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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마지로의 만려일작(萬慮一作)

중단편선

웹소설 > 작가연재 > 일반소설, 중·단편

견마지로
작품등록일 :
2013.06.30 21:22
최근연재일 :
2023.02.01 01:49
연재수 :
14 회
조회수 :
12,593
추천수 :
389
글자수 :
98,073

작성
23.02.01 01:49
조회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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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자
22쪽

A.E in 켄타우리

DUMMY

현수는 미팅에 앞서서 홀로그램으로 마지막 시연자료를 조사하고 있었다. 항상 겪는 일이었지만 워프 존을 통과할 때 겪는 미세한 두통은 자신이 준비한 내용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심어줬다. 더불어 PT 최종본은 마지막으로 확인할 필요성이 있었다. 원고를 제롬에게 정리시키고 아직까지 쳐다보지도 못 했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스케줄!

그것도 원격PT가 아닌 직접 클라이언트 앞에서 하는 PT!

달에서 꼬박 1주일을 현장작업에 매달리고 사흘간은 지구 본사에 들어가 월말 산정을 내게 해 놓고 일이 끝나기도 전에 켄타우리로 날아가라는 통보서를 내다니! 현수는 기획국장의 목을 졸라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네 일 바쁜 거야 내가 제일 잘 알지. 하지만 어쩌겠나. 대면PT를 해 본 사람이 우리회사에 몇이나 된다고. 더군다나 최고의 승부사를 말이야! 고생스럽지만 이번 일만 해 주면 한달 정돈 쉬게 해 주지. 대신 서포팅 제대로 할 친구 하나 붙여줄 테니 안심해.”


사흘 전, 기획국장실에 얼굴이 시뻘개져 들어간 현수 앞에서 국장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생글생글 웃으며 어깨까지 가볍게 두들겨주었다. 다른 건 몰라도 사람을 가지고 흔드는 기술은 현수보다 국장이 몇 수 위였고 쓰다 달다 말도 못한 채 특근수당을 약속 받은 현수는 조용히 방을 나올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켄타우리라니, 말처럼 쉬운 광고주인가?


그나마 진정될 기미가 보이던 현수의 감정은 스페이스터미널에서 본사 서포팅 직원을 보자마자 다시 폭발해 버렸다. 기획국장이 옆에 있었으면 우주선 꽁무니에 넣고 불쏘시개로 태워버렸을지 모를 일이었다.


‘붙여준 게 제롬이야?’


제롬 언더월드는 올 해 초 새로 들어온 신입사원이었다. 또릿또릿하긴 했지만 워낙 고집이 세고 엉뚱한(엉뚱한 걸 창조적이라고 오해하는 건 광고계 고래의 전통이지만)성격이라 기획1팀에서는 아예 내놓은 찬밥 신세인 녀석이었다.

수폭전쟁으로 신대륙이 박살 난 2090년도 이후 한반도에 수 많은 외국인이 몰려왔지만 ‘언더월드’라는 성(姓)을 가진 인간을 좋아할 사람은 별로 없었다. 어쩌면 이번 2박3일자 켄타우리 출장에 현수랑 같이 붙여서 기획1팀이 한숨 돌리려는 이유인지도 몰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제롬은 현수를 무서워한다는 것이었다. [승률 100%의 무적 A.E]라는 타이틀을 지닌 10년 차 대선배에게 덤벼들 정도의 배짱이 있다면 그건 엉뚱한 게 아니라 광고판을 떠나겠다는 이야기니까.


‘차라리 밍하고 같이 오던가 이도 저도 아니면 예쁜 카트리나하고 오는 건데’


투덜대며 스페이스 셔틀에 탄 것이 어저께의 일이었다. 그리고 꼬박 24시간을 워프상태에서 해롱대며 보냈고 그 뒤 클라이언트에 도착할 때가 되어서야 기획서를 점검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차피 달에 가기 전 최종시안은 만들어 놓고 기획팀에 정리를 맡겨 둔 상태였지만.


“야, 제롬, 여기 매출예상표 어디 갔어? 30페이지 중반부터 32페이지 하단부까지.”


“어제 붙여 넣어 놨는데요?”


“워프존에서 뭘 어떻게 붙이냐? 시공간이 뒤틀리는데.”


“예?”


“밍이 그 말도 안 하디? 워프존에서 홀로뷰어 작업 하지 말라고? 다 날아간다고.”


