽기 전에 남길 말이 있을 거예요. 놓치지 말고 들어주세요. 그것이 당신의 의무잖아요?]

“네, 등록됐어요.”

“좋아, 시스템은 3년 동안 충분히 연습해봤을 테니, 굳이 설명 안 해도 되지?”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졸업식 이전 3년간의 교육 동안 약식으로나마 시스템을 다뤄봤기에 나머지 기능은 독학으로도 충분했다. 란은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얼추 설명은 다 끝났어. 더 궁금한 것들은 나한테 물어보거나, 시스템을 통해 본청에서 검색하면 될 거야. 아, 그리고 오늘은 종일 잘 거니까 전화하지 마.”

같이 일어나던 현은 그녀의 마지막 말에 의문을 표했다.

“어디 따로 가서 주무시나요?”

“무슨 소리야? 내가 잘 데가 숙소 외에 어디 있다고?”

방향이 안 맞는 대화에 서로 의문을 표하기도 잠시, 란은 현의 이마에 딱밤을 날리며 말했다.

“이제부터 여기가 네 숙소잖아. 그니까 넌 여기서 자야지.”

“예? 갑자기요?”

“그럼 나랑 계속 자려고?”

“어감 이상하게 하지 마세요. 그리고 아직 못 가져온 짐도 있으니 어차피 다시 가야 하잖아요.”

“못 가져온 게 있어?”

“음, 생각해보니 딱히 없네요. 근데 그게 아니라 갑자기 말도 없이 오늘부터 혼자 살라는 건 좀 그렇지 않아요?”

“다 큰 남녀가 같이 붙어 자는 걸 좋아하나봐?”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요.”

란은 피식 웃었다. 그녀에겐 현이 어리광을 부리는 동생처럼 보였다.

“네 사무실이잖아. 빨리빨리 익숙해져야지. 그러니까 오늘은 여기서 지내봐.”

“그냥 오늘 혼자 편히 쉬고 싶은 게 아니고요?”

정곡을 찔린 란은 재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현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뒤따랐다.

란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창틀에 팔을 걸친 그녀는 현을 보며 인사를 건넸다.

“그럼 갈게. 혼자 잔다고 질질 짜지 말고.”

“아, 네. 선배님이야말로 무섭다고 인형 껴안고 주무시지 마시고요.”

“그럼 간다. 내일 보자. 시간 남으면 린에게 연락도 좀 하고.”

“네, 살펴 가세요.”

현은 떠나가는 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낡은 도로를 지난 그녀의 차가 곧이어 코너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녀가 사라진 곳을 보던 현은 피식 웃으며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갑자기 헤어지게 된 건 아쉽지만, 그녀 말대로 앞으로 새로 얻은 숙소에서 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현은 기지개를 켜며 사무실 계단을 올랐다. 길게 늘어선 건물의 그림자가 그를 삼켰다.



늦은 밤, 숙소로 돌아온 란은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꾸물거리며 옷을 벗은 그녀는 매끈한 다리로 벗은 옷을 걷어찼다. 현이 봤으면 한숨을 내쉬며 옷가지를 정리했겠지만, 지금 그는 이곳에 없었다.

‘아, 힘들어.’

잠도 제대로 못 잔 채 종일 운전하느라 죽을 것 같았다. 저녁을 못 먹었으나 졸음 때문에 공복조차 귀찮을 뿐인 그녀는 이불을 머리까지 덮어썼다.

‘일단 자자.’

눈을 감자 순식간에 정신이 까마득해지며 잠에 빠졌다. 뒤척이기를 몇 번, 5분도 채 되지 않아 잠에 빠진 란의 눈앞에 푸른 창이 나타났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나타난 알람에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알람은 그녀의 정신을 통해 비추어진 것이었고, 당연하게도 알림창 또한 그녀를 따라 한 바퀴 돌았다.

란은 신음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알림창이 내뿜는 빛이 눈 부신 탓에 잔뜩 눈을 찌푸린 그녀는 천천히 창에 쓰인 글을 읽었다.

[2014년 6월 12일 오전 1시 42분. 8-F구역에서 침입자 발생. 마력 파장에 의하면 성녀(聖女)로 확인됨. 현 위치 파악 불가. 성녀 – 무력 등급 : A, 위험도 : B, 조직 등급 : B. 성녀의 상세 정보······.]

[2014년 6월 12일 오전 3시 31분. 8-F구역에서 침입자 발생. 마력 파장에 의하면 사악(邪惡)으로 추정. 현 위치 파악 불가. 각 구역의 순찰자들은 각별한 주의 요함. 사악 발견 시 절대 도주를 원칙으로 함. 도주 불가능할 경우 사악의 위치 전파를 모든 행동에 우선으로 함. 사악 – 무력 등급 :UT, 위험도 : UT, 조직 등급 : A. 사악의 상세 정보······.]

어느새 몸을 일으킨 그녀는 메시지에 적힌 글자를 하나하나 꼼꼼히 읽었다. 매섭게 뜬 눈엔 졸음 따윈 찾아볼 수 없었고, 꽉 쥔 주먹은 긴장으로 가득했다.

“성녀와 사악이라······.”

근 10년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성녀와 사악이 동시에, 그것도 같은 지역에서 나타났다. 우연인가, 아니면 필연인가. 잠시 고민하던 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이 둘이 동시에 나타난 것은 이미 그 자체로 거대한 사건이었다. 필요한 것은 일어날 일에 대한 대비뿐이다.

시스템을 조작해 정보를 찾아보던 란은 침대에서 일어나 벗어둔 옷을 입었다. 문을 열고 숙소를 나선 그녀는 차에 시동을 걸고 본청으로 향했다.

짙은 어둠 속을 달리며, 그녀는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꼈다. 그녀는 그 불안이 불안으로만 끝나기를 바랐다.

작은 빛줄기에 의지하며 그녀는 본청으로 향했다.


작가의말

이로써 유언의 1장-불청객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연재는 매주 수, 토요일이지만 오늘은 기분이 좋아 하루 먼저 연재를 해봤습니다. 이번주에 된다면 세 번 글을 올려보고 싶네요.


글이 많습니다. 저는 한 화에 5000+-500자를 기준으로 삼는데, 얘기할 것도 많고, 기분 좋게 흥얼거리며 쓰다보니 8천자가 넘어버렸습니다. 때문에 앞에 5천자 안 되는 화들은 애교로 봐주세요:>


유언은 라노벨 형식으로 1권당 이야기로 진행할 것이며, 대략 8장, 1장-3화 시스템을 고수할 예정입니다...만 정식으로 연재해보려는 건 처음이기에 변동이 있을 수 있는 점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본분이 대학생인지라 다음 주와 다다음주엔 정기 연재가 힘들 수도 있습니다.ㅠㅠ  최대한 연재를 노력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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