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학과 교양수업으로 베스트셀러와 대중문화 과목을 수강하고 있습니다. 최근 몇주간에 걸쳐 가부장제에 의한 여성 억압이라든가 역사적·사회적 이데올로기에 따라 만들어지고 강요된 이상적 여인상 등에 대해 배우다가, 오늘부터 새로운 주제에 돌입했지요. 대대로 여성이 수동적·희생적 역할을 강요받아온 것은 사실이라 하나 그렇다고 하여 가부장제의 수혜자가 곧 남성 자체인 것은 아니고, 실질적으로는 남성 역시 가부장제에 의해 남자다움(힘과 능동성과 경제적 역할 등)을 강요받아온 희생자의 입장으로 볼 수 있다는 이야기였고요.
어딘가 페미니스트에 살짝 가까운 기질이 있다보니 - 그렇다고 해서 여성부의 정신나간 주장에 동조한다든가 하는 건 아니에요 여성의 입지가 지금보다 좀더 강해지기를 바라기는 하지만 그걸 위해서 남성의 권한을 깎아내리고 그 자리에 대신 끼어든다든가 하는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랍니다; - 여기저기에서 흔히 등장하는 수동적인 여성상을 반기지 않고, 각종 시대물 등에서 등장하는 순종적 여성상의 경우 시대상황을 이해하고 그 배경에서는 그 편이 자연스럽고 합당함 역시 이해하면서도 결과적으로 그 시대분위기 자체를 싫어하는(...) 것이 평상시의 제 입장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그런지 오늘 수업은 오히려 그만큼 더 흥미가 가고 더 수월하게 들려오던걸요. 여하간 이번 수업 덕택에 여성의 입장이든 남성의 입장이든간에 좀더 다양한 관점에서 들여다보고 관심을 보낼 수 있게 되었으니 그런 점에서는 이모저모 보람차고 즐거운 노릇일까요.
...하지만 본론은 이게 아니니 이쯤에서 넘기고; 여성이 수동성과 상냥함을 강요당하는 만큼 남성은 능동성과 강인함을 강요당하며 섬세함이나 부드러움을 선택할 자유를 침해받는다 하는 이야기를 듣다보니, 언뜻 제 글에서의 등장인물 생각이 나더군요. 사실 제가 판타지를 유독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가 캐릭터성을 자신의 뜻대로 마음껏 표현할 수 있다는 부분이거든요. 현실을 배경으로 하는 장르에서야 일단 사회분위기 자체가 그러하니 별 도리가 없다 하더라도 판타지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그 제약이 훨씬 덜하지 않을까 싶으니까요.
저같은 경우 메인주인공부터가 여성이기도 하고, 그밖에도 글 전체를 통틀어 여성과 남성의 주도권이 대개 6:4 정도로 나타나게끔 분위기를 조정하고 있습니다. 일단은 저 자신이 여인네인 만큼 중점을 여성에게 맞추는 편이 좀더 편하다는 입장이 분명히 있으니까요. 그러다보니 평상시의 제 취향까지 넉넉히 반영하여 여성 쪽이 좀더 능동적이고 강한 이미지, 그에 비해 남성 쪽이 상대적으로 약간 수동적이고 조용한 이미지로 표현되는 일이 적지 않고요.
문제는 남성캐릭터 쪽이더랍니다. 여성캐릭터의 경우에도 여자가 너무 앞으로 나서는 것 아니냐 남성보다 적극적인 여성은 별로다 하는 이야기가 간간이 들리기는 하지만 요즘은 강인한 여성캐릭터도 여기저기 많아서 그런지 그렇게까지 또렷하게 두드러지는 편은 아니던데, 남성캐릭터 쪽은 그게 아니더라고요. 이야기를 직접 주도해나가지 않고 한 걸음 떨어져 보조역에 머무르는 남성상은 어떤 상황에서든 환영받는 일이 그다지 많지 못한 듯한 느낌이더라고요. 특히 여성캐릭터의 보조역일 경우 더더욱.
