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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마지로의 만려일작(萬慮一作)

중단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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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마지로
작품등록일 :
2013.06.30 21:22
최근연재일 :
2023.02.01 01:49
연재수 :
1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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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27
추천수 :
389
글자수 :
98,073

작성
22.09.26 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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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9쪽

카르타헤나에 비가 내리면 (1)

DUMMY

4월의 스콜은 부두부터 시작해서 점차 부두와 포구에 연이어 있는 술집과 포석의 바닥에 잔잔히 굵은 점들을 찍기 시작했다. 미풍이라기 에는 세찬 바람이 불어와 모자의 깃발을 흩날렸다.

사내는 모자챙을 잡아 날아가지 않도록 푹 눌러쓰고 매 같은 눈빛을 감추었다. 뾰족한 콧날 아래 얇게 맺힌 두 가닥의 수염은 뾰족한 차양처럼 입술 위를 감싸고 예리한 첨단을 양 옆으로 펼친 채였다.

모자아래의 윤곽으로는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검은 비단 재킷 위에 덧대 입은 낡은 가죽조끼와 그 아래 역시나 낡게 닳아버린 벨트의 옆에 매달린 허름한 레이피어 역시 사내의 나이와 관계없는 간난산고를 말해주는 듯했다.

사내는 마을의 언덕 위에서 조금씩 소나기가 수평선에서 검은 구름을 타고 밀려와 바다 위 배의 범포에 빗물을 떨구고 포구에 늘어선 상점의 붉은 벽돌지붕들을 적시며 서서히 밀려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후두두 빗방울 소리가 조만간 모자 위에서 울릴 것 같았다. 요새 언덕배기에서 바라보는 식민지의 항구는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고스란히 사내의 눈에 빨려 들어왔다.


검푸른 바닷가 위에 커다란 갤리온 두 척이 닻을 내리고 있었고 닻줄 아래의 넘실대는 바다 위에는 갈매기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소나기를 대비하고 있었다. 선원들이 바쁘게 닻줄을 뿌리고 널어둔 돛을 거두었고 부두에 모여있던 사내들은 누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명령이라도 받은 듯 부둣가의 집 안으로 밀려들어 가고 있었다. 작은 별 무리가 시야 건너편으로 사라지듯 흥청대던 포구가 금세 조용하게 비어버렸다. 사내의 입이 살짝 벌어지고 휘파람처럼 들리는 한숨이 나왔다. 아련한 소리가 바다로부터 들려왔다. 비가 바다에 퍼붓는 소리, 천천히 부딪히는 포말의 소리. 곧 모든 것을 덮을 장막이 되어 줄 장엄한 물줄기의 파열음.


부두로 내려가는 계단 왼쪽의 언덕, 두꺼운 요새의 흰 석벽에 물기 섞인 바람이 부딪혀 조금씩 회색으로 바뀌는 중이었다. 사내의 발걸음은 떨어지는 비와 함께 부두의 계단을 향해 움직였다. 사내와 같은 스페인식 깃털모자를 쓴 인디오 하나가 슬쩍 골목에서 사내의 얼굴을 보더니 어두운 건물 사이로 사라졌다. 바람이 비보다 먼저 도시를 청소하고 있었다. 술집과 어구상과 포목점을 벗어나 대장간의 옆으로 먼지 한 무더기가 날렸고, 대장장이는 칵 하니 침을 도로에 내뱉고 화사한 붉은 지붕 아래 어울리지 않는 검은 대문을 투덜대며 천천히 닫아걸었다.


부둣가에 붙어있는 노예시장도 잠시 문을 닫아걸었다. 철로 된 문 틈새 사이로 검은 눈동자가 사내의 발걸음을 쳐다보고 있었다. 빗방울이 본격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붕 없는 철창의 위로, 노예들의 두른 것 없는 어깨로 비가 흩날리자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서로의 간격을 좁히고 부둥켜안았다. 사내의 시선이 잠시 그들에게 머물렀다.

한 때 이곳의 주인이었던 이들, 바다와 산과 들판의 청색과 초록빛을 자신들의 직물에 물들이던 황금깃털의 주인은 이제 쇠창살에 갇힌 채 처음 보는 세상에 팔려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 하나가 사내의 눈동자와 마주치자 남자는 고개를 다시 돌리고 포석 깔린 부둣가를 천천히 지나갔다. 사내의 옷이 시나브로 젖어들고 있었다.

그 외에도 한 명의 사내가 비를 맞으며 서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검은색 법의와 삼으로 된 허리띠를 잔뜩 졸라맨, 바닷바람에 언제라도 날아갈 듯 비틀대는 말라깽이 수사(修士)가 가느다란 팔목에 두꺼운 성경을 끼고 노예들을 향해 걷고 있었다.


“회개하라!”

투덕거리며 옷에 떨어지는 빗줄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수사의 쉰 목소리는 철창을 향해 울려 퍼졌다.


“무지한 이들아, 멸망을 앞에 둔 이들아! 영원한 심판이 다가오리라! 주를 믿으라! 오직 주 예수의 이름을 믿고 회개하면!”

사내의 오른손이 으르렁대며 울음을 토해내는 잿빛 하늘을 향해 들렸다.


“영원히 살리라. 영원히 살리라!”


영원히 살리라. 사내의 눈이 수사와 알아듣지 못하는 말에 겁먹은 노예들을 손으로 하나하나 만지듯 훑어가고 있었다.

영원히 살리라.

죽음도 없고 고통도 없고 시집도 장가도 가지 않는 그곳에서 영원히 살리라.