“전 출장이 처음이라······”


“Raw data 다시 열어서 붙여 봐”


현수는 한숨을 길게 내 쉬고 더 이상 채근하지 않았다. 하긴 저 녀석이 뭘 알겠나. 아직 홀로뷰어도 제대로 못 다루는 놈을 붙여 준 망할 놈의 기획국장놈 탓이고, 제대로 출장교육도안 시킨 밍 그 놈 탓이고, 평생 순결을 지키겠다는 속가수녀 카트리나의 미모 탓이고! 내가 잘 나서 그런 거고! 망할 켄타우리 놈들이 상판을 꼭 보자고 해 그런 거고! 젠장! 젠장! 젠장!


현수의 손가락이 덜덜 떨려왔다. 워프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만날 광고주를 생각하니 끔찍했기 때문이다. 켄타우리는 어떤 광고주보다 까다로웠다, 전혀 다른 의미에서.


“다 붙였습니다. 다른 건 과장님 하신 거 그대로고 단가표에서 빠진 게 하나 있어서 넣었습니다.”


“뭐가 빠져?”


“성간 환율이 4개월 전으로 되어 있어서, 이번 달 분으로 바꿨습니다.”


“그래? 그건 내가 챙기지 못했는데 잘했다.”


제롬이 최고의 서포터는 못 되도, 설렁설렁 기획서를 읽는 신입은 아니라는 사실에 현수는 약간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렇게 나쁜 부하직원은 아닐 거라는 생각과 기획국장이 사람 보는 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이 동시에 떠올랐다. 하긴 별다른 일만 없으면 이번 대면PT는 쉽게 해결될 문제였다. 단순한 몇 가지 아이템이 추가되고 캠페인을 확장하자는 것이니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만 잊지 않는다면 말이다.


“제롬 언더월드”


“예, 과장님.”


“나중에 PT룸 들어가면 꼭 이것만 명심해라.”


“예. 뭡니까?”


“클라이언트 앞에서 이빨 보이지마.”



2)-


켄타우리 성단 제2태양계 4번째 행성 ‘사락(砂駱)의 별’에 사는 알레그로스(AlleGross)족은 지구와 매우 흡사한 대기환경에서 살아가는 종족이었다. 인간과 알레그로스가 만난 것은 지금부터 100년전의 일로, 외계무역에 있어서는 화성인들 이후 2번째로 역사가 깊은 종족이었다. 바다 하나와 대륙 하나로 이루어진 행성의 알레그로스인들은 인종차이가 없는 단일종족이었고, 움직이는 피카소의 그림을 보는 듯 했지만 하여간 인간형태와 비슷한 외형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그들의 관습이었다. 뛰어난 기계공학과 진보적인 통신망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워프존 개발은 알레그로스인들의 조력이 없었으면 십중팔구 못 써먹을 기술이었다) 그들은 직접적이고 공식적인 통상, 군사 및 외교교섭은 늘 현장대면을 원했다. 통신망과 화상통화, 이메일, 광통신메신저 따위는 [Confront(대면)]을 위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2차원이자 3차원인 그들의 용모적 특성 때문인지 몰라도 직접 보면서 대화를 해야 뭔가 숨기는 것이 없다고 믿는 그들의 특이한 Confront는 일종의 종족 행동양식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엄청나게 빠른 교통수단과 공간이동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이 터지면 일단 얼굴을 맞대고 대면해서 말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Confront의 의식적 절차와 엄숙성이었다.

Confront시 그들은 절대로 웃지 않았다. 물론 웃는 것과 비슷한 감정은 존재하고 행복함이 뭔지 아는 고등생물이었지만 그들의 Confront는 아메리카 인디언과 고대 일본사무라이와 중세 기사들의 잡탕밥 같은 의식이었다. 일체의 감정적 동요 없이 상대의 의중을 알아듣고 철저히 이성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이 상대를 존중하는 법도였다. 만약 그 자리에서 웃거나 울거나 기타 잡다한 감정이 들어난다면······


“역사공부 좀 했다면 벤 야민 사건에 대해 알겠지?”


“예. 들었습니다.”


“벤 야민 골드슈타인장관이 광신도들에게 죽었다고 배웠지?”


“예”


“그거 순 뻥이야. 사락의 별에 드나드는 샐러리맨들은 그게 다 뻥인 걸 알아.”


“예?”


“회담장소에서 혼자 실실대면서 웃었어. 그러다가 앞에 있던 알레그로스가 도끼로 반 토막을 내 버린 거라고. 알레그로스는 황소도 반토막 낼 수 잇는 도끼를 모두 허리에 차고 다녀. 그것만 알아 둬.”