실상 그렇다고 해서 BL물에나 등장할 듯 완전히 여성적인 남성캐릭터를 그리는 건 아닙니다. 수동적이라고 해서 자신의 의지라고는 아예 없이 막연하게 주인공만 따라다닌다거나 하는 인물을 그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일반적인 남성상보다 다소 나긋나긋하고 다소 섬세한 이미지로 나타낼 뿐이건만, 어쨌거나 취향상 여성캐릭터에게 좀더 중점을 두고 강한 면모를 부여하다보니 그 여성상에 맞춰서 곁의 남성캐릭터에게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부여할 뿐이건만, 현실에서는 단지 그 정도만큼으로도 거부감을 보이는 분들이 제 생각보다 한층 많은 듯하더군요. 여하간 당장의 현실 속에서는 아예 존재하기 어려운 타입의 인물상이기도 할 테니까 말이죠.
그야 일단은 여성의 손에서 그려진 환상 저편의 남성상이니만큼 실제 남자들이 위화감을 받고 어색하게 느끼는 것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가만히 보면 여자들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도 않은 듯하던걸요. 아무래도 여자들의 입장에서는 조금이나마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는 있으련만 그러면서도 결과적으로 제가 그리는 남성상을 기꺼이 이해하고 동조하는 경우가 여자들 중에도 그리 많지 않기는 마찬가지인 듯하더라고요. 여성이 강한 것은 이제 별 상관없지만 그렇다면 남성은 다시금 그 여성을 감쌀 수 있도록 한층 더 강해야 한다, 대세에 따라 가늘가늘 예쁘장한 것까지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근본적으로 남성의 이미지는 어쨌거나 강해야 한다, 언뜻 보기에는 대체적으로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순정만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남성캐릭터들이 실제 남자들 보기에는 현실성이 없을 듯 섬세하고 낭만적인 모습을 보이면서도 결국에는 앞장서서 여성캐릭터를 이끌어주는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듯이, 어떤 상황에서든 여성보다 수동적인 남성상은 남자의 입장에서든 여자의 입장에서든 딱히 환영받기는 어려운 모양이지요. 저와 같은 경우가 지극히 특수할 뿐.
소설이나 만화나 게임이나 가리지 않고, 국내작품이나 국외작품이나 가리지 않고 실질적으로 거의 모든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대부분 강한 남성과 여린 여성, 아니면 강한 여성과 더 강한 남성의 구도. 결과적으로 저는 제 손으로 직접 제 취향에 맞춘 글을 쓰면서 스스로 아쉬움을 달래고 있는 입장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철저히 여성주도 남성보조의 구도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대개 6:4에서 7:3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수준에서 좋아하는 것뿐이건만, 그만큼으로도 마음에 맞는 경우를 찾는 건 정말로 하늘의 별따기 수준이던걸요; 그나마도 주위에는 이런 쪽으로 마음을 나눌 만한 사람이 온라인상에든 오프라인상에든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고요;
더 이상 미룰 수도 피할 수도 없는 발표과제(물론 이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고전문학사 과목입니다만;) 작업을 앞두고 정신도 가다듬을 겸 평소 늘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내용으로 간단히 작성해본 한담입니다. 언제나 한 걸음 떨어진 위치에서 조용히 구경만 하다가 처음으로 직접 도전해본 한담이 이렇게나 두서없고 어설프기만 한 것이 죄송스러울 따름이고 그러니까 혹시나 문제가 될 듯한 부분이 있을 경우 지적해주시면 성실히 살필 것을 약속드립니다만, 그러는 와중에 살그머니 질문을 하나 남겨봅니다. 일상 중에서 접할 수 있는 현실 그 자체와는 별개로, 여러분께서는 같은 글 안의 여성인물에 비해서 수동적이거나 좀더 조용하고 섬세한 성격의 - 주연급 - 남성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본인의 의지 없이 마냥 줏대없이 끌려다니는 식의 인물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보편적인 남성상에 비해 상대적인 수동성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었던 것뿐이었습니다만, 아무래도 제 표현능력의 부족으로 의미를 또렷하게 전달해드리지 못했던 듯하네요. 오해의 여지를 만들었던 것에 대해서는 죄송한 마음을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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