빗방울이 점점 굵어졌다. 금방 오가는 스콜이 아닌 며칠간의 장대비인 듯, 하늘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사내는 다시 망토를 추스르고 부두의 설교에서 등을 돌렸다. 하지만 축문처럼 수사의 말은 그의 귀를 따라왔다.

영원히 살리라. 영원히 살리라. 사내는 귀에 들러붙은 포교를 떼어버리겠다는 양, 떠들썩한 소음이 빗소리를 먹어버리는 작은 선술집 안으로 들어섰다.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몰려든 뱃사람들로 좁아터진 선술집은 북새통을 이루는 중이었다. 사람 하나는 더 세울 만큼 높은 천장 위에 타륜(舵輪)을 샹들리에처럼 세우고 타륜 위에 촛불을 매단 묘한 조명이 여기저기 밝혀져 있었다.

촛농이 녹아 초를 세워둔 테이블 위와 질척한 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만 이미 럼주와 위스키의 축복을 받은 사내들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밀랍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사내는 천천히 바로 다가가 술 취한 손님들을 상대로 정신이 없는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그(럼주에 물을 타 희석한 술) 한 잔.”


쟁그랑 소리와 함께 컵이 하나 떨궈지며 두 명의 사내가 작은 나이프를 뽑아들고 멱살을 잡은 채 테이블 위로 굴렀다. 둑이 터지듯 왁 하는 함성이 울리더니 사내들의 응원이 펼쳐지고 두 명의 사내는 테이블을 발로 차 던지고 작은 공터를 만들었다. 주인이 오른손으로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 시작했다.

“여기 그러그 하나.”


사내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주인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양철술잔을 재빨리 어딘가 휘둘러 찰랑거리는 액체를 가득 담아 사내 앞에 던지다시피 내놓았고 주인의 터진 나팔 같은 목소리가 사내의 등 뒤로 향했다.


“테이블을 부수면 네놈들 모가지로 상다리를 만들겠어!”


사내 하나가 얼굴을 감싸 쥐더니 나이프를 떨어뜨렸다. 손가락 사이에서 피가 샘솟듯 흘렀고 두 싸움꾼을 둘러 싼 관중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주인은 정말 못 말리겠다는 듯 욕을 바닥에 내뱉으며 구시렁거렸다. 사내가 천천히 주인을 올려보았다. 모자 사이로 촛불을 받은 눈이 번쩍였다.


“늘 이렇게 시끄러운가.”


“비가 올 때만 그렇소.”


“늘 비가 오지.”


“그렇지요.”


주인은 술집 안이 조용해지자 자신도 괜히 흥분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시 사람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사내의 오른손이 슬쩍 품 안으로 들어갔다가 은화 한 닢을 바 위에 올려놓았다. 장사치의 본능인 듯, 주인은 사내를 내려다보지도 않고 왼손으로 은화를 덥석 감쌌다. 사내는 천천히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말을 꺼냈다.


“사람을 찾네.”


“누구 말이오?”


“디에고 헤수스 헤라나”


주인의 눈동자가 아래로 내려가며 바에 앉아있는 검은 모자의 사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사내는 개의치 않고 말을 꺼냈다.


“거래할 일이 있어.”

“겟세마니 거리 위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산 페드로 성당이 나오는 건 알 거요. 성당 앞에서 항구를 내려다보면 오른쪽에 빨간 문이 하나 있지. 거기가 헤라나의 상점이요.”

주인은 빵을 씹어 삼키듯 순식간에 길을 알려주더니 다시 사내를 쳐다보았다.


“당신도 노예상이오?”


“아니.”


“충고하는데, 헤라나하고는 거래를 트지 마시오. 아무리 타락의 도시에서 술을 팔아도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로 내려가는 건 권하지 않는 법이니.”

사내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고는 아직 다 마시지도 않은 술잔을 앞으로 내밀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내의 인상과 허리에 찬 칼을 보자 주인은 침을 바닥에 내뱉었다. 천천히 사내의 오른손이 술집의 문을 열자 억수 같은 비가 사내를 반겼다.

빗방울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거세지고 있었다. 바람이 빗물을 사내의 얼굴로 휘몰았다. 어느 틈엔가 노예를 전도하는 수사는 사라진 지 오래였고, 비를 맞는 검은 어깨들만이 옹기종기 철창 안에 모여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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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A.E in 켄타우리 23.02.01 61 4 22쪽
13 카르타헤나에 비가 내리면 (fin) 22.09.26 65 1 10쪽
12 카르타헤나에 비가 내리면 (2) 22.09.26 58 0 10쪽
» 카르타헤나에 비가 내리면 (1) 22.09.26 93 0 9쪽
10 진실의 순간(fin) +1 22.07.30 65 4 21쪽
9 진실의 순간(3) 22.07.30 62 0 14쪽
8 진실의 순간(2) 22.07.30 65 2 12쪽
7 진실의 순간(1) +1 22.07.30 135 2 17쪽
6 소울(soul)의 대부 (fin) +4 14.06.27 1,111 31 19쪽
5 소울(soul)의 대부 (2) +1 14.06.27 1,025 35 25쪽
4 소울(soul)의 대부 (1) +2 14.06.27 1,780 33 15쪽
3 부지사부지생(不知死不知生) - (完) +20 13.06.30 2,373 101 18쪽
2 부지사부지생(不知死不知生) - (2) +3 13.06.30 1,966 81 12쪽
1 부지사부지생(不知死不知生) - (1) +3 13.06.30 3,660 9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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