“···웃지만 않으면 되나요?”


“울어도 안 되고, 겁내서도 안되고, 적의를 보여서도 안 돼. 평상심을 그대로 유지해야 해. 내 사수의 사수는 맨 처음 PT하다가 무서워서 오줌을 지렸지. 하지만 얼굴색은 그대로였어. 바지에 오줌을 갈겨도 좋고 똥을 싸도 좋으니까 얼굴빛만 평상심을 유지해. 그럼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 때 우주선 선체에 파란 등이 점멸되기 시작했다. 앞에 핑크색에 가까운 행성의 바다가 우주선의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사락의 별에 도착한 것이었다.


[사락의 별, 65분 후 130번 스페이스 터미널 착륙예정]


스크린에 안내표시가 뜨기 시작했고 현수는 제롬과의 대화를 멈추고 홀로뷰어를 끝까지 재빠르게 읽기 시작했다. 제롬은 너무나도 심각한 상사의 정보를 머릿속에 채운 채 굳어지는 얼굴을 움직이며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는 중이었다. 점점 스크린의 바다가 가까워 지기 시작하는 중이었고, 어렴풋이 육지와 바다의 구분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알레그로스와 미팅은 지구시간으로 5시간 뒤였다.


3)

켄타우리 독점의 워프용 항행선은 서비스도 엉망이지만 이착륙도 후한 평가를 줄 수 없는 물건이었다. 터뷸런스를 좌우로 맞는 비행기처럼 급강하하던 셔틀은 가까스로 130번 터미널에 옆구리를 갖다 대었고 기장은 괴상한 기계음으로 “안녕히 가십쇼. 감사합니다”를 반복해댔다.

다행스럽게도 지구인과 알레그로스의 사무구역은 터미널 인접구역에 위치하고 있었고 현수와 제롬은 복도를 뚜벅뚜벅 걸어가며 마지막 최종점검을 서로 예행하는 중이었다. 이 정도면 별다른 걱정은 없었다.


“앞으로 2시간 뒤면 PT야, 정신 단단히 차리도록”


“알고 있습니다.”


“질문은 내가 맡는다. 그냥 뒤에서 홀로뷰어나 조종하고 있어. 절대 대답하지 마라. 그냥 경험을 쌓는다고 생각하란 말이다.”


“예, 알겠습니다.”


“명심할 것, 무어?”


“얼굴표정······변하지 않는다.”


“오케이.”


그 때였다. 저쪽에서 번쩍이는 알람이 보였고, [지구, SKYCOMM]이라는 홀로그램이 뜨기 시작했다. [켄타우리 광통신연합]이라는 글자도 한글로 선명하게 보였다. 광고주였다. 그리고 그 홀로그램 아래 서 있는 사람은······


“저 여자 지구인인데요?”


제롬의 말과 함께 현수의 눈도 금발의 미인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갑자기 현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저 여자는 멜리나 아닌가!


“멜리나.”


“아시는 분인가요?”


“예전에 같이 일했었지.”


“다행이네요. 갑(甲)에 지구인이 있다니”


“젠장, 좋은 관계 아니야.”


두 사람은 도박판의 동업자들처럼 입술을 작게 일그러뜨리며 속삭여대고 있었지만 멜리나는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실쭉하니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현수의 그녀의 얼굴을 보고 섬뜩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는 대륙기획에서 초짜 AE를 같이 보낸 동기이자 견원지간이었다. 둘 다 경력을 쌓아가며 필연적인 경쟁관계가 될 수 밖에 없었고, 그녀는 현수를 물리쳐야 할 조직 내 암투 1순위로 찍고 사회생활을 지속하던 사람이었다. 물론 두 사람이 그렇게 틀어지기까지는 현수의 되도 않는 프로포즈가 원인이었지만······기억의 단락은 거기까지였다.

이미 멜리나는 두 사람에게 걸어와서 조용히 미소를 띠고 있었던 것이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기획부장 멜리나 선이라고 합니다.”


“예, SKYCOMM의 현수 셍케비치 과장입니다.”


“제롬 언더월드입니다.”


“구면이시군요. 셍케비치 과장님······아직 과장이신가요.”


상대방은 10년이 넘도록 발톱에 날을 세우고 있었다. 현수는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 날 경쟁자가 갑이 되어서 내 앞에 선다니! 직장인들이 피해가는 악몽이 현실이 되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이 먼 켄타우리의 [Confront]를 말 그대로 직면한 상태에서.


