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소설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읽는 이와 쓰는 이 모두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장르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여러 장르가 복합적으로 섞이거나 합쳐지는 일이 많습니다.
때문에 보통은 작가가 ‘이거 판타지야!’라고 쓴 건 퓨전 요소가 좀 있어도 그냥 판타지 소설이라고 출판이 되고, ‘이거 무협지야!’라고 쓴 건 현대인이 무협으로 넘어가든 뭘 하든 그냥 무협지라고 출판이 되죠. ‘퓨전 판타지’라고 주장하고 나오는 소설들은 대체로 그 퓨전된 부분을 강조하고 싶거나, ‘내 소설은 정통 판타지가 아니야!’라는 생각을 가지고 출판하는 경우라고 봅니다. 그 때문에 장르 구분에 중요하게 적용되는 것이 ‘장르적 요소'가 되었습니다.
요새는 그냥 일반 대중문학 작가들도 장르적 요소를 많이 차용하고 있고, 장르문학이라는 개념이 확립되기 이전에도 이런 장르적 요소는 편견없이 쓰인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먼저 대체역사 소설을 쓴 작가가 복거일 선생님이라는 점이 시사하는 바가 크죠. 그 소설이 ‘비명을 찾아서’라는 작품인데, 이 책은 서문에서 부터 ‘이 글은 과거의 사건이 실패하여 실재 역사와 다르게 진행되었을 경우를 가정하여 썼습니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이 작품을 그냥 역사소설로 여겼죠.
사실 이렇게 잘 모르는 이야기 꺼낼 것도 없이, 우리가 잘 아는 파우스트 같은 소설도 ‘악마’라는 아주 친숙한 판타지 요소가 등장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그걸 그냥 ‘소설’이라고 생각했지 ‘판타지 소설’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현대에도 모두들 그걸 고전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상 장르구분은 의미가 없죠.
때문에 어떤 장르적 요소가 들어갔느냐는 장르구분에 있어서 절대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막말로 판타지 소설에 엔서블을 등장시켜도 작가가 SF소설이라고 딱 정하고 쓴 게 아니라 ‘난 판타지 소설을 쓰지만 엔서블이라는 소재가 너무 매력적이라 써봤다.’라면 그건 SF가 아니라 그냥 판타지가 되죠. 반대로 당장 소설 내에서의 묘사나 등장인물들이나 소재가 전혀 과학이랑 상관이 없어 보이다가 마지막 결말, 혹은 눈치채기 어려운 복선 같은 것에 어떤 과학적인 요소를 넣어서 ‘이건 SF소설이다.’라고 말해도 그걸 SF소설이 아니라고 말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이젠 정통 판타지내지는 순수무협, 하드SF라는 구분도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아무리 순수하게, 마치 신화와 같은 이야기를 쓰려고 해도 그걸 쓰는 작가 자신이 수많은 장르요소와 서브컬쳐를 접해왔는데 완전히 순수하고 독립적인 하나의 장르만으로 글을 쓸 수 있는가 하는 의문도 들고, 그놈의 정통 판타지라는 걸 나누는 기준은 있냐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답하기도 어렵죠.
바야흐로 융복합 시대입니다. 장르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취하고 필요없는 것을 과감히 버리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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