“예. 부장님. 영전을 축하 드립니다. 그런데······언제.”


“두 달 되었죠. PT 잘 부탁 드립니다. 물론 시안이 맘에 들 때 이야기지만.”


아예 멜리나는 대 놓고 PT를 뭉개버리겠다는 심산인 듯 보였고 현수는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기 시작했다. 더불어 속에 납작하게 엎드려있던 호승심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제대로 PT만 한다면 승률은 보장된다.’

현수는 자신이 있었다. 멜리나가 아니라 광고의 신이 온다고 해도 이번 PT는 절대적으로 우세했다. 더구나 경쟁입찰도 아닌 신제품 런칭 아닌가. 뭐 하나 손해 볼 건 없었다. Confront가 대수인가? 언제 어디서나 마찬가지였다. 광고주 앞에서 부동의 객관성을 지키고 사실만을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고래로부터 A.E에게 요구되는 첫 번째 자격조건이었으니까.



4)


“지금부터 저희 켄타우리 광통신연합의 개인통신위성 PS-0011 신규 런칭에 대한 제안서를 발표하겠습니다.”


새롭게 만들어진 신제품은 개인이 띄워서 사업 및 개인연락용으로 사용 가능한 소형 위성이었다. 소규모 공간점프가 가능하여 성층권에서 지구 위성으로 사용하다 사용자가 대기권 밖으로 이동 시 궤도이탈이 가능한 기종으로 실시간 통신이 가능하도록 만든 제품이었다. 시장성도 충분할 뿐 아니라 알레그로스의 신기술은 지구인이 손 댈 레벨이 아니었다.

막말로 PT를 개떡처럼 하고 광고에 장난을 쳐도 제품 스펙 하나면 시장석권이 가능한 물건이었던 것이다.


현수는 이 점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번 PT 광고는 사실위주의 컨셉 하나로 가져가면 되는 것이었다. [Transpace]라는 상품명과 광고는 모두 공간 어디에서나 통신가능한 개인위성이라는 컨셉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었다. PT는 처음부터 끝까지 순조로왔다.

물론 알레그로스인들은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더군다나 극동 제2어인 한국어에 대해서는 문맹수준이었지만 화면 가득 펼쳐지는 통역자막과 현수의 풍부한 음색이 어우러지자 공감각적으로 PT를 이해하는 모습이었다.

제롬은 홀로뷰어를 조작하며 하트의 퀸과 클로버의 잭처럼 생긴 알레그로스 종족이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과 그가 존경하는 대(大)A.E의 놀라운 프레젠테이션 능력 사이에서 말할 수 없는 경이로움을 느끼는 중이었다.

“이상 제안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혹시 질문사항이 있으십니까?”


“하나 물어보겠소.”

스페이드의 킹처럼 생긴 납작(하지만 분명 굴곡이 있는)한 얼굴 하나가 현수를 쳐다보며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 같은 알레그로스어로 질문했다.


“꼭 [평면 광열배터리]이라고 해야 하오? 3차원에서 2차원으로 충분히 수렴 가능한 전지판이라고 쓰는 것이 훨씬 이해가 빠를 텐데”


“지구인들의 차원에 대한 이해는 알레그로스인들처럼 보편적이기 보다는 직관적입니다. 평면이라는 단어가 우아하진 않지만 훨씬 몰입도가 좋을 것이라 생각되어 채택했습니다”


스페이드의 킹은 뭔가 불만이 있는 듯 하면서도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진의 태도는 협조적이었다. 형식상의 질문이 끝나면 PT는 끝이었다. 어디에서 나처럼.


“신임 기획부장입니다. 질문 하나 하죠.”


갑자기 종이 찢어지는 소리가 아닌 우아한 한국어가 들렸고 전광판에 통역문이 뜨기 시작했다. 현수는 하마터면 얼굴이 구겨질 뻔 했다. 멜리나가 볼펜을 하나 든 채 홀로뷰어를 가리키고 있었다.


“31번째 챕터. 비용계산편을 다시 보여주시죠.”


제롬은 허둥대며 31번째 챕터를 다시 띄웠다. 광고비 산정계산서였다.


“새롭게 바뀐 환율로 넣어두셨군요.”


“성간환율은 지구기준 한달 치를 작정으로 작성되기 마련이라 올해 초 환율로 잡았습니다.”


“4개월 전 PT때, 환율고정을 지구기준으로 6개월간 가져가기로 약조했던 걸로 아는데요?”


맙소사.

워프 때 뭔가를 까먹은 것 같더라니.

4개월 전의 비용편익 PT때 계약했던 환율고정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착실한 제롬]은 그것을 고쳐버린 것이었고.

지금 환율로 따지면 훨씬 SKYCOMM이 이익이었다. 하지만 광고주 입장에서 보면 엄연한 협약위반 아닌가! 현수는 자기도 모르게 제롬을 바라봤다. 제롬은 현수에게 배운 그대로 초탈한 표정 그대로였다. 피가 다 뽑힌 듯 하얗게 질린 얼굴색만 뺀다면.


“제가 그 내용을 잠시 망각했습니다.”


“신제품기획이라는 중대한 사안에 발생하는 비용인데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일처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군요. 더군다나 이사회 앞입니다. 이건 의도적으로 환차익을 노리고 불순하게 이윤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군요”


멜리나의 말에는 새파란 날이 서 있고 날 끝엔 독이 왕창 발려 있었다. 아예 오늘 광고사를 갈아버릴 작정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현수 개인에 대한 증오심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건 무표정하니 현수를 채근하는 미녀의 눈빛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그렇게 내가 싫더란 말이냐? 현수의 심장은 터질 듯 뛰기 시작했다. 저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지만 조용히 기획부장의 말에 대답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불순한 의도가 아닌 실수였음을 알아주시기 부탁드립니다.”


“광고단가 20% 낮추세요.”


“예?”


“지금 이 기안에서 낮춘 걸로 협의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시안은 없던 일로 하지요.”

지구에서도 몇 번 안 겪은 엿 같은 경우를 켄타우리에서 겪는 순간이었다. 이사회가 보는 앞에서 일개 부장이 가격을 퉁치는 짓은 시장잡배들이나 하는 짓거리 아닌가?

이건 PT장에서 그냥 개망신을 주자는 의도 외엔 아무것도 아니었다. 현수는 속이 시꺼멓게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여기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단가를 낮추는 건 내가 할 권한이 아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고개를 숙이고 뒤돌아 서야 하는 건가? 그는 곁눈질로 옆의 제롬을 쳐다봤다. 부하는 여전히 초탈한 모습이었지만 얼굴빛은 핼쓱해질대로 핼쑥해져 볼의 실핏줄이 다 보일 지경이었다.


‘대체 저 어린 놈에게 뭘 보여주려고 내가 여기까지 끌고 왔던가?’


멜리나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현수의 말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천길 낭떠러지가 따로 없는 상황이었다. 이럴 때 선배들은 어떻게 했을까?

[승률100%]라는 것은 그냥 허명일 뿐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행동은 무엇이 있을까? 승률 100%라는 것은 언젠가는 깨질 일이었다. 그것도 영전한 지 두 달 밖에 안 되는 과거의 라이벌에게 깨지는 최악의 경우를 당하고 있지만.


어떻게 할까?

제롬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할까?

회사에서 잘릴지도 모른다.


어떻게 할까?

누구나 광고판에 있으면 한 번쯤 꾸는 악몽 아닌가? PT에서 잘리고 회사에서 잘리고.


어떻게 할까?

살든지, 죽든지.


현수는 잠시 숙였던 고개를 들고 또박또박 멜리나에게 말했다.


“가격 20% 지금 깎겠습니다. 부장님이니까 깎아드리는 겁니다”


멜리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다.

“과연 일개 부장님이 그게 가능한 일이긴 합니까? 깎아주신다니 고맙긴 합니다만”


그때였다. 하트의 여왕이 일어나 성큼성큼 회의장 가운데의 현수에게 다가왔고 현수는 동시에 오른손에 무거운 중량감이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의전용 도끼였다. 현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두 손으로 도끼를 쥔 채 멜리나에게 다가섰다. 멜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현수를 쳐다봤다.


“뭐 하는 짓입니까?”


순간 클로버의 잭과 스페이드의 킹이 멜리나의 손을 양쪽에서 잡았고 멜리나의 표정은 어이없다는 쪽에서 경악과 공포로 바뀌고 있었다. 현수는 여전히 무표정한 상태로 도끼를 어깨위로 쳐 들어올렸다. 곧 멜리나의 입에서 새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고 현수의 손에 들린 도끼는 위세 좋게 아래를 향해 낙하하기 시작했다.



5)

“괜찮으냐?”


“······예”


“사람 죽고 사는 건 광고판에선 흔히 있는 일이야.”


“그 여자······죽은 건가요? 왜 웃었을까요?”


“질문이 두 개군, 반쪽이 났으니 살았을 리는 만무하고······두 달이면 모든 걸 인수인계 받기 벅찬 시점이지. 인계자도 없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제롬은 현수를 경외감이 아닌 두려움이 잔뜩 실린 눈으로 쳐다봤다. 현수는 제롬을 흘낏 보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4개월 전과는 달랐어. 선택의 여지도 없었고 내 딴엔 도박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회사에 이익이야.”


“왜요? 갑을 두 토막을 냈는데요?”


“알레그로스인들은 Confront에서 모욕을 준 진영에게 뭐든 요구할 수 있어. 그래서 지구인들이 켄타우리에 외항선을 하나도 투입 못하는 거다, 병신 골드슈타인의 미소 하나 덕분에. 이번엔 우리 쪽이 그 쪽에 요구할 수 있어. 4개월 전의 가격협상은 완전 무효. 그리고 현 환율로 광고비를 계산할 것.”


현수는 잠시 혼자 히죽 웃더니 제롬을 다시 쳐다봤다. 이전과는 달리 친근함이 가득 담긴 얼굴이었다.


“잘 해줬다. 신참. 그 상황에서 가장 걱정된 건 너였는데 나보다 훨씬 침착했어. 좋은 경험이었을 뿐 아니라 네 덕에 회사에도 이익이 돌아왔으니까. 이번 일은 절대 잊지 않으마. 앞으로 잘 해 보자. 제롬 언더월드”


제롬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수는 피곤했는지 셔틀 좌석에 몸을 기대곤 곤 눈을 감아버렸다. 제롬은 현수를 빤히 쳐다봤다. 그는 선인도 아니고 악마도 아닐 것이다. 그저 광고판에 발을 들여놓은 지 10년이 넘은 평범한 [광고맨]일 것이다.


하지만 제롬은 결국 현수가 전설의 A.E라는 사실을 목격한 또 하나의 증인이 되어 버린 셈이었다.

말 그대로 상대편의 시체로 산을 쌓아놓고 올라가는 무적의 기획자. 제롬은 이미 잠에 빠진 그의 사수를 쳐다보며 말할 수 없는 기괴한 검정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기획국장은 이 모든 것을 알면서 날 서포터로 보낸 것이었을까?

아마도 광고팀의 상층부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달 출장을 나간 현수를 본사로 불러들인 것이었으리라. 목을 걸고 하는 PT를 따 내기 위해서. 이미 그는 지구 본사에서는 전설이었으니까.


아마 지구에서뿐 아니라 켄타우리 사락의 별에서도 현수 셍케비치의 이름은 전설이 되어 남아있을지도 몰랐다. [무적의 승률 100% A.E], [Confront의 지배자]로써.


스페이스 셔틀은 다시 항성간 워프를 하기 시작했다. 우주선의 벽이 기묘하게 녹아내리듯 변하기 시작했다. 제롬은 생각을 그치고 눈을 감았다.

그래, 잊자 잊어. 지나간 PT를 기억해서 무엇하리.

아직도 내 앞에는 수많은 PT들이 산적해 있는데.

그것이 기획자들의 숙명이거늘.


우주선은 순조롭게 지구로 향하는 중이었다. 사락의 별은 이미 웜홀 건너편 멀리로 사라진 지 오래였고 제롬은 꿈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자신이 보였다. 기막힌 장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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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카르타헤나에 비가 내리면 (2) 22.09.26 62 0 10쪽
11 카르타헤나에 비가 내리면 (1) 22.09.26 95 0 9쪽
10 진실의 순간(fin) +1 22.07.30 70 4 21쪽
9 진실의 순간(3) 22.07.30 66 0 14쪽
8 진실의 순간(2) 22.07.30 69 2 12쪽
7 진실의 순간(1) +1 22.07.30 139 2 17쪽
6 소울(soul)의 대부 (fin) +4 14.06.27 1,115 31 19쪽
5 소울(soul)의 대부 (2) +1 14.06.27 1,031 35 25쪽
4 소울(soul)의 대부 (1) +2 14.06.27 1,783 33 15쪽
3 부지사부지생(不知死不知生) - (完) +20 13.06.30 2,377 101 18쪽
2 부지사부지생(不知死不知生) - (2) +3 13.06.30 1,970 81 12쪽
1 부지사부지생(不知死不知生) - (1) +3 13.06.30 3,674 